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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20강 심무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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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573회 작성일 21-08-09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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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심무가애(心無罣碍)


마음 그 자체는 경계에 대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 같으면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경계를 본 후에 경계가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지 않으면 보통 우리는 즐겁거나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이나 몸에 괴로움, 고통이 없을 때를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이라는 것이 따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경계를 대했을 때 마음이나 몸에 괴로움이 있을 때는 고통스럽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그래 이것은 피하고 저것은 받아들이자.’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물을 판단할 때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고, 이것은 좇아가야 되고, 저것은 추구해야 되며, 저것은 멀리 해야 된다고 하는 이런 분별들은 경계에 의지해서 나옵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고, 이 순간 경계에 부딪혀서 망령되게 마음이 일어났을 때 만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붙들고서 도를 닦는 곳을 색계라고 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서 여기서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니다.’ 마음이라고 해서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는데,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그 자체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아니고 색으로 인해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 색을 경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령 가을 날씨가 좋으면 젊고 건강한 사람은 날씨가 참 좋다고 하지만, 지난밤에 잠을 잘 못잔 사람은 으슬으슬 하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그런 것입니다. 똑같은 경계인데 어떤 사람은 ‘야! 이런 날 소풍가면 좋겠다. 산에 가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야!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서 쌍화탕이나 하나 끓여먹어야 되겠다.’ 이렇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똑같은 경계인데 왜 이렇게 될까요? 이 마음은 본래 없던 마음입니다. 가을이라는 날씨가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하는 정도면 조금 높은  영적 수준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색계천입니다. 색계천은 마음의 고찰이 없이는 절대 닦아나갈 수 없습니다.

수행을 안 한 사람은 이정도 경계를 이해 못합니다. 욕계에서는 선하게 마음을 쓰고 착하게 마음을 쓰는 사람은 복력이 많아서 욕계 6천 천상까지도 태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욕심에 의지해서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베푼 마음이고, 색계천 부터는 지혜가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지혜가 따라 들어가 ‘아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결국은 내 욕구에 맞춘 거구나.’하는 생각을 깨칠 수가 있어야 색계에 사는 것이고 여기서 얘기했듯이 ‘마음 그 자체가 마음이 아니고 색으로 인한 마음이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계로 인해서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경계로 인해서 기뻐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이 기쁨과 화를 내는 것은 이 경계가 없으면 없는 거구나.’ 이 정도는 알아야 색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불법을 수행하지 않는 이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갈수가 없는 천상계입니다. 

  ‘색은 그 자체로써 색이 아니라 마음으로 인해서 색이 된다.’

 바깥 경계를 대했을 때 ‘아! 오늘은 좋은날.’이라고 했을 때 날씨는 스스로 좋거나 싫다고 한 적이 없고 내가 정의 내린 것이며, 또 감기가 들고 몸살이 난 사람이 ‘아! 오늘은 쌀쌀한 날이구나.’ 라고 했을 때도 그것은 마음이 정의내린 것입니다. 

  ‘마음과 색의 모든 색이 없으면 이것이 무색계이다.’ 여기서 색이라는 것은 그려 넣은 것을 얘기하는데 그려 넣은 것이 없으면 이것이 무색계인 것입니다. 아까는 색에 의해서 경계에 의해서 마음이 일어났는데 이젠 경계에 의해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고 담연(淡然)하게 맑은 거울처럼 있는 대로 비출 수 있는 세계, 이것이 무색계입니다.

  ‘이 무색계가 되어야 비로소 병이 없으면 약도 오히려 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무색계 까지도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근본무명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은 이것을 얘기합니다.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상태에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서 ‘아! 내가 어리석구나.’하고 아는 깨친 마음이 지혜인데 본래자리에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가을 하늘은 원래 푸른데 구름이 끼었다가 구름을 벗기고 나면  가을 하늘이 드러납니다. 그때 ‘아 가을하늘이 원래 이렇게 푸르구나.’ 이렇게 아는 마음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이제 이런 것을 알았다거나 얻었다고 하는 ‘얻음’이 생기는데 가을하늘 자체는 그 사람이 그런 얘길 하든 말든 언제나 푸르렀습니다. 그때 그 자리 입장에서 보면 얻음도 없고 지혜도 없기에 ‘무지역무득’인 것입니다. 

