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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3강 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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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608회 작성일 21-08-09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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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우리 앞에 나타난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일 뿐 고정적인 실체가 있어 생(生)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바닷물의 젖는 성품은 증하는 것도 감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닌데 인연의 힘에 의해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고, 파도가 일어나면 파도에 영향을 받은 만큼 형상이 만들어지는데, 보통 중생들은 파도에 영향을 받은 만큼 낱낱의 실제적인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다보니 윤회의 고통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있고 없고를 다 포섭하면서도 그 있고 없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자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생멸은 관계의 틀에서 연기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생멸을 물의 젖는 성품이라고 보면 그 성품은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나 업력에 의해서 형상 없는 것에서 만 가지 형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생해도 불생불멸이고 멸해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경무대로 각계인사를 초청하여 생일 연회를 하는 자리에서 당시 종정이시던 효봉스님께 ‘스님은 생신이 언제이십니까?’ 라고 물었는데 효봉스님께서는 ‘태어난 바가 없는데 무슨 생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답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설할 법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윤회를 끊기 위해서는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본성을 이치적으로 설명하면 불생불멸이고, 태어나되 난바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보통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이 자기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착각하여 거기에 집착하고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바라밀다는 범어인데 번역하면 ‘도피안’으로 저 언덕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언덕은 고통과 윤회와 탐욕으로 가득 찬 세계인데 수행을 잘하여 극복하면 저 언덕인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데 반야의 지혜란 공의 체험으로 얻는 것이고 공의 체험은 참선 수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도 사람의 영적인 단계나 지위에 따라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인식내용으로서의 공입니다. 누가 설악산에 가을 단풍을 갔는데 단풍이 좋다는 것을 다시 돌이켜 보니까 저 단풍의 아름다움은 설악산의 단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의 욕탐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인식 내용의 공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이웃사람을 보고 친구를 대하고 부모를 대하고 세상을 보고 어떤 것을 보고 평가하려고 할 때 마나식이라는 아집에 의해서 자기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설악산 단풍을 보면 좋고 구정물을 보면 싫고 하는 것이 인식 내용의 실체는 없지만 이것을 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대상을 보고 평가함에 있어 제 7식인 마나식이라는 아집에 의해서 자기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음으로 인해 좋다, 싫다, 괴롭다, 즐겁다 하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인식내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변계소집성) 실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인 것입니다.

  둘째, 존재로서의 공입니다. 설악산의 단풍나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보는데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인식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면 삼라만상이 영원히 하나의 실체로 머물러 있는가? 그대로 있는가? 을 관찰하게 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전생에 인연만큼 전생에서 사용하였는 것 만큼 내 앞에 인연으로 펼쳐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 한 것이 아니고 가유 즉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들이니까 이것들도 결국은 공인 것입니다. (의타기성) 즉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고 가유(假有)로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결국은 ‘공‘입니다.

  셋째, 진리 차원의 공입니다. 인식차원이나 존재차원의 공은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본성 차원의 공은 내가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차원입니다. 즉 주관과 객관을 벗어난 마음자리이기에  스스로 깨쳐야 알 수 있는, 부처나 보살의 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리입니다. (원성실성) 

  우리의 몸은 지, 수, 화, 풍 4대가 인연의 힘에 의해 남자 또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6근이 안으로(내부로) 눈이 멀어 4대의 모습이 자기 모습의 실체인줄 알고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선업도 짓고 악업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적을 평생 아들로 삼는 마음인데 원성실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미하여(알지 못하고) 일으키는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 이 언덕이고, 나고 죽음이 없는 본성을 깨달으면 저 언덕인 것입니다. 

  경계를 만나도 항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계를 만나게 되면 판단하게 되는데 관찰을 해야 합니다. 관찰과 판단은 분명히 다릅니다. 관찰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제 3자의 입장에서 경계를 보는 것이고 판단은 내 입장에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마나식 즉 아집, 아견, 아치, 아만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볼 때는 판단이 나오고, 한 생각을 쉰 상태에서 상대를 살펴보면 관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 닦는 요령인 것입니다. 금강경에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쓰라‘는 것도 같은 뜻이 됩니다.

