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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8강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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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0,126회 작성일 21-08-09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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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강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지난 시간에 12연기에 관해 살펴봤는데 무명이나 12연기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위해서이고, 반야심경은 생사를 뛰어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최초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를 보면 무명에서 시작되어 노사에 도달하는 것으로 12연기에서 얘기하는 것인데 어떻게 무명을 뛰어넘고 끊을 수 있는가를 반야심경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시간에 했던 무명에 대하여 좀 더 설명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무명이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다시는 물들지 말라.’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언구로써 우리가 왜 태어나고 죽느냐? 무명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자기가 쓰는 생각 생각이 무명에 의지해서 쓰는 마음이기에 업을 형성하여 나와 남에게 무한한 빚을 지고 업을 쌓아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무명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은 그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착하고 선하게 살았어도 불교의 인생관, 우주관에 입각해서보면 자유, 해탈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인과적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면 그 사람이 불교를 믿고 안 믿는 것에 관계없이 거기에 과보는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천상에 나거나, 좋은 집안, 배우자, 친구 등을 만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범부들은 자기가 좀 뛰어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더 발전시켜 좀 더 높은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오만하고 교만해져서 뛰어나기 이전의 영적 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업을 지어 천당에 가더라도 마음의 무명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시 타락하여 구덩이에 떨어진다 했습니다. 궁극적 해탈을 원하면 또 나고 죽음의 긴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무명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무명은 최초의 어두운 일념(一念), 밝지 못한 일념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근본 무명이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어리석게 살다가, 자기가 존경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으로부터 한두 마디를 들고 개과천선을 할 수 있는데, 그때는 이 사람이 무명의 혼선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최초의 무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무명은 내가 겨우 한 생각을 일으키려는 생각 이전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써 이것은 굉장히 끈질긴 것으로써 보통 얘기로 본능적인 마음입니다. 누가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탁 가리키면 놀라서 피하는데, 이 피하는 마음에 벌써 무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세세하고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 무명의 정체를 알 수 없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최초의 일념 이것을 근본 무명이라 하고 그 다음 지말무명(枝末無明)이 있습니다. 이 무명에 의지해서 우리가 현상계에서 마음을 쓸 때 세 가지 상태로 마음 쓰는데 그것이 탐·진·치 3독입니다. 보통 전문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먼저 3독을 끊으라는 것을 강조를 하고, 탐·진·치를 끊는 방법 안에서 인과가 개입이 됩니다. 그런데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탐·진·치를 끊으라는 말을 하지 않고 무명을 끊으라고 합니다. 무명은 어머니고 탐·진·치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원효대사라는 책을 본적이 있는데 원효스님이 어느 절에서 공양주는 노릇을 하며 학인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절에서 원효스님을 알아보는 스님은 방울이란 스님밖에 없었고 학인들은 원효스님이 지어준 밥을 먹고, 원효스님이 쓴 대승기신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방울스님은 원효스님을 처음 보고 원효스님인줄 알아봤습니다. 방울스님이 원효스님에게 ‘그대는 이미 오욕을 떠났기 때문에 귀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학인들에게 공양을 지어주면서 저 사람들이 내가 지어준 밥을 먹고, 내가 지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있다는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화엄신장 눈에 띄었다.’