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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7강 무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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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887회 작성일 21-08-09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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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관보현경에 이르기를 ‘일체 업장은 모두 망상에서 생긴다. 만약 참회하고자 한다면 실상을 관하라.’

  이것은 업장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경전에서 간추려서 얘기하는 것으로써 수행문에서 보면 이것이 수행의 요결이 됩니다. 즉 우리가 업 또는 업장이라 하는 모든 것이 망령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한 상태에서 일으키는 모든 생각이 망령된 것이지만, 각자 개인들이 부딪히는 망령된 생각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 의해 업장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죄를 짓고서 참회를 하려 해도 모든 죄가 망상에서 생긴 것임을 알고서 참회를 하면 이것은 실상을 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만약 참회를 하고자 한다면 실상을 관하라.’ 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죄업의 큰 바다도 모두 그대의 일시적 생각이 낳은 망상한 것에 불과하다.’

 일체 중생이 갖고 있는 모든 죄업이란 것이 결국 우리가 일으킨 망상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망상은 나와 세계라는 것을 의식되어진 내용이 실재하다고 착각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반야심경에서 전도몽상이라 하는데 이것은 수행을 통해 마음을 통달하지 않는 이상 이것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망상을 이용해서 세계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 있는데, 최면술에서 매운 양파를 맛있는 사과라고 해서 먹어도 아무런 고통을 못 느끼는 것인데 이것도 망상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망상이 현상 세계로 적용되었을 때 나와 세계라는 것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최면술은 제 7의식을 상대를 하여서도 매운 양파가 달콤한 사과로 느껴지고 그렇게 또 업을 받는데, 하물며 제 8아뢰아식에 있는 근본 무지나 망상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리시키며 생로병사를 끊임없이 연출해 내는 것을 보통 사람은 깊은 명상과 깨달음이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습니다. 이처럼 망상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죄업을 참회하고자 한다면 자세를 바르게 하여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참회라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일평생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카톨릭에서 개종한 어떤 보살이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 자기가 일으킨 망상을 하나하나 모두 기록하라고 했었는데 나중에 연락이 와서는 ‘스님, 제가 이렇게 나쁜 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망상은 모두 자기 입장에서 쓰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것이 죄나 잘못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스스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고 지내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남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했거나, 질투를 했거나, 욕심을 냈거나, 해롭게 한 것을 하나하나 더듬어 기억해 내어 그것을 공책에 적으면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 때 느끼는 것이 내가 착하고, 지혜롭고, 어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실은 내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무릇 제법의 큰 바다도 모두 그대의 일시적인 생각이 낳은 망상한 것에 불과하다. 죄업을 참회하고자 한다면 자세를 바르게 하여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 와야 한다.’ 는 것은 망상을 피우기 이전의 자기 모습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참회라 부를 수 있다.’ 세 가지 근본 번뇌, 대상을 쫓아가는 망상, 세 가지 번뇌가 무엇인가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의지해서 쓰는 마음인데 탐·진·치입니다. 끊임없이 탐하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것이 마음을 요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쓰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갖고 대상을 쫓아가기만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누구를 만났을 때 상대방을 재빠르게 판단해서 좋거나 싫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을 판단하는데 이것이 모두 탐·진·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깨닫기 전에는 모두가 마구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닫기 전에 쓰는 마음이 모두 마구니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의식 분별이 모두 제거된다.’ 

근본으로 돌아오게 되면 크고 작은 의식 분별이 모두 제거된다고 했는데 왜 불가에서 깨달음을 얘기하느냐 하면 보통 중생은 자기가 마음을 써도 자기 입장에서 쓰는 마음이니까 자기가 행복하고 만족하면 착한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깨닫게 되면 자기가 행복하거나 만족스럽다 하는 것도 망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쓰고, 또 오랜 세월동안의 습을 다스리는 것이 쉬워집니다.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우는 아이에게 누런 낙엽을 주고 돈이라고 속이면 아이는 그것을 믿고 울음을 그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돈이 아님을 알고 다시 울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딱 그 수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을 때는 근본적인 마음자리를 회복한 다음에 닦아야 닦은 만큼 밝고 맑은 마음이 회복이 됩니다. 

 ‘부처를 관찰하여 마음의 통일을 지속하면, 자신은 홀연히 청정하게 되고 대상을 생각함도 없다.’

