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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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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661회 작성일 21-07-2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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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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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식 자체가 전생에 했던 행위, 축적물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한 번의 행위에 의해 그 습을 익히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고쳐야겠다고 결심한 후 고쳐지는 것은 후천적으로 이 생에서 살아가면서 익힌 습입니다. 하지만 전생으로부터 익혀져 있는 업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전생의 행위의 축적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유럽에서 쌍둥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이 쌍둥이는 태어나자마자 분리되어서 40년 동안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놀랍게도 40년 후에는 둘 다 생물학 교수가 되어서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만나게 됩니다. 또 미국의 버지니아 대학 스티븐슨 교수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전생의 행위를 기록합니다. 1975년까지 약 1300여개의 사례를 수집했습니다. 이 가운데 이스마일이란 사람의 전생 이야기가 독특합니다. 이스마일은 1950년경 터키 남부의 아나다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1, 2년 동안 마을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 아이가 자꾸 자기 집에 대려다 달라고 합니다. 여기는 자기집이 아니니까 자기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이스마일의 부모님이 집이 어디냐고 묻자 아이는 마을 이름을 댑니다. 찾아보니 이스마일의 마을에서 멀지않은 곳에 그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건너 마을 과수원집 주인이었는데 50살에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과수원집 주인이 죽고 다시 이스마일로 환생한 것입니다. 이스마일은 전생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자기 부인이 누구였고 누구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족은 이스마일을 데리고 그 마을로 갑니다. 그 마을에 가자 이스마일은 나이 든 노인에게 왜 자기에게 빌린 돈을 안 갚느냐고 말합니다. 언제 자신의 돈을 빌려가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놀라서 그 돈을 갚아 줍니다. 그렇게 이스마일은 전생에 빌려준 돈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전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육근, 육경, 육식에서 촉이 일어납니다. 촉은 상태가 급격히 변할 때 깨집니다. 예를 들어 죽고 다시 태어날 때 내가 기억하던 모든 것이 흐트러집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거나 촉이 덜 깨진 사람은 전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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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에 정연득이란 사람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연득은 ‘그것이 알고 싶다.’란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전생을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에 6살인가 7살이었을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전혀 배우지 않았던 5개 국어를 합니다. 또 자기의 전생이 조선 시대 학문이 높은 정수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나라 때 환관이었던 이거라는 인물도 자신의 전생이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한 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오늘은 제7식인 사량식을 봅시다.

 나에게는 안이비설신의가 있고, 의인 의식을 세분화하면 의식, 제7식, 제8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외부적으로 활발하게 나타나는 것이 6식이고 현재 의식입니다. 6식을 일으키는 뿌리가 7식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일으킬 때 그 뿌리가 7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7식을 평생을 갖고 살아갑니다.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나타는 것을 보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물을 보고도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는 각자 속에 든 것이 나타날 뿐입니다. 우리가 평생 나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제6식이고, 나라는 것을 나타내는 뿌리가 7식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분별하는 모든 것은 7식에 뿌리를 둡니다. 8식은 종자식으로 제7식을 있게 하는 더 깊은 뿌리입니다. 제8식을 이해하고 인식하면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됩니다. 하지만 중생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이해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뿌리는 모르고 줄기, 잎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뿌리는 모른 채 나타나는 현상만 갖고 나다, 내 것이다 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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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식은 말나식, 사량식으로 매일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항상 생각을 끝도 없이 하면서 표현을 하게 되면 나라는 것이 됩니다. 그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하는 것이 제7식입니다. ‘대질경을 반연하며, 유부무기이고 정과 본에 통하니’란 말을 봅시다. 정은 나타나는 것이고 본은 뿌리를 말합니다. 정은 나타나는 6식이고 본은 뿌리인 8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7식은 6식과 8식의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대질경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적인 대상입니다. 주관은 내가 일으키는 생각이고 객관은 상대방이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7식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분석하고 따지고 합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 사이에 놓여있는 비량인 것입니다. 비는 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며 견주는 것입니다. 유부무기란 말을 봅시다. 무기란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상태입니다. 선은 다른 생명을 도와주고 살려주는 것이며 불선은 다른 생명을 해치고 자신만 잘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6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의 다 선과 불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속에 가만히 들어 있으면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무기가 됩니다. 경계에 부딪혀야 선과 불선이라는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7식은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쌓인 업을 씁니다. 내 속의 업은 그냥 안에 있기 때문에 무기입니다. 유부란 기름덩어리 같은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7식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무기인 것입니다. 오염된 무기입니다. 제7식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 업에 의해 형성된 오염된 무기인 것입니다. 

