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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강 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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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8-09 05:42 조회 14,6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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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강 


역부여시 사리자


  먼저 번에 수·상·행·식에 대해 설명했는데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렇게 나가거든요. 역부여시는 ‘다시 위아래도 이와 같다.’는 의미거든요. 역부여시는 해설을 보면 ‘이미 내가 없는 연고로 만법이 다 비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스님이 해설해 주는 것은 교학적인 면도 있지만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실지 체험하고 경험한 바를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없음을 요달하거나 마음에 본성을 실견한 사람이 봤을 때는 실지 만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함을 보고서 일체고액을 뛰어 넘은 이유도 나 없음을 실견하거나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것을 보든지 그것은 법인데 그것은 실지 체험이 되고 경험이 되기에 만법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만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물을 보고 사물에 대해 평가하는 마음이 다 만법입니다. 만법이라 해서 바깥에 있는 형상, 고정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을 만법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 여러분들이 바깥에 있는 형상이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그것은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나한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그 공부를 따라 들어갈 때는 바깥에 있는 무엇을 쫒아서 해석하려는 그 마음이 먼저 내 마음을 가린다는 것을 알아야, 내가 없는 연고로 만법이 비었다는 이 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꾸준하게 마음에 비춰 깨닫겠다는 기대감 없이 오랜 세월 순수하게 수행하다보면 문득 한 생각이 툭 벌어지는 때가 있는데 이때 만법을 보면 만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미 내가 없는 연고로 만법이 다 비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 두 번째 견해라는 것은 공부의 묘한 비결인데 마음을 요달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마음을 더럽히는 까닭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어려서 활활 타는 불이 뜨거운 줄 모르고 만지게 되지만 뜨거워서 고통이 느껴지면 다시는 불을 안 만집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한 번 탁 요달하여 만법이 비었음을 알게 된다면 두 번 다시 만법에 마음을 붙잡히지 않는다. 즉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니까 견해에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일상생활에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고 경계를 대하고 여러 가지를 대했을 때 항상 나 있음 입장에서 파악을 하기 때문에 그 파악하는 내용이 딱 두 가지 견해 밖에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상견과 단견, 항상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곧 없어지는 견해로 파악하지만,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좋은 것과 싫은 것’, ‘괴로운 것과 즐거움’ 이 두 가지로 판단하는데 마음을 요달하면 이런 것이 사라지니까 두 번째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한번 깨달아봐야 여태까지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집착하고 쫓아다닌 것들이 불에 대인 화상처럼 고통스럽고 어리석고 필경에는 고통의 원인으로 다가오는 걸 알기에 코앞에 어떤 경계를 던져주어도 거기에 마음이 머물지 않아서 두 번째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떼까치 쉬지 않고 지저귀니 봉황이 깃들 수 없다.’ 보통 범부들은 이치를 모르니까 쉬지 않고 우는 소리처럼 마음에서 끊임없이 자기 입장에서 탐착, 분별, 해석, 번역하고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됩니다. 까치와 봉황은 차이가 엄청나겠지요. 원래 봉황은 용을 잡아먹는 새, 금시조라 해서 새 중에서 가장 위력이 큰 새인데, 마음을 새에다 비유해 아주 상스럽고, 힘 있고, 위력 있는 새를 봉황이라 하는데, 까치는 흔해 빠진 것이 까치라 떼까치가 울면 같이 놀지 않고 봉황이 자취를 감춘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요달하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끊임없이 분별하고, 사량하고, 집착하고, 치고 박고하면 마음자리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불성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함으로써 눈뜨기 시작한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야만 관자재보살이나 봉황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지혜로써 자기 마음을 깨달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마구니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기특한 생각이나 지혜로운 생각을 일으켰어도 내 몸뚱이를 기준으로해서 나온 생각이나 내가 태어나서 익히고 배우고 경험한 깜냥만큼의 마음이기에 그런 것으로는 반야바라밀다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야는 나 없음을 먼저 이해하고, 실행하고, 깨달음으로써 눈을 뜨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인 공을 이해하고’ 이것도 수처인연(隨處因緣)을 따라서 방편을 베푼 것이지 생명의 근원인 공은 아닙니다. 

