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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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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8-09 05:04 조회 12,5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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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오늘부터 반야심경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구법승들의 불교에 대한 애정과 은혜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손오공이 등장하는 삼장법사(현장법사)나 신라의 구법승 의정스님등 목숨을 건 구법에 의해 경전이 전해지게 됩니다. 그 당시 세계 최초의 대학인 인도의 나란다대학에는 불교를 배우는 학생이 2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반야심경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반야심경은 너무 철학적이고 개념적이라서 불교 지식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이해가 됩니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자립심을 펼칠 때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만물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제일 원인자가 있어 어떤 전개에서든지 당위성이 있습니다.  둘째 그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자가 있습니다. 인식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이 만물을 만들었습니다. 불교식으로 하면 마음이 만물을 만들었습니다. 그 세계를 보고 평가하는 마음, 인식하는 마음이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 또 어떻게 보는 것이 참된 인식인지, 객관을 보는 주관의 생각을 모든 종교는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다라는 인식에는 두 가지만 있습니다. 여기에 주관과 객관에 대한 밝은 인식이 있어야 올바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을 때 앞의 두 가지만 있으면 그것을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로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되어야 단편적인 지식으로 종교를 곡해하지 않게 됩니다. 본성과 참된 인식, 올바른 실행론을 배울 수 있는 근거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반야심경을 배운다는 것은 세계를 보는 나와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기회이며, 이 기회를 통해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중에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실행자가 보는 반야심경 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두 가지를 다 설명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원래는 마하가 없습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번역을 했다가 구역의 여파로 명지견이 모아져서 마하를 집어넣었습니다. 반야심경의 260자는 어떤 내용입니까?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것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데 경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율은 윤리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들을 소박하고 성실하고 곧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조직화하고 개념화되고 생각이 많으니까 부처님 당시의 간단한 언어로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풀어놓은 것이 논입니다. 보살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논에 해당되는데 논까지는 너무 어렵습니다. 유식 같은 것은 논만으로 봐서는 아무도 이해를 못합니다. 보살이 써 놓은 것에 대해 다시 줄을 놓은 것을 소라고 하며, 깨달은 스님들의 말씀을 어록이라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소와 어록까지 포함된 것으로 이것을 260자로 함축했다는 것은 고도의 지식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마음 ‘심心’으로 표현할 수 있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도를 깨달았다라고 말합니다. 

노력을 하면 숙명이 사라지고 운명이 겹쳐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좋아 죽겠다할 때 좋아 죽겠다하는 마음을 따지고 보면 숙명에 얽혀 운명이 초라해집니다. 마음에서 그리지 않는 것을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인연 기도를 하여 마음에 그리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섭섭하게 했을 때 앙금이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스님이 조금 전에 이야기한 본성과 현실은 여러분들이 자신의 마음에 그리지 않는가를 살펴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을 그려놓았는지 자신을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 알아도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를 잡게 됩니다. 마음에 그리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이 반야심경 공부를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그리지 않는 것이 본론이며, 마음에 그리면 업의 종자가 되어서 숙명에 의해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러한 업에 잘 이해해서 통달하게 되면 오욕죄가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등 열 가지 악을 십악이라고 하는데 이런 악업들이 무엇 때문에 나타나느냐 하면 마음에 그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최초에 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다라는 것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한테 좋게했다, 나쁘게 했다. 이롭다, 해롭다등 훤히 보이잖아요. 반야심경 내용을 제대로 배우면 오욕죄와 십악등 모든 죄악이 모두 소멸하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대할 때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먼저 고맙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관에 의해서 객관이 어떻게 보이며 깨달은 내용을 설명을 해야 합니다. 