오염되기 전의 것은 뿌리인 제8식입니다. 제8식은 더럽지 않은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것으로 물들기 전이기 때문에 본래 청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 가지 수를 보면 번뇌가 선보다 훨씬 많습니다.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불선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성품은 어떻게 보면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에 더욱 가까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6식을 말한 것이고 제7식과 제8식에 들어가면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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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질경에는 진대질과 사대질이 있습니다. 

진대질은 제7식 말나식이 제8식 견분을 자아로써 반연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합하면 생명이 탄생합니다. 생명이 생기는 순간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 생깁니다. 본질을 알면 나란 것이 없음을 압니다. 나에 대한 어리석음인 아치 때문에 나라고 생각하는 아집이 생깁니다. 그것이 제8식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나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제7식은 제8식의 뿌리에서 일으키는 생각을 나라고 고집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을 깨트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제7식에 의해 살아갈 뿐입니다. 제8식의 견분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7식입니다. 그래서 제7식은 항상 나라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죽다 깨어나도 나입니다. 제7식이 깨트려지지 않는 한 항상 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뿌리에 전부 남아 있습니다. 전부 다 나를 위해서 산 삶인데 그것을 각색하여 남에게 희생하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 사랑 때문에 산 것 뿐입니다. 그 본질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이것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반연 하는 것이지 객관적인 경계를 반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관에 그칩니다. 제7식은 대상과 부딪혀 대상과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한 것이 대상과 부딪히면 6식이 나옵니다. 좋다, 나쁘다, 된다, 안 된다 등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상과 부딪히기 전에 내 속에는 주관적인 것만 가득합니다. 대상과 부딪히기 전에는 내 속에 내 것 밖에 없습니다. 어떤 생각을 일으키던 다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의 업에 근거한 자기의 생각만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대질은 마음으로 경계를 반연 하는 것으로 주관에서 객관을 반연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6식으로 나타납니다. 진대질이 대상과 부딪히며 일으키는 생각이 사대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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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무기는 세 가지 성품인 선, 불선, 무기 중에 무기로 오염된 무기입니다. 

무기는 유부무기 말고도 무부무기가 있습니다. 더러운 것으로 덮인 것이 유부무기라면 무부무기는 더러움이 없는 무기입니다. 원래 내 속에 있는 업의 종자는 유부무기, 무부무기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제7식은 유부무기이고 제7식보다 더 깊은 뿌리인 제8식은 무부무기입니다. 유부무기이고 내 업을 반연 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끄집어 내더라도 다 다릅니다. 내 색깔로 물들어버리면 다 다르게 됩니다. 하지만 물들기 전의 것은 전부 깨끗합니다.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것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생각을 일으킬 때 물든 것으로 일으키면 전부 다릅니다. 물들기 전의 것으로 보면 다 똑같은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누가 부처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대답을 물든 생각인 제7식으로 볼 땐 다 다르게 보입니다. 제7식을 깨트리고 물들지 않은 제8식에서 그 답을 끄집어 내면 조주 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든 내가 무엇이라도 하든 다 답이 됩니다. 우리가 깨달아서 견성성불한다고 했을 때 견성이라는 것은 내 성품을 제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제8식을 인식하고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품을 본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는 지혜와 더불어 복덕이 구비되어야 됩니다. 전생에 지은 복이 없다면 아무리 깨쳐도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성불을 하게 됩니다. 본질을 깨치면 누구든지 견성은 할 수 있으나 성불을 하려면 지혜와 함께 복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생에서 부처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견성하기는 쉽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 많은 생 동안 복덕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번 생에 공부한 것은 다음 생에 가도 이자가 붙어서 내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자신이  보는 것 밖에 못 봅니다. 내가 인식하는 것만 내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을 따라 자아에 집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삶을 살면서 그때 그때 남긴 발자국을 따라 자기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전생에 어떤 방식으로 살았다면 이번 생에도 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부무기와 무부무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유부무기는 제7식의 18가지 마음 작용이 더러움으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유식 30송을 전부 공부하면 5위 100법을 합니다. 100가지 가운데 제6식이 일으키는 심소 작용이 51가지나 됩니다. 이에 비해 제7식은 일으키는 마음은 18가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을 짜내도 18가지 마음 작용 안에 속합니다. 무부무기는 더러움으로 덮여있지 않으므로 제8식입니다. 6식, 7식을 공부함으로써 본질적인 제8식을 이해하고 체험하게 되면 견성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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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보고 호감을 느끼고 비호감을 느끼는 것은 대상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이 대상을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대상은 그냥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업이, 자신의 집착이 그 생각을 일으킬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 따라 자아를 집착하는 것은 비량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전부 다른 것입니다. 