  다음은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얻은 바가 없는 이렇게 철저하게 마음의 바탕을 사무쳐 깊이깊이 알게 되어버리니 어떠한 사람도 이런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내다.’ 하는 한 생각에 의지하는 마음이 허공에 뜬 구름과 같고 오색구름이나 먹구름과 같다고 하면, 이런 것을 철저하게 없는 상태 ‘하늘은 늘 푸르기에 여름에 아무리 장마가 져도 저 창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그러한 상태가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로써, 얻은 바가 없는 연고로 본래 생멸이 없음이니 얻고 잃음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 49재를 할 때 염불 내용 중에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산다는 것은 한 조각구름이 허공에 일어난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구름이 바람이 훅 불어서 흩어져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우리가 태어났다 죽는다는 것은 자기 망상에 홀연히 일어나면 태어나는 것의 원인이 되고 자기 망상이 흩어져 없어지면 인연이 다하여 사라지면 죽는 것이 되는데 허공은 망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지 않든지, 구름이 일든 일지 않든지, 허공 자체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부운자체철저공(浮雲自體徹底空) ’이라 하여, 태어났다, 죽었다, 온다, 간다, 이런 것들이 다 뜬 구름과 같은 것들인데 철저하게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서 내가 부처가 됐다든가 아니면 중생이 되어 부처 성품을 잃었다는 것조차도 지난밤의 꿈속에서 잠꼬대를 하는 얘기입니다. 중생이 생멸(생사)에 뛰어든 것은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이걸 알라는 것이다. 생사에 뛰어든 것은 지혜의 부족, 자기 마음의 본성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치면 푸른 허공을 인식을 안 하고 허공에 떠있는 몇 조각구름을 보고서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려는 그 무명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생멸에 뛰어든 것은 지혜가 부족하여 공의 이치를 모르고,’ 여기서 공은 허공이 공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가 일으키는 생사심이 공이라는 것이다. 

  ‘공의 이치를 모르고 가슴속에 쳐 넣은 알음알이로써 본심을 가리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어떠한 것에도 물들지 않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마음 바탕에 생각이 하나 일어나면 그것이 내가 일으킨 생각이고, 그 생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많은 선악업을 일으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가?’ 부처가 무엇인가를 얘기 하는 것입니다. 

  ‘생각 생각에서 벗어나서 삼계를 만들지 말라.’ 아까 삼계를 얘기 했는데 욕계, 색계, 무색계 그것은 우리가 생각 생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불법의 견지가 없는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각 생각의 업을 짓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원죄라는 것도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맞을 것입니다. 마음의 본바탕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떠한 기발한 생각을 하고 기발한 행동을 해도 그게 다 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각 생각에서 벗어나서 삼계를 만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부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부처가 뭘까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배운 깜냥으로 ‘마음이다’, ‘본성이다.’ 이렇게 애기할 것인데 그것은 들은 대로 지식으로 얘기한 것일 뿐입니다. 옛날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한테 어떤 스님이 와서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부처가 무어냐고 물으면 들은 깜냥으로 ‘마음이다.’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운문문언 선사는 ‘마른 똥 막대기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마른 똥 막대기다.’하는 이 소식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참구(參究)를 해서 이야기하면 이이가 진짜 부처를 바로 드러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특수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 것을 진여(眞如)라 부른다.’ 마음이 특수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입맛대로 다른 것을 가져다 보고 듣는 것이 특수한 형태인데 팔만사천가지 특수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진여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 없음이 법성(法性)이다.’ 변화라는 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인데 생멸이 끊어졌기 때문에 생멸이 끊어진 자리는 어떠한 것도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고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저 창공을 보게 되면 봄부터 겨울까지 늘 그대로인데 다만 우리 중생의 업력이 봄에는 아지랑이를 일으키고, 여름에는 비를 오게 하며, 가을에는 단풍을 물들게 하고, 겨울에는 눈을 쏟아 붓지만 허공은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법의 성품이라 합니다. 하나는 체(體)와 상(相)을 얘기한 것이고 하나는 작용(作用)을 얘기한 것입니다.

