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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21강 구경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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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055회 작성일 21-08-09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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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강


구경열반


 ‘우리들이 보고 있는 생멸하는 것은 환상이 발생한 것일 뿐이다. 실은 발생한 것이 아니다. 또 환상이 소멸한 것일 뿐 소멸한 것도 아니다.’ 여기 한사람이 있어 이 사람을 우리가 무지한 마음으로 봤을 때는 영원히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부처님 법으로 보면 이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 사람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존재하려면 그 사람의 조상이 있어야 하고, 또 태양과 지구,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있어야 하며, 의식주가 다 해결되어야 하나의 인간이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딱 놓고 이 모든 것을 제거해버리면 이 사람이 ‘이것이 나다.’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피와 살조차 음식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인연이 이 사람의 생명력, 그것을 조합해서 이 사람의 모습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이 있으면 있다, 생 했다고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는데, 우리의 본바탕 인연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그 본바탕을 깨닫게 되면 나고 죽음이 본래 없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멸하는 것은 환상이 발생한 것일 뿐이라고 한 것은 지금 여러분들의 키, 몸무게, 얼굴, 사는 습관, 환경이 서로 다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그 무엇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이 일으킨 업력만큼 판이 짜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여러분들의 모양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의 그 모양, 그 꼴을 만든 그것은 여러분이 일으킨 망상에 의한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환상이 발생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물의 젖는 성품을 보면 물이 얼거나, 구름이 되거나, 비가 되어 내려도 젖는 성품은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무엇이 되더라도 물의 젖는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은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본체의 측면에서 고찰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작용면에서 봤을 때는 발생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업을 지으면 업을 또 받지만 도를 깨달은 사람은 업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물의 젖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되어도 물의 젖는 성품이고 꿀물이나 흙탕물이 되어도 물의 젖는 성품이기 때문에 거기는 업이 저장될 수 있는 인연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깨닫지 않고 도를 닦는 것은 다 마업(魔業)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든 자기 주관이나 개념이 들어가서 또 하나의 업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환상이 소멸한 것일 뿐 소멸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은, 이것은 인연이 만나면 있고 인연이 없어지면 사라지지만 그 있고 없음은 마음의 작용과 본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체를 관찰해서 수행할 때는 한 물건도 없지만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입장에 있을 때는 환(幻)을 일으켜야 합니다. 환인 마음, 이것이 묘한 것입니다. 이것이 원각경에 나오는데 보통 수행을 하면 고요하고 마음의 본체, 체성만 얘기하려다보니 사람이 오는 것도 싫고 사람하고 교섭하는 것도 싫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반쪽자리 공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환인 줄 알면서 환에 속지 않으면 자비심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작용을 제대로 깨달았을 때 그 마음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파도가 곧 물이지만 물이 곧 파도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현실 자체가 대긍정으로  돌아와서 현실참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작용으로도 나오고 체로도 나오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거두면 한 티끌도 볼 수가 없고 펼치면 대천세계가 이것에 의지해서 우주가 유지되는데 도대체 이 어떤 물건이냐? 이때 ‘이 뭐꼬?’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수행을 함에 있어서 화두를 들기 전에는 진실하고 곧은 마음을 항상 놓치지 않아야 되고, 화두수행을 할 때는 일심으로 화두에 몰입을 해야 합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그래서 공포가 있지 않으니 전도된 몽상이 멀리 떠난다고 했습니다. 전도몽상은 크게 교학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영원히 실재하는 무엇이다.’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계가 영원히 유지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인생관과 우주관인데 불교적으로 봤을 때 기독교관이 어떻게 비판되느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어떤 신을 잘 섬기면 그 신의 눈에 띄어서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철학적으로 분류하면 ‘상견외도’입니다. 이것은 ‘나’라는 것이 태어나서부터 영원히 고정적으로 생각이 되는 것으로써 한번 태어나면 죽은 다음에도 그 태어났던 것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고정불변한 나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기법으로 보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라는 것도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 나, 아무개라는 것이 생성이 되었고 그 여러 가지 인연이 다 흩어지면 나, 아무개라는 그것도 사라져버립니다. 실제 여러분들도 백 년 안쪽에 다 사라지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백년이 지나도 나는 그대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원리전도몽상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마음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내가 나라고 했던 것은 인연의 소산물임을 알고 인연에 속하지 않는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더 깊이 깨닫게 되면 이 세계가 내 마음이 물질화 된 것임을 깨닫기 때문에 내 마음이 고요하면 세계조차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삼매에 들게 되면 이 몸과 마음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로 사라지게 되고 거기서 깨닫게 되면 확실하게 나와 세계가 인연의 소산으로 잠시 있는 것이지 영원히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미 깨닫고 걸림이 없으니까 전도된 몽상을 멀리 떠나 없앤다고 하는 것입니다. 