  누구나 가고자하는 ‘저 언덕’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킨 것을 쉬는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스님, 사찰, 영험이 있다는 기도터를 찾아다니는 것은 불법도리로 살펴보면 욕심과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선악에 물들고 생사윤회를 하는 것은 본성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의 자리는 대상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한 생각 쉼으로써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탐, 진, 치 삼독을 쉬고,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정체를 여실히 알아서 판단하지 말고 관찰하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이제까지 설명한 ‘마하반야바라밀다’을 간략히 정리하면 ‘마하’는 ‘크다’는 뜻으로 마음의 본성, 즉 바닷물의 젖는 성품은 크다, 작다라는 형용사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로 ‘크다’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반야’는 변계소집성이나 의타기성에 속지 않는 마음으로 지혜인데 그것을 우리는 작용이라 했습니다. ‘바라밀다’는 반야를 증득하기 위해 실천하고 수행하는 형태로 이것을 삼위일체로 나누면 체, 상, 용입니다.

  그 다음 ‘심경(心經)’은 여러 가지 경전 중에서 ‘심왕’이 홀로 빼어나고 중요하여 마음이라 했는데 범어에는 마음이라 해석하지 않고 ‘심장’이라 해석했습니다. 핵심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야경 600부 중 가장 적은 구절로 된 것이 반야심경인데 곧 반야 600부의 골수라는 것입니다.


  심‘心’이란, 일체중생의 본래 근원으로서의 ‘마음’입니다. ‘나’에 대해서 앞 시간에 설명했었지만 자기를 생각하는 나, 몸을 중심으로 위탁하는 나, 이 두 가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 3가지가 있는데 중생의 본원이라는 것은 바로 앞의 두 가지에 영향 받지 않는 나인 마음이 바로 원성실성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일체 법이 마음으로 돌아가고, 마음이 생멸하면 만법도 생멸하는 것입니다.

  만공스님이 젊은 시절 절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절 아래 마을에서 초립동이 올라와서 ‘스님 만 가지 법이 하나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 하나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萬法歸一 一歸何處)’,하고 물어 본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참선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식으로 하면 하나님이 만 가지를 창조했는데 그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원성실성의 자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은 다음 생에 태어날 종자를 마음에 계속 채워 넣고, 도를 닦는 사람들은 그 종자가 마음에 채워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차이가 있는데, 중생이 책을 보는데 책만 보고 마음은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님이라 할 수 있는 원효스님의 ‘해골바가지 물’이야기를 잘 아시겠지만 경계라는 것도 내가 만드는 것이지 원래는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스님께서 깨달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기가 쓰는 마음을 스스로 잘 알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 착하다, 어떻다 하는 것이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일으킨 변계소집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아무리 기도하고 다라니를 외워도 그것은 해서 좋다는 욕탐 때문에 하는 것이지 지혜롭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처처에 성품이 나타나지만 중생은 물질에 막혀 긍정치 못한다. 견성하고자 한다면 굳이 공들일 필요가 없나니, 다만 공부한다는 오만과 소견을 멀리 하여라’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공부 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공부한다, 남보다 더 뛰어나다 라고 생각한 것의 기반은 ‘나다’라는 것을 의식한 마음인데, 이것이 망상인 줄 모르고 원성실성을 막아버린 역할을 한 것입니다.

  2조 혜가스님이 경∙율∙론 3장을 다 섭렵했음에도 도를 깨닫지 못해 달마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마음이 불안합니다.’ 라고 했을 때, 달마스님께서 ‘그 불안한 마음을 한번 내놔봐라.’ 라고 하니 혜가스님은 ‘내놓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내가 너의 불안한 마음을 치료했다.’ 라는 달마스님의 대답에 혜가스님은 깨달은 것입니다.