  서울에 아주 돈이 많은 재벌보살인데  44살에 말기 암에 걸려 죽게 생겼는데 스님과 인연이 있어서 자기 49재를 부탁하여 서울 갈 일이 있어 우연히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보니 재산, 자기 젊음, 자식, 남편 등 떠나려는데 애착이 너무 많아 보였습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를 물어봤더니 49재 법문은 스님이 꼭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내가 미리 해주겠다고 했더니 어떻게 미리 해 주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승법으로서  마음공부를 한 사람만이 얘기할 수 있는 것이고 일반인들이 이렇게 하면 머뭇머뭇 거릴 것입니다. 그 보살에게 뭐가 제일 마음에 걸리느냐고 했더니 평생 남편을 미워한 것이 맘에 걸리고, 그래서 참회를 하겠다고 하는 것을 내가 참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얘긴 잘 들어야 합니다. 참회 안하면 어떻게 죄가 없어지느냐고 하기에 참회한다는 것도 한 생각 일으킬 때만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분이 큰 재벌 집안을 운영을 했던 사람이라 훤칠한 기운이 평소에 있는걸 알아서 작년에 부처님께 귀의하라고 오계를 설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참회하는 것도 마음을 일으킬 때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현재의식은 다스려도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은 다스릴 수 없다고 했는데 거기서 탁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의 본성은 무엇일 것 같으냐고 물어봤습니다. 여기서 얘기한 공이라던가 고요함, 맑음, 깨끗함 등 이런 얘기를 쭉 했습니다. 마음의 본성을 얘기할 때, 만약 스님한테 누가 와서 물어보면 상대방 근기에 따라 어떤 사람한테는 공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요함, 맑음 이라고도 하는데 그 보살에게는 그것이 적용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다시 그러면 마음의 본성이 뭐냐고 묻기에, 알고 싶으냐고 되물었습니다. 이럴 땐 마음을 모으게 해야 되니까 뜸을 들여야 합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때 그냥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정밀한 방편이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물어 보라 했더니, 전에 스님께서 ‘젖지 않는 물의 젖는 성품’이라는 것을 얘기 했는데 이해가 안 간다고 해서 마음의 본성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은 타는 것이 본성이고, 땅은 견고한 것이 본성이며,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 본성이고, 물은 뭉치는 것이 본성인데 마음의 본성은 무어냐 했더니, 고요함이다, 공허함이다 등 쭉 얘길 하는데 법문을 좀 들은 사람은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그 보살에게는 그것이 적용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기에 ‘마음의 본성은 물들지 않음 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한테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 그 보살이 보고 들은 것이 그 보살의 본성을 한 번도 더럽힌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보살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더라고. 그러니까 자기 나름 죽으면 좋은 데 가고 싶고, 남편한테는 참회도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의 본성을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거기가 현대 아산병원 18층으로 언니가 옆에서 간호를 했는데, 그 보살의 언니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놓아버려라. 왜 그렇게 잡고 있느냐?’고 말했다고 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맘이 편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49재가 이제 끝났다고 했어요. 이것이 49재를 하는 법입니다. 그런 이치를 지금 여러분들이 죽기 전에 배우는 것입니다. 

  서산스님의 선가귀감에 어록에 ‘만약사람이 죽을 때 한 티끌이라도 성인이라든지 범인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면 나귀 배나 소 뱃속으로 붙잡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만법이 비었음을 알게 되면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9재란 이럴 때 필요한 것이고 임종할 때 도를 깨달은 사람이 와서 법문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며, 여러분들이 이왕 인연을 맺으려면 도를 수행하거나 도를 깨달은 분과 인연 맺는 것이 좋고, 또 임종할 때 힘을 받으려면 평소 공부해 두면 훨씬 쉽습니다. 그 보살은 만 가지 복력을 덜어놓고 혼자 간다니 간다는 것도 두렵고 살아있는 것에도 애착이 가고 했는데, 이 두 가지가 자기 생각에 불과 했음을 깨닫고 자기가 평생 했던 것이 자기 본성을 더럽힐 수 없음을 알아서 안심이 된 것이었고, 그래서 49재가 필요 없어져서 그냥 왔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함으로써 눈뜨기 시작한다 해서 생명의 근원인 공을 이해하고 있을 때 이 공은 마음을 얘기하는 것인데, 마음을 왜 공이라 하는가? 여러분들은 마음을 항상 조작하거나 일으키거나, 이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 병이 없어지게 하기위해 공이라 한 것이지 마음을 공이라 하면 틀립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병이 이쪽에 있을 때는 이 언어로 타파하고 저쪽엔 있을 땐 저 언어로 타파하는데 보살은 자기 마음에 평생 남편을 미워했다는 것이 병이 되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천 번 만 번 욕을 하더라도 물들지 않음으로써 맘의 병이 없어 진거야. 병에 따라 약이 틀린 것이니 모두 똑 같이 적용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인 공을 이해하고 인간 본래의 정신으로 자비심을 채워나가게 되고 모든 마음과 운명도 공 차원에서 연결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중하근기를 가르치는데 이렇게 하면 내면에 들어가서 결국은 마음이 쉬게 되고 일체 중생이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사라짐으로써 그때 나타나는 그 마음이 이해와 자비입니다. 