  ‘범부는 멋대로 분별하여 스스로 탐·진·치가 많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은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진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삼악도에 떨어지는데 불교에서는 ‘나다’라는 것이 영원한 실체라고 주장하면 삼악도에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인연,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서 나라는 어떤 이미지가 형성되는데 그 인연이 다 흩어지면 내가 주장하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가령 지금 스님의 경우를 보면 곡식이 없으면 스님이 가지고 있던 이 살이 모두 빠져버리겠죠. 그렇죠? 그리고 태양이나 불빛이 없으면 생명력이 사라지고 바람이 없으면 호흡이 끊어져버립니다. 능엄경에 보면 밝은 것은 태양으로 보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두움으로 보내고 이렇게 해서 쭉 돌려보내고 나니 내가 나라고 주장했던 실체가 없어져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깨닫는 것이 소승법이고 대승법은 자기 마음만 깨달으면 이게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범부는 멋대로 분별하여 나는 탐진치가 많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은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삼악도는 지옥, 아귀, 축생입니다. 지옥은 못된 짓을 많이 해서 떨어지는 곳이고, 탐욕이 많으면 아귀에 떨어지며, 어리석음이 많으면 축생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을 주장하고 사람을 대해서 이기려는 허성심을 가지면 그 한 생각 생각들이 결국 삼악도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아무리 절에 오래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쓰는 마음이 자기의 업력이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져주는 연습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육도 중생 중에 사람만이 남한테 져주는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짐승은 져주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가 힘이 있고 지혜가 있어도 남한테 져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업력을 소멸시키는 제일 첫 번째 원인이다. 눈앞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눈앞의 경계에 속지 않으니 자기의 영성이나 심성은 지혜롭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죄는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죄에 대한 정의다. 기독교에서의 죄는 아예 원죄라는 것이 따로 있고,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다 죄인이라 하는데 기독교의 제일 나쁜 점은 그 종교를 믿음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을 증오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남을 증오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부터 죄가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죄는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지옥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 집착하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죄의 핵심이 내 입맛이라는 얘기입니다. 내 입맛을 만족시키려고 남의 종교를 헐뜯고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나는 놓아두고 다른 사람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몰염치하고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지옥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 집착하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것을 악업이라고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내다.’라는 그 한 생각, 이것이 만 가지 악의 근원 인 것입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멋대로 이리저리 분별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업이다.’ 이것은 어리석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원래는 그냥 바위였는데 불교신자가 거기에 ‘佛’ 자를 새겨 넣고 부처님이 계신다고 규정 지은 것이나,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새겨 넣고 예수님이 계신 성역이라고 하는 것이나 이것은 모두 악업이라는 얘기입니다. 보통 불교나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들이 착한 짓 한다고 그러겠지만 왜 엄한 바위에다 정으로 찧어서 佛자 새기고 십자가를 새기냐는 것입니다. 그게 악업입니다. 그 사람이 부처를 모시고 하느님을 모신 이유가 뭘까요? 내 입장에서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전제, 즉 탐욕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은 바로 나에 대한 탐욕, ‘내가 이렇게 바위에다 부처님을 새기고 뭘 하면 부처님이 잘 봐주겠지’하는 탐욕이 거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써 이게 악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데 바른 지견이 없으면 수십 년을 돌아다녀도 필경은  악업밖에 짓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닦지 않고 남을 닦으라는 것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짓인지 알겠지요?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는 닦지 않아도 이 사람들을 닦게 했으니 부처님이 잘 봐주겠지.’하는 교묘한 계산이 있는 것입니다. 진짜로 닦은 사람은 ‘아, 이것은 내가 닦아보니 진짜 마음이 영특해지고 지혜롭고 맑고 순수해지는구나. 그러니까 너도 닦아봐.’ 이렇게 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은 어디 써여 있기 때문에, 누가 말했기 때문에’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설사 오랜 전통이라도 그것이 법에 합당하면 따르고 합당하지 않으면 따르지 말라. 그래서 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자기에게 의지할지언정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철저하게 

말씀하셨는데 오늘날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렇듯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멋대로 이리저리 분별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업인 것입니다. 성인은 자기라는 것이 없습니다. 무애 하는 도를 탁 봤을 때 최초에 깨닫는 것이 있는데  평생에 자기를 누가 괴롭혔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명상이나 참선, 염불 등을 하거나 좋은 말씀을 듣고 나면 일시적으로 평안한 것 같지만 그건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려고 몸부림을 친 것일 뿐입니다. ‘아, 저 얘길 들으니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참 좋은 말씀이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다독거릴 뿐입니다. 정신이 없어 다독거릴 시간이 없을 땐 옛 본성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립니다. 먼저 본성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나타나고 있는 대상은 나타나고 있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명쾌하게 얘기했잖아요. 여러분이 누구를 보고 속으로 ‘아, 저 사람 참 미워 죽겠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워 죽겠다는 마음이 그 생각을 일으켜서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심이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정의를 내린 후에 미워하고 좋아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지 않고 거울처럼 비추기만 하면 그 비친 대상에 대해서 영향을 전혀 안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오랜 습관으로 사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하여 좋거나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고 그 다음 스스로 기쁘거나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가 스스로를 갈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고 있는 대상은 나타나고 있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아녀자를 업은 정명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명도, 정이천 형제는 당·송 팔대가 시대에 주자학의 바탕이 된 송학의 대가였습니다. 정명도가 동생하고 어디를 가다가 개울을 만났는데 개울가에 어떤 젊은 여인이 물이 깊어서 건너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여인이 종아리만 보여줘도 정조를 잃었다고 할 정도로 남자 위주의 시대였는데, 정명도가 그걸 보더니 그 여인을 등에 업고 냇가를 건너 주었습니다. 개울을 건너 한참 가다가 동생이 ‘그래도 천하에 알아주는 대인이고 군자며 선비인데 어떻게 젊은 아녀자를 등에 업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정명도가 ‘너는 그 젊은 아녀자를 지금도 업고 다니느냐? 나는 아까 그 개울을 딱 건너서 내려놓고 지금은 업고 있지 않는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쓰는 도리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업을 만드는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사물을 보고 사물에 대해서 평가하고, 좋거나 싫어하며, 집착하고 끈질기게 갖고 다닙니다. 그런데 도를 닦는 사람은 ‘일념 단속’, 최초에 마음이 어디에 물들거나 집착하려고 할 때 재빨리 알고서 본성으로 비춰서 녹여버리고 쉬어 버립니다. 앞에서 동생은 형이 큰 선비로서 촌부를 등에 업었다는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왔는데, 도를 닦은 형님은 인연 따라 비추어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업어주면 되겠다.’ 해서 그 행동만 하고 딱 내려놓고 싹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무심이며 불가에서 얘기하는 도는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이러한 얘기를 많이 들어도 일상생활에서 적용을 안 하게 되면 이건 그냥 지식일 뿐이고 지혜를 배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면 마음은 청정하게 되지만 한 생각이라도 분별을 일으키면 마음은 더러워진다.’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진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죄라 하여 원래 죄를 업고 태어났으니 누구나 죄인이지만 불교에서는 원죄라는 것은 없고 내 마음에 나라는 입장에서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분별을 일으켜 마음이 더러워지게 됩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누누이 얘기했지만 한 생각 한 생각 잘 비추어 속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가 쓰는 마음에 다른 사람은 나를 속이지 못하는데 자기가 잘 속습니다. 그런 것들을 미세하게 분별 하려면 참선 수행을 해서 최초의 단서, 한 생각이 막 일어날까 말까 하는 순간에 바로 눈치를 채어 쉬는 것이 도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생각이 일어나서 업으로 지어진 다음에야 ‘아휴, 내가 말을 잘못했다. 행동을 잘못했다.’ 하는데 이것이 범부입니다. 

