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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6강 무색성향미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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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845회 작성일 21-08-09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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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강


무색성향미촉법

                                     


 ‘베어도 끊이지 않고, 묶으려 해도 붙들 수가 없으며, 태우려 해도 불붙지 않으며, 화살을 쏘아도 뚫어지지 않고, 비가와도 젖지 않으며,’ 라고 했는데 ‘비가와도 젖지 않으며’라고 하는 이 구절에서 도를 깨달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옛날 한 사람이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자기 색시 될 사람을 전에 몰래가서 봤는데 너무 예쁘고 좋아서 말을 타고 신부 집에 혼례를 치르러 가는 길에 신부생각을 하다가 신부삼매에 들어버렸습니다. 김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을 보면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데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리는데 그 사람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지극하니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도를 깨달아 버린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이든 무엇이든 일념이 되면 모든 생각이 소멸이 됩니다. 마음을 일념으로 묶으면 자연히 내면으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신랑이 신부 생각을 골똘히 하여 신부 삼매에 빠져들었는데, 이 상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마음이 이미 분별이 끊어진 자리니까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일행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었는데 신랑은 가만히 말을 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신부 집에 도착해서 신랑이 자기 옷이 왜 젖었냐고 물어보니 주위 사람들이 오는 길에 비가 왔었는데 몰랐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가만히 더듬어보니 신부생각만 하다가 자기도 잊어버리고 주위의 세계도 잊어버렸는데 이것이 아공·법공입니다. 순간 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걸 미쳐 눈치 못 채고 있다가 조금 전 자기가 들었던 마음자리가 번뜩 스치며 도를 깨달은 것입니다. 장가가면서 도까지 깨달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냐 허공은 비가 와도 젖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젖지 않는 성품을 알게 되면 생사가 나를 더럽힐 수 없고 생사가 나를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없으므로 비로소 윤회가 끊어지고 해탈이 됩니다. 이런 사람을 도인, 아라한, 보살, 부처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팔아넘기려 해도 값을 매길 수 없으니’,  저 무변 허공을 값으로 치려하면 살 사람도 없거니와 값을 매길 수도 없듯이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를 값을 매기려 해도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살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려 해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니 도대체 이 무엇일까?’ 그래서 이런 전제하에 드는 화두가 ‘이뭣고?’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 화두를 잘못 들면 ‘밥 먹는 것이 이뭣고?’, ‘말하는 것이 이뭣고?’ 이렇게 들게 되면 자기는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자기의 분별의식을 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이뭣고?’ 화두를 들어도 생사 안에 갇혀있는 마음이 됩니다. 이런 ‘이뭣고?’를 들고 있으면 평생을 그르칩니다. 대부분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밥 먹는 이놈이 뭔가?’, ‘말하는 이놈이 뭔가?’ 하고 이러면서 다니는데, 그것은 화두 드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나 생사심을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증무색’의 결론이 ‘가을하늘이 서늘하니 온갖 중생이 서늘하다.’ 추석이 지나고 이런 쌀쌀한 산속에서 사 보름달이 떠있을 때 자기 마음을 돌아보면 그때 냉랭하고 초롱초롱 해지는데 그 상태에서 사람을 보면 그 대상이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다 서늘할 뿐일 것입니다. 자기가 견해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자리를 터득을 해야 비로소 생사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왔듯이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렇고 이렇게 하다보면 걸음걸음이 염라노자에게 자기 몸과 마음을 통째로 맡기는 행위가 됩니다. 업력을 일으켜 다시 나고 죽는 사슬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공중무색인 이 자리는 수·상·행·식이 없습니다. 공중무색 했을 때는 이 자리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를 했는데, 그 다음은 ‘공중무수상행식(空中無受想行識)‘이라 해야 맞습니다. 수·상·행·식은 중생이 자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놓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자기 업력의 그림자 모습입니다. 허공에 한조각 구름이 떠있는데 그것을 중생을 자기라고 생각해 허공에 떠있는 그 구름을 자기 마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지키는 마음의 허망함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이 왜 생사에 뛰어들고, 왜 나고 죽으며, 왜 긴긴 세월을 윤회를 거듭할까요? 이 수·상·행·식을 자기 마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상·행·식을 다른 말로 ‘생사심’ 즉 ‘나고 죽음의 마음’ 이라 합니다.

 교학적으로 수(受)는 바깥경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정신작용 감각인데 수에는 고(苦), 락(樂), 사(捨:고도 아니고 락도 아닌 상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금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기쁨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그것은 도가 아니라 ‘수’입니다. 이런 상태를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想)은 받아들여진 고·락·사의 마음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 작용, 그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상상을 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이것은 어떤 것일 것이라고 상상을 하게 되는데, 쾌감은 기쁨, 괴로움을 노여움으로 나타나고 사(捨)는 담담함으로 나타나는데 이 담담함까지도 사실은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중생들이 수행해나가면서 도라고 착각하는 것을 끊어주는 것입니다. 