  ‘이상은 일체 번뇌, 망상을 두드려 진여 자성을 밝힌 것이다.’ 진여 자성이라는 것은 언어나 설명으로 들으면 대단히 복잡합니다. 자기가 한 생각을 바꾸어 한 생각의 실체를 깨닫게 되면 그 순간 문득 마음의 본성이 딱 와 닿습니다. 이것이 쉽다면 참으로 쉬운데 어렵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있기 때문에 천만번 해도 안 됩니다.


  이 앞에서 역부역시까지가 번뇌 망상을 두드려서 마음의 본성을 밝힌 것이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사리자야 시제법공상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 이며, 부증불감이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 가장 지혜로운 분으로서, ‘사리’는 ‘매의 눈’ 이라는 뜻으로 사리자 어머니의 눈이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생겼는데 그분의 자식이라 해서 ‘사리자’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불교에서 법명을 받지만 그 당시에는 인디언의 ‘늑대와 함께 춤을’처럼 자연스럽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제법이란 하늘, 땅, 사람, 음식 등 우리가 만나게 되는 낱낱이 법인데, 그냥 법이 아니고 내가 인식한 내용에 따라 나에게 인식되어진 법입니다. 제법이 공하려면 그 인식하는 마음이 쉬어야 합니다. 크고 깨끗한 거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거울이 탁하거나 삐뚤어지고 작으면 그 형태에 맞추어 사물을 비추게 됩니다. 그 비춰진 내용을 불법에서는 제법이라 합니다. 제법은 결국  내가 없으면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법당에 있고, 산에 올라와서 스님을 보고, 도반을 보고 있지만 잠을 깊이 들게 되면 모두 사라집니다. 내가 인식할 때만 존재로써 나에게 인식되고,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기에 제법공상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지어낸 마음으로 그려낸 모습들이 제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깨달아 보면 그게 마음의 본성인데,  떼 까치가 쉼 없이 우는 것처럼 우리는 한 순간도 허망한 생각에 의지함이 없이 다른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이라 하고 중생은 허망한 생각을 수도 없이 만들어냅니다. 