‘이리저리 쓸데없이 망상 하여 그릇된 생을 날조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왜 태어나느냐? 이리저리 분별하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고 죽는 원인이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이것은 자기 입장에서 보고 듣고 한 것을 자기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되었다가 다음 생에 자기가 일으켰던 마음만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를 끊거나 헛되이 나고 죽지 않으려면 마음을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꿈같은 생각이 이미 멀리 여의었는데 마음은 지금 어느 곳에 안심입명 하고 있는가?’ 만약에 마음이 본래 한 물건도 없고 본래 청정한 것을 알았다면 그것을 안 사람은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지금 법문 하는 곳에 머물러 있고 또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이런 욕구, 하는 일에 마음이 딱 달라붙어 있는데, 마음을 밝게 깨달았다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요? 여러분 한 번 얘기해 보십시오. 이같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몰랐을 때 참구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점안식 때 도반 스님한테 법문을 하러 갔더니 그 스님이 먼저 법문을 했는데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놓고 자기가 소리를 꽥 질렀어. 그러니까 옆에 있던 스님이 또 북을 쳤는데 그게 진짜 답일까요! 그 스님들한테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배울 수 있을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각자 수행을 해서 알아야 합니다.

  ‘구경열반(究竟涅槃)’, 중생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잘못된 것을 한마음 깨치고 보니 세계 전체가 마음인 것을 알게 되고 그리하여 모든 잘못된 몽상들이 멀리 사라져버립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깨치지 못했을 때 나와 세계가 대립 되어 그 세계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업을 짓습니다. 마음을 깨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되고, 나되 난바가 없고 죽어도 죽은 바가 없는 자리를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구경열반입니다. 필경에는 열반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범(凡)과 성(聖)이라는 것. 범부와 성인이라는 것은 모두 멋대로 망상 하여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왜 구경열반에 대해 사족을 붙였는지 여러분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 지옥, 하나님, 부처님 등 어떠한 개념을 갖다 붙여도 그건 가설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다 우리 입장에서 좋은 것들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멋대로 망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를 깨달은 사람은 한 번도 부처님을 보고서 예를 한 적도 없고 경솔히 한 적도 없습니다.