라고 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오욕을 떠나면 그게 도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경지에서는 이것은 아직 도의 지말, 가지만 붙든 것이지 근본을 본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말무명이 탐·진·치 삼독인데 이것이 가지가 벌어져서 팔만사천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번뇌들은 크게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으로 나누어집니다. 소지장은 최초의 무명으로써 이 소지장을 깨뜨리지 않으면 어떤 선행을 해도 결국은 자기 입장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ego를 더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처럼 오욕에서 떠나더라도 화엄신장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지장을 깨닫고 나면, 다음 속세에서 익혀온 업이 아득하게 많아서 마음으로는 아는데 행동으로는 거꾸로 나갑니다. 마음으로는 예쁜 여자가 와도 눈을 돌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나타나면 아래 위를 유심히 보게 되는데 이것이 습으로써 번뇌장입니다. 탐·진·치가 게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스리는 것을 불가에서 오후보림(悟後保任)이나 수행이라고 얘기합니다. 무명에도 이렇게도 2가지가 있고 수행을 하는데도 2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가끔 공부를 좀 한 사람들이 뭘 봤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시초에 불과한 것이고 지말무명에 대한 것을 본 것이고 근본무명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근본무명은 깊은 삼매에 들지 않고는 깨뜨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21일 동안 흔들림 없이 선정에 들었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곰이 겨울에 겨울잠을 자듯이 몸과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들어가야 비로소 무명이 깨집니다. 이것은 무의식 안에 들어있는 무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현재의식으로 무엇을 하고 안하고, 지혜롭고 아무리 해봐야 잠 한번 들면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잠이 들면 나타나는 세계는 잠재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도 미치지 못하는 꿈도 없고 생각도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본 무명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하고 아득한 세계로써, 무의식까지도 초월한 청정한 맘이 부처의 경지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무엇을 조금 얻어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어떤 보살들이 ‘스님은 법문하시는 것을 보면 다 아는 것 같은데 왜 여태 산 속에 앉아계시는가요?’라고 하는데 아마 저는 세세생생 더 앉아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왜냐 현재 의식에서는 어느 정도 견처가 있는 사람은 사물에 물들지 않습니다. 사물이 내 앞에 왔을 때 이미 알아차립니다. 잠재의식 상태에서는 반은 알아차리고 반은 멀어지겠지만 무의식 상태에서는 확철대오하지 않는 이상은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문을 들고 조금 알아들었다고 해도 거기서 멈추게 되면 지말무명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원효스님이 오욕을 극복해서 귀신 눈에는 안 띄었지만 ‘내가 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화엄신장 눈에 띄어버린 것입니다. 신장 눈에도 안 띄려면 ‘내다’하는 한 생각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무명에 대하여 자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중에 정말 절실하게 공부를 하고 싶을 때, 자기의 경계나 상태에 대하여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남이 속이는 것은 기를 쓰고 파헤치면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은 자기가 속아 넘어가버립니다. 내가 도를 깨쳤다 얻었다고 하는 기가 막힌 경계, 좋은 것이고 순경계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명이 일어나는 곳을 스스로 깨달아 다시는 물들지 말라.’ 라고 한 것입니다. 간단하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무명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관음경의 흑풍 이야기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 중국에 큰 노스님이 계셨는데, 나라의 한 장군이 있어서 늘 관음경을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관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외우면 바다에 나갔을 때 흑풍이 불어도 흑풍이 사라진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법을 신앙적으로 들어간 경우입니다. 불법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지적으로, 신앙적으로, 의지적으로 들어가는 세 가지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관음경이 제일 적합하거든요. 어느 날 그 장군이 의문이 생겨 노스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은 상대방을 처음 볼 때 이 사람이 어디에 떨어져 있는 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스님이 장군을 보니 우직하고 지혜가 없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흑풍이 뭡니까?’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나라의 2품 장군입니다.’