 이것은 청정함이 무엇인가를 여기서 가르쳐주는 것으로 마음이 안팎의 모든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머무르지 않게 마음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즐겁다든가 행복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 어떤 상념을 일으켜서 그것으로 자기를 되비추어 만족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가끔 없어질 때가 있는데 기절 했을 때, 잠이 깊이 들어 꿈까지도 사라질 때, 이럴 때인데 이것은 도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리적이거나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잠이 들었을 땐 행복했지만 깨어나면 다시 두렵고, 괴롭고, 번거로운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를 부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관보현경 중 여기서는 염불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염불한다는 것은 부처를 념하라, 생각하라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부처는 32상 80종호를 갖춘 거룩한 모습을 부처라 여긴다면 아직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것이고 도를 닦거나 부처님의 참다운 법 입장에선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서의 마음자리 그 상태를 지니는 것을 염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염불, 즉 부처를 생각한다는 것이 참 간단한 것 같기도 하고 오묘하게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법들은 신도들이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줘도 상대방이 모르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편으로써 마음을 한 곳에 묶어놓기 위해서 그냥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천만 번을 외워도 일으킨 생각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알아야 마음을 제대로 닦고 삿된 견해에 물들지 않으며 참부처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부처인가를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하근기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부처를 생각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자기가 수행을 통해 경계에 부딪혀 증득을 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인데, 언어나 말이 아니면 여러분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을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는데 옛 스님들이 무심이 곧 도라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6식이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일으키지 않을 때 일시적으로 잠깐 사라졌다 하여 무심한 것으로 알아서 도를 알았다고 착각을 하는데 그런 것으로는 무심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인연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무심이 됩니다. 잠이 들어 꿈속에서 나타나는 내다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에 조차도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안심(安心)은 무엇인가? 편안한 마음이란 마음의 실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써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도를 닦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절에서 철야기도를 하거나, 절을 얼마나 했다거나, 몇 시간을 염불을 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대승법적인 입장에서는 자기가 일으킨 망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초심자에게는 붙잡고 의지하고 인도해야 할 길이 필요하겠지만 지혜를 논하는 문에서는 그것은 일어난 파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파도가 아닌가? 마음의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 파도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도를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왔을 때 달마스님이 혜가스님에게 ‘넌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혜가스님이 ‘제 마음이 불안하니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여, ‘그럼 네 불안한 마음을 나에게 보여다오. 그러면 내가 너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겠다.’ 라고 했는데 편안하다, 불안하다 하는 것은 자기가 일으킨 망상인데 이것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에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 

‘내가 너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했느니라.’ 하는데서 혜가스님이 깨달았습니다.

 도라는 것이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하면 한 언구에 바로 얻을 수 있는데, 요즘 사람들은 욕탐과 업력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바로 일러주면 시시하게 생각해. 묘하고 대단히 뛰어난 도리를 얘기해야 ‘아! 도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데 사실은 자기 업력 때문에 쉽게 일러주는 것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어렵게 일려줘야 고생고생해서 도는 이렇게 닦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마음을 진정시키면 마음은 청정하게 되지만’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것은 마음이 끊임없이 6기관을 통해 바깥 것에 달라붙어서 평가를 내리려 하는데, 계속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을 쉬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망상 피우지 말라는 도리를 알고서 그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번뜩하고 쉬어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것에도 물든 적 없는 본래자리로 돌아가니까 청정하게 됩니다.