  예전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화양계곡에서 천 일 기도를 했는데 끝나고 수덕사 노스님께 가서 ‘기도를 천일동안 했습니다.’ 했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셔서 ‘천 일 동안 관세음보살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멋대로 상상을 지어내지 않기 위해서 저는 안 본 것입니다. 이것이 도 닦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구절들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무지’입니다. 도를 깨달으면 참으로 내가 나를 괴롭혔음을 알 수가 있고 그걸 알아야 비로소 도를 닦는 오후 보림(悟後保任)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삼세제불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불교적인 우주관이 여기에 포함되고 함축되어 있는 데 불교에서 얘기하는 삼세는 과거 장엄겁, 현재 현겁과 미래 성수겁을 말합니다. 과거 장엄겁은 불교적으로 공간적인 우주관으로써 우리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은 생명체가 있는 것은 태양계 속의 지구 하나로 보겠지만 불교의 화엄사상이나 법화사상에 의해서 이 우주 공간을 측량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일정 기간 어떤 형성력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지고 그다음 머무르며 또 변했다가 사라지는데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하며 이러한 것을 우주의 생노병사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삼세라 함은 보통 과거·현재·미래를 말하지만 광범위하게는 과거 장엄겁을 이야기하며, 태양계가 이루어지기 이전 태양계를 과거 장엄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식으로 그것을 논의하게 되면 ‘과거에 천 부처님이 지나가셨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부처님이 보통 출세하실 때 기간이 우리가 보통 미륵부처님이 앞으로 오실 기간을 56억 7천 만 년이라고 하는데 과거 1000부처님이 계셨으니 그만한 태양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장엄겁 입장을 현재라고 봤을 때 또다시 과거장엄겁이 또 있으니까 태양계 이전의 태양계가 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태양계를 ‘현겁’이라 하는데 현겁의 수명은 현겁에서 천불이 출세하신 다음에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가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현겁의 일곱 번째 부처님이고 미륵부처님이 여덟 번째 부처님으로서 이렇게 해서 천불이 지나간 다음에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나 안드로메다 은하와 같은 이 모든 우주가 완전히 파괴가 됩니다. 다시 아득한 세월이 지나서 우주가 다시 빅뱅과 같은 대 폭발을 일으켜서 우주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미래 성수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라 했을 때는 굉장히 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중생이 한량없는 오랜 옛날부터 끊임없이 이렇게 겁에 의지하여 나고 죽는 윤회를 되풀이하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은 내용은 불법 가운데에서는 자성을 청정히 하는 것, 거기에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세제불이라 할 때 시간적으로는 과거 장엄겁과 현재 현겁과 미래 성수겁을 얘기하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이 우주 간에 끝도 시작도 없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모든 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 그 안에도 각 곳마다 부처님이 계신다고 했는데 그런 부처들을 통틀어서 삼세제불이라 합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의 부처, 현재의 부처, 미래의 부처가 우리 지구상, 또는 태양계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오랜 세월, 우리가 기억조차도 할 수 없는 우리 우주가 만들어지기 이전 우주부터 부처님과 같이 깨달은 분이 있었고 또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 있었기에 삼세제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나 현재 모든 부처님이 부처가 된 연유가 무엇일까요? 삼세제불 했을 때 여기서는 ‘지금 현전의 한 생각에 분별하는 그것이 삼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얘기할 때 과거의 장엄겁, 현재의 현겁, 미래의 성수겁을 얘기하며 굉장히 아득하고 어마어마하게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인데 이 모든 것이 우리 한 생각에 의지하여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구(禪句)입니다. 교리적인 것은 하나하나 이론적으로 분별하고 따지지만 선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마음을 비춰보게 되면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교리적으로 설명을 한 다음 선구를 얘기해서 직관으로 마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참선하는 사람들끼리 유통이 되는 것으로써 이 입장에서는 공부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한테 한 마디를 들어서 그 마음의 고정 관념이 없어지면 바로 마음바탕이 들어나기 때문에 돈오사상도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전의 한 생각에 분별하는 그것이 삼세다.’라고 하여 수행문에서는 삼세를 아득하게 멀리 보지 않고 지금 현전 일념, 여기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지는 그 마음이 삼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거나 명상을 해보면 이 이치가 들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삼세제불이라 그랬는데 장엄겁 전에 아득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 또 다른 우주에서 그 시대에서도 중생이 있었고 부처가 있어서 법을 얘기하고 수행을 했는데 미래에도, 현재에도 시방세계 곳곳에서 모든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수행을 하고 깨닫고 도를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그 삼세제불을 알고 싶으냐? 어떤 것이 부처냐?’ 이렇게 얘기했을 때 ‘부처님을 알고 싶은가? 진주의 무는 알겠는데 청주의 베옷은 모르겠다.’ 이 구절에 오면 여러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조주스님의 은사 스님인 남전스님이 선의 왕이라 하여 ‘왕화상’이라고 불리었는데 깨달은 바가 아주 깊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조주 스님께 어떤 학인이 와서 ‘스님이 남전스님을 친견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친견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 법회에 와서 스님을 봐도 스님의 겉모습은 보지만 스님이 알고 있는 것들, 예를 들어 ‘업에 대한 이해’같은 것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주스님께 학인들이 남전스님을 뵈었냐고 묻는 것은 남전스님의 법을 봤냐는 것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주스님이 답을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 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진주라는 고을이 무가 아주 유명한 생산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찌 삼세제불을 알고 싶은가 해 놓고서 이런 대답이  삼세제불을 드러내는 얘기냐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와서는 여러분이 이전에 알고 있던 법, 즉 유식, 반야 이론, 공, 불타 등 일체가 여기에 개입이 안 되고 다만 이 한 구를 꿰뚫어야만 알 수가 있는 것으로써 이것을 조주스님처럼 친히 남전스님의 면목을 깨달은 연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조주스님은 물어본 학인이 수행승이니까 이렇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청주의 베옷은 모르겠다.’ 