‘이품장군이 아니라 내가보기엔 성 밖에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꽤재재 하다.’ 이 말에 장군이 자기를 비하한 말로 여겨 자기가 스님께 법문을 청하러 온 것을 망각하고서 화가 난 것입니다. 이것이 무명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보면 나에 대한 불이익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부모, 형제, 친구 등 어떤 대상이든 나에 대한 불이익을 감수할 수 없을 때 남에게 내뿜는 것이 미움입니다. 이럴 때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군인입니다. 처음 법문을 들으러 왔을 때의 공손한 모습은 없고 꽤재재 하다는 말에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칼을 뽑아들었는데 이것이 살생하던 습입니다. 그때 노스님이 큰소리로 할을 하면서

 ‘이것이 흑풍이다.’

 그 소리에 놀라 장군이 칼을 뽑다가 거기서 멈칫했습니다. 여태 자기감정대로 살던 사람이었잖아요. 칭찬하면 웃고 욕을 하면 화를 내고 하는 상태로만 살다가, ‘이것이 흑풍이다.’ 라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자기가 어디서부터 미혹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3배를 하고나니 노스님이 

 ‘이것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니라.’ 

이 장군은 큰 도인을 만난 덕분에 평생 참선을 하지 않고도 한 언구에 깨달은 것입니다. 근본무명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일상 속에서 고찰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스님과 장군의 얘기지만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만났던 사람과 환경이 여기에 준하는 것입니다. 헛것을 보고 헛된 마음을 일으켰다 사라질 때 헛것이 아닌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을 스스로 깨달으라 했고 다시 물들지 말라고 했는데 이 한 도리를 잘 깨달아야 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수행을 하는데 마음의 힘이 많이 덜어집니다.

‘찰나에 아비지옥의 죄업을 없애고 만법이 본래 공한 줄 깨달으면 무명이란 지난밤 꿈속 일이다.’

앞에서 노스님이 찰나에 장군이 칼을 뽑는 순간 탐·진·치가 다 일어나 아비지옥에 있던 것을 한마디로 딱 제압을 해버렸잖아요. 만법이 본래 공한 줄 깨닫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지 수행 중에 뭐가 나타나고, 신비스럽고 희한한 무엇을 경험하고 하는 것들은 다 외도입니다. 자기가 그린 것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장군이 자기가 잘못 생각하여 분노한 것도 자기가 그린 것이고, 참선을 하다가 그윽한 경지에 들어가 고요하고 평화롭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것도 자기가 그려놓은 것일 따름입니다. 만법이란 우리가 살면서 평생 동안 일으키는 모든 것들입니다. 나에게는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쁘니까 특별히 잘 해주고, 저것은 미우니까 보지 말고 멀리 해야 된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늘 이렇게 마음을 쓰고 법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만법입니다. 깨닫게 되면 이런 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내가 일으킨 마음들이 실재하지 않기에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인연의 소산물이라고 하지만 수행문으로 보면 딱 일념단속입니다. 일념단속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어디서 단속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무명이란 지난 밤 꿈속의 일이다.’ 한 것은, 장군이 화가 나서 노스님의 목을 칼로 치려다가 자기가 어리석음을 깨닫고 딱 쉬고 보니, 자기가 평생 그런 마음을 쓴 것을 알았고 다음부터는 그런 마음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꿈속의 일이었거든요. 이렇게 꿈을 깬 사람이라야 마음이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고, 이것을 부처라 합니다. 그전에는 다 꿈속에 취해서 그냥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가에서는 법신 부처가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중생이고, 법신 부처가 꿈을 깨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 도인이라고 했습니다. 찰나에 아비지옥의 죄업을 없애는 것이 돈오돈수입니다. 몰록 깨달으면 마음이 몰록 닦아집니다. 몰록 일체 업력이 쉬어버리니 돈오돈수라 하는데, 엄격히 말하면 돈오돈수는 없고 돈오점수입니다. 깨달았어도 습이 많은 중생은 다시 갈고 닦아야 합니다. 