 ‘한 생각이라도 분별을 일으키면 마음은 이미 생멸 속에 있다.’ -우리가 대상을 만나 ‘저 사람 왜 저러지?’ 하는 순간에 이미 생각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 사람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이 자기 마음에 저장이 되어서 다음 생에 그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왜 저러지’하는 업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생멸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생각 생각을 일으키고 분별하고, 따지는 생각들이 바로 다음 생에 여러분이 평가 받는 그런 삶과 환경에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념단속의 수행은 안하고 법문을 많이 들고 절에 오래 다니고, 많이 알고, 스님을 오래 쫓아 다녔다하는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런 업력을 만들어서 다음 생에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이 그러한 이야기나 보복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다 마음 닦는 요령입니다.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망상하는 것은 그릇된 생을 날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희와 비를 논하는 것조차 그릇된 생, 다시 태어나는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날조’는 있지도 않은 것을 자기가 억지로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깨닫기 전에는 다 마구니라고 하는 얘기가 깨닫지 않은 사람은 생각 생각을 생을 날조하는데 평생 헌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온 삶도 선했든 악했든 다음 생의 원인을 날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선한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아무래도 주위가 자기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쪽으로 날조를 할 것이고, 악한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사람들이 나를 괴롭고 힘들게 하는 쪽으로 날조를 하겠지요. 그러나 불법도리로 봤을 땐 이 또한 지난 밤 꿈 속 얘기입니다. 꿈속을 벗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로 보면 착하기 위해 불법을 닦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악 하려고 불법을 닦는 것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어떤 것이 불법을 닦는 이유냐? 바로 다음 생을 날조하지 않는 마음을 쓰는 것이 불법을 닦는 이유입니다. 다음 생을 날조하지 않으려면 여러분이 근원을 깨뜨리고 근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한 근원을 모으기 때문에 나고 죽는 원인을 계속 만들어 내면서도 나는 예외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방법을 궁리해 봐도 업의 지배를 멸할 수 없다. 깨닫지 못하면.’ - 왜냐? 깨달은 사람은 생각 생각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해도 머물지 않으므로 업이 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늘 좋다 싫다 하면서 거기에 착 달라붙고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의도가 다시 일어납니다. 이렇게 의도가 들어가는 순간 다음 생이 날조가 되어버립니다. 일체 중생이 평생을 살면서도 이것을 모릅니다. 이것을 처음 가르쳐주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이 도리를 잘 들어보면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되는데 손에 잡히잖아요. 그래서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한 톨의 쌀알도 소화를 못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하루에 만근을 녹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몇 푼을 녹이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다음 생을 날조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음은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없고 또한 생각하는 세계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18계를 파한 것이라고 원측스님의 반야심경찬에 쓰여 있습니다. 18계는 6근, 6진, 6식이 화합했을 때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계도 존재인데,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면 여러분들이 꿈을 꿀 때 여러분 마음속에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잠이 깊이 들면 여러분들이 함부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 종자로 있다가 잠재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꿈속에서 산하대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안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잖아요. 그 산하대지를 보는 놈이 있는데 ‘나’다 하는 놈. 그게 의식계입니다. 그런데 꿈을 깨고 나면 그 안계와 의식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꿈속에서 꾸는 꿈은 순간적인 꿈이고, 지금 우리가 꾸는 꿈은 백년 안쪽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안계와 의식계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업력에 의해서 그것을 물질화시켰기 때문에 존재로서 존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그것을 파하는 것입니다.

 ‘바깥세상의 적을 정복하려면 그것은 셀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바깥세상의 적을 왜 셀 수 없을까? 깨닫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쫓아다닙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쫓아다닙니다. 밥은 한 그릇인데 그 밥을 탐하는 인간은 수없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다 이길 수 있을까요. 바깥에 있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욕탐·분노·어리석음으로써는 정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바깥에 있는 적은 내 맘의 무지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속에 있는 자인 마음을 정복한다면 모든 적은 곧 사라지리라.’