라고 했는데 청주의 베옷이라는 또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불가에서 처음에 수행을 한다고 하면 스님들로 부터 법문, 화두를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다 똑같은 줄 알지만 화두는 병에 따른 약 처방이기 때문에 스님들은 상대방의 근기를 봐서 지적으로 아주 예리한 사람한테는 그 지적인 것에 합당한 화두를 주고 정적인 것에 예리한 사람한테는 정적인 것에 합당한 화두를 줍니다. 그 학인이 경전을 많이 읽은 사람이니 경전과 비슷한 그런 화두를 주면 몰록 의심이 나고 집중이 되니까 그 사람한테는 그런 화두를 줍니다. 어떨 때는 학인들이 경전을 읽고 와서 조주스님한테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것은 조주스님이 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달아보려고 할 수도 있고 몰라서 물어볼 수도 있는데 ‘만 가지 법이 불교 경전으로 보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하나라는 것을 여러분은 보통 공이나 마음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라고 했을 때 벌써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나 공이라고 했을 때 벌써 한 가지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았을 때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물어보는데 조주스님은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누가 장삼을 한 벌 맞춰줬는데 그게 무게가 서 근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언구는 수행을 하는 사람끼리 통하는 언구입니다. 이 사람이 도를 통했는지 안 통했는지 문제를 물어봐서 대답하는 이런 차원이 아니고 직관에 의해서 마음을 터득했는지 알아보려면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불교에서는 만법이 다 유식, 오직 마음이라 그러는데, 그러면 그 마음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데 하나님은 어디서 나왔냐고 물어보는 것 하고 똑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하나님 대신 마음이라 했으니까 천지를 마음이 만들었다 했고, 그 마음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이렇게 얘길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마음이라는 것, 여러분 즉 ‘나’라는 생각이 있는데 그런 것이 의식되기 이전에 여러분은 어디 있었는지 이것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주스님은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누가 장삼을 한 벌 맞추어줬는데 그 무게가 삼서근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도리를 알면 어떠한 언구, 기존적인 개념, 종교, 신앙 같은 것들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해탈을 못하느냐 하면 이슬람교 믿는 사람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고, 기독교인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며 힌두교인은 힌두교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을 쭉 나열해보면 사람들이 어디에 얽매여 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바로 자기 것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 얽매여 있는 것 그것이 고통의 시작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나없음’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니라 색으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여러분들이 내 마음, 내 마음 하는 것은 중생을 제도할 때 선구로써 제도하는데 하근기 중생은 경계를 없애주면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경계를 없애버리는 수행 방법을 줍니다. 하근기들은 경계만 보면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기에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경계에 의해서 반연한 마음, 흔들리는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중근기는 경계에 의해 마음이 끌려 다니지는 않는데 자기 스스로 일으키는 의욕 때문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 사람들한테는 공부 방법이 또 다릅니다. 그런데 상근기는 경계와 마음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그 한 법집에 집착을 하는데 이 법집을 다스릴 때 제일 빠르게 도를 통할 수 있는 방법이 ‘화두선’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한테 진주에 큰 무가 난다든가 아니면 내가 장삼을 맞췄는데 무게가 마 서 근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경계나 마음가짐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한 생각을 꿰뚫고 들어가야 타파가 되는데 상근기가 수행하는 법이 화두선입니다. ‘과거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여기서 이렇게 해놓고 아주 친절하게도 여러분들이 사량으로 추측해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놓는데 이것을 노파선(老婆禪:간절하고 자상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것으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모두 있다.)이라고 합니다. 아까 초반에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이 장엄겁으로부터 현겁, 성수겁을 얘기했는데 수행문으로 얘기할 때는 지금 한 생각 일으키는 그곳에 과거·현재·미래가 있다고 했고, 그럼 그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처의 본래 모습인가 이것을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그래 놓고서  ‘저녁에 뜨는 해요. 아침에 지는 달이다.’ 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이걸 무심히 읽을 것입니다. 저녁에 해 뜨고 아침에 달이 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구절이 상근기가 도에 들어가는 아주 긴요한 문인데 여러분들이 이러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으면 여기 와서 법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삼세제불이 왜 제불이 되었느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도피안, 저 언덕에 도달하는 지혜인데 안이나 밖에서 얻을 수 없음을 확연히 아는 지혜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부처님이 교학적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이에게는 안이나 바깥에서는 한 가지도 얻을 수 없음을 자기 스스로 확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자리를 요달 해서 조금이라도 보게 되면, 자기가 일으키는 일체 것들이 ‘인연생 인연멸’임을 알아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자기가 머물지 않습니다. 머물지 않으면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자유롭고 편안하고 평상심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슬람교인들이 힌두교나 기독교를 상대로 테러를 일으키는데 똑같은 신을 믿으면서 내가 믿는 신을 믿어야 지옥에 안가고 천당을 갈 수 있다고 서로 주장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자기가 일으킨 념, 여기에서 안이나 밖에서 뭔가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마음 바탕이 더러워지고 그 바탕 위에서 자기가 일으킨 바탕과 맞지 않는 사람은 저주하고 미워하고 테러처럼 폭력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원적으로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일으킨 상념에 대하여 하근기는 ‘이것이 경계에 물들어서 나오는 마음이구나.’ 하고 알게 되면 마음을 쉬고, 중근기는 ‘내가 일으킨 생각에 내가 속았구나.’ 이렇게 알면 마음을 쉬며, 상근기는 ‘일념 자체가 홀연히 일어나는 근거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알면 마음을 쉬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셋 중에 하나를 붙들고 들어가야 공부를 하게 되고 도를 닦는 거야. 