  ‘마음이 어떠한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해탈이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어떠한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인데 여기서 어떤 것은 뭘까? 크게는 있고 없음이고, 인간 세상에서는 선악이고 또 감정적으로는 좋고 싫음 등과 같은 것들로, 이러한 것들에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음을 전통 수행자들도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무심 하라는 것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관심을 갖되 그것을 집착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마음 그 자체가 무애 자재(無碍 自在)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마음이 걸림이 없이 자재하려면 첫 번째 탐·진·치가 마음에 없어야 됩니다. 예전에 개운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큰 스님을 시봉한 적이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정치승들은 서로 모함을 하곤 했는데 상대방이 모함을 하여 갑자기 검찰청에서 영장을 들고 와서 절을 수색하다가 금고를 열라고 하기에 그때는 제가 햇중이라 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지은 것이 없으니 큰소리로 ‘당신이 뭔데 열라고 하느냐?’고 맞섰는데, 막상 그 자리에 있던 큰 스님은 그 얘길 듣고 떨면서 열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법당에 가서 고승이라는 스님이 왜 벌벌 떨까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살아온 자체가 탐·진·치였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일이 이미 그 인과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수사하는 사람이 열어달라고 하면 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에 안 걸립니다. 무슨 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떳떳한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검찰이 아니라 검찰 할애비가 와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느낀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것이 자재라는 것입니다. 보통 도를 깨달아 자재한다는 것은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 말을 해서 누굴 이기고 이런 허성심(虛聲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에 탐·진·치가 없어야 자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 그 자체가 무애자재 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탐·진·치가 없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한다.’ 여기서 마음이 고요하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마음이 고요해야 된다.’라는 명제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천의 어느 비구니 스님이 우리 도반 스님이랑 초청을 해서 같이 초청을 받아 갔는데, 그 스님이 30년 선객으로서 공부하는 스님이시니 우리가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것을 물어보고 했는데, 그 당시 강 청화 스님이라는 큰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에게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여 그래서 그 스님 언구가 어떠하더냐고 물었더니 그 도반스님이 ‘선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강 청화 스님께서 ‘선이란 고요함과 안상함이다.’ 라고 얘길 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못된 기질이 있어서 그 얘길 탁 듣고는 ‘아! 이 스님 강사스님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내 견해였는데 그때 도반스님이 제 허리를 쿡 찔렀습니다. 대선사 스님이셨고 상대방이 존경하는 스님에 대하여 말을 듣자마자 강사스님이라 했으니까요. 그게 왜 그랬는지 잘 알아야 됩니다. 선이란 것이 고요함과 안상함이라는 얘기가 강사스님이 쓰는 언구인데 이게 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이 열반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아까 그 강사 스님처럼 마음은 고요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잘못 가르치게 됩니다. 고요함은 움직임의 상대적인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된다는 것은 이미 생사심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럴 수도 없고, 항상 그대로 일 수도 없는데 한가지로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를 닦거나 수행하는 사람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무얼 듣고 알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공부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원래 큰 스님은 상대방, 물어온 사람이 초학자이니까 처음부터 마음을 어디다 묶어두기 위해 그 얘길 한 것이지만 선적인 언구에서는 맞는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기 촛불이 지금 타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 현상계이고 윤회의 세계이며, 촛불이 꺼진 상태를 열반, 니르바나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얘기하신 니르바나는 고요함을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촛불이 탈수 있는 조건이 있죠? 바로 연기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촛불은 산소와 기름이 있어야 되고 불씨가 있어야 되는데 이 세 가지 인연이 흩어지면 촛불은 사라집니다. 그러한 상태, 즉 업의 인연이 다한 상태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업의 인연을 다 하려면 먼저 마음이 고요해져야 하니까 ‘고요한 것이 열반이다.’ 이렇게 얘기한 것일 뿐입니다. 고요한 걸로 치면 산천초목처럼 고요한 것이 없습니다. 선가에서는 이러한 걸로 상대방에게 공부를 좀 깨쳤다하면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촛불을 꺼놓고는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은 그 어디로 갔느냐의 ‘어디’에 다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실제 수행을 하게 되면 무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여러분들은 수행을 안했기 때문에 스님처럼 화평하고 자비로운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얻은 바가 없는 연고로 무애자재하고, 법성이고, 해탈이고, 열반이라고 얘길 하는 것입니다. 

   ‘보리살타(菩提薩埵)’, 우리가 ‘보살님!’할 때 그 보살의 본래언어가 보리살타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이란 뜻으로 ‘각유정(覺有情)’입니다. 각유정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깨달은 중생이라는 의미로써 이것은 돈오(頓悟)하고서 점수(漸修)하는 사람을 보리살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법신보살들을 칭할 때는 깨달은 유정이라 하지 않고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한 보살들을 각유정이라고 또 그렇게 얘기 합니다. 보리살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한역을 하면 ‘중생을 깨닫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보리살타에 대한 주관은 보리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내세요.’ 라고 아마 절 도깨비들은 어디를 가든지 다 한마디씩 이렇게 얘기하지 싶은데 그것은 보리심의 내용을 모르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보통 ‘보리심을 내라.’는 것을 부처님을 믿는 걸로 얘기를 하는데 그건 부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내라는 것은 ‘나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지, 절에 가서 몇 천 배하는 것을 보리심을 내는 것으로 아는데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리심 할 때 보리의 내용은 주관인 내가 공하면 보리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려면 참으로 미세하고 미세하게 마음이 청정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이해도 안가거니와 그러기도 싫을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좋은 나인데, 평생을 내가 가꾸고 먹이고 입혔는데, 이것을 어떻게 공하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끼고 살핀 이 나라는 느낌이 잠 한번 들면 사라지는 참 허망한 것입니다. 평생을 먹이고, 재우고, 향수 바르고, 목욕하고, 맛있는 것 먹이고 했는데 잠 한번 탁 들면 이것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붙들고 나라고 그러거든요. 그걸 알고서 ‘주관인 내가 공하면 보리다.’라고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닌 것을 알겠죠? 부처님법이 현실적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내가 공한 것을 확실히 인지해서 절대로 나라는 것에 속지 않으면 보리, 깨달음입니다. 객관인 경계가 공하면 ‘살타!’ 여기서 경계가 공하다는 것은 법공자리를 얘기하는데, 여기서 살타라고 얘기하는 것은 대승보살은 중생을 제도할 때 나없음으로 중생을 제도하며, 이런 사람은 중생을 제도할 때  중생이 있음을 보지 않습니다. 즉 객관세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타’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내가 공한 것은 보리니까 지혜이고, 중생이 공한 것을 보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이것이 각유정의 본래 뜻입니다. 깨달았는데도 정(情)이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자비로운 정이 있는데 이것이 대승보살이 가지고 있는 보살심입니다. 보리살타는 그런 의미를 얘기한 것입니다. 아직도 제도해야할 중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흠이 있으니 여기서 무어라 하느냐 하면 주객이 함께 공하면 ‘묘각(妙覺)’이라 합니다. 묘각은 미륵보살이나 부처님 전생의 선혜보살 그 상태가 묘각보살입니다. 마지막 기침 한번 하면 부처가 되는 자리, 주관도 공하고 객관도 공해서 재채기하면서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에서 마음이 드러난 자리가 묘각보살입니다.

