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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9강 무고집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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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453회 작성일 21-08-09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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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지난 시간에 ‘무안계 내지~ 무노사’까지 했습니다. 늙고 병들어 죽음이 없다는 내용인데 거기까지가 본성에서 본 우리의 본래 실체고 정체성입니다.

‘역무노사진’ 또한 노사가 다함이 없다는 것으로 이미 늙고 죽음이 실재하지 않기에 없앨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늙어서 시력이 나빠지거나 눈병이 생기면 허공에 홀연히 헛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환화(幻花)라 합니다. 변화하여 나타난 꽃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본성자리에서 인생을 고찰해보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허공에 헛꽃 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이것을 간파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무아와 무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허공에 헛꽃이 핀 것은 여러분이 좌선이나 어떤 수행, 기도를 할 때 홀연히 누가 보고 싶거나, 누구에 대하여 좋고 싫다거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일상생활에서 경계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허공 꽃입니다.

이런 헛꽃들이 뭉치고 뭉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러한 헛꽃과 같은 마음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을 하고 움켜쥐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뜬 달이 본성이고 옹달샘이 우리의 ‘내다’하는 한마음인데, 옹달샘에 즉 내다하는 한마음에 달이 비치게 되면 미혹한 중생은 그달을 움켜쥐려고 옹달샘을 계속 손으로 잡지만 달은 잡혀지질 않습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무상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미친 원숭이가 옹달샘에 비친 달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움켜쥘 수도 없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필경으로는 허망으로 돌아가서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늙고 죽는 원인이 옹달샘이 비친 달이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데 있습니다. 옹달샘에 비친 달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거기를 떠나는데 보통 미친 원숭이는 그것을 모르고 끝까지 잡기위해 애쓰다가 지쳐 쓰러져 죽습니다.

산에 살다보면 사람들이 쳐놓은 덫에 짐승들이 걸려드는 것을 보는데 다리가 잘리거나 덫에 걸린 짐승들은 앞으로 나갈 줄만 알고 발버둥만 치다가 결국 목이 죄어져 죽고 맙니다. 덫에 걸린 짐승이나 여러분들이 생사의 굴레에 걸린 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성자리에서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일으켰던 생각 하나하나가 옹달샘에 비친 달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좋거나 밉다는 것도 경계에 따라 일어났던 마음이기에 그 마음에 능히 집착하지 아니하고 물들지 않도록 마음을 쓰게 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 결과가 노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노사가 없다고 해놓고 역무노사진 즉 노사가 다함도 없다고 한 것은 저 노사까지가 허공의 헛꽃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의 헛꽃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병들고 죽으면 슬퍼하는데 이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서 죽을 때 까지 착각하여 꽉 붙들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논파하기 위해 늙고 병들어 죽는 것 까지도 없다고 한 것 입니다. 왜냐 자기가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거기에 어떤 것도 걸림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눈에 보이는 부처나 주위사람들은 여러분들이 바쁜 일상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깊이 잠이 들게 되면 우리 상념조차도 움직이지 않게 되어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때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이 의지하고 있던 몸뚱이도 사라지고 여러분들이 ‘내다’라고 했던 내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게 실체야. 그런데 눈만 뜨면 잠시 동안은 멍하니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구지하는 시간이 잠시 있고 바로 ‘내다’하는 마음이 기준이 되어 서게 됩니다. 그것에 의해 또다시 생사의 원인을 계속 만들어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사가 실재하지 않으니 없앨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옛 스님들이 열반하실 때의 임종게 중에 보조스님 같은 경우는 ‘온다, 온다 해도 온 바가 없고 죽는다, 죽는다 해도 죽은 바가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태어난다, 태어난다 해도 태어난 바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무생법인’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태어나고 죽음을 뚜렷이 봅니다. 왜? 몸뚱이를 나로 알고 몸뚱이에 의지해 반연한 마음을 자기로 착각하여 알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공하다고 한 얘기는 이것을 먼저 간파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하고 악하게 사는 것에 관한 것은 반야심경의 지혜를 배우기 전까지 근기를 익히기 위해서 선하게 살고 악을 끊으라고 한 것이지. 지혜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다 해 놓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욕에 물들지 않아야 반야지혜를 통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차분히 얘기하면 인과도 반드시 인과법칙에 의지해서 생활을 해야 반야지혜를 깨칠 수 있고 마음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경계가 없어야 불사의 경지에 도달한다.’