  ‘시제법의 공상은 불생불멸이다.’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것은 여러분들이 한 생각만 싹 바꾸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의 바닷물이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고, 거품이 나고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모습들이 생합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잠잠해지면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생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한 생각 잘못된 망념에 의해 태어났는데 그게 생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이 전생에 피웠던 망념에 의지해서 에너지를 만들어 총체적으로 저장이 되어있습니다. 아까 말한 재벌 보살이 44살에 죽게 되었는데 남편의 재산이 3조라고 했습니다. 복력 계통으로는 3조 이지만, 생명력 계통으로는 44살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이 그렇게 된 것은 전생에 일으킨 마음, 자기가 쓴 마음, 행한 마음,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조금 있으면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멸을 잘 보게 되면 오로지 우리가 일으킨 생각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가 90까지 산다면 그 사람의 생멸에 의해 일으켰던 생각이 90까지 살도록 에너지가 결정된 것입니다. 그것을 생멸이라 하면서 왜 불생불멸이라고 하느냐 하면 생각에 의지하지 않는 마음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법의 공상을 딱 깨쳐보니까 여태까지는 생하고 멸하는 생각 생각을 따라 세상을 보고 행동을 했는데 생멸이 없는 이치, 즉 제법의 공상을 보니 마음자리는 본래 생멸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닷물의 젖는 성품은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젖는 성품은 파도가 있다고 해서 따로 생한 것이 아니고, 파도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젖는 성품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자리도 이와 같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불생불멸, 여기에서는 시간적인 우리의 망상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 오래 영원히 살기를 바랍니다. 생을 위주로 자기 생명을 평가하는 것이 장수하는 것입니다. 재벌 보살도 키도 크고, 잘 생겼는데 44살이면 아직은 꽃다운 나이인데 그런 사람도 멸하잖아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인생 100년에 반도 못 살았으니 단명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명 한다는 것은 몸뚱이와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한 생각입니다.  젖지 않는 성품이 뭣인지 이해를 못한다고 그 보살이 물어왔을 때, ‘마음의 본성은 물들지 않는다. 물들지 않으면 물든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 자리는 어떠한 것에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제법의 공상이며, 또는 불생불멸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다음 불구부정은 마음의 청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마음이 착해, 저 사람은 마음이 탁하고 지저분해 라고 말하지만 마음의 본성을 요달 해보면 착한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 착한 모습이 나타난 것을 내가 착하거나 악하다고  평가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이가 미우면 영원히 미울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와서 미안하다고 하며 100일 만 옆에 있으면서 맛있는 것 사주고 놀아주면 이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 절간에 나오는 보살들도 아주 친하다가도 말 한마디에 안 좋게 되어 얼굴도 안 마주치는 것을 제가 수도 없이 봤거든요. 착하고 악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선악의 기준은 나에게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연의 소산물인데 이런 것들을 계속 쫓아가다 보면 다음 생에도 나에게 잘하고 못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조건 없이 좋아하거나 미워한다면 전생에 여러분들이 썼던 그 마음이 그대로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선 인과가 선행이 되고, 그런 자리에서는 참회도 해야 되지만, 불생불멸이나 제법의 공한 입장에서 봤을 때 참회는 무엇일까요? 내가 있으니까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 제법공상의 입장에서는 나 없음을 얻은 자리인데, 거기에 만약 참회를 한다면 다시 망상이 됩니다. 이해가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법이라도 근기에 따라 쓰는 법이 다 틀리는 것입니다. 법문을 많이들은 사람이 어디 가서 ‘아, 나는 불생불멸이니 참회를 안 해도 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구부정이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내 입장과 인연의 소산에 의해서 나타나는 주관과 객관을 버리거나 취하면 다시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기록이 되어 또다시 윤회를 펼치게 됩니다.  재벌 보살에게 다시는 재벌가에 태어나지 말고 대수행인이 되어서 생사를 뛰어 넘는 그런 원을 세우라고 했더니 자기도 지긋지긋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돈 갖고도 안 되는 세상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불생불멸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 불구부정도 물의 젖는 성품으로 보면, 예를 들어 우리가 깨끗한 물을 마시고 그것이 생리 현상으로 나오는 것이 오줌인데 탁한 물로써 형질은 깨끗하고 더러움이 생겼지만, 이 깨끗하고 더러움이 의지하는 곳이 바로 젖는 성품입니다. 그 성품은 깨끗하고 더러움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목이 타듯이 마르면 자기 오줌을 받아 마시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이 물을 더럽다고 하겠습니까? 목마른 것을 풀어 주는 것은 젖는 성품이지 깨끗하고 더러움이 아닙니다. 이 깨끗함과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본성 즉 젖는 성품을 스님이 재벌 보살의 49재 법문에서 물들지 않음으로 비유했던 것입니다. 

  ‘부증불감’은 아무리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더 많아지거나 적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젖는 성품이 그렇지요. 물을 한 컵 먹으면 적지만 10컵을 마시면 많지요. 그게 증입니다. 10컵 있던 것 중 한 컵 만 마시면 멸이라. 그렇지만 젖는 성품 자체는 이것이 하늘에 올라가면 구름이 되고, 비가 되며, 바다로 가면 바닷물이 되지만 일찍이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것은 증도 멸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을 물로써 비유한 것입니다. 노자가 도와 가장 가까운 것을 물이라 했는데, 다른 물질로 얘기하면 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리자야 제법공상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것을 왜 했느냐 하면, 이것이 공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이다.’ 라고 할 때 도대체 뭐가 공이냐 하는 이것을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써 공이란 어떤 것인가? 공이란 결국 마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인데 마음의 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공이라 하면 허공이 되겠지만 불교에서는 ‘진공묘유’라 합니다. 참된 공은 묘하게 존재하며 텅 비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표면의식입니다. 남극이나 북극에 가면 빙산이 있는데,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은 1/7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수면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표면의식이 이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현재의식이라고도 하는데 물질로써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남을 평가하고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재의식은 눈 한 번 딱 감고 잠 한 번 자고 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그 다음 마음의 세계, 이것을 잠재의식의 세계라고 하는데, 거기에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세계가 또 있습니다. 그 세계는 현재의식의 세계와는 묘하게 틀려서 현재의식 상태에서는 창피하거나 두려워서 못 하는 말이나 행동을 다 합니다. 한 번씩은 다 겪어봤을 것입니다. 미운 사람과 싸우고, 사모하는 사람과 만나기도 하며, 물속에서 고기와 대화도 하고, 용을 타고 하늘을 날기도 합니다. 이것이 잠재의식의 세계인데 현재의식 보다 7배나 더 큽니다. 그래서 잠재의식 세계를 정복하지 않으면 현재의식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꿔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어떻다.’ 라고 하는 근원은 잠재의식 세계의 정보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은 잠재의식에 의해 조정 되는데, 여러분들은 현재의식, 즉 내가 생각하는 이것이 조정하는 줄 알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입력된 정보가 어떤 사람을 좋거나 나쁘게 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잠재의식부터는 수행을 안 하면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심층의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6,7식이 여기에 해당되고, 표면의식은 5식과 6식입니다. 