적이란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인데, 내가 ‘나’라는 것을 세우면 남도 ‘나’라는 것을 세우게 되어 나와 대립을 하게 되는데, 내가 ‘나’라는 것을 비우게 되면 남이 나를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공부 단계에서 사람 눈에 안 띄는 것. 마음을 진실로 닦고 싶다면 우선 사람 눈에 안 띄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살들을 사람들 눈에 잘 띄려고 아침마다 찍고 바르고 거울 앞에 앉아 있잖아요. 조금 더 들어가면 귀신 눈에 안 띄어야 됩니다. 귀신 눈에는 섬뜩한 소견을 일으켜서 마음에 집착을 하면 귀신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살 눈에 안 띄어야 되는데 수행자 눈에 안 띄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수행을 하므로 다른 이는 내보다 못하다는 소견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수행자 눈에 띄는 것입니다. 제방에 참선하는 사람들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다음은 부처 눈에 안 띄어야 되는 것인데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아까 일체 생각이 없는 것이 부처라 했는데 그 생각이 없다는 것에 머물면 부처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없다는 것에도 마음이 떨어지지 않아야 부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적이 무엇이냐?, 적이 바깥에 있느냐?, 자기가 한 생각 일으킨 어리석음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네 속에 있는 자인 마음을 정복한다면 모든 적은 곧 사라지리라 했는데 우리가 마음이라 하면 참 친근하게 느끼고 불교에서 마음이 부처라 하여 귀중한 것으로 알지만 여기서 ‘마’는 마구니 마(魔)자이고 ‘음’은  소리 음(音)자 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이 생각해 내고 말하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마구니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평생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모두 마음입니다. 마구니가 시킨 소리라는 것입니다. 왜냐? 다 제 입장에서 지 입맛에 맞는 것만 얘기했거든. 보살들을 모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다가도 누가 시기를 해서 이간질하면 바로 마음(魔音)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魔音)을 내세워야 되는 것이 아니고 불음을 내세워야 되는데 불음의 정체가 어떠한 생각에도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서 나옵니다. 그런 것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방에 몇 시간을 앉아있고 장좌불와 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미친 견해입니다. 부처가 앉아있다고 다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부처는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자기 본성에 대한 지혜 여러분들이 내 마음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내 마구니 마구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으킨 소견은 내 입맛에 의해 나온 것이고 그것은 부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령 신찬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의 스승이 살림이 좀 넉넉했었는데 하루는 이 스님이 상좌 세 사람을 불러서 한 스님은 도가를 배우게 하고, 또한 스님은 유가를 배우게 하고, 고령 신찬 스님에게는 참선을 배우고 오라 했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스승이 식량을 대어주어 공부를 하고 돌아왔는데 도가를 배운 스님은 복기법(服氣法)을 배워서 몸이 강건하고 피부색이 백옥 같았으며 눈에서 불이 펄펄 나는 것을 보고는 공부는 잘했다고 했고, 유가를 배운 스님은 예의범절을 잘 알아서 불공을 할 때 의식을 훤히 잘했고, 고령신찬 스님에게는 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저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이놈이 삼년이나 식량을 대어 주었더니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너는 앞으로 어디 가지 말고 내 시중이나 들어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쓸고 닦고 밥하고 하는 것을 시켰습니다. 그 노장 스님은 매일 경을 외고 있었는데, 사실 고령 신찬 스님은 삼년 동안 백장회해스님 회당에 가서 깨닫고 왔거든요. 깨닫고 보니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음을 알았고,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노스님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쓸모가 없다고 허드렛일을 시켰던 것입니다. 고령 신찬스님이 은사 스님을 보니까 복력은 많은데 지혜가 없어보였습니다. 불가에서는 복력보다는 지혜를 우선으로 합니다. 세속에서는 지혜보다는 복력을 더 쳐주잖아요. 자기 스님이 매일 책만 보고 있는 것을 어떻게 깨우쳐줄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벌이 방에 들어왔다가 나가려고 문에 흰 창호지를 계속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리 옛 묵은 종이를 뚫으려고 해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느냐’라고 했는데 노스님이 경전을 보다가 이상해서 쳐다보니까 ‘어 부처가 방광을 할 줄 아네.’라고 했습니다. 

 또 하루는 노스님을 목욕을 시키고 있다가 고령 신찬 스님이 스승을 깨닫게 해주려고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네.’라고 했습니다. 스승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나중에 조용히 불러서 ‘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말해라.’하고 했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정직한 것이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첨부터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이 이야기입니다. 곧은 마음 없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배울 수 없는 것이 도의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령 신찬스님이 ‘사실은 백장회해 스님 회상에 가서 3년 동안 있으면서 도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이 스님이 복력이 있는 만큼 진실하였던지 제자를 법상에 앉히고 3배를 하고 법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영광독요(靈光獨耀) : 신령스런 광명이 외로이 밝아- 여러분들이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려도 이 신령스런 광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악한 짓을 하고나서는 마음 한쪽으로는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영광독로로써 부처의 성품, 천하의 살인마도 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형탈근진(逈脫根塵) : 몸(6근)과 경계(6진)를 멀리 여의였으니 - 근은 오관을 의미하고 진은 객관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써 안으로 내 몸과 밖으로 일체 세계로부터 여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체로진상(體露眞常) : 바탕은 항상 참된 모습으로 드러나 있어 - 여러분들이 나빴을 때도 그 본체는 더렵혀진 적이 없고 여러분들이 깨끗한 사람이었을 때도 본체는 더 깨끗해진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깨끗함과 더러움, 선악과는 일찍이 관계가 없는 자리입니다.