중생의 마음의 병, 우울증, 조울증, 화병, 정신병 등이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큰 병이 마음의 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바로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계가 병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인연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이 세계가 만들어 지고 누리고 있는 고락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낙을 얻고 고를 없애려면 이 두 가지 인연에 대해서 껑충 뛰어넘어야 합니다. 한 생각을 쉬면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끔 거친 생각을 쉰 것을 쉬었다고 생각하여 머리가 빠른 사람이 공부를 좀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현재의식에서의 얘기입니다. 잠재의식에서 더 닦아야 하고 나아가 무의식에서 최초의 무명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러 두 가지 병이 사라집니다.

사실 ‘불사’라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태어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죽습니까? 난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는 경지를 깨달아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난적이 없음을 어떻게 알 수 잇는가? 허공에 비유해보면 옛사람이 본 허공이나 지금 본 허공이나 미래의 사람이 볼 허공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맘의 본성과 비슷하다하여 마음을 공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공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런 것입니다. 따로 마음을 공하다고 하면 틀립니다. 사물에 비유할 때 마음과 유사한 것 중 하나로 금을 이야기 하는데, 어쨌든 삼라만상은 마음이 물질화되었기 때문에 다 마음의 한 습성을 지니고 있고, 허공도 마음이 물질화 된 것이지만, 우리가 금을 귀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썩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보존이 됩니다. 그래서 고금에 걸쳐서 금을 화폐로 쓰는 것입니다. 이 변하지 않음은 마음의 본처이고 금을 녹여서 불상을 만들거나 장신구를 만들면 그것은 작용인데 중생은 이 작업한 형상을 자기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미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면 먼저 본체성을 알아야 된다하여 불가에서 견성하는 법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수행문에서 각자 닦아가는 방법이 틀리기 때문에 어떤 이는 마음부터 닦은 후 경계를 닦고, 다른 이는 경계부터 닦고 나서 마음을 닦는데 이 두 가지가 마음의 병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병은 본성의 병입니다. 이 두 가지 병을 인식하지 못할 땐 끝없는 산하가 펼쳐지고 끝없는 우주가 펼쳐지며 끝없이 중생의 생사가 뒤풀이 됩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일찍이  태어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적이 없는 그 영역이 자기임을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생사에 의해 쓰던 마음이 자기 모르게 문득문득 쉬어집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인과를 알고 착한 행을 해도 좋은 복력의 세계는 만들지언정 생사자체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뿌리요 경계는 티끌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윤회하는 원인은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법문하는 사람마다 다른데 어떤 이는 마음이 부처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을 모든 윤회의 뿌리라 하는데, 하나는 통달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통달하지 못한 중생에게 얘기 할 때 두 가지로써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윤회의 뿌리로써 얘기할 때 마음은 보통 사량 분별하는 6식을 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잠을 깨어 눈을 막 떴을 때 처음에는 육식이 발동하지 않아 내라는 생각도 없고 사물을 분별하는 생각도 없다가 조금 지나면 6근의 기능이 작동을 하면서 육식이 만들어집니다. 그때 만들어 집니다. 여러분이 보는 마음, 듣는 마음 등이 만들어지면 ‘아! 이게 내 마음이구나.’ 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이렇게 6식이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 근본뿌리입니다. 6식을 현대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재의식입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쓰고 있는 마음 하나하나가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경계는 그것이 아무리 귀하고 좋은 것이라도 결국은 마음 뒤엎는 먼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티끌이라 하는 것입니다. 묘령의 아름답고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 생각이 일어나고, 못생기고 추악한 사람이 나타나면 혐오심이 일어나는 것 모두가 경계가 티끌이라서 그런 것 입니다. 기쁘거나 혐오스런 마음이 그 경계가 없을 때는 아까 원숭이가 샘 속에 달을 움켜쥐는 것과 같이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실재하지 않았는데 그 경계를 보면서 미혹함이 일어나고 마음이 미혹하기에 경계를 보면서 또 판단을 하여 이렇게 서로 의지하기에 경계를 티끌이라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마음 거울의 흠이다.’