  ‘이것을 여의고 한량없는 세월을 부지런히 수행하고 도를 이루려 해도 모두 꿈속의 일이다.’ 제방에 보면 수행 방법이 참 많고 여러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호흡, 무술, 주력, 염불, 다라니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미혹, 한 생각 겨우 일어나기도 전에 그 생각 자체가 흔들린 것을 깨우치지 못면 결국은 내 입장에서 세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마음에 진정한 해탈이나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신문 같은 것을 보면 입산수도 몇 십 년을 한 스님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기가 안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몇 십 년 해서 닦아야 할 도가 아니라 이것은 한 생각 바뀌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몇 십 년 안 하면 또 이걸 알 수도 없는 묘한 도리가 있습니다.

 ‘항상 능소(能所)가 구별되기 때문이다.’ 몇 십 년 수행을 해도 지난 밤 꿈속 일이라고 했는데 닦는 나와 닦아야 할 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불법 이외의 모든 수행을 하는 수행인들을 보면 깨달아야 할 도가 따로 있다 생각하고, 내가 지금 먹고 살고 하는 이것 이외에 따로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능소라 하는데 능은 주관이고 소는 객관, 능은 보는 자고 소는 보이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능소가 구별되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도를 닦는 방법으로써 능(주관)인 아집과 소(객관)인 법집 이 두 가지를 뛰어넘으라고 교리적으로 설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일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이승과 연각은 참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이승과 연각까지도 참다운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승은 소승불교를 얘기합니다. 소승불교는 삼법인 중에 무상과 무아를 체득해서 마음에서 염착을 버리는 것인데 왜 그것을 부정했을까요? 소승불교에서는 아직 수행 면에서 깨달아 아라한과를 얻는 자기, 즉 미세번뇌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각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 예를 들어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면서 꽃이 피고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생했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집착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인데 거기에도 깨달은 자기 자신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서천축 말인데 우리말로 하면 ‘아’는 ‘없다(무;無)’라는 뜻이요, 뇩다라는 ‘위(상;上)’라는 뜻이며, 삼은 바르다(정;正)는 말이고, 삼보리는 올바른 깨달음(정각;正覺)이라는 뜻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번역하면 무상정각(無上正覺), 즉 위없는 올바른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소승이나 이승은 정각이 아니고 편각이라고 합니다. 편각은 깨달은 것이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이해했어도 세계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거나 세계의 존재 본성에 대해서는 진리적으로 이해했지만 자기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편각이라 하며 그 모든 것을 확연히 아는 사람을 우리가 원각(圓覺) 또는 정각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는데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이 무상정각을 의지하여 닦고 깨달아서 성불하셨다. 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했는데 무상정각을 얻은 가장 근본이 ‘한마음’이라 그랬습니다. 과거·현재·미래도 이 한 마음에 의지해서 나온 것이고, 시방세계도 마음에 의해서 나온 것이며, 나와 남도 내 마음의 분별에 의해서 나온 것이니 분별이 나오기 이전 그 마음자리를 아는 것을 여기서 무상정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탐욕의 마음은 범부의 마음이다.’ 여기서는 마음에 여러 가지 차원이 있음을 설명해줍니다. 탐욕이나 분노나 어리석음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오르내리면서 허덕거리며 사는 그 마음을 범부의 마음, 평범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누구나 똑같이 쓸 수 있는 마음으로써 특별하게 남보다 뛰어난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미운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예쁜 사람이 있으면 좋아하며, 나에게 이익이 되면 취하고 이익이 안 되면 버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범부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탐욕의 마음은 범부의 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현생을 살 때는 편한데 이 마음속에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다음 생에서는 또 다른 내가 고통 속에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부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는 아이를 임신하면 태교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려서부터 올바른 습관을 갖게 하려고 가르치거나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범부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낱낱의 경계에 따라 분별하고 반응하는 그 마음은 평범하게 욕탐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의지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그리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자기 마음의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저장이 되었다가 다음 생에  또 다른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이가 어미 뱃속에 있을 때 태교하는 것이나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마음을 진실하고 밝고 맑게 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쓰는 대로 마음에 저장이 되었다가 다음 생의 내가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사실은 평생 태교를 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보면 하근기에게는 그래도 마음을 조심스럽게 쓰게 할 것으로 봅니다. 


이보다 조금 뛰어난 사람이 성문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성문은 존재를 공으로 봅니다. 존재를 공으로 보는 것은 어떻게 그릴까요? 예를 들어 젊은 남녀들의 첫사랑이 대체로 결혼까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첫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이성을 처음 봤을 때는 사회 물정이나 사람에 대하여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의 지·정·의 중에서 정적인 마음만 가지고 상대방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는 상대방이 죽도록 좋은데 주위의 부모 형제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별로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되고 오래 가다보면 주변의 압력을 이길 수 없게 되어 첫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정적인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 되어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성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존재를 공으로 본다고 한 것입니다. 형상이 눈앞에 닥친 경계가 실재하지 않음을 꿰뚫어 보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성문의 마음인데 부처님의 교리에 의지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성문입니다. 성문이란 불법을 귀로써 소리를 듣고 이해를 했기 때문에 ‘아 무상하고 무아구나’라는 이 이치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존재를 공으로 보는 것이 성문의 마음입니다. 앞에서 범부의 마음은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봐서 집착을 하지만 그 병을 없애주기 위해서 ‘존재가 실재하지 않다.’라고 부처님이 아함경에서 설하신 것을 이해하여 사물을 관찰하고 사물을 닦아나가는 것이 성문의 마음이라 하는데 그 수행방법이 지금 우리나라에도 많이 들어와 있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자기의 감정과 신체의 세계 하나하나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이 다 하면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서 처음부터 마음을 거기에 빼앗기지 않게 하는 마음이 바로 성문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연각의 마음이 있는데 법이 고요한 체성을 갖지 않는 것은 연각의 마음입니다. 한 차원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은 산하대지나 인연 같은 것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걸 보고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이 다 하면 사라지는 걸 알아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뺏기지 않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연각승입니다. 그래서 연기의 마음은 성문의 마음보다는 한 차원 높은 마음입니다. 성문은 배운 대로 보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면 기독교 교리대로 세상을 보고, 이슬람교인은 이슬람 교리대로 세상을 보며 힌두교인은 힌두교 교리대로 세상을 보고, 불교인은 불교 교리대로 세상을 보게 되는데 마음이 오염되지 않게 노력하고 발버둥치는 마음이 성문의 마음이라고 하면 연각은 스스로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차원이 높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모욕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자연의 이법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러다 오래 동안 명상을 하고 숙고를 하다가 어느 날 꽃이 뚝 떨어지는걸 보고 “아! 세계 실체는 이거구나!” 하고 탁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각의 마음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어떠한 종교에 얽매여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 떨어져나갑니다. 꼭지가 떨어지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도 아직 안 떨어진 꼭지가 있는데 무엇을 알아서 희열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마음이 남아 있고 아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마음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해탈이라고도 미혹이라고도 보지 않는 것은 보살의 마음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단한 경지입니다. 옛 스님들은 이 경지를 ‘평상심이 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평상심이 도라고 하니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마음이 평상심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경계가 와도 마음이 그것에 의해서 따라가지 않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 부동의 마음인데 이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해탈이라고 하면 좋아하고 미혹이라고 하면 싫은 견해가 일어나지만 보살은 그것이 다 자기 한 꼭지 분별에 의지해서 나타나는 가법(假法), 실재하지 않는 법임을 깨달은 분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도 그것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데 이것이 곧 보살의 마음입니다.