불구문자(不拘文字) : 문자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구나. - 그것을 설명하려면 체험을 해야 하지 문자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심성무염(心性無染) : 마음의 성품은 물들 수 없어서 

본자원성(本自圓成) :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 본래부터 스스로 다 갖추어져 있기에 원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두두물물이 다 부처인 것을 모르는 것은 본래 부처를 가리는 ‘내다.’ 하는 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리망연(但離妄緣) : 다만 망령된 인연만 여의기만 한다면- ‘내다.’ 하는 한 생각만 탁 놓아버리면 확철하게 두두물물,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부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즉여여불(卽如如佛) : 이것이 변함없는 부처의 모습이다. - 여여(如如)는 과거·현재·미래에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 부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이렇게 이해해서 깨닫는 것을 참의문(參意門)이라 하여 어리(語理)로써 깨닫는 문으로써 이것은 지식은 되지만 지혜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참구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화두에서서도 뜻을 참구하지 말고 구를 참구하라 했습니다. 참구문이 되려면 여기서 화두가 나오게 됩니다. 

 옛날 수덕사 혜암스님이 일제시대 때 6대 선지식 중에 한분인 오성월스님에게 갔을 대 오성월스님이 하루는 이 게송을 말씀하시면서 만약 이 게송을 지금처럼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참의문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어리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따지면 다 알 수 있기에 힘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의 얘기를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사람이나 경계를 만나면 그것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참선하는 사람들이니 이것을 참구하려면, 여여불이라는,즉  부처라는 견해에 떨어져 있는데(이것도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부처 불(佛)자 대신 다른 글자를 넣어서 이 구절이 참구문이 되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이러한 화두를 몇 번 줘 봤는데 한두 명이 이것을 알긴 아는데 대개 참의문으로 아는 것을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망상만 여의면 부처라 했을 때 이것은 이미 모순이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의였다든가, 붙었다든가 하는 생각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글자를 넣었을 때 이 구절도 살고 부처 불자를 바로 살려낼 수 있을까 했을 때, 부처 불자 대신 한 글자를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견성했다,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법문을 듣는 것은 대부분 참의, 즉 어리로써 이해한 것이고, 이것이 법문을 안들은 사람들 보다야 낫겠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구문을 아는 사람은 넣을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안 됩니다. 글자를 알려면 본성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로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 마쳤습니다.