전 5식에는 안이비설신이 있습니다. 의 즉 의식은 제6식입니다. 내가 대상을 보는데 눈에 대상이 비친 그 순간은 다 똑같습니다. 내 의식(6식, 7식)이 다르게 판단하게 만듭니다. 내 업이 작용해서 다 다르게 판단합니다. 내가 대상을 볼 때까지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므로 현량입니다. 귀, 코, 혀, 몸(촉감)은 눈과 마찬가지로 현량입니다. 그러므로 전5식은 현량입니다. 의식은 다르게 판단하므로 6식, 7식은 비량입니다. 제8식은 무부무기로 오염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현량입니다. 우리는 6식과 7식을 통해 살기 때문에 평생을 분별하고 번뇌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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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가지 큰 번뇌와 변행과 별경 중의 혜와 탐욕과 어리석음과 아견과 아만이 서로 따르느니라.’의 문장을 봅시다. 제7식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성품은 본질은 무아인데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인 아치 때문에 아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아집 때문에 아만이 생기고 아만 때문에 아애가 생깁니다. 아집은 나를 만들어서 나에게 집착하게 합니다. 제7식을 깨트리지 않는 한 아치, 아집, 아만, 아애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도 어떤 사람은 성인이라고 추앙받고 어떤 사람은 소인으로 매도를 당합니다. 성인이라 추앙받고 칭송을 듣는 것은 결국 자기 각색을 잘 한 것에 불과합니다. 속에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나 외부로 연출을 잘 해서 칭송을 듣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아치, 아집, 아만, 아애에 불과합니다. 세세생생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 중생의 삶이란 제7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들고 오염된 속에서 우리는 깨끗하고 맑은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최근 정신분석학 쪽에서 정신의 능력을 점수로 매겼습니다. 그 결과 성인 한 사람은 수십 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제대로 공부하고 수행을 잘 한 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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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식은 항이역심입니다. 항이역심이란 깊이 생각하는 것을 항상 한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항상 심사하고 사량하여 아상이 밤낮으로 혼미에 빠집니다. 제7식이 하는 일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제7식은 제8식의 견분을 자아라고 생각하고 항상 심사하고 헤아립니다. 평생 일으키는 생각 모두가 제7식입니다. 항상함과 심사에는 네 가지 구별이 있습니다. 네 가지 구별은 5식부터 8식까지의 특징을 말한 것입니다. 제8식은 청정해서 항상 하지만 심사는 없습니다. 생각이 없이 청정함 그 자체로 있을 뿐입니다. 7식이 항이역심이면 8식은 항이비심입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면서까지 생각합니다. TV를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멍한 것도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을 뺏겨 생각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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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식은 심사를 하지만 항상하지 않습니다. 부딪힐 때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식은 심이비항이라고 합니다. 전5식은 항상 하지도 않고 심사도 없습니다. 단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비항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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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식에서 일어나는 네 가지 미혹과 여덟 가지 큰 번뇌를 살펴봅시다. 이 부분은 5위 100법을 설명할 때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네 가지 미혹은 탐욕, 어리석음, 아견, 아만이고 여덟 가지 큰 번뇌는 도거, 혼침, 불신, 해태, 방일, 실념, 심란, 부정지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현재 의식은 전부 7식을 근거로 합니다. 이것을 깨트리고 없애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환희지의 초심에서는 평등성이고 무공용행에서는 아집을 항구히 부수느니라. 여래가 타수용신을 나투니 보살들이 가피를 받느니라.’의 문장을 살펴봅시다. 무공용행이란 무공용지의 행으로 아집을 항구히 부숩니다. 아집은 환희지 초심에 이르면 깨지기 시작합니다. 타수용신은 깨달음의 법락을 다른 중생에게 돌리는 부처의 지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들이 가피를 받아 불과에 듭니다. 보살의 지위에 들면 제7식이 깨트려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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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10지 