  그리고 이 잠재의식이 의지하는 세계로써 ‘무의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아이를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적당히 운동을 하게 되면 10달 뒤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려고 하면서 출산의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상처가 났을 때 백혈구가 딱지를 앉게 만들어 출혈을 멎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만듭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무의식이 조정하는 것입니다. 이 처럼 무의식의 힘이 엄청난 것입니다. 이 의식을 ‘아뢰아식’이라 합니다. 만약 이 무의식이 혼탁하면 잠재의식에 영향을 줌으로써 가난한 부모집안에 태어나게 되고, 소위 사주팔자가 안 좋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앞의 재벌보살은 무의식 영역에서 부귀는 얻었는데 수명을 얻지 못하는 무의식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용했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치는데 생사를 뛰어 넘으려면 무의식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무의식 세계는 무색계, 잠재의식 세계는 색이 있어 색계, 여러분들 살고 있는 세계는 욕심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욕계, 이 세 가지 의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체입니다.  ‘이 외에는 어떠한 세계도 없다.  그래서 공이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의식이 비어 왜곡 현상이 없는 상태의 마음이다.’ 무의식과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이 ‘내다.’라는 그 기준에 의해 더럽혀진 정보가 없는 마음, 이것을 불가에서는 ‘무심’이라 합니다. 여기서 무의식과 무심의 차이를 아시겠지요. 무의식은 무명의 상태, 밝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를 계속 만들어 갑니다. 이 무의식까지 정복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고의 원인과 조건을 알고 제거하면 공의 원인이 스스로 나온다.’ 고의 원인은 보통 교리적으로 집착이나 갈애로 하지만, 마음 닦는 입장에서는 고의 원인은 ‘내다.’라는 한 마음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사람을 대할 때 ‘내다.’라는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이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있을까.’ 라든지, ‘이런 멍청한 사람이 있나.’라고 하거나, 또는 어떤 이는 그것을 악용할 것이고, 지혜로운 이는 ‘참 착하고 맑은 사람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 처럼 욕탐에 따라 똑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 유명한 효자가 한 명 있었는데 겨울날 이불이 차갑고 추우니까 자기가 먼저 들어가 몸으로 따스하게 만들어 놓고, 음식도 미리 간을 보고 어른이 드시게 했는데, 같은 마을에 불효자가 있어서 그 집 아버지가 효자 집에 가서 보고 배워오라고 해서 그대로 집에 와서 했는데 버릇없는 놈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어떤 현상이든 자기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효자라는 것도 그것을 받아줄 아버지가 있어야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것을 느끼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길고 짧은 것은 다음 생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삐뚤어진 것을 알면 고치지만 모르면 자신의 흉한 마음을 그대로 아무렇게나 드러낸다.’ 이것이 무명의 근본입니다. 자기 마음, 자기 입장에서만 얘기하고, 사람을 대하고, 행동을 하면 마음이 삐뚤어진 것인데, 지금의 대통령이 실용주의자라서 돈이면 다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백성들의 마음을 삐뚤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은 지적, 정적, 의지적인 것이 있는데, 정적인 욕심만 채우고 지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을 팽개쳐버리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마음이 삐뚤어진 것을 알면 고치는데 그렇지 못하고 무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이 왜 필요하냐 하면 깨닫게 되면 자기가 마음을 잘못 쓴 것을 알고, 누가 강요를 할지라도 다시는 그렇게 마음을 쓰고 싶지를 않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도를 자연히 닦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흉한 마음을 아무렇게나 드러낼 때는 현재의식으로 나타나고, 마음의 삐뚤어진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무명 상태에 갇히게 되면 마음의 깊은 상처는 잠재의식에 형상으로 그려지게 된다.’ 무의식은 마음을 삐뚤어지게 하는 근원이고 잠재의식은 그것을 새기고 현재의식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펼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명상이나 깨달음 없이는, 깊은 내면의 수행이 없이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까 그 재벌보살 병실에 천주교 신자 친구가 왔었는데, 스님과 보살이 대화하는 내용을 보고 이해를 할 수 없으니까 ‘스님 그렇게 해봐야 아무런 소용  없으니 기도나 좀 해주세요.’ 라고 계속 그랬었는데, 그 사람은 기도를 해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스님 입장에서는 단호히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현재의식에서 만족시킬 뿐이지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있는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 불자들이 가서 기도를 해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임종을 앞에 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근원에 대해서만 건드려주지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을 쓰더라도 상대방의 아픈 상태를 봐서 죽을병이 아닌 사람에게는 같이 기도를 해서 마음의 평안함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우는 아이에게 돈 대신 누런 낙엽을 주고 과자 사먹으라고 하여 울음을 그치게 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다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행하는 기도는 이와 같은 같은 것인데 그것이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무슨 영향을 주겠습니까?  여기에 불법과 타종교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삐뚤어짐은 마음의 깊은 상처에서 나온다.  인간이 고를 느낄 때 마음의 깊은 상처가 생긴다. 마음의 정화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다.’ 여기서 깊다는 것은 무의식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고치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무의식까지 정화가 되면 세상 모든 것, 일체와 내가 둘이 아닌 경계가 있는데,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니 상대의 고통스러움이 나에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것을 알기에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내가 손해 볼지언정 상대가 손해 보는 것을 보질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우선 만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욕탐의 세계에 빠져든 것뿐입니다. 