  보통 중생들이 세계를 보거나 생각을 할 때 무명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깨뜨리기 위해 ‘무무명(無無明) 즉, 무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는 십이연기(十二緣起)가 나오는데 중요하므로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십이연기를 모르면 수행하는 방법과 우리가 미혹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수행문과 교학적 측면에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무무명에서 무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무명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무명이 근본 미혹을 밝힌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근본 무명이 무엇일까요? 근본 미혹은 존재의 본성에 대한 무지입니다. 우리가 왜 태어나고 죽는가? 존재의 본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함으로써 업을 지어 그 위에 덧칠을 한 것입니다. 존재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는 자기실체에 대한 무지와 세계의 실체에 대한 무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교학적으로 아(我)와 법(法) 이라 하고 다른 말로 주관과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에 대한 무지 때문에 중생이 생사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학적으로 더 자세히 얘기를 하면 도를 닦음에 있어 무명은 무엇이냐?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이 있어 외도(外道)라 불렀는데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있었습니다. 상견은 전변설(傳變設)을 말하는데 브라만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고, 단견은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적취(積聚), 즉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불교는 무엇일까요? 바로 연기관(緣起觀)입니다.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나타난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신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물질이 화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명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이무명은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무명, 내무명은 나와 세계에 대한 무명, 업보무명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업이 쌓이는 가에 대한 무명을 말하는데 이 무명이 전부 우리의 한 생각 분별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문에서는 한 생각 한 생각만 다스리면 이 무명이 힘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행(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지한 상태에서 파악된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의 반대는 명이겠지요? 무무명은 본래 무명이란 것이 없는 것인데, 나와 세계에 대하여 한 생각 분별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것이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본성이 공한데 이 공의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 여러분이 깨닫기 전에는 평생 이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무명이란 것, 이 무명을 여러분들은 의식조차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아뢰아식 즉 무의식에 들어있는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명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깊은 삼매와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가르쳐줘도 무명의 정체를 모르고, 대개 외도들이 말하는 고요하고 청정하게 느껴지는 것만으로 이것이 도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명은 지혜 없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무명, 즉 지혜 없음이 일어나게 되면 행(行)이 나타납니다. 즉 무명에 의해 연기된 행이 나타납니다. 행은 쉽게 말해 행동입니다. 무명에 의해 과거에 지은 모든 선·악업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춘기 때 이성에 대해 감지를 하게 되는데 어릴 적에는 같이 발가벗고 목욕도 하고 손도 잡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게 되잖아요. 이게 행입니다. 의도를 갖고 보게 되는 것이죠. 무명 상태에서는 무지하니까 그냥 대했는데 이 상태에서는 상대를 욕구를 갖고 대하게 되어 상대를 어떻게 대할까, 친구할까 애인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행입니다. 이것은 인간사에 있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지만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이게 마음의 번거로움이고 고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한 마음으로 살다보면 어린아이들이 살다보면 행이 나타나게 됩니다. 행은 무명에 의해 과거에 지은 모든 선악업이 본능적으로 펼쳐지는 움직임입니다. 어디로 펼쳐지느냐? 몸·입·뜻으로 펼쳐집니다. 여기까지는 미세하여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것이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TV에 보면 짝짓기 대회와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보는데 도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망상의 업력이 그것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깊은 깨달음이나 지혜가 없으면 그것이 왜 고통인지 조차 모릅니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고 좋다고들 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여기서 자아를 취착하고 개념화된 언어를 이해하고 새로운 체험을 추상하는 것이 행입니다. 이것은 무지에 의해 본능적으로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불법을 깨달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눈치를 못 챕니다. 외도의 수장이나 종교의 지도자조차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를 닦을 때 행까지 닦은 사람이 있고 무명까지 닦은 사람이 있는데 무명까지 닦아도 아직 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도인입니다. 교학적으로 이것이 2인(二因)이라 했습니다. 과거 2인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지어놓은 것은 이 2가지 힘에 의해서 된 것이라 과거 2인이라 합니다. 행, 이것은 충동적인 움직임이고 유위를 조작하는 의식입니다. 의도적인 마음이 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동물이든, 인간이든, 천상인간까지도 이것이 죄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이 단계는 보살지가 아니면 사실은 훤히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이치로 그러려니 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비구가 연못가에 앉아서 연못 향기를 맡고는 ’참 연꽃향기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연꽃신이 나타나서는 ‘당신은 파계승이요’라고 했는데, ‘내가 뭐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연못향기만 맡았는데...’라고 하니, 그때 ‘당신은 연꽃향기에 탐욕을 일으켰소.’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행의 단계를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 수 있어요? 안 되죠. 도를 닦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니고 진짜 성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온갖 향수를 다 갖고 쓰는데 위의 스님은 연꽃 향기에 취한 것 갖고도 탐욕이라고 했으니... 

 잠재의식에 들어가면 신들과도 대화가 되는데 스님은 신을 보고 신도 스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잠재의식에 들어갈 만한 정신의 맑음이 없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충동적 맹목적 본능적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TV에서 남녀 간 사랑을 자주 보는데 본능적이라고 하는데,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도의 입장에선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이 얼마나 미세한 번뇌인지를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봐야 압니다. 

  다음은 이렇게 해서 ‘식(識)’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내 영혼이다.’ 라고 하는 것이 이 때 형성됩니다. ‘무명과 행에 의해 금세에 태에 의탁하는 의식일 뿐이다.’ 했는데 이것은 무명과 행이 과거 2인에 의해 어머니의 태에 탁태하기 이전에 지은 업장들이 무명과 행으로 본능적으로 발동을 하게 되면 이게 태어나고 싶은 욕망으로 확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려면 어머니 자궁으로 갇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자궁은 이 세상 저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 자궁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 이 세상이 나타납니다. 어머니 자궁을 통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때 어머니 자궁에 탁 들어가는 무명과 행에 의해 이미 짓밟혀진 그 일념이 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분별 즉, 사물을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면 다시 태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분별심입니다. 그래서 무심하지 않으면 생사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태어나는 것이 바로 이 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행과 무명이 있겠지만 태어나는 것은 식이 어머니 자궁에 의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탁태일념’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마음 마구니의 소리라 했었지요. 여기서부터 무명과 행에 의해 짓밟혀진 그 상태로 판단하는 마음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전생에 지혜롭고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맑은 마음을 갖고 탁한 사람은 추악한 마음을 갖고 그 수준에 맞는 어머니 뱃속으로 찾아들어 갑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보고 누굴 닮아서 그러냐고 하는데 여러분들을 닮아서 온 것입니다. 수준이 맞는 것이지요. 