우리의 삶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로부터 출발합니다. 불교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뿌리는 믿음, 信입니다. 신이 되면 머무르는 주가 됩니다. 주는 지혜를 터득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이해하면 행해야 합니다. 결국 앎은 행입니다. 우리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함께 사는 모든 생명에게 회향합니다. 그래서 10신, 10주, 10행, 10회향의 삶을 마치고 나면 보살이 됩니다. 10지에 들어갑니다. 보살 10지에 들어가야 우리의 삶에서 제7식이 깨트려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감정이든 자신이 느껴본 만큼 느낄 수 있습니다. 환희지를 터득하면 그 느낌 이상의 환희를 느끼는 겁니다. 초지보살의 경지에 도달하여 환희지를 느끼면 우리의 삶은 진리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초지보살의 경지에 도달해야 7식을 깨트리고 그 이상의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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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식을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전변하며 아뢰야식을 반연하며 사량으로 성과 상을 삼느니라.’의 문장을 봅시다. 성은 선, 불선, 무기를 말합니다. 상은 형상을 말합니다. ‘네 가지 번뇌가 항상 함께 하니 아치, 아견(아집), 아만, 아애이며 더불어 나머지 촉 등과 함께 하며 유부무기에 포섭되느니라. 생하는 곳에 따라 계박되니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는 존재하지 않느니라.’의 문장은 우리가 공부해서 멸진정을 터득하여 출세도에 이르면 제7식이 깨트려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생하는 곳에 개박된다는 말을 봅시다. 우리는 죽은 후 육도에서 생합니다. 지옥부터 천상까지 자신의 업에 따라 생합니다. 계박界縛이란 지경 계界, 묶을 박縛으로 태어난 계에 묶는다는 뜻이며 머문다는 말입니다. 제7식은 아뢰야식의 근본종자에 의지하여 활동하며 아뢰야식의 견분을 반연합니다. 8식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생각을 자기라고 여기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제6식의 사량은 완전히 드러나게 이것 저것을 의식하여 분별하는 것이며 제7식의 사량은 잠재적으로 분별하는 사량입니다. 7식은 일단 내 속에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사량하는 것입니다. 제7식은 근본 번뇌인 아치, 아견, 아만, 아애와 수반되어 덮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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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수용신의 설명을 봅시다. 이 우주의 중앙은 법신인 비로자나여래불입니다. 중앙에서 동쪽은 아총여래로 스스로 성품을 깨치는 자성신입니다. 중앙에서 서쪽은 타수용신으로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태어나는 것입니다. 서방정토 아미타여래입니다. 중앙에서 남쪽은 남방화주 보생여래 석가모니입니다. 석가모니는 자수용신입니다. 스스로 깨쳐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북방은 불공성취여래입니다. 북방의 여래는 끝도 없이 변화합니다. 다섯 여래는 이 세상을 표현한 것으로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에 이들이 나옵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옴으로부터 출발해서 옴으로 끝납니다. 옴을 풀어 쓰면 옴마니반메훔이 됩니다. ‘옴마니반메훔’에서 옴은 비로자나여래불이고 마는 아총여래이고 니는 석가모니이고 반은 아미타여래이고 메는 불공성취여래입니다. 훔은 이 현상 세계를 말합니다. 