이것은 수행을 할 때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가 아니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맛보지 않고 하는 유교에서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인데 이것은 작용을 다스리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인의예지가 일어나기 이전 마음자리는 그걸로 깨닫지 못해요. 그것은 오직 인의예지가 일어나기 이전자리에 들어가 봐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다 거울의 흠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첫째 예가 아니면 말을 하면 안 되고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자기감정대로 처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속이 후련하겠지만 이미 예에 벗어낫기 때문에 마음속에 다음 생에 받아야 될 과보가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연을 작용면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입니다.

옛 스님이 말씀하신 구절 중에 ‘마음 성품이 둥글어 인연을 따라 흐르나니’-마음이 아무것도 안하고 오래 앉아있고 고요히 한 것으로 도를 닦는다 했을 때 이것은 이미 귀신 굴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 성품은 둥근 것 입니다. 그래서 머문다고 해도 작용한다 해도 틀리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머무는 것에 집착해서 마음을 파악하려하고 범부들은 흐르는 것, 즉 작용하는 것에 집착해서 마음을 만족시키려하는데 두 가지 다 병입니다. 이것은 묘한 도리입니다. 보살들을 예를 들면 집안에서는 아내고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인데, 어머니는 옳고 아내가 틀리다하면 이것은 여자가 아니고 미친년입니다. 이치를 잘 알아야 됩니다. 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나만 주장하는데 이것이 미친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서 다른 사람을 대하면 반드시 불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만약보살들이 딸 노릇만 하거나 어머니 노릇만하고 아내나 또 다른 역할을 안 하게 되면 불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한곳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성품은 그게 아닙니다. 마음성품은 인연 따라 흐르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정확하게 행동하고 말하고 처리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의 조상 가운데 공부를 엄청 많이 한 스님이 계셨는데 우리 집 삼남매 중에 저에게 그 복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딱 하나가 있는데 저한테는 뭐가 들어오면 평등하게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자손들은 제 것 챙기기에 더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도리입니다. 뭐든지 들어오면 빨리 분배할 수 있는 사람에겐 복이 그만큼 더 많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샘물을 퍼 쓰더라도 물을 계속 더 많이 솟아나는 것과 같이 이것은 우주원리로써 마음 쓰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자기가 마음을 쓴 만큼 공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하나하나가 우리의 본성의 작용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데 그걸 모르고 자기머리로 욕심으로 깜냥으로 뭘 처리를 하려다보니 반드시 다른 사람을 불쾌하거나 불행하게하고 고통스럽게도 만듭니다.

 ‘흐르는 곳마다 성품을 알면’-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한사람이 어머니도 되고 동생도 되고 딸도 되듯이 여러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다해도 근본성품을 알면 이것은 인연 따라 흘렀다가 인연이 다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면 집착하지를 않습니다. 누구를 아끼는데 있어서도 도를 닦는 사람과 범부들 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도 닦는 사람은 깨달음의 기틀을 마련하게 하기 위해 상대방을 꾸짖기도 하고 칭찬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인연에 속아서 한번 미우면 영원히 밉고 한번 좋으면 영원히 좋은 것 같이 합니다. 이게 뭐나면 흐르는 곳마다 성품을 알면 되는데 여러분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기쁨도 슬픔도 없습니다. 왜냐 꿈을 깬 사람 입장에서는 지난밤 꿈속의 내용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허공 꽃과 같이 여러분 눈에 뭔가 세게 부딪혔을 때 불꽃이 번쩍 튀는데 중생은 이 번쩍한 불꽃이 안에서 왔는지 밖에서 왔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지한 병으로 인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불꽃이 바깥에서 왔다고 생각해서 바깥을 없애려고 산도 없애고 강도 없애고 사람도 없애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 성품이 둥글어 인연을 따라 흐르나니 흐르는 곳마다 성품을 알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도다’-이게 ‘역무노사진’에 대한 적절한 표현입니다.