‘개념화된 내용을 분별하는 의식 작용이다’ 이때부터는 사물에 대해서 욕구가 들어가기 때문에 사물을 이해하려면 사물을 정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개념화된 내용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화두선에서 화두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개념화된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을 해도 어머니 뱃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식은 사물을 개념화시켜 인식하고 분별하려는 마음입니다. 엄격히 말해 중생 세계는 이 마음이 없으면 유지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도를 깨달으면 이 마음이 소멸이 되고 맑은 거울과 같이 비치는 대로 반응만 합니다. 그 때의 반응은 선악을 여읜 자리입니다. 이식은 선악을 비로소 정립하는 마음입니다. 이식이 세 번째 단계이니 이미 두 번이나 타락한 마음임을 알겠지요.  부처님이 연기법이라 했는데, 지금 무명으로부터 연기에 의해 물질화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식이 형성 되고나면 명색(名色)이 만들어지는데  명(名)은 정신적인 것이고 색(色)은 물질적인 것으로서, 어머니 뱃속에서 10달 동안 조금씩 자라납니다. 즉 식이 의지하는 물질이 형성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몸과 마음이라는 의식이 싹틉니다. 전에 낙태를 하려할 때 태아가 막 피하고 몸부림하는 영상을 본적이 있는데 이때 명색이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식이 의식된 모습과 그것에 붙이는 이름이 명색인데 내 몸과 내 마음이 연기한 현상에 이름이 주어지는 것 즉, 명색은 어머니 뱃속에서 몸뚱이가 자라고, 자라면 거기에 이름이 붙여지잖아요. 쉽게 정신적, 물질적 현상이 어머니 뱃속에서 발아가 되는 상태, 여기까진 뱃속의 일이죠. 이렇게 해서 연기되어 육입 즉, 육근이 갖춰지는 단계가 됩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완벽히 갖춰지게 되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되어 출태하기 바로 전 단계가 됩니다. 

육근이 완전히 갖춰지게 되면 아뢰아식에 있는 종자의 힘에 의해 어머니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게 하는 힘을 스스로 일으킵니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아뢰아식에 있는 정보들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태입니다. 우리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법은 6가지가 있습니다. 이때 이 세계를 존재의 6가지 방법으로 인식하는 단계가 6입(六入)입니다. 물질은 눈, 소리는 귀, 향기는 코, 맛은 혀로, 부딪히는 감촉은 몸으로, 정신적인 것은 의식으로 인식하는 단계인데 이것으로 6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서 외부와 부딪힐 때 이 세계를 6가지 존재로  파악하는 6근이 구족된 것입니다. 물론 전생의 업으로 6근이 불완전하게 형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정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를 6가지 존재로 파악하는 6입을 완전히 구족하여 출태 합니다. 이것이 출태일념(出胎一念)입니다. 앞에서 식(識)을 탁태일념이라 했었지요. 비로소 바깥 세계와 부딪히면서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6입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법입니다. 6입이 있어야 세계와 우리가 연결이 됩니다. 명색으로는 안 됩니다. 

 6입이 갖춰지면 세상에 태어나면서 세계에 있는 6가지 존재를 감촉하는 촉(觸)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눈은 색에, 소리는 귀에, 향기는 코에, 맛은 혀에, 부드럽고 딱딱한 감촉은 피부에, 생각은 그런 것을 조합한 명상에 부딪힙니다. 촉은 이와 같이 접촉을 통한 지각작용으로 주객이 펼쳐지는 단계입니다. 이단계가 갓난아기의 단계입니다. 이전에는 나와 남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딱 태어나면서 내가 하나의 ‘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주객, 즉 내가 보는 세계와 대하는 경계가 여기서 갈라지게 됩니다. 인식의 내용은 존재를 느끼는 것, 나와 세계가 펼쳐지고 자아와 대상에 대한 것들이 촉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식이 됩니다. 즉 나라는 존재감과 세계라는 존재감을 처음 느끼게 되는 것이 촉입니다.