부처들은 각자의 손갖춤이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손갖춤은 바로 지권으로 한쪽 손으로 다른 한쪽 손의 검지만 꽉 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 자체, 빛을 상징하는 최고의 모습입니다. 모든 지혜를 터득했음을 의미합니다. 남방화주, 석가모니는 여원인을 합니다. 여원인이란 한쪽 손은 들고 한쪽 손은 내리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의 의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소원을 들어 준다는 말입니다. 동방의 아총여래는 촉지의 자세를 합니다. 땅을 가리키는 자세입니다. 모든 것의 뿌리는 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을 가리키면서 마귀를 항복시킵니다. 서방의 아미타여래는 선정인을 합니다. 선정인은 참선할 때의 자세로 두 손을 몸 중앙으로 모으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하시면서 선정에 들기 위해 했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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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마니반메는 인체, 음양오행등과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하나였는데 음양으로 나뉘어집니다. 음양이 운행하는 방식에서 생겨난 것이 오행입니다. 음양과 1에서 5까지 숫자가 이 세상을 전부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숫자들은 1에서 5까지의 응용입니다. 

이것들이 우리 신체의 오장육부와 연결됩니다. 오장이란 간심비폐신입니다. 간, 심장, 비장, 폐, 신장입니다. 육부는 담, 위, 대장, 소장, 방광, 삼초를 말합니다. 오장은 생명활동의 중요한 요소인 정, 기, 신, 혈, 혼, 백의 저장 장소로 생명의 근본이 됩니다. 전신의 다른 조직과 정신활동을 주재하고 지배합니다. 오장은 정기를 축적하지만 그 정기를 배설하지 않습니다. 육부는 음식들을 받고 내보내며 소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육부는 소화된 물질을 전달하지만 축적하지는 않습니다. 거쳐가는 곳입니다. 인체 활동은 오장과 육부의 상호간의 유기적 상관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인체의 장부는 모두 음과 양으로 구분하는데 오장은 양이고 육부는 음입니다. 오장, 육부의 상관관계는 사계절의 기후 변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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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기는 상생, 상극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은 심장을 생하게 하고(木生火) 심장은 비장을 생하게 하고(火生土) 비장은 폐를 생하게 하고(土生金) 폐는 신장을 생하게 하고(金生木) 신장은 간을 생하게 합니다(水生木). 

장기의 상생관계를 보면 목화토금수 방향대로 가면 상생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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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극관계는 목화토금수의 방향에서 하나씩 건너뛰면 됩니다. 木은 土를 극하고 土는 水를 극하고 水는 火를 극하고 火는 金을 극하고 金은 木을 극합니다.  장기를 살펴보면 신장은 심장을 제약하고 심장은 폐를 제약하고 폐는 간을 제약하고 간은 비장을 제약하며 비장은 신장을 제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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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은 각각 가리키는 방향이 있습니다. 동쪽은 木이고 남쪽은 火이고 중앙은 土이고 서쪽은 金이고 북쪽은 水입니다. 목화토금수는 오행이 움직이는 방법입니다. 오행 관계만 잘 아시면 오장육부의 상생상극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장을 색깔로 봅시다. 목화토금수가 각각 간 심 비 폐 신이 되고 청색, 적색, 오렌지색, 흰색, 노란색이 각각 해당 장기에 좋습니다. 간에 좋은 것은 모과, 키위와 같은 푸른색 계통의 음식입니다. 심장에 좋은 것은 토마토, 수박 등으로 붉은색 계통의 음식입니다. 비장에 좋은 것은 귤과 같은 오렌지색 계통의 음식입니다. 폐는 배, 바나나와 같은 흰색 계통의 음식이 좋습니다. 신장은 밤과 같은 노란색 계통의 음식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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