  ‘일체 존재는 내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수 양희은의 노래에서 ‘저 산은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한다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저 하늘이 나한테 그렇게 말한 적 없고 다만 내가 저 산을 보고 ‘아 저 산이 내게 이렇게 얘길 하는 구나’ 이렇게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하고, 우리가 평생 그렇게 마음을 씁니다. 사물을 보고 ‘아, 저 사물이 나한테 어떻게 했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내가 치악산 상원사에서 100일 기도한 적이 있는데 어떤 공부를 많이 한 노스님이 오셔서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하기에 무슨 신기한 것을 보여주나 하고 따라갔더니 상원사 옆쪽에 관세음보살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툭 튀어나와 있는데 ‘저기 관세음보살이 항상 지켜본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는 스스로  관세음보살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세음보살에게 홀려서 자기 욕구에 맞으니까 그 바위보고 ‘관세음보살이 도량을 지켜준다.’이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신도들은 그곳에 가서 합장하고 좋아하는데 나는 일부러 그 바위에 올라가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들이 사물에 대해서 어떻게 미혹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남편에게 ‘저거 봐 저거 뭐처럼 생겼어’ 이렇게 한 적 있을 건데 그건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본 것일 뿐입니다. 자기의 욕구대로 봐놓고 남편에게 그렇게 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것이 있는 한 마음 바탕을 알 수도 없고 자기 마음이 지은 업에 옥죄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올바른 안목을 지니고서 삶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보면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라는 것이 누가 너는 괴롭다, 너는 즐겁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이 들었을 때에는 아무리 괴롭거나 즐거운 일이라도 사라져버리기에 공부를 좋아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것만 비춰 봐도 한 생각 푹 쉽니다. 가을 하늘에 청풍!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뜻으로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했는데 그 마음 상태를 딱 가지고 있으면 정말 편안합니다.

  ‘일체 존재는 스스로 존재 한다고 말하지 않고,’ 요즈음 불교TV나 방송에서 어느 스님이 바닷가 어딘가에 관세음보살이 누워있다는 둥 이런 헛소리를 하고, 그 스님이 법문하는걸 보면 자기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불교의 세계관에서 무색계 4천의 네 번째. 일체 번뇌에서 벗어났으나 아주 맑고 미세한 정신작용만 남아 있다.)에 들었다는데 완전히 헛소리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다 그려 넣는 것일 뿐입니다. 그 스님의 이러한 상태가 비상비비상처정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수많은 남녀들을 속여서 어리석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지옥에 떨어뜨리는 일이기에 안목이 밝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에 대해서 미혹된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이 미혹된 것을 먼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렇게 살면 너무 재미없다고 그러더군요.

  ‘공은 스스로 공이라고 말하지 않고 색도 스스로 색이라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는 있는 것에 집착한 견해를 깨뜨려주기 위해 얘기한 것이고, 이것은 앞의 것이 다 쓸데  없고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되면 그 다음 조금 지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 붙드는 것이 ‘아!  공하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허공은 자기가 공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 입맛으로 ‘아 형상이 없으니 저것은 공한 것이구나.’ 이렇게 얘길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은 스스로 공이라 말하지 않고 색도 스스로 색이라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이 참 좋은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읽고 수행을 하게 되면 마음이 미혹되지 않습니다. 이 두 구절을 모르고 마음을 수행한다고 하면 조금만 초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면 착 달라붙습니다. 근래에 많은 명상 수행법들을 보면 다 이런 것들을 펼쳐놓고서 도라고 하고,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뭐 어떻다고 얘기를 하는데 이게 다 망념입니다. 깊이 잠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그 옥황상제가 어디 있는가를 얘기할 수 있으면 그건 맞는 얘긴데 누가 얘길 할 수 있습니까?

  ‘좋고 나쁨도 사람을 얽매이는 일이 없다.’ 이런 것을 우리가 왜 알아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대상에 대하여 좋거나 나쁘다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자기가 그렇게 정의 내려놓고 자기가 얽매여 버려 자기식의 업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얽매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청송에서 어느 보살님이 법명을 지어 달래서 지어주었는데 거기에 사람이 자기가 만든 마음에 자기가 갇혀서 사니까 이것을 벗어나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써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사는 것이 여러분을 만족시키기도 하고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인과적으로는 그 원인이 전생에 자기가 마음을 그렇게 썼기 때문에 그렇고, 지혜 측면에서는 자기가 지금 이런 상태가 괴롭다고 자기가 정의 내리고 괴롭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이것 또한 망상이구나.’하고 쉬는 것이 공부입니다. 이것을 일념단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큰 불덩이 같아서 어떠한 생각도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이 도 닦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상생활에서 해야 됩니다. 얼마나 많이 달라붙겠습니까? 그런데 마른 화광(火光)이 충천한 불덩어리라 생각하고 고락이 왔을 때 이 불덩어리에 달라붙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것도 자기씩 깜냥, 생각대로 경계에 의해 일어난 생각, 스쳐 지나가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이런 것을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이렇게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금강경 읽다가 도를 깨친 사람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렇게 가르쳐 주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좀 깨달았나요?