 천수경에 있는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란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백겁으로 쌓은 죄. 사람이 백년도 못살면서도 수많은 생명이 자기 한 몸을 위해 희생을 하는데 하물며 수백 겁을 살면서 그 순간순간 쌓은 업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한 생각에 몰록 다 없어져버린다. 꿈속에서 어떤 이가 백겁이나 되는 꿈을 꾸어도 옆 사람이 툭 건드려 눈을 떠 꿈을 깨면 꿈속 일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게 돈오돈수 요법입니다. 이와 같이 무명의 정체만 알면 일념에 몰록 백겁에 쌓인 죄가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백겁동안 뭔 짓을 안했겠습니까? 이것을 근본적으로 참회할 수 있는 방법은 깨닫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신론에서 진짜 참회는 무념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 그래서 이것은 마치 마른풀에 불이 붙는 것과 같고, 타고나면 아무 흔적도 없이 재만 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앞에서 흑풍을 깨달은 장군은 이 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이렇게 깨닫는 것이지 머리를 이리저리 재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 것이고 지식으로 알아들은 것일 뿐입니다. 깨달은 것은 그 지혜가 한번 나타나면 그 다음부터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인생관이 확 바뀌어 버립니다. 그전에는 무슨 일이든지 잘못되면 남의 탓으로 돌렸지만 도를 깨달은 사람은 남의 탓을 절대 안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마음에서 일어난 것 즉 진성연기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에게 잘했을 때 일어나는 좋다는 느낌도 자기 마음에서 일으킨 것이고, 자기에게 못해줄 때 일어나는 미운 마음도 내 마음에서 일으킨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는 나와 남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도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스스로 성품이 없어 다만 마음을 좇아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경계를 만나 일어나는 좋고 싫은 마음은 사물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의지해서 일어난 것도 아닌, 결국 죄라는 것은 내가 반응한 마음에 의지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죄를 없애려면 반응하는 그 마음을 쉬면됩니다. 그래서 옛 스님들이 누가 도가 뭐냐고 물었을 때 ‘망상 피우지 마라’, ‘한 생각 쉬어라.’, ‘한 생각 안 태어난 셈 쳐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죄가 달라붙을 곳이 없어집니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 마음이 만약 멸하면- 여기서 마음은 생각, 곧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참마음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데, 이것이 작용으로 나타날 때는 분별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분별로 나타나는 과정이 내다하는 주관을 세워, 내 입장에서 사람을 대하다보니 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죄 또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참회가 참 간단하죠? 무심해야 되는데 무심해지기 위해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갈고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삼매에 든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지었던 일체 죄업이 내 한 생각 분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쉬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마음의 바탕을 모르기 때문에, 설마 이정도로 될까 하는 의심을 갖고 믿지를 못합니다.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爲眞懺悔): 죄도 잊고 마음도 사라져 둘 다 공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참회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도 수행을 하면 업이 가벼워집니다. 수행을 함으로써 마음도 사라지고 죄도 사라지는 이치대로 살기에 죄가 의지할 곳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과거 생부터 수억 겁 동안 온갖 죄를 다 지었겠지만 한 생각 망념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게만 되면 망념을 일으킬 생각이 사려져버립니다. 내가 일으킨 것으로 인해 그 업력이 내에게 오는 것임을 아는데 어떻게 망념을 일으키겠습니까? 이것이 깨닫고 나서 닦는 요법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않고는 의심이 많아서 닦을 수도 업습니다. 

 ‘무명의 참 성품이 그대로 깨달음이요, 환화(幻花)같은 빈 몸뚱이 그대로 법신이다. 법신을 알고 보면 한물건도 없다.’

 우리 마음자리, 이 자리를 깨닫고 보면 한 물건도 없다 했는데 옛 스님들이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내다’하는 것을 세우는 순간 만법이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그것도 자기 소견만큼 일어납니다. 무명의 참 성품이 그대로 깨달음이라 한 것은 무명의 원래 진짜 성품은 실재하지 않음입니다. 무명이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세계도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깨닫지 않으면 이것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환화같은 빈 몸뚱이 그대로가 법신이다. - 이 몸을 일정기간 유지했다가 몸  속의 기능이 다하면 나중에 파괴되어 늙고 죽게 되는데, 이 몸뚱이가 법신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중생은 금반지가 금으로 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반지라는 것만 실재하는 것으로 밖에 보지 못하여 환화가 되지만, 깨달은 사람은 금반지 자체가 금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중생의 몸이든, 보살의 몸이든 다 법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신을 알고 보면 한 물건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금부처 금도깨비, 금반지 등의 여러 가지 형상이 있는데 이게 다 형상으로써 이 형상들의 공통적인 점은 금입니다. 변하지 않는 성품은 금인데 그 금을 딱 보면 모든 형상들이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 물건도 없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아주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애착하고 탐착, 미혹했던 경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설명했습니다. 무명이란 우리의 밝지 못한 마음이 금이 불상으로 나타나면 거룩하다하고 금도깨비로 나타나면 무섭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명의 실체 알고 보니 금이더라는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니 금도깨비도 작용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체는 작용만 존재할 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무명이 없는 것입니다.

‘역무무명진’- 무명이 다한 것도 없다.