 행(行)은 자기가 생각하고 개념을 둔 것에 나름대로 자기의 의도를 첨가하는 것입니다. 기쁜 것에 대해서는 계속 유지하려는 의도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욕탐이나 사랑이며, 나쁜 것에 대해서는 멀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증오와 분노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자기가 쓴 정신적 행위에서 업으로 형성되는 것이 이 ‘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식(識)은 이렇게 만들어진 경계에 대해서 확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경계를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이라, 여러 체험 속에 종합적 지식이나 관념을 형성해서 판단하는 의식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진·선·미, 위·악·추라고 하는 것들을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의 성격, 학력, 교양 등이 사람마다 다른데, 가령 이명박 대통령 같은 경우도 온 국민이 다 싫어할 것 같지만 여론조사를 해보면 10~20%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각자의 행과 식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인생사에서 커다란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당연히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서 배려를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업이 소멸이 됩니다.

 허공의 본바탕이 왜 무수상행식이라 했는가? 허공의 본바탕은 무자아(無自我)이기 때문입니다. 무자아는 제법무아의 뜻입니다. 모든 것은 고정적인 실체가 없고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기 때문에 무자아입니다.

 그다음 무아상(無我相), 허공의 본바탕은 ‘나’라는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또 허공에 대고 욕을 해도 허공은 눈 깜짝 안합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허공의 본바탕을 깨달은 부처님에게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처님 전에 불공을 하고 기도해서 복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근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절에 오는 종자가 끊어지니 그냥 무슨 기도라고 해서 계속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어놓아야 나중에 정말 불교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서 배우러 다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고 금강경에 나오듯이 무유정법이라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떨 땐 나쁜 법이지만 때론 좋은 법도 되는 것입니다. 무아상, 무아집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은 색을 놓아두어도 공은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우리가 마음을 이렇게 닦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제일 먼저 사물을 인지할 때 색으로 판단을 하는데 색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마음이 그것을 집착하거나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수를 놓아두어도 공은 수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수는 느낌입니다. 좋은 느낌, 나쁜 느낌, 평범한 느낌. 그런데 사람들이 ‘저는 저 사람을 보면 기분 나쁘고 싫어요.’ 하듯이 기분 나쁜 것은 느낌이고 싫다는 것은 식(識)이 하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시작해서 상상을 하고 행위를 해서 싫다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식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 느낌은 세상에서 가장 중심인줄 압니다. 모든 사람의 느낌은 안 믿어도 내 느낌은 옳다고 믿는 것이 범부입니다. 느낌에 의지해서 사물을 판단하려는 것은 오류입니다. 이것이 도를 닦다보면 색에서 벗어난 사람이 두 번째 잘못 하여 외도로 빠지는 것이 여기입니다. 지금 제가 수행문을 철저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상을 놓아두어도 공은 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은 자기 상상입니다. 이 상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서부터 자기가 받아들여진 정보 하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해낸 것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부부지간의 의처증과 의부증이 바로 상으로 인한 것인데 느낌으로 시작해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상’을 뛰어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수행이 간단한 공부가 아닙니다. ‘상을 놓아두어도 공은 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는 이정도 경지가 되어야 마음 쓰는 것이 자유로워집니다.

 ‘행을 놓아두어도 공은 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행은 어떤 일을 할 때 잔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치고 제대로 도 닦는 사람 보기 힘듭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의도가 많기 때문에 즉 계산적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행을 쓰는 것입니다. 이 행이 바로 다음 생에 받을 업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수·상까지는 미세하여 미쳐 업력으로 형상화가 안 되지만 행에서는 다른 사람 눈에 다 띄게 됩니다. 잔머리 쓰는 것, 의도적으로 쓰는 마음들이 다른 이에게 다 띄는 것입니다. 예전에 게가 배에 치에 죽은 것을 보고 제자가 스승에게 누구의 업이냐고 물었던 일화를 예로 든 적이 있는데 이것은 누구의 업이냐고 물어본 제자가 의도를 일으킨 것입니다.

 ‘식을 놓아두더라도 공은 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 공을 여러분의 마음자리로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더 이해하기가 쉽겠죠. ‘식’은 결론을 짓는 마음입니다. 무엇이 어떻다고 하는 결론을 짓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참 무서운 얘기지만 이것을 선입감이라 하는데 우리는 자기에게 입력된 그대로 대상을 봅니다. 식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싫어하거나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예뻐 보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면 ‘너 그럴 줄 알았어!’ 라고 하게 되는데 이런 판단을 식이 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내가 일으키는 마음 낱낱이 이런 것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엄격히 얘기하면 수행을 하는데 보살들이 높고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만 선방에 가서 배우거든. 그래서 도라는 것이 멀리 잇는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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