  ‘일체 법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한 생각 망상으로 좌우되는 것이다.’ 멋진 얘기입니다. 그렇죠? 일체법이 스스로 내가 뭐 어떻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자기 생각에 의지해서 자기 깜냥만큼 자기 그릇만큼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대상이 원래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깨달으면 사람도 그대로 해방되고 각각의 존재는 모두 소멸하면서 그곳이 그대로 도량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도 닦을 때 어떻게 닦을지 요령을 얘기한 것입니다. 대상이라는 것은 내가 필요할 때 갖다 쓰면 되는 것이지 대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는 대상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대상에 의해서 마음이 더럽혀지게 됩니다. 

  ‘마음과 대상이 원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내가 욕구를 갖고 보면 바위가 관세음으로 보이고 푸른 하늘이 쌀쌀맞은 가을 날씨로 보이게 됩니다. 대상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심한 상태에서 대상을 볼 때와 자기가 대상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대상과의 그 차이를 여러분이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누가 사랑스러울 때와 전혀 그 사람이 밉거나 사랑스럽지 않을 때가 있는데 왜 차이가 있을까요? 거기에는 자기의 욕구를 기반으로 한 분별이 존재합니다. 다른 얘기로 하면 새로 온 보살에게 심등명이란 법명을 지어줬는데 이 보살이 이 법명을 받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심등명 보살이 어떻다고 얘기를 해도 아무렇지 않다가 법명을 딱 받고 난 후에는 누가 심등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촉각이 곤두서게 됩니다. 그 촉각이 곤두서는 마음은 심등명이라는 법명을 자기라고 전제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심등명은 그 보살 것도 아니고 천지 것도 아니고 그냥 관념이고 개념이고 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이 자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문자를 세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첫 번째가 이름입니다. 

  ‘사람도 그대로 해방되고 각각의 존재는 모두 소멸하면서 그곳이 그대로 도량이 된다. 대상이 자기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 멋대로 지어낸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옳다거나 그르다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이 부처님의 지혜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전에 얘기한 이러한 경지가 사실은 여러분이 말 한마디 듣고 수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경지입니다. 법을 설명하려니 이렇게 설명한 것이고 이 경지를 체득하는 데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공을 삼단계로 다시 나눈 것입니다. 첫째는 인공(人空)입니다. 사람이 공하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나다’라고 하는 그 마음은 어떤 상태에서 나오는가 하면 업력에 의해서 조립된 마음에서입니다. 이 업력이라는 것도 전생에 자기가 자기 본성에 대해 무지했을 때 자기의 ‘나다’하는 마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썼던 마음들이 업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업력의 마음으로는 절대로 마음의 본성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면 ‘나다’라는 한마음이므로 그것이 비어져야 되므로 ‘아공’이라고 합니다. ‘인공’,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현상은 인식과 사유로써 인식주체의 관념으로 착색된 것,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미망에 의한 망념의 집착이 취하고 버리고 분별하여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내다하는 마음은 자기망상에 의해서 이것이 나다하고 정의 내리는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잠 한번만 깊이 들어도 현재의식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음 ‘법공(法空)’으로 객관세계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내가 없음을 아는 단계에서 아라한과를 얻고 아라한과에서 더 깊이 수행하게 되면 이 세계가 실재 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에 대해 세계연기를 깨닫게 됩니다. 이 세계라는 것이 내가 섰던 마음이 물질화되어 연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면 그것이 법공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유식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합니다.  서로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것,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에 의해서 있다는 것이 법공입니다. 

  그 다음이 이러한 아공, 법공을 완전히 그 정체를 간파했을 때 어떠한 생의 원인이나 사의 원인, 업의 원인을 만들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마음이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의 미혹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의 공성입니다. 비유를 해보면 새끼줄을 뱀으로 보고 놀라는 마음, 이것은 아공단계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미혹한 마음은 새끼줄을 밤에 보면 하얗고 긴 것이 밤에 보면 두려움으로 인해 뱀으로 착각하는 마음이 ‘아(我)’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다하는 마음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다 불을 딱 밝혀보면 뱀이 아니고 새끼줄임을 알게 되는데 그게 ‘법(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새끼줄은 볏짚이 얽혀서 된 것으로써 그 볏짚상태, 최초의 원 진리 상태를 깨닫는 것이 원성실성의 상태입니다, 마음을 깨닫는 데는 크게는 이 삼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의 반야바라밀다고(依 般若波羅蜜多 故),  앞에서 얘기한 현미하고 현미한 마음의 깊이를 깨닫고 나서 그것에 의지한 연고로 이러한 뜻입니다. 