  ‘일어나는 것은 다만 법이 일어나고’- 화두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지에서 10지까지의 보살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 드는 화두인데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하는 것입니다. 이때 만가지법이란 말에 불교용어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은 이게 무슨 뜻인가 해석 하는 데만 몰두하는데 이것은 마치 개에게 던졌을 때 개가 던진 돌을 무는 것과 같이 우둔한 것입니다. 뛰어난 사람은 돌을 던진 사람을 쫓아가 묻겠지요. 그런데 우둔한 사람은 ‘법이 일어나고’ 했을 때 법이 무엇인가에 생각은 몰두하게 됩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했을 때 그 하나가 뭘까 하는데 생각이 갇혀 버립니다. 법이 뭐냐 하면 여러분이 보고 듣고 판단한 내용이 다 법입니다. 그러니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나서 죽을 때까지 대했던 온갖 것들, 여러분 마음의 내용물들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인데 일어나는 것은 여러분들의 생각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기에 일어나는 것은 다만 법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법당에 처음 와서 봤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시원하니까 좋다고 했을 때 여러분이 ‘좋다’라는 법을 건립한 것입니다. 같은 법이라도 싫거나 밉다는 이런 법을 건립할 일은 없잖아요. 이런 것을 건립하게 되면 여러분 마음에 전이가 되어 다음 생에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아이 짜증나!’라고 하게 됩니다. 이게 법의 원리로써 이것은 부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쓰는 대로 그래서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다만 법이 일어나고.’했습니다. 법이 왜 일어날까요? 자기 생각을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생각을 아끼지 않아봐. 무심해져 여러분들이 좋다 싫다하는 것도 상대방보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멸하는 것은 다만 법이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화엄경이나 원효스님 같은 이가 깨닫고 나서는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이라 했는데 마음이 일어나면 만가지법이 따라서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만가지법이 따라서 고요해진다고 했습니다. 수행의 요령이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 닦느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평소에 늘 그 얘기를 해줬는데도 마음을 어떻게 닦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땐 그 사람이 아둔한 근기니까, 우선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주제를 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면 그것이 공부인줄 아는데, 그것은 공부가 아니고 그걸 준 후에 상대방의 흐름을 봐서 눈 깜박할 사이에 상대방의 명맥을 끊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일어나는 것은 다만 법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은 다만 법이 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멸이 다음 생으로 넘어가게 되면 여러분의 생사가 됩니다. 여러분이 일으킨 마음이 다음생의 원인이 되고, 일어났다 사라지게 된 마음의 원인은 다음 생에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장수하려면 생멸의 마음이 끊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은 불사(不死),죽지 않는 법이라 했습니다. 생멸 자체가 없기에 적멸이 되어야 불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생에서는 도달해야 되는데 지금 걷지 않으면 다음 생에는 뛰어도 도달 할 수 없기에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법은 서로 아는 일이 없으며’- 제 스스로 일으킨 법은 자기가 누가 밉거나 좋거나 하는 것을 법끼리 서로 알지를 못해요. 왜냐 허공 꽃이니까. 무단히 일어난 것입니다. 홀연히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법이란 것입니다. 

 ‘생 할 때도 내가 생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왜냐? 원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은사스님이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천일기도를 할 적에 제가 머무르고 있는 절에 격려차 방문 했는데, 마침 정전이 되어 전기불이 꺼져 촛불을 켜놓았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오자 노장께서 상좌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나 보려고 저보고 ‘촛불이 어디로 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이 알고 묻는지 모르고 묻는지 확인하려고 도로 노장께 ‘스님께서는 어디로 갔다고 봅니까?’ 라고 물으니 그 스님께서는 ‘꺼졌다.’라고 했는데 그 스님은 생멸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아는 사람은 상대가 한마디 했을 때 알고 하는 것인지 풍월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스님께서는 꺼진 것만 봤습니다.’라고 했더니 스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못하셨었습니다. 그래서 도를 깨달은 사람은 온몸 자체가 안목입니다. 어떤 것에 부딪혀도 제 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경계를 가져와도 그 경계를 능히 파악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귀신 굴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간화선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법은 서로 아는 일이 없으며, 생 할 때도 내가 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 본래 생멸이 허망한 것이고 여러분들이 보는 산하는 여러분들의 업력이 물질화된 것일 뿐입니다. 업력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바세계를 공계(空界)로 보았습니다. 천상 인간은 사바세계를 유리로 보고, 아귀는 사바세계를 불타는 세계로 보게 되며 인간은 산하대지로 보게 되는 것과 같이 자기 업력만큼 보는 것입니다. 일단 뭔가 본다는 것은 자기 업이 개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업력이 개입되지 않고 볼 수 있다면 ‘뜰 앞에 잣나무’입니다. 여기까지 해서 역무노사진 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입니다. 남방불교에서 이 ‘고집멸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고집멸도’ 까지도 망상으로 쳐버립니다. 우선 고집멸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실 때 외도의 법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근거가 삼법인과 사성제입니다.