이것은 무명이란 것을 중생입장에서 보면, 아까 장군이 일으킨 흑풍은 자기를 가상하여 세우고 비하하니까 살생하려는 분노가 일어났고, 그 일어난 마음을 한마디로 제압을 하고 보니, 그것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진 상태에서 자기가 일으킨 성낸 마음을 살펴보니 거북털과 같아 실재하는 마음이 아니고 미혹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허다한 망상이 사라져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라졌다는 견해도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망상을 피우다 없어졌을 때 망상을 없앴다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없앴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내가 일으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존재로 나타난 것이지, 착각한 마음이 없을 땐 존재로 인식할 대상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경지에서 보면 무명이 없다거나  다해서 없어졌다는 견해조차도 무명에 대한 또 다른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몸에 집착하면 무명이 있고, 무명이 있으면 삼독이 있으며, 삼독이 있으면 삼악업을 지으니 바깥 경계에 미혹되어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일체 중생이 자기라고 할 때 자기 몸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몸을 기준으로 해서 무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자도 가장 괴로운 근심덩어리가 몸뚱이가  있는 것이라 했는데 불교적으로 보면 이것도 소승나한의 견해에 있습니다. 수행문으로 봤을 때 몸이라 하지 않고 ‘마음에 집착하고’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몸이라는 것도 여러분이 내 것이라고 마음으로 인식할 때만 귀한 것이지, 남의 죽은 시신을 보고 귀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고 인식하기에 씻고 바르고 치장하고 합니다. 그것이 ‘내다’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집착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고, 수행 측면에서 깊이 들어가 보면 ‘내다’라는 마음에 집착하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 자체가 무명이거든요. 그래서 몸에 집착하면 무명이 있고-근본무명이 이렇게 시작 되는데, 무명이 있으면 지말무명, 즉 3독이 나타납니다. 경계에 대하여 취하거나 버리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유로울 땐 기뻐하고 여유가 없을 땐 분노하고, 그래서 다시 어리석어지고, 3독이 있으면 그것이 악업을 짓게 되는데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질 3악업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올바르게 살아서 다음 생에 왕후장상으로 태어나더라도 교만해져서 또다시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닫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음에 집착하면, 이것을 여러분들이 수행하기 좋게 해석하면 자기 자신, 자기 마음에 집착하면 이렇게 하면 좋겠지요. 여러분들이 괴로운 것의 90%가 자기 마음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미워 죽겠는데 왜 내 눈에 보일까?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미워 죽겠는데’하는 것이 무명인 줄 알아야 합니다. 왜 괴로울까요? 나에게 이득이 안 되니 미운 것입니다. 잘나고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오감에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집착하면 무명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수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이런 구절을 듣고 날카롭게 알고서 여기서부터 일념단속을 그때그때하게 되면 수행이 됩니다. ‘무명이 있으면 삼독이 있고 삼독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물인 현상업인 지옥·아귀·축생의 업을 지으니 바깥 경계에 미혹되어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이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이미 무명 그 자체가 본능이 됩니다. 누가 싫은 소리나, 그리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면 ‘왜 이것이 본능인데?’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법문을 일반인들에게는 하질 못합니다. 일반인들은 ‘그럼 우린 무슨 낙으로 살아요?’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는 인과법문(因果法門) 정도로 해서 좋은 일 많이 하면 좋은데 가고 악한 일 하면 나쁜 곳에 간다고 해서 단순히 그 업을 순화시키는 수준 밖에 하질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젊어서 문경 주흘산 안정암에 있을 때 결혼을 앞둔 한 아가씨가 인사차 암자에 왔다가 내려가는 길에 배웅하러 나갔다가 하늘을 보니 오색구름이 묘하게 떠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하늘을 보더니

 ‘스님, 하늘을 보세요. 봉황이 보여요.’ 

 ‘나에게 물어봐라. 저게 무슨 구름인지 가르쳐주마.’ 

 ‘저것이 무슨 구름이에요?’ 

 ‘구름이지.’

이것이 무어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사물을 파악합니다. 자기 업력만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환경 자체가 자신의 업력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하는 사람은 그 업이 실재하지 않음을 철저하게 파악한 사람이거든. 구름을 보면 구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먹구름을 보면 우울하다 하고, 흰 구름을 보면 가볍다 하고, 오색구름을 보면 상서롭다고 합니다. 결혼을 앞둔 아가씨에게 오색구름이 상서로운 것이라고 얘기를 해줄 수도 있지만 수행하는 사람이 인정이 깊으면 도가 얕아집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24시간 전신이 안목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것에도 자기 견해를 곁들이지 않아야 마음을 닦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한 경계를 얻어야 합니다. 대상을 만나 미워하고 질투하고 하는 것이 모두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견해가 들어가는 것이 곧 무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쓰는 것이 무명에서 붙임을 합니다. 하늘에 오색구름이 떠있는 것을 보고 그 보살을 봉황으로 봤고, 나는 그냥 구름으로 봤는데, 차이가 뭔지를 여러분들이 잘 돌이켜 보면 일상사에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마음을 미혹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있는 그대로 못 보잖아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이지, 좋은 산 나쁜 산은 내 업력만큼 판단한 것일 뿐입니다.