  ‘존재의 본성에 의지한 지혜, 반야지혜라는 것은 존재의 본성을 깨달은 지혜이다. 존재의 본성은 중생의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 본성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래 마음을 깨달으려면 내가 일으킨 탐, 진, 치가 사라져야 되고, 탐, 진, 치가 사라지면 원래 있던 마음이 드러납니다. 하늘에 오색구름이나 먹구름이 덮여 있을 때는 하늘이 없다고  하지만 태풍이 불어 그 구름이 싹 쓸려가고 나면 비로소 하늘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생의 마음이 없는 것이 존재의 본성이라 했고, 이 본성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그릇된 나가 어디서 일어나는지 살펴보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처음에 수행주체가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 ‘나다’라는 느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그 나라는 느낌을 쫓아 안으로 반조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행이 되는데  특별히 스님이 오늘 수행의 방법을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가식 수행은 아니고 인도의 유명한 성자였던 ‘라마나 마하리쉬(1879~1950)’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나 없음을 닦는 수행방법을 논한 것인데 그 내용이 좋아서 여기에 적어 놓았으니까 오늘부터 수행하는 방법을 찾아 들어갈 사람은 이것을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그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음으로써 그대는 모든 생각의 뿌리인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대의 내면으로 집중하게 된다.’ 여러분도 ‘나는 누구인가?’ 하고 한번 해보십시오. 마음으로 자기가 나라는 느낌에 대해서 마음을 질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느낌에 대해 질문할 줄 몰랐을 때는 마음이 바깥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탐구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보면 정의를 내립니다. 저건 좋은 것, 저건 싫은 것, 쟤는 밉고, 누구는 아름답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그놈이 누군가 알기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게 되면 만 가지 념이 하나로 딱 집약이 됩니다. 최초의 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난 다음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데 만 가지 생각은 나를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이 생각이 누구에 의해서 일어나는지 자문해보라.’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온갖 사람과 일들이 생각나는데 그 생각 자체는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생각을 해야 되겠지만 수행을 할 때는 번거롭고 장애가 됩니다. 그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의 뿌리가 있을 것이니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지 그 뿌리를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광반조(回光返照), 마음으로 돌이켜 비추어 보라는 것입니다. 내면으로 그렇게 비춰볼 때 바깥경계는 보이질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 이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서 일어났는가 물어야 한다.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렇죠? 처음에 할 때는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보라.‘ 이걸 화두선으로 치면 ‘이 뭐꼬?’라고 하는데 ‘이 뭐꼬?’는 중국식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착각을 많이 일으킵니다. 나라는 걸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래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로 갈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병폐에 떨어져 버리는데 여기서는 아예 나라는 느낌 그 자체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계속해서 질문하면 마음은 점점 근원으로 사라진다. 이때 현상적인 ego의 존재는 초월된다.’ 그래서 여기서 마음이 뭔가를 가르쳐줍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마음은 생각의 다발인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내 마음은 내생각일 뿐입니다. 그 생각이 본체를 가리고 있는데 ‘나는 누구인가?’하고 내면을 비춰서 끊임없이 의문을 일으키게 되면 생각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이것을 근원으로 찾아든다고 얘기합니다. 이 수행방법이 제일 간단한 것입니다. 병폐가 없거든. 최초의 무명인 나와 상대하는 것이니까 병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식 원죄라는 것은 ‘내다.’라는 한 생각이거든. 

  ‘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라는 느낌은 다 있죠? 모르겠다는 말은 여기에 통용이 되지 않습니다. 꿈틀거리는 미물도 나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느낌, 이것이 어디서 일어나는가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집중하는 상태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 에고(ego)의 최초의 원인체이다. 이 원인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하면 입으로만 하는데 그것은 염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춰서 이렇게 보게 되면 그것은 염송이 아니고 수행이고 현전일념이며, 도를 닦는 것이 됩니다. 

  ‘이 에고의 최초 원인체인 나라는 느낌,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으로 느껴진다. 육체와 마음의 모든 행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할 수가 있겠죠?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고 몰두함으로써 그러한 느낌을 없애는 나를 이용하여 나를 죽이는 수행인 것이다.’ 여기서 죽인다고 하기보다는 사라지게 하는 것인데, 업력으로는 여러분이 잠 한 번 깊이 들어도 사라지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업력에 의해서 그런 것이고 수행력으로는 자기가 비추어서 그 나라는 것이 힘을 못 쓰도록 약화되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은 하나의 지각 행위가 되지만 실행이 익숙해지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나라는 느낌이 된다.’여러분들이 나라는 느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비춰보면 계속 사라져버리는데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그만큼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하다보면 현전일념이 되어 나라는 느낌이 뚜렷해집니다. 그것을 선가에서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하고, 화두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느낌과 다른 대상, 또한 생각과 연결이 끊어질 때 그것은 사라진다.’ 여기서 수행이 더 깊어지면 이 느낌 자체가 순간적으로 딱 사라지면서 마음이 무심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보조 지눌스님(고려 1158~1210)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누가 나에게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계속 있으면 좋겠지만 잠깐 나왔다가는 또 다시 업력이 뒤덮이니 또 나라는 느낌이 툭 튀어나옵니다. 