 삼법인(三法印)은 진리에 합당한 세 가지 도리이고, 사성제(四聖諦)는 네 가지 성스런 진리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삼법인은 상근기에게 설하는 것인데,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하며 열반이 적정하라는 말만 들어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 사리불이나 목련 존자는 이 삼법인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사리불이 처음 깨달은 인연을 보면 스승을 찾아 성을 돌아다니다가 마승 비구(초전법륜의 5비구 중 한 분)가 걸식을 나왔는데 위의가 걸출하고 얼굴이 청량하게 보여서 따라가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고타마 서가모니 부처님이다’라고 답하고 ‘그 이가 무엇을 가르치느냐?’라는 질문에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멸한다.’라고 답했는데 사리불이 여기서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상근기들이 도를 깨닫는 방법입니다. 그 인연법이 바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입니다. 실제 삼법인 갖고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태어나신지 2500여년 지난 말세에 태어난지라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깨닫게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사성제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처럼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것은 사법(邪法)이고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사람을 가려서 적용한다는 것은 Ego가 들어간 것인데 사성제는 과거, 현재, 미래와 시방의 모든 중생에게 모두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할 때 맨 먼저 고성제를 설하셨습니다. 고성제를 설하신 이유는 우리 인생의 실상을 먼저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위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고통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절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먹고 살만한 사람은 안 와요. 고통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이 삶이 지긋지긋 한 것임을 알아야 도를 닦아요. 부처님이 위대한 점은 왕자였음에도 향락이 고통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향락을 고통으로 느낄 정도로 진정으로 본성에 가까운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향락이라도 지난밤 꿈속일인데 중생은 고통이 없으면 신앙심도 없고, 종교도 안 가지려하고, 도를 닦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도를 닦으려면 원인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실상을 가르쳐준 것이 빠르고 진실한 것이니까 인생은 ‘고’라 한 것이 고성제입니다. 불법은 교리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것입니다. 인생이 왜 고인지 제자들이 물어 본 것입니다. 

 인생은 첫째 ‘생(生)’, 태어났기 때문에 고입니다. 태어남으로 인해 만 가지 짐을 평생 짊어지게 됩니다. 우리 가진 모든 고통의 단초는 생 땜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통틀어 생이 고통이라고 말한 적은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생이 고통인 것은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잘 알 것이고 그런데 지금 즐겁고 행복한 사람은 살만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삶이 자기 복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인연된 사람의 복력까지도 자기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들, 딸, 부모, 형제 등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고입니다. 그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다음으로 진행되는 것이 있지요. 늙는(老)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30,40대 사람들은 잘 몰라. 50살 되어 봐요. 저도 치아사이에 틈이 생기고 오래 서 있으면 엉덩이가 아프고 뻐근해요. 이런 것들이 늙어가는 징조잖아요. 늙음의 고통은 늙어봐야 압니다. 