불설대사정경(佛說大邪正經:크게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경이란 의미의 경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무릇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물을 버리고 얼음을 찾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이 깨달음 자체인데 또 다른 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배우고 익힌 만큼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지어내게 됩니다.

 ‘얼음이 곧 물이며, 물이 곧 얼음이다.’ 여러분들이 쓰는 마음 자체가 다 이 깨달음의 표현인데 깨닫지 못했음으로 인해 이것 외에 또 다른 거룩한 깨달음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참으로 욕심이 없고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자기 마음 밖에서 신비한 어떤 것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스님이 공부를 하려면 단순해야 되고 진실하고 성실해야 된다고 얘기 하는 것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 밖에서 뭘 구하려는 것이겠어요? 부처님이 성불을 하시고 공관을 이루었지만 최초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쓰는 마음 그것이 곧 부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툭하면 성내고 짜증내는 것이 내 마음인지라 여러분들은 못 믿겠지요. 

 ‘번뇌와 깨달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번뇌를 버리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마치 형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것은 병에 따른 약과 같은 것입니다. 병이 없으면 약도 없듯이 그럴 땐 깨달음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는 깨달았다고 하지 않고, 중생이 깨달았을 때 깨달았다고 하지 부처 자신은 깨달은 상태이기에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번뇌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는 깨달음이라는 약이 필요한 것이지, 본래 무일물입니다. 본래 깨달음이고 부처고 뭐고 할 것도 없이 한 티끌도 거기에 세워 놓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깨달음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형체가 곧 그림자요. 그림자가 곧 형체이다. 형체 밖에 그림자가 없으며 그림자 밖에 형체도 없다. 마음과 부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마음을 버리고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소리가 반향이고 반향이 곧 소리이며 소리 밖에 반향은 없고 반향 밖에 소리가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어디 기독교의 천당이나 옥황상제와 같이 멀리서 구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렇게  자기가 안락하려는 욕구를 일으키는 그것이 무명임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요즘 모든 종교는 정(情)적인 종교인데 그 특징이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표적인 종교인데 불교에서는 욕구를 만족 시켜주는 그 자체가 무명이야. 그것은 근본 무명도 아닌 탐·진·치의 지말무명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데 싫다고 하면 성질을 내는데 그것이 무명 속에 묻혀 살면서도 무명인줄 모르고 쓰고 있는 것이어서 부산에서 사찰 무너지라고 기도하는 뻔뻔한 일도 하는 것입니다.