  ‘만약 금계를 깨뜨렸을 때 그 당황하는 마음이 불가득임을 알면 이미 해탈한 것이다.’ 이 경지에서는 굉장히 사는 것이 편합니다. 아까 소승이나 연각까지는 자기가 과거의 인연이든 현세의 어디서든 계를 파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서 번민을 하고 고통을 받지만, 보살의 경지에서 마음을 깨달은 이는 그 일어나는 마음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에 이미 해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계를 지켰다든가 안 지켰다든가 하는 자체가 이 보살의 경지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근래에는 경허스님 같은 경우에는 이 경지를 많이 써서 후학을 대단히 미혹시키기는 했지만 경허스님 잘못은 아니라고 봅니다. 계를 깨뜨렸을 때 두려워하는 마음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아는 보살의 마음, 참 어려운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마음을 알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해탈해 지는데 보통사람은 어려운 것입니다. 천수경에 보면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 하여 죄라는 건 본래 자성이 없고 마음이 흔들림으로 인해서 쫓아 일어나는 것인데 그 흔들림이 흔들림이 아님을 알게 되면 해탈입니다. 그런데 보통사람은 기껏 성문이나 연각 정도의 의식 상태에서 도를 닦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길 하면 ‘아, 나도 저렇게 해볼까?’ 하는데 이 또한 마음이 더 흔들리는 것이고 말에 떨어지는 것이 됩니다.

  ‘무상정각을 알고 싶은가?’ 이것은 반야의 참 지혜를 알고 싶은가 하는 의미입니다.

  ‘산이며 강이며 온 세상 누리가 부처님의 알몸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것은 바로 드러내어 얘기한 것입니다. 근래의 선지식 중에 금봉스님이 계셨는데 해인사 조실을 지내고 돌아가실 때 해인사 홍류동 계곡에 옷을 다 벗어 옆에 챙겨놓고 게송을 하나 짓고 돌아가셨는데 그때 이 경지가 바로 부처의 경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산색(山色)은 문수안(文殊眼)이요. 수성(水聲)은 관음이(觀音耳)라.

 금일(今日) 세연진(世緣盡) 하여 의구수동류(依舊水東流)다.

 눈앞에 보이는 산의 푸른 색깔은 문수보살의 눈동자고, 홍류동 계곡에 흐르는 저 물소리는 관세음 보살님의 귀이다. 이제 세상의 인연이 이미 다 하여서 몸을 벗으려고 하는데 물은 옛것을 따라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바로 ‘무상정각을 알고 싶은가? 산이며 강이며 온 세상 누리가 부처님 알몸을 드러냈다.’를 표현한 것으로써 깨달은 도인은 보이고 들리고 말하는 것 자체가 다 부처님이 현전하는 것입니다. 현전한다니까 여러분들은 또  ‘부처님이 눈앞에 보이는 건가?’ 하고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불가나 수행에서 부처가 나타난다고 했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와 같이 마음이 어떠한 것도 탐착하지 않는 마음이 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가끔 기도하다가 부처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부처에 대한 자기의 욕탐이 일어난 것입니다. 옛 설화에 보면 수행승들이 부처님이 타나나서 뭐라고 하셨다고 했을 때 그 부처님은 눈에 보이는 부처님이 아니고 마음이 부처님과 같이 지혜롭고 참된 상태에 도달한 것을 비유적으로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청산첩첩미타굴 창해망망적멸궁 물물염래무가애 기간송정학두홍

  (靑山疊疊彌陀窟 滄海茫茫寂滅宮 物物拈來無罣碍 幾看松亭鶴頭紅)’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새벽 예불 때 쇠송이라고 큰 종을 놓고 이 염불을 합니다. 이것은 온 누리가 부처임을 드러내는 선구입니다. 문을 열면 눈앞에 보이는 산들이 첩첩이 있는데 이것이 아미타불의 굴이요, 창창하고 망망한 바다가 적멸궁이란 말입니다. 부처의 자리는 마음이 적멸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자리인데 눈앞에 보이는 창파가 적멸궁이라고 하는데 멋있는 구절입니다. ‘물물염래 무가애’, 마음자리를 딱 지키고 있으면 어떤 경계가 나에게 다가와도 거기에 걸리질 않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참 지극한 것인데 ‘기간송정학두홍’, 소나무는 푸르고 학의 머리는 빨간 것을 몇 번이나 봤느냐하는 것입니다. 이 구를 알면 부처가 현전한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있으며, 이런 것들은 수행을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정각이라는 내용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故知 般若波羅蜜多)’, ‘그런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를’ 이런 뜻입니다.