법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있는 원측스님은 반야심경에 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원인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무상을 종지로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다음 법문을 나눠서 해석하는데 관찰하는 질을 밝히고, 내용을 밝히고, 대상을 밝히고, 과거가 없다는 것을 밝힌다고 했습니다. 교의 입장에서 반야심경을 해석하면 보편적으로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대의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불교의 기본 교리에는 삼법인이 있습니다. 삼법인은 불법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내용입니다. 무상인과 무아인과 열반적정인입니다.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독특하게 세간에도 적용이 되고 진리에도 적용이 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세간에서 보면 나가 있는데 진리의 입장에서는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공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속성을 잘 이해해야 앞으로 반야심경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는데 특히 중생들의 헛된 것을 바로잡아줍니다. 공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제법무아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며 불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마하라는 것은 인도 말입니다. 역대 중국말로 번역하는데 번역할 때 번역을 하면 안되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비밀이란 뜻이 숨어있는 것으로 비언은 번역하지 않습니다. 바라밀을 뜻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비언이기 때문에 풀이를 하지 않습니다. 아제아제바라아제라는 것도 번역을 안 합니다. 둘째 한 가지 말에 뜻이 여러 가지인 것이 있습니다. 마하라는 것은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셋째 중국 실정에 맞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연무제라는 표현은 중국에서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바세계는 춥고 괴로운 세계인데 중국사람들은 낙천적이어서 춥고 괴롭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단어는 번역을 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옛날부터 번역을 안하고 쓰는 것이 있습니다. 인도말을 중국말로 번역하기에는 중국의 언어재능은 불교처럼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언어가 별로 없습니다. 중국말로 번역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느낌이 있어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합니다. ‘보리’같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가 번역을 하면 뜻이 가벼워져서 원래 뜻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반야라는 말은 번역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신비감이 있고 많은 뜻이 숨어있는 것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이 터득한 경지를 성품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하에 대해 표현한 것은 허공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생각할 수 있지만 허공같은 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해낼 수가 없습니다. 단어는 있지만 내용은 없습니다. 마음을 생각해보면 단어나 개념은 있지만 마음하면 도대체 어떤 것이 마음인가?  허공하고 똑 같아서 내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은 마음에 그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되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이 옛날에 법문을 하실 때 무엇이라 했느냐하면 하늘과 땅이 이것에 의존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언어로 표현해 보면 하늘과 땅도 내가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작용은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스님이 설명을 하면 여러분은 스님의 소견이 되어서 이것도 저것도 모르게 되니까 본인 스스로 생각해서 ‘아 이것이구나’ 할 수 있게 내버려두겠습니다. 마하라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크다’ ‘일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하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 존재를 느낄 뿐입니다. 노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있고, 변함이 없고, 인식도 없고, 손상되지도 않는 그것이 ‘천하만물의 어머니다’라고 했으며,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도’고 ‘대大’고 ‘마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형상을 끊은 상태가 되면 바로 이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다음이 반야인데 크게 세 가지 반야가 있습니다. 실상반야, 문자반야, 방편반야입니다. 스님이 여러분한테 똥과 메주를 설명해서 알게하는 것은 문자반야이며, 똥과 메주의 본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실상반야이여, 똥과 메주를 활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방편반야입니다. 설명을 덧붙이면 은밀하게 설하는 반야가 있는데 옛날에 어떤 큰 스님 이 산의 푸른색이 눈이라고 했으며, 흐르는 물소리는 관세음보살의 귀다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두 가지 반야가 있습니다. 분별심으로 따져 들어갈 수 있는 생각과 방법이 있는데 ‘산색이 눈동자다’라고 했을 때 이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험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젠가는 터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야는 지혜로 번역합니다. 지혜도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식으로 알지에 알식자입니다. 이해가 가는 것 그것이 지식입니다. 외부지식을 모아서 머릿속에서 해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산지식인이라고 하지요. 남보다는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행동을 할 때 주의가 깊고 사려가 깊지만 근본적인 본성이나 업을 소멸시킬 능력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솟아나오는 것으로 배우지 않았는데 스스로 터득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책을 많이 보고 경험해 얻는 것은 지식인데 지혜는 마음이 맑고 곧고 성실해야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맑다 했을 때 맑음은 탐욕이 적다는 것이며, 곧다 했을 때 헛된 욕심이 없다는 것이며, 재주가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생동안 노력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터득을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설했던 것을 적어놓은 것을 ‘자‘라고하여 반드시 ’자‘자를 넣습니다. 씨앗 ’자‘자인데 예를 들어서 12지에서 하루가 시작할 때도 자시부터 시작하지요. 중국의 유명한 예언가가 쓴 운명을 점치는 책에도 인류의 시초를 자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를 넣는 것은 모든 것의 시초라는 뜻입니다. 사막지대는 물이 귀하니까 큰 물독을 만들어놓고 빗물을 모읍니다. 마을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한 아이가 큰독에 빠졌습니다. 아이가 독에 빠졌다고 겁만 낼 것이 아니라 큰 돌로 독을 깨어 아이를 살려내는 지혜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데는 두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지식을 익힌 아이의 태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지식에 마음이 뺏기지 않은 지혜의 태도가 있습니다. 접시는 깨면 안되고, 항아리는 깨면 안되고 하는 것은 지식을 배운 사람입니다. 큰 물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다 죽어가도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사물의 가치 중에 생명이 더 귀하고 독은 그 다음이라고 아는 것은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독을 깨어서 아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입니다. 이제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지혜는 맑고 뚜렷하고 곧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의 출발이 지혜이며, 대의는 마하에서 모두 나타내었습니다. 


노력을 하면 숙명이 사라지고 운명이 겹쳐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좋아 죽겠다할 때 좋아 죽겠다하는 마음을 따지고 보면 숙명에 얽혀 운명이 초라해집니다. 마음에서 그리지 않는 것을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인연 기도를 하여 마음에 그리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섭섭하게 했을 때 앙금이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스님이 조금 전에 이야기한 본성과 현실은 여러분들이 자신의 마음에 그리지 않는가를 살펴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을 그려놓았는지 자신을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 알아도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를 잡게 됩니다. 마음에 그리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이 반야심경 공부를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그리지 않는 것이 본론이며, 마음에 그리면 업의 종자가 되어서 숙명에 의해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러한 업에 잘 이해해서 통달하게 되면 오욕죄가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등 열 가지 악을 십악이라고 하는데 이런 악업들이 무엇 때문에 나타나느냐 하면 마음에 그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최초에 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다라는 것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한테 좋게했다, 나쁘게 했다. 이롭다, 해롭다등 훤히 보이잖아요. 반야심경 내용을 제대로 배우면 오욕죄와 십악등 모든 죄악이 모두 소멸하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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