‘내지 무노사(乃至 無老死)’ : 무명이 다하는 것에 대한 소견도 다 끊어지니 어떤 언변으로도 이 상태를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상태에 들어가 보니 우리가 늙었다 죽었다 하는 것조차도 우리가 일으키고 분별했던 그 마음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이지, 그 마음이 없을 때는 노사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 최초의 무명이 12연기에 의해 노사까지 벌어진 것인데 무명이 실재하지 않는데 노사가 어디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늙고 죽음은 본성 위의 구름이다.’  아까 그 아가씨가 하늘 위의 오색구름이 떴다고 했지만 오색구름이 의지하고 있는 푸른 하늘에 의지해서 보면 한 점 흠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구름을 구름으로 알아야 흠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사를 본성 위의 구름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으며 이것이 불지견(佛智見)이다. 한 법도 보지 않으면 그분이 여래이다.’ 우리가 최초의 무명을 쓸 때 그 형태가 ‘내다.’하는 한 생각에 의지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목표는 ‘내다’하는 한 생각을 일으킬 때 한 생각 쉴 줄 알면 그 사람이 도를 깨닫든 못 깨닫든 공부가 되겠지만 오히려 내라는 생각을 확장시키려 한다면 이것이 마구니가 되는 것입니다. ‘내다.’ 하는 한 생각을 쉴 줄 알면 시방 부처님도 그 사람을 못보고, 삼세제불도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어, 개념, 이념, 관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기 때문에 ‘네가 누구다.’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은 덧없는 것, 하물며 노사이겠는가? 죽은 뒤 태워버리면 연기마저 사라지는데 어디로 향할 것인가?’ 젊은 시절 탱탱한 피부와 혈기도 덧없이 사라졌지요. 하물며 늙고 죽음까지도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인연에 의해 사라지기에 무상하고 덧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어 화장을 하고나면 연기까지도 사라지는데 우리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몸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주는 ‘죽어도 한 줌 티끌이 되고 연기도 날아가고 재도 흩어졌을 때 오늘 이 법문 듣는 놈은 어디 있는가?’ 하는 화두가 있습니다. 몸에 집착이 많은 사람은 이 화두를 탐구를 해서 도를 깨달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죽어 화장 후 뼛가루까지 바람에 날려 보내면 오늘의 이 법문을 듣고 생사를 벗어나려는 그 마음은 어디 있을까 하는 화두입니다. 일념으로 관찰하는 화두, 죽은 사람을 이용해서 수행하는 수행법입니다. 남의 장례식장에 가서 옛날 생각만 하고 멍하니 있지 말고 고인은 지금은 어디에 있고, 내가 죽으면 어디에 갈 것인가를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두철미하고 냉철함이 없이 신앙심만으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사물이 생하는 것은 공이 생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도 공이 소멸하는 것이다. 본래는 한 물건도 생하는 것이 없으며, 한 물건도 소멸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요새는 아인슈타인의 질량 불변의 법칙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질량 불변의 법칙은 색법에 대해서 설명을 한 것이지 심법에 대해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견지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물은 모두 탐욕과 마음으로 인하여 그 모습이 나타난다.’

여러분들이 평생 보고 듣는 경계가 결국은 여러분들의 ‘내다’하는 한생각과 탐욕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경계였든 나쁜 경계였든 그것조차도 백년 안쪽 일이지요. 그래서 한줌 재가 되어 흩어져버리고 나면 그 수많은 세월동안 겪었던 경험했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가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은 안에도 밖에도 없고 그 주변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이것이 골자입니다. 무명이 실재하지 않음을 간파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탐욕스런 마음은 ‘내다.’하고 분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다.’라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이 나에게 좋고 나쁜 것이라고 분별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분별이 공한 줄 알아야 도를 닦는다는 얘기인데 여태껏 한 얘기가 이것입니다. 그래야 생사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분별이 공한 것인데 범부는 그 분별로 인해 불탄다.’

 평생 여러분들을 괴롭힌 것이 이 분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보살이 결혼하여 어른이나 시댁 가족들에게 시집살이는 잘하고 있다가 어떤 사람에게서 ‘너는 왜 병신같이 그렇게 당하고만 사느냐?’ 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여태껏 잘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다가는 그 얘기를 듣고, 자기가 하는 행동을 하나하나에 대하여 분별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무심으로 해서 전생에 업도 소멸이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분별에 떨어지면서 죄업이 형성이 됩니다. ‘내다.’ 라는 것을 세워놓고 사물을 보게 됨으로써 그만큼의 죄업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도 닦는 요령입니다. 그래서 범부는 분별로 인해 불탄다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삼계가 불타고 있다고 하면서 눈이 불타고, 귀가 불타고, 코가 불타고, 입이 불타고, 생각이 불탄다고 했습니다. 탐·진·치에 의해 불타는 것인데 근본적인 것은 ‘내다’라는 한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생 살아온 것이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것도 입이 불타려고 한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불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맛에 집착해서 그것을 기억하려는 분별이 앞서기 때문에 불이 탑니다. 이해가 안가죠. 여러분들이 제대로 된 공부를 하려면 화두가 물론 좋지만, 미혹하지 않는 공부를 하려면 여러분들의 분별이 공한 것을 알아차리는 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아마 평생 분별하는 것이 내가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도 스스로를 분별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더 빨리 분별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사물의 옳고 그름은 밖에도 안에도 없으며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내다 하는 한 생각에 있습니다. 공부의 키포인트가 무엇인지 알겠지요. 내다하는 한 생각 쉴 줄 알아야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늘 일념단속이라고 스님이 강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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