  그 다음은 병(病)입니다. 작은 병부터 큰 병까지 다 걸립니다. 여러분들은 독감 한번만 걸려도 세상 모든 게 귀찮아지잖아요. 옛날엔 요즘처럼 독한 독감이 없었는데 중생들의 업력이 탁하니까 아주 지독하게 옵니다. 이렇듯 병드는 것도 고통입니다. 만성질환에 걸리기라도 하면 평생 고통 속에 사는 거지요. 스님들은 참선하느라 앉아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관계로 기혈이 안돌아 치질이 자주 걸리게 되는데,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립니다. 각자 이렇게 남모르는 병고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사(死), 죽는 고통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모든 고통의 총집합입니다. 죽는 고통은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게 착하게 마음을 쓴 사람은 죽을 때 기쁘게 죽는다고 하지만 소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 사람들은 정말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예전에 서울의 어느 신도 집에서 개인 법문을 청 받은 적이 있는데, 전 두환 대통령의 의상을 담당했던 보살의 집이었습니다. 큰 학교를 두 개나 갖고 있었고 아파트 넓이가 100평이나 되었으며 자식들이 모두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던 겁니다. 부귀영화를 놓고 죽고 난 뒤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 두려운 것입니다. 자손들이 너무 효성스러운 것도 부모에게는 고통으로 돌아오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거기서 생사법에 대해 법문을 해주고 왔었는데, 우리 생각에는 돈 많고 명예도 있고, 자손들이 효성스러우면 참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겠지만 그때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평생 힘들게 불행하게 산 사람들은 이판사판인데 빨리 몸이나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린 사람은 빨리 죽어 몸을 바꾸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데, 이생에 너무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은 죽으면 다 놓고 가야 되기에 그런 희망이 없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재벌회사 회장들입니다. 남의 피를 가져다 수혈하고 온갖 좋은 것 다 써도 소용없잖아요. 그때의 공포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이 죽는 고통입니다. 스님은 임종이 다가온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전에 재산을 3조나 가진 집안의 보살이 44살에 암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가서 보게 되었는데 대승법을 만나면 편안해 지더라고. 그래서 이 법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생. 노. 병. 사가 인생 4고로써 예외 없이 누구나 적용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지혜를 지녔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더라도 최후에 걸리는 것이 이 4고입니다. 천하 영웅도 진시황도 여기에 다 걸립니다. 따라서 인생은 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진흙탕속의 미꾸라지가 진흙탕 속에 있는 줄 모르는 것과 같이 여러분들은 늘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통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이지요. 웬만한 것은 참고 넘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이게 고통인 줄 압니다. 생노병사 외에 네 가지 고통이 더 있습니다.

 먼저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사람들과 죽어 이별한다거나, 더 넓게 보아 늘 아끼는 물건과 분리될 때 느끼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자동차, 보석 등과 같은 물건뿐만 아니라 우리 기억 속의 추억들과 같은 것들도 아끼는 것입니다.

 다음은 원증회고(怨憎會苦),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되는 고통입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 만나게 되는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차를 부딪쳤을 때 상대방 입장에서는 원증회고 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애별리고가 되기도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걸 안 겪은 사람이 없습니다.

셋째로 구부득고(求不得苦), 내가 구하는 바를 다 얻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왜냐 이미 내가 이 삶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가 지은 업력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업력과 복력이 따로 있는데, 물론 이생에서 복을 지으면 복력이 늘어나긴 하겠지만, 세상에 물질문명이 발달하다보니까 자기가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도 그게 잘 안됩니다. 취직을 하고 싶은데도 맘대로 되지 않고, 예쁘거나 잘난 얼굴을 갖고 싶은데도 안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한 생각 욕탐을 일으키는 순간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인생사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고통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부처님이 되기 전까지는 이 경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가하려는데  라훌라(장애의 뜻을 갖고 있음)가 태어나 출가를 가로막았을 때 가졌던 마음도 출가를 하지 못한데 대한 구부득고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음치성고(五陰熾盛苦), 이것이 핵심입니다. 오음은 오온을 말합니다. 즉 ‘내다’ 하는 마음이 치성하는 고통입니다. 수행은 이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내다하는 이 한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과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수행을 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손해 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한글로 하면 ‘내다하는 마음’이라 해서 쉬운데 한문으로 ‘아상’, ‘인상’ 등으로 쓰거나, 철학적으로 Ego(에고)란 말을 써서 굉장히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한 생각 손해 볼 줄 알면 ‘내다’ 하는 마음이 쉬게 되는데 이것이 오음치성고를 쉬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대승법을 들어 수행에 들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하지 않는 것이 그 순간에는 편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가 해롭다는 소리를 들어도 담배를 끊고 싶지 않는 것도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면 그 맛이 좋고 미움이 편하거든요. 그런데 그 마지막 결과는 폐암이라는 고통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오음치성고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 ‘내다’하는 마음, Ego를 내세워서 남을 이기고, 남이 내 뜻대로 해주는 것이 기분이 좋지만, 담배피우는 사람이 끝내는 폐암에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오음치성고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공할 때 이고득락(離苦得樂)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앞의 인생 4고와 뒤의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치성고의 4개를 합하여 인생 8고라고 부릅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 이 8가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정밀히 들어가면 세 가지 고통이 더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여야만 살아 갈수 있는 고통입니다. 바로 행고(行苦)입니다. 여러분들은 직업을 가져야만 자기의 삶을 살아 갈수 있잖아요. 따라서 일단 태어난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음은 이렇게 평생을 행(行)을 했어도 괴고(壞苦), 필경에는 죽으면 평생에 쌓아놓은 것이 모두 무너져버리게 되는 고통입니다. 스님이 이 절간을 크고 화려하게 짓지 않는 것이 아무리 잘 지어도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달관할 수 있는 단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인줄 알아야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몇 마디 듣고 알았다고 하는 것은 발심이 안 된 잔머리 발심이기에 인정을 안 합니다. 그것은 다 무너지는 것이며 다 무너지는 줄 알기 때문에, 다 무너지기 전에 도를 깨닫기 전까지 다음 생의 복덕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복을 짓는다는 것이 절 불사에 큰 시주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부처님과의 인연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자기가 편하려면 베풀면서도 베푼 만큼 자기 맘이 고요해져야 합니다. 8고 다음에 첫째 행고(行苦), 행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고통입니다.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아침에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회사에 나가면 부딪히기 싫은 사람들과도 만나야 되잖아요. 이것도 누구나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다 무너집니다.