  ‘이때 개체성이 잠시 정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이 처음엔 가끔 나타나다가 점점 자주 나타나고 결국은 나라는 상태를 일으키는 경향은 점점 사라지고 그것들의 힘이 어느 정도까지 약해지면 존재의 본성이 힘이 남아있는 찌꺼기를 완전히 씻어내서 나라는 의식 자체가 사라진다.’ 이 상태를 불교에서는 ‘멸진정(滅盡定)에 든다고 합니다. 나라는 느낌이 완전히 멸진해서 사라졌을 때의 마음상태가 멸진정입니다. 여러분들이 늘 이것을 하게 되면 어떠한 염불이나 화두를 드는 것 보다 직접적으로 여러 마음의 에고성을 제거할 수 있고 탐. 진. 치를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 수행 방법은 억압적으로 마음을 조절하는 것보다도 우수하다.’ 이 생각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또 노여워하거나 기뻐할 때,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노여워하거나 기뻐하는걸 알아서 그것을 조절을 하는데 사실은 그건 억압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자기가 다른 쪽으로 돌리는데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날 때 염불하면서 염불로 돌리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마음을 돌리는 것뿐이지 없애고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이 났을 때 다시 분노가 일어나고 다시 기쁨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그러한 생각을 이용해서 닦는 것으로써, 기쁨이나 생각이 일어날 때 이 기쁨이나 생각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자기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다’라는 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내다’라는 한 생각이 없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기쁨이나 슬픔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죠? 여러분이 아무리 큰 기쁨과 슬픔이 있어도 잠만  들어도 사라집니다. 얼마 전 유명한 연예인 최 진실이 자살을 했다는데 불법을 알아서 이 방법으로 수행을 했었더라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한 사람의 업은 다음 생에 참으로 행복하고 유복해서 더 살고 싶을 때 목숨이 사라지는 과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인과가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행 방법은 억압적으로 마음을 조절하는 것보다 뛰어납니다.

  ‘대상의 집중도 생각의 억압도 아니다.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춰서 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스쳐지나가는구나.’함으로써 마음이 거기에 무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도를 먼저 깨달아야하는가 하면 깨달은 사람은 이치를 알기에 어떤 상태가 왔을 때 일시적으로 속지만 그 상태에 영원히 속지는 않습니다. 자기 한 생각 돌이키면 그대로 미음이 쉽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누가 뭘 잘못해서 막 화를 내지만 화내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일반 사람은 두고 보자 이렇게 하지요. 대상의 집중도 생각의 억압도 아닌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것이 편한 사람도 있고 안 편한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이 방법이 굉장히 편하겠지만,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것도 귀찮고, 내 스스로가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싫습니다. 그것은 업력이 덕지덕지 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초기엔 여러 가지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자기로 주의를 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님들이 선방에 들어가고, 도반들끼리 몰려다니면서 공부 얘기를 하고 하는데서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의 이유에 대해 명확히 모르면 해태해지는데, 그렇게 하면 다음 수행을 여러분들이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도 여러분들이 지금 미리 해 두는 게 좋은데, 지금 사는 것이 그냥 편하기 때문에 안한다는 얘기입니다. 영리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봐도 마구 달리는데 어리석은 말은 채찍이 맞아 등에 피가 터져야 달려서 그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도를 닦게 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의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단 나라는 느낌에 대한 주지가 확립되면 이것이 성성적적이 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노력은 방해가 된다.’ 더 이상의 노력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의도가 들어가고 욕구가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동안 무슨 일을 하든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설거지를 하든, 밥을 먹든, 무엇을 하든 나라는 느낌에 집중을 하게 되면 자기가 썼던 마음이 환히 보입니다. ‘아, 내가 옛날에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얘기 했구나.’ 하는 것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갖고 말을 하는지 말하는 의도도 다 보이게 됩니다. 

  ‘일하는 시간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하는 시간에도 놓지를 않으려면 매일 한두 시간만 집중할 수 있다면 일하는 시간에도 계속할 수 있다.’ 아침에 한 시간 정도 하면 아침에 공부한 힘이 있으니까 낮에 유지가 되고, 저녁에 또 수행을 하게 되면 밤에 잠재의식 중에 또 수행이 됩니다. 한두 시간만이라도 올바르게 집중을 하게 되면 그 집중할 때의 의식 상태가 일하는 동안에도 유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옛 스님이 ‘깨어진 거울은 다시 비춰볼 수 없고 떨어진 꽃잎은 거듭 피기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거울이 맑고 맑은 것인데 다 깨뜨린 상태여서 그런 상태에서는 비춰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떨어진 꽃잎은 거듭 피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아서 미리미리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심무가애(心無罣碍), 마음에 걸림이 없는 연고로 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이 주객이공하고 마음의 근원이 확 드러나 나라는 생각이 완전히 소멸되면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사라지니 무엇이 걸릴 것인가?’ 죽은 사람은 마음이 사라진 상태로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불변합니다. 부동지심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터득이 됩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허공 같은 법을 보여주니 허공을 깨달으면 옳고 그름도 모두 없으리.’ 마음에 탐·진·치가 없고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마음이 탁 트인 허공과 같아서 어떠한 것이라도 용납이 됩니다.