  촉이 다시 연기를 하면 수(受)가 됩니다. 수는 생각과 분별인데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고·락·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이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는 거짓을 몰라서 눈앞에 뭔가 나타나도 두려움이 없으므로 그냥 빤히 쳐다보기만 합니다. 2~3살 정도 나이인데 여기서부터 수가 발동을 하는데 이때는 배부르면 웃고, 졸리고 배고프면 울고 하는 이런 상태입니다. 단순히 괴롭고 즐거운 것만 감수하는 단계입니다. 세계를 받아들였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춘기 이전까지가  수의 단계로 보면 될 것입니다. 애들은 욕망도 별로 안 크고 단순하게 살아가잖아요. 

 이렇게 하여 수가 연기가 되면 자기가 받아들인 느낌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愛), 즉 욕탐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춘기가 되면 욕정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은 아뢰아식에 있는 종자가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수에 의해 애(愛)가 만들어 집니다. 이 애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욕탐, 즉 욕계·색계·무색계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욕계는 모든 존재가 중생의 욕탐에 의해 규정된 세계입니다. 욕탐에 의해 도구화된 세계로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욕계의 특징은 어떤 사물이든지 자기 입맛에 맞추어 보려합니다. 즉 욕구화 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욕계에서 벗어나는데 비로소 욕구화해서 바라보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색계입니다. 색계는 대상을 인식하는 존재로, 세계는 인식이 되는 대상일 뿐이라는 그런 상태의 정신세계입니다. 무색계는 인식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대상세계임을 자각하여 색에 대한 생각이 멸진하여 세계는 사유에 의해서 존립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색계입니다. 애착하는 마음도 중생이 자기 존재에 대하여 탐착하게 되는 단계가 이런 세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는 고락에 대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주체적인 마음입니다. 나이로 16세 안팎의 사춘기인데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전생에 자기가 쌓았던 본성이 드러납니다. 

 애가 일어나면 취(取)가 연기하여 일어납니다. 취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입니다. 탐욕을 취하는 단계로써 이것은 성인들이 쓰는 마음입니다. 이때부터는 평생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가져야하고 나쁜 것은 멀리하려는 것이 이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평생 나는 착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교학적으로 보면 이것도 9번째로 타락한 것일 뿐입니다. 개념으로 탐착, 즉 자기 욕구에 대해서 탐착하고 견해에 대해서 탐착하는 것입니다. 견해란, 사견(邪見), 즉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따라가려는 잘못된 도덕률에 탐착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침부터 무엇을 보면 재수가 없다는 등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견취(見取)입니다. 계취(戒取,戒禁取)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중학생 때 아버지가 영어 학원 수강증을 끊어줬었는데 아침부터 학원에 가기 싫어서 극장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극장 매표소 여직원이 줄 맨 앞에 여자가 서있는 것을 보고는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가 없다고 줄 뒤쪽에 서있는 남자아이를 불러서 먼저 끊어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견취가 계취로 된 것입니다. 그다음 아취(我取)인데 내가 세계의 가장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타락한 상태의 망상심입니다. 촉에서 생긴 오온을 욕탐하는 것이 취입니다. 우리가 외부 세계와 처음 부딪혔을 때 감각이 느껴지고 그 감각에 대하여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것을 취하거나 버리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온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온의 실상은 연기하는 것인데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계속 업을 쌓게 됩니다.  한 가정에 못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잘못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취, 즉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취 때문입니다. 

  취사선택에 의해 집착, 취로 인해 유(有)가 연기합니다. 즉 다음 생에 태어날 새로운 존재가 만들어집니다. 그리하여 애·취·유에 의해 미래의 선악업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3인(三因)입니다. 현재 내가 하는 행동이 애·취·유 세 가지에 의해 미래의 선악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생기고 다음 존재로 대상화한 욕계·색계·무색계가 만들어집니다.

  존재가 만들어지면 그때 자아와 세계를 존재화 해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의식이 이때 형성되고, 즉 생이 만들어진다는 것과 나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도 이때 만들어집니다. 결국 태어나서 늙고 죽는다는(生·老死) 것은 최초의 무명에 의해 연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도를 깨달은 스님들이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不去不來),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라는(不生不滅) 얘기를 이래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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