  즉 견성하고자 한다면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신론에서는 ‘삼계유심소작(三界唯心所作)’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모양은  마음이 조작해낸 것이고, ‘이심즉무육진경계(離心卽無六塵境界)’는 망령된 마음을 여의면 모든 업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뜻인데 그만큼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경(經)’은 범어로 ‘수다라’입니다. 한문으로는 정경(正經), 관경(貫經)으로 해석하는데 ‘정경’은 올바른 길, 관경은 하나로 꿰뚫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보리수 나뭇잎(패엽)에 새겼는데, 거기에는 설해야 할 바의 의미를 잘 관통했고 중생들을 교화하는 글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경(經)이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에게 구족되어 있는 근본지 즉 물의 젖는 성품은 바람이 불면 파도가 되고 구름이 되고 안개도 되지만 물의 본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 후득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지닌 각자(覺者)가 지혜로써 중생을 이끌어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경’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나고 죽는 것이 가장 큰 일이고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경’입니다.

  선(禪)적으로는 ‘경’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운거 도응스님께 학인이 묻기를 ‘어떤 것이 학인의 경입니까?’ 하니 ‘말하고 행동하는 거기에 분명하다’ 라고 답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까 ‘자넨 평소에 무슨 경을 외는가?’  ‘유마경을 읽고 있습니다.’ 라고 하자 ‘나는 유마경을 외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유마경을 욀 줄 아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평소에 쓰는 마음을 물어본 것으로 공부를 안하면 변계소집성에 얽매여 정직하게 알 수가 없고, 공부를 하게 되면 한마디 말에도 골수를 꿰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을 할려면 진실해야 되고 곧아야 되고 성실해야 된다는 이유입니다.

  좋은 글귀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나에게 한권의 경이 있으니 

     종이나 먹으로써 만든 것이 아니고

     그 경을 펼침에 한 글자도 없이 

     항상 대광명이 나오더라.


  이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본래 경의 뜻입니다.

  옛날 인도의 반야다라 존자가 국왕의 초청을 받아 경을 독송하는 자리에서 경은 읽지 않고 음식만 먹고 있으니까 왜 경을 읽지 않느냐는 문책을 받습니다. “저는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이 경을 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내쉴 때 바깥경계에 집착 안하고, 들이쉴 때 바깥경계를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는 요령입니다.


지혜로 중생을 이끌어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경입니다. “경”이란 다른 말로 설명하면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설명해주는 길입니다. 사람이 가야하는 길을 도道라 하며 도가 길道잖아요. 우리가 도 닦는다고 했을 때 사람이 가야하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이냐 하면 가장 큰 길이 나고 죽음을 여의는 길이고 중생은 이 길을 가지 않고는 세세생생 윤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기 모여서 부처님 법을 듣고 나고 죽음의 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방법에 따라 수행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법문을 듣다가 ‘뜰 앞에 잣나무’를 알아낸 보살이 있다 해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그것이 평상심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는데 말은 맞는 말인데 정말 그 사람이 알았다면 맞는가?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것이 평상심이냐고? 어떤 것이 평상심일까요? 여러분들은 평상심은 이런 저런 거다 하고 설명하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평상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도를 얻었다 하면 도가 망했겠지 아직 까지 전해 내려오겠습니까? 옛날에 어떤 스님이 죽을 때가 되어서 몸이 아파서 아프다고 계속 소리를 지르니까 스님은 도인이시면 아프다고 하십니까? 하니 그 스님이 일반 범부들은 아플 때 이렇게 아프다고 하지 않느냐? 하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참 묘한 것입니다. 

오늘 불법을 배우는 보살들이여! 이 경전을 배우면 팔만 장경이 원래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교리적으로도 설명했고 일상에서 쓰는 마음에서도 설명했고 팔만장경이 마음 심心 하나 설명한 것입니다. 선한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지혜종자라고 가르치고, 악한 것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고, 중생은 어리석어 내 눈앞에 있는 좋은 것에 빠져 탐욕에 떨어지고, 외도는 교만해서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잘못된 교리에 의해서 자기는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몰라 밖에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자기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게 사는 교만한 것이 진리를 모르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다음에 할 것은 관자재보살입니다. 부처님 경을 보면 먼저 제목에서 경 뜻에 대해 설명을 하고 발원문을 할 때 발원문을 생각하고 하면 사람을 대할 때도 넉넉하게 대하고 원하는 바를 닦아나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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