   ‘유가 없는데 어떻게 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가 있기에 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이나 일반 사람들이 빠지는 개념이 이 공의 도리를 이해 못하는 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상대적으로 공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병폐를 끊기 위해서 유가 없는데 어떻게 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으며, 무가 있기에 유가 있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인데 부처님이 연기법을 얘기 했다고 했잖아요.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불법이 아니고 세간법인 것입니다. 

   ‘무가 있기에 유가 있는 것이다. 무가 없는데 어떻게 유라고 할 만 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학적인데 여러분들이 우리가 사물에 매하는 태도가 지적으로 사물에 얽혀드는 있고 없음, 이런 판단 분별에 의해서 그런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인데 약간 이해가 곤란할 것입니다. 수행을 하는 법을 잘 알아야 도를 닦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이 반야심경을 배우는 것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되고, 공부를 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이런 확신을 심는 것인데, 이것 자체가 사실은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을 듣고서 실제로 앞에서 얘기한 나라는 그 느낌이 사라질 수 있도록 깊이깊이 수행해서 깨달아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서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끝나게 되면 지식이 되는 것이고, 여러분이 실제로 집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 만이라도 앉아서 일상생활에서도 늘 자기를 회광반조하는 공력을 일으키게 되면 그때부터 법력이 생기고 업력을 이기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청송에 사는 한 보살님이 새로 법명을 지어달라고 했는데 이 보살님은 스님이 청송에 10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법문 들으러 오지 않다가 떠나기 석 달 전에야 와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참 재수가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법회를 하니까 청송에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법명을 마음의 등불을 밝히라고 심명등(心明燈)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마음의 등불을 밝혀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글을 하나 지었는데 이것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주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근원을 알 수가 없다지만 모두가 마음의 나툼일 뿐이다. 이것이 불교적인 우주관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일체 것, 그것이 태양이든 화성이든, 토성이든, 안드로메다 은하든, 그게 다 현대 과학에선 끝이 없다고 그렇지만 끝이 있다. 단서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자신이 만든 자기 업에 따라서 곳곳에서 다양한 인연을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법회에 와서 법문 듣는 것도 법에 대한 인연을 맺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여러분들이 만나는 숱한 인연들이 다 인연을 새로 만들고 파괴하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인연이든지 소중하게 상대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리한 근기라면, 여기서 예리하다는 건 날카롭다는 건데 상근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날카롭다고 하느냐 하면 번뇌를 끊는다 해서 칼로 자릅니다. 그래서 예리한 근기라 이렇게 하는 것이다. 예리한 근기라면 주변의 인연이 자신의 마음크기만큼 다가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것이 딱 여러분의 소견만큼 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여기 집을 지을 때 설비하는 사람이 와서 집 뒤에 물통을 설치하는데 그 사람이 여기저기 전화로 알아보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60만원이란 소리를 휴대폰 소리를 통해 내가 들었는데도 나에겐 90만원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니까 모른척하고 90만원을 줬는데, 나중에 물통 뚜껑을 설치할 일이 있어 견적을 내라 했더니 스텐 뚜껑 2개에 35만원이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할 것이 있어서 물어보니 그땐 25만원이라 했는데 여러분도 보면 알겠지만 스텐철판 3개 구부려 놓고 25만원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부터 나를 속이는 줄 알면서도 나는 속아줬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스님이 그때 있었던 일을 얘길 하니까 이것이 다시 그 사람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전화가 와서 그때는 자기가 상대방이 하는 얘길 잘못 들어서 10만원을 더 불렀다 그랬는데 돈을 어떡하면 좋으냐고 하기에 담에 일하러 올 때 그냥 그 10만원의 일을 하라고 하고 끝을 냈습니다. 그때 주변사람들이 뭐라고 그럴 때 내가 무어라 얘길 했느냐 하면 ‘그런 것이 그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고 그 사람의 마음의 크기가 그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을 지어보면 알겠지만 도와주는 사람도 많지만 속이는 사람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엄격히 얘기하면 나한테 그런 인연이 온 것은 전생에 내가 그런 사람을 많이 상대한 것입니다. 예리한 근기라면 주변의 인연이 자신의 마음 크기만큼 다가온 것임을 알고 그 마음을 넓고 크게 지혜롭게 간직하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도 닦는 사람이 마음을 쓰는 도리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세상에서도 등불이 되어 숱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한없는 중생의 의지처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마음만 먹는다고 될 수가 있을까요? 나도 저렇게 해야 되겠는데 하면서도 경계에 부딪혀서는 ‘아, 내가 손해 보잖아’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다스리는 혹독한 절제와 타인을 위한 다함없는 사랑에는 먼저 그 마음의 등불을 선하고 지혜롭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명등’입니다. ‘우주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근원을 알 수가 없다지만 모두가 마음의 나툼일 뿐이다. 따라서 곳곳에서 다양한 인연을 만들고 있다. 예리한 근기라면 주변의 인연이 자신의 마음크기만큼 다가온 것임을 알게 되어 그 마음을 넓고 크게 지혜롭게 간직하려 노력한다. 이런 사람은 어느 세상에서도 등불이 되어 숱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한없는 중생들의 의지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마음만 먹는다고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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