 ‘반야의 앎은 스스로 아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사물에 대해 알기 때문에 앎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 여러분에게 ‘마음의 본성이 뭐냐?’ 하고 물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알아야 힘이 되는데 이렇게 하면 공부는 한 10년은 떨어질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은 ‘아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것이 본성이 있는데 영각(靈覺), 신령스럽게 아는 것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 스님들이 공부를 좀 한 사람에게 마음을 바로 깨닫게 하려고, 하택신회(荷澤神會:685~760, 6조 혜능의 5대 제자 중 한 분)스님은 ‘지지일자 중묘지문(知之一字 衆妙之門)’이라 하여 안다는 것 이 한마디가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知), 안다는 이 한 글자가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배가 고프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이 지(知))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앎이란 것이 어떤 앎이냐 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앎은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 안다는 자리는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는 놈이 아는 놈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이라고 말하는데 그렇지만 사물에 대해선 뚜렷이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보살이 저의 법문 테이프를 우연히 듣다가 법문하는 스님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 보살의 남편이 20여년 전에 나하고 잘 알았던 터라 20년 전에 내 목소리를 듣고 기억했다가  어느 스님이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별로 아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에 대해서 어떠한 상태에서도 다 알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반야의 앎은 스스로 아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사물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앎이 없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 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앎 자체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것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실제 그것에 의지해서 사물을 분별하고 선악을 따지고 생활을 영위하고 평생을 의지해서 살기 때문에 앎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탑이나 불상, 경전 속의 일체 말씀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후 500세, 말세에는 조탑(造塔), 즉 불사를 많이 하고, 그 뒤 말세에는 끊임없이 서로 싸운다고 했는데, 애초에 탑이나 불상을 모신 것은 하근기 중생들이 거룩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 반성을 하고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중생을 불법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바른 불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야의 목표는 생사의 윤회를 멈추고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도를 닦고 법문을 들으며, 왜 반야지혜가 있어야 할까? 생사윤회를 멈추고 해탈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넉넉하고 살만하고 행복한 사람은 다음 생에도 자기가 이렇게 살 것이라 착각하고 도를 안 닦는데 그 사람이 이 생에서 넉넉하고 여유 있게 사는 것은 전생에 남한테 베풀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사는 것이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이것을  믿으면 손해니까 믿지를 않습니다. 대개 도를 닦는 사람은 부처님처럼 뛰어난 지혜가 있거나 아니면 삶이 피곤하고 힘들어서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로서 대조를 보입니다. 그래서 부귀하면서도 도를 닦는 사람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나 의식이라는 붓으로 지옥을 그리고 나중에 공포를 느낀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애착과 욕탐이 너무 많아 자신에 대해서는 조그만 일만 생겨도 마음으로 그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그려 넣고 걱정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를 깨닫게 되면 ‘아, 이것은 내가 일으킨 마음으로 원래 경계가 없으면 실재하지 않는 마음이구나.’ 하고 쉬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혹이 없으면 망상은 사라진다.’ 미혹이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공과 법공을 깨달아야 되겠지만, 일상사에서는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경계가 자신이 평가한 대로 인식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미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깜냥만큼 사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의식이라는 붓으로 색·성·향·미·촉이란 다섯 가지 대상을 그리고 탐·진·치를 일으켜 각종 업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을 짓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지(知)가 아니고 여기서 얘기하는 분별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분별이냐 하면 사물에 대한 분별, 욕탐에 의지한 분별, 분노에 의지한 분별, 어리석음에 의지한 분별로써 색·성·향·미·촉이라는 다섯 가지 대상을 그리게 되는데 이 세계를 판단하는 근거가 색·성·향·미·촉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대상과 탐·진·치를 일으켜 거기서 취하고 버리는 온갖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자, 악귀, 염라대왕을 그리고 스스로 마음으로 분별하여 각종 고뇌를 일으킨다. 이것이 중생의 실상으로 해탈이 없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묘한 것이 있습니다. 법당 부처님 뒤에 탱화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붓끝에 필력도 있고 아주 섬세하게 잘 그려졌습니다. 원래는 하얀 백지였는데 화가가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그려놓고서는 부처님이 참 거룩하게 보인다고 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참 묘한 얘기입니다. 자기가 그려놓고 스스로 거룩하다, 흉악하다, 무섭다고 하는데 이것이 중생들이 쓰는 마음입니다. 색·성·향·미·촉·법에 대해서 경계를 만들어 그림을 그려놓고는 스스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런 경지를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친구를 봤을 때 어떨 땐 친구가 참 좋고 어떨 땐 싫어질 때가 있는데 이것이 앞에서 탱화를 그린 사람과 같이 자기가 그려놓고서 자기가 기분에 따라 좋은 그림으로 보이거나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미혹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자기가 그리는 그 한 생각 일으키는데 있습니다. 도를 닦는다는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을 깨닫지 못하면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마음이나 의식이란 붓으로 지옥을 그린다고 했는데 나는 지옥을 그리는 사람을 참 많이 봤습니다. 오래전에 스님이 청주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여자가 ‘여기 지옥이 있습니다.’라고 적어 놓고서 사람들을 보고 지옥이 있다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청주에서 일을 다 보고 가는 길에 보니 그때까지도 떠들고 있기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저 사람 죽으면 지옥 간다.’고 그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듯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지옥을 그렸는데 그렇게 그린 것이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스스로 마음에 그려주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상상을 늘 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전조가 되어 그 사람은 지옥이라는 안경을 하나 받게 되며 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도 지옥 갈 것, 저것도 지옥 갈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지옥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심여화공(心如畵工)이라 하여 마음은 화공과 같아서 온갖 것을 다 그리는데 온갖 것을 그리지 않는 마음, 그것이 부처의 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주 간단명료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마음이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도록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며, 마음이 자유롭고 깨끗한 거울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이라는 그림을 그려놓고 보게 되면 지옥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안경에다 빨간 색깔 넣고 보면 산하대지가 다 붉게 보이듯이 자기가 지옥을 그려놓으면 자기가 먼저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에 속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그냥 알고 있기에 굳이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을 관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 마음이 이걸 반영했구나.’하고 쉬는 것입니다. 쉬고 쉴 뿐입니다. 그래서 깨닫기 이전이 어렵지 깨닫고 나면 마음 닦는 것은 참 쉬운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원래 공적하고 색이 아님을 알면 스스로 색이 아니라 자신의 분별이 변화한 것임을 알면 이것이 반야이다.’ 마음이 색이 아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색의 정체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반야심경에 대하여 제방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색을 물질로 보고 양자역학의 원자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수행문에서는 그렇게 보면 틀린 것입니다. 색이란 법처소색(法處所色)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에 그려서 사람을 볼 때 그 그려진 마음, 그것이 색입니다. 내가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선하게 보이고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악하게 보이는데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입니다. 색이란 마음이 그려놓은 모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적인 언어로 ‘선입감’이라 그러는데 누구나 갖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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