세번째 고고(苦苦), 이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서 처음 우는 소리가 ‘나도 이제 고통의 바다에 떨어졌구나.’하여 고고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11가지의 고통들이 돈 많고 명예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없을까요?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딱 보면 고통입니다. 이러한 인간세상의 실상을 부처님은 이렇게 정의 했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이것이 고통인 줄 알아야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발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심이라고 하지. 남에게 잘 보이려고 우쭐하는 마음은 발심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보여주는 것이고 또 다른 업이 될 따름입니다. 그래서 사성제에서 첫 번째가 고성제입니다. 이 고성제가 얼마나 성스러운 것입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이 고성제에서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집성제(集聖諦), 여기서 더 근본적으로 그러면 우리가 왜 태어났는가, 우리가 고통을 받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집성체로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은 그 원인을 ‘갈애(渴愛)’라 하셨습니다. 갈애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다가 멀리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이는 것을 보고 거기에 물이 있는 것으로 알고 막 달려가 보니 물은 없고 먼지만 일고 있었는데, 이때의 타는 심정이 갈애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사물과 자기에 대한 욕탐이 이 갈애와 같고 이렇게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11가지 고통의 원인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 갈애도 그냥 갈애가 아닌 앞에서 말한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다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과 같은 심정의 갈애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갈고 닦아 뛰어넘어야 될 과제입니다. 이렇게 고와 집까지의 두 가지를 세속제라 하는데 세속의 사람들은 누구나 이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세속제라 하기도하고 유루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 갈애를 없앤 사람은 있는가하고 물었을 때, 그 답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가지신 경계가 멸성제(滅聖諦)입니다. 여기서 ‘멸’은 적멸할 때의 멸, 생멸이 멸하여 적멸이 나타났을 때의 그 멸을  말하는 것으로써, ‘적멸위락(寂滅爲樂)’은 부처님은 적멸로써 낙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Ego를 만족시키는 것으로써 즐거움으로 삼는 것인데 이것은 생멸법이라 하고, 부처님은 즐거움은 그 Ego를 소멸시켰을 때의 고요함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저녁 종송(鐘誦) 중에 문종성번뇌단(聞鐘聲煩惱斷) 이란 구절이 있는데 깊은 산속에 홀로 있어 달이 고요할 때 아주 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도 비유고,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런 상태를 적멸이라 하는데 여러분들이 쓰는 마음, 기쁘고 슬픈 마음은 생멸이라 하는데, 이러한 생멸이 다 멸했을 때의 마음을 적멸이라 하는데 그것을 멸성제라 합니다. 아까 얘기한 고의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이것을 뛰어넘을 경지와 사람이 있는가? 있다. 그것이 열반, 삼법인에서는 열반적정인이고 사성제에서는 멸성제를 가리킵니다. 이 경지를 부처님께서는 니르바나라고 했습니다. 니르바나라고 하는 뜻은 촛불이 딱 꺼져버리면 유지했던 업력이 사라지는데 이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이것을 수행문에서는 적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행하는 사람이 그러한 경지가 있음을 알고 발심을 하게 됩니다. 지고지순한 진리, 멸성제를 얘기를 해줌으로써 발심을 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사바세계의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경지와 벗어난 분이 있으니 우리도 그것을 따라 가고자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가 했을 때 도성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수도(修道)한다 했을 때 그래서 그 道(도)자를 쓰는 것입니다. 부처님당시에는 그것을 8정도라 하여 8가지 바른 수행을 하게 되면 멸성제에 도달한다고 한 것입니다.