  ‘공의 차원에서 지혜가 나온다. 마음의 상처를 고치면,’ 여기서 마음의 상처는 무명입니다. 무명을 제거하면, 즉 깨닫게 되면 ‘공’, 텅 빈 충만이 되고, 그다음에 지혜로운 마음이 나옵니다.   

  ‘영혼의 왜곡을 뿌리치려는 생명 본래의 작용이 지혜이다.’ 내 마음의 비뚤어진 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자체가 지혜이다. 여러분들이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한 달에 한 번 여기에 법문을 들으러 오는 것도 기이한 일이라고 봐야지요. 안 오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이 법문을 알아듣고 배우려고 하는지 스님이 신기할 때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설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법문을 잘 안 듣거든요.

  ‘일그러진 마음은 진리의 말을 자신의 마음에 유리하게 결부시킨다.’ 세익스피어의 ‘악마도 남을 조정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한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악마는 바로 자기입니다.

 

  여기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이제까지는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총체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낱낱이 다시 짚어보겠습니다. 

  ‘사리자야?’ 제가 여기서 ‘~ 보살’ 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는데, 제가 ‘네’라고 대답한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 라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여러분들은 사물을 보거나 사물에 대해 개입할 때 선이나 악 두 가지로 봅니다.  수행을 가르치고 마음을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그것이 병인 줄 알기 때문에 그 병부터 없애기 위해 ‘주인공아’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 서암 스님은 바위에 앉아서 ‘서암아?’ 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고는 ‘네’하고 대답을 하고는 ‘너 이다음에는 남한테 속지 마라.’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남은 ‘내다.’하는 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대답하는 놈은 내가 아닙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거든요. 이 이치를 잘 알아야 됩니다.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에게 법문을 하면서 사리자를 부르는 것은 ‘사리자야?’ 했을 때 상근기는 여기서 깨닫습니다. ‘사리자야?’ 하는 이 한 마디에 반야심경의 골수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사리자야?’, ‘네.’  ‘이게 선이냐, 악이냐?’  여러분들이 여기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갖고서 깨치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개념이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눈앞에 마음껏 드러났으나 인생은 이것에 다시 헛것을 일으킨다.’ 인간들은 ‘사리자야?’ ‘네’  하는 순간에 본래 마음이 탁 드러났는데 거기에다 다시 헛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새로 법명을 자꾸 지어달라는 사람들이 이런 헛것을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법명이 있으면서 왜 자꾸 법명을 달라는지, 그것은 병을 계속 키우는 독 밖에 안 됩니다. 참으로 공부를 가르치고 양심 있는 스님이라면 다른 스님에게서 법명을 받았는데 다시 법명을 지어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따라간다면 스님은 중생 욕심에 타협한 것이며, 신자는 자기 욕심으로 스님을 더럽히게 됩니다. 어느 스님들이 보살계는 받을수록 업장이 소멸된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보살계를 받은 대로 행했을 때 적용되는 것이지, 만약 보살계를 받는 것만으로 업장이 소멸된다면 중세 암흑기 때 기독교의 면죄부 파는 행위와 다름이 없는 행위며, 돈 있는 자들만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보살계를 수도 없이 받은 절 도깨비들은 모두 극락 갈까요? 무엇이 근본인지 모르고, 앞에 있는 스님이나 성직자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으면서 그냥 자기를 옹호하거나, 필요할 때만 그 말을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명 덕을 보거나 다른 바깥의 것에 의지하려는 사람은 수행을 못합니다. 수행은 무엇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쳐서 미혹함을 스스로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헛것’은 사물을 보고 거기에다 자기 나름대로 망상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변계소집성이라 그러지요.