8정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첫 번째의 정견(正見)입니다. 올바른 우주 인생관을 갖고서 세계를 보는 것 입니다. 올바른 우주 인생관은 인생이 고임을 알아 거기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도성제는 멸성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론입니다. 요즘에는 그 방법이 화두선, 염불선, 다라니, 진언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도성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멸(滅)성제와 도(道)성제를 합하여 제일의제라 합니다. 모든 것 중 가장 으뜸인 진리라 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 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도를 깨닫고 보니까 고집멸도에 고집멸도가 없다고 했는데 왜일까요? 이미 생사에 관여를 안 하니까 고집이 없고 고집이 없는데 고집을 뛰어넘을 멸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무명이 없으니 사제가 성립될 수 없다.’ 병이 없는 사람에게 병의원인 고통, 병을 낫는 방법과 나았을 때 편안함 등과 같은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잖아요.

 ‘여래를 알고 싶은가?’ 제자가 부처님을 칭할 때 ‘세존’이나 ‘여래’라고 합니다.

 ‘대나무 숲 우거져도 흐르는 물 막힘없고,’-이것은 마음이 무심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유심이면 ‘어! 여기 대나무가 있네. 피해가야 되겠네.’라고 하게 됩니다. 물은 무심이기 때문에 물질 중에 가장 도(道)와 가장 가까운 것이 물로써 비유되는데 네모난 곳에 들어가면 네모나지고 둥근 곳에는 둥글게 만들어지고 뜨거우면 올라가고 차가우면 내려와서 얼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기에 천변만화를 할 수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해도 흰 구름 걸림 없다.’-이렇게 마음을 쓰라는 것인데 참 어렵지요? 그러나 오늘 한걸음이라도 진보를 안 하면 다음 걸음은 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반야의 앎은’- 이건 보통 마음이 공하다하면 허공처럼 인식하는데 허공이란 것도 마음이 물질화된 경계이므로 이것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 반야의 앎은 역력히 보고 듣고 할 수 있잖아요. 

‘그 앎은 스스로 아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 여러분들이 뭔가 해놓고 내가 했다했을 때는 스스로 아는 것으로 되는데 그땐 Ego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일을 했어도 착한일 인줄 모르고 착한 일을 하는 경우도 있거든. 이것이 반야가 하는 착한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쓰는 것, 기독교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과 같은 경지를 말합니다. 보통사람들이 내가 어떤 착한 일을 했고 절을 몇 번했으며 다라니를 몇 독했다고 스님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스님과 뭔 관계가 있어요? 제 공부 스스로 하는 것인데 모두가 탐심에서 한 것일 뿐입니다. 보이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반야의 앎은 스스로 아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앎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물에 대해 알기 때문에 앎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고 그러므로 어리석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이 도리를 모르면 귀신 굴에 떨어지게 됩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도라 하는 것은 깊이깊이 우물 속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옛 스님들이 말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천성적으로 착하게 마음을 쓰는 것이 반야의 본성입니다. 보통은 내가 상대방에게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러잖아요. 이것은 제가 쓴 마음이지 반야가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 업력에 걸려 착한일 한 것은 악한일 보단 좋은 결과가 오겠지만 큰 복은 안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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