 이 절에서 관음기도 하다가, 저 절에서 지장기도 영험 있다하면 거기로 몰려가고 하는데, 자기가 보고 들은 깜냥과 욕심만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불법을 모르고 부처님 얼굴에 똥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헛것입니다. 마음을 수행한 사람은 그런 것에 절대 현혹되지 않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지장보살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툭하면 지장보살입니다. 점점 근기가 약해지고 재 한번 지내고 나면 돈이 많이 생기니, 요새는 선방에서도 이것이 있어야 유지가 되고, 순수하게 법문만 해서는 유지되는 곳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겉으로는 번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도 없이 업력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평생을 귀신에 의지해서 산 사람은 다음 생에 무당이나 무당 쫓아다니면서 북을 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귀신과 평생을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다음 생의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각인 된 정보가 쉽게 귀신을 볼 수 있는 몸을 받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하면, 내가 편한 대로 신앙을 갖거나 종교를 갖게 되면 지금 이 생에서는 달콤하겠지만  다음 생엔 북채를 잡는 것과 같은 과를 받게 됩니다.

  언젠가 불교TV를 보는데 해인사 주지를 지낸 스님이 11번 49재를 지내준다고 크게 광고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불자들은 큰스님이 재를 지내주니 그리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다 외도의 길입니다. 그 스님도 평생 중노릇한 것이 귀신 시중들려고 한 것인지, 살아있는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제도하는 것이 선견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백중날 재 한 번 지내고 재벌보살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고치면 죽은 사람 49재는 지낼 필요가 없단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부처님 말씀 어디를 봐도 49재를 지내야 된다는 말이 없고, 후세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죽은 이에게 부처님 법문을 전해주기 위해 만든 것이 49재입니다.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으면 공인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얼마나 탐욕스런 행위입니까? 이것은 정법이 아니며 허공에 말뚝을 박는 행위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의 본성이 허공성임을 모르기 때문에 말뚝을 박는 대로 물질화됩니다. 귀신을 섬기면 귀신이 감응을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허공에 말뚝을 박으면 박힙니까?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공에 말뚝 박지 말고 아교칠에 착착 달라붙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사리자야?’ ‘네.’ 다만 이것뿐이다.’ 여기다 대고 말뚝 박지 말고 헛것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님에게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부르며 대답하는 그놈을 놓치지 않으면 참선 수행입니다. 화두는 이 도리를 알면 그대로 다 풀리는 것입니다. 왜 어렵게 가르치는지? 어렵게 가르쳐야 장사가 잘 되는가 봅니다. 

‘사리자야?’ 이것 하나를 가르치는데도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하는데 반야심경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기 바른 안목을 가르쳐 열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장자 한 번 내리치고 내려가 버리면 여러분들은 모르잖아요. 

  ‘시제법공상’의 제법은 앞에서 말한 헛것이 제법입니다. ‘사리자야?’ ‘네.’하고 대답하는 그 자리는 미처 내가 제법을 일으킬 틈이 없는 자리입니다. 누가 나를 부르면 대답부터 하지, ‘저 놈이 대답하면 기분 나쁘다. 네.’ 이렇게 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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