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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2강 반야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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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772회 작성일 21-08-0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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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반야의 종류

 지난번 시간에 지혜와 지식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생활에서 영명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지혜를 후득지라 합니다. 마음의 본체가 맑고, 밝게, 깨끗하게 깨쳐도 중생계의 일을 다 경험하고 거쳐야 나오는 지혜가 후득지라는 것입니다. 보살이 깨닫고 나서 다시 닦는 수행 즉 중생을 돕기 위해서는 중생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고통을 풀어 줄 수 있는 후득지를 터득해야 하기 때문에 보살이 만행을 합니다. 즉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현실에도 어둡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스님이 컴퓨터를 한다든가 CD제작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득지의 단점은 생사를 벗어나는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고 죽는 것을 면할 수 있는 지혜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데 이것을 근본지라 합니다. 이렇게 지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삶에 의해서 현명하게 사물을 판단

하고 운영하는 후득지는 배워서 경험하고 직감에 의해서도 터득

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또 하나는 근본지로 남이 나한테 가르쳐 줄 수 없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무사지(無師智)로 스승 없이 터득한 지혜입니다. 

스승은  증상연으로 즉 깨닫는 조건은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깨닫고 안 깨닫고는 본인

마음의 맑기와 노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사지와 후득지를 완전히 터득하신 분이십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다 부처라 하지 않고 

보살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경전을 보면 ‘아난아 내가 중생

을 위해서 몸을 버린 땅을 헤아려보면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많은 세월동안

몸을 버렸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다음은 근본지(根本智)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전에 금강경을 보다가 불교경전을 본 적도 없고 읽은 적도 없었는데 홀연히

마음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스승 없이 터득을 했는데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후당(後唐)황제 이경이 법안 스님을

모셨을 때 모란이 가득 핀 정원을 거닐며 스님이 읊은 시가 있습니다. 

법안 스님이 도를 깨치기 위해서 젊어 도반들과 도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여기

저기 찾아다니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어떤 암자에 피신했습니다. 다음 날 비는 멈추고 젊은 스님들이 떠나려하자 그 암자에 계시던 나한 계침스님이 묻기를 “스님들은 무엇하러 돌아다닙니까?” 

법안이 대답하기를 “불법을 무엇인지 생각하며 다닙니다.”

나한계침이 “어떤 것이 생각하는 일입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것은 달마가 서쪽

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계침선사가 “스님들께서는 생각하러 다닌다고 했는데 이 세상이 마음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세상이 스님들과 같습니까? 틀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법안스님이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법안 스님께 묻기를 “조금 전에 스님이 마음이 세상을 만들었고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 저기 법당 앞에 있는 바위가 스님 마음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법안 스님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생각하는 스님이 있는 것도 버려야 하는데 저 무거운 바위를 어떻게 마음에 넣어 다니느냐?” 고  묻자 밥안스님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법안스님은 계침선사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이 암자에 한 달동안 머물며 소견을 대답 했으나 그 때마다 “아니다” 라고 하자 

결국 법안스님은 “이제 할 말도 끊어졌고 더 이상 생각해낼 이론도 없습니다.” 라고 했더니 계침선사가 “불법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대로다.” 라는 말에 법안이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법안 스님이 후당 황제 이경을 교화하기 위해 읊은 이 시를 잘 이해하게 되면 불법의 한 귀퉁이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가사자락 걸치고 꽃 숲을 마주하니 오고가는 인연이 서로 같지가 않네

 머리털은 오늘따라 희끗희끗 늙어가고 꽃 들은 예전처럼 다시 붉게 피는구나

 아름답고 어여쁨도 이슬처럼 사라지고 저녁바람 불어오면 고운향기 흩어질걸 

 하필이면 잎이 다진 그 때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덧없이 허무한 줄 알겠는가?


이 시는 무상을 이야기하고 공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럼했던 힘들고, 기쁘고, 슬프고, 실감나게 느꼈던 

것들이 봄날의 꿈처럼 흔적도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은 도 닦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잘 살아야 백년인데 이것도 눈 깜짝할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교리 중 첫 번째인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배워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도를 배우거나 닦을 때 힘이 됩니다.

꽃을 보면 화려하지만 석 달만 있으면 추풍낙엽이 됩니다. 즉 오고가는 인연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저녁 바람이 불어오면 좋은향기가 

흩어지듯 저녁은 황혼이니 곧 죽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답고 휘황찬란할 때 그 무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도반 스님이 나에게 불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한번 공을 철저하게 안 사람은

일체에서 공을 본다.“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 공을 터득 할 때, 즉 스승 없이 터득하는 지혜를 얻는데 첫 번째 조건이 무아를 깨달아야 합니다. 

공의 다른 표현이 ‘무아’입니다. 그래서 그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약이 바로 무상과 무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품이 좋아도 백이면 백 모두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얽힌 인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잎이 다 떨어진 그때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덧없어 허무한 줄 알겠는가?’

이것을 터득하면 무상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스승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체득하게 되면 마음을 쉬는 방하착을 하게 됩니다.

방하착은 첫 째, 무아와 무상을 철저히 아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중생은 뼈 빠지게 

고생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무상을 알아요.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처럼 호화로운 궁전에 살면서도 무상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상근기입니다.

이 구절에서 후당황제 이경도 마음을 터득했다는 것인데 이 시를 통해서 여러분이 반야심경을 배울 때 무엇에 의지하여 마음을 다스려야 할 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음을 쓰는 것을 도를 닦는다고 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라고 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생각하는 나 , 이것이 가장 거친 나입니다. 둘째 인연화합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 즉 전생의 업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입니다. 셋째 근본적인 나, 앞의 두 가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 라고 했을 때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이 나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연의 성품을 깨달아 공하지 않는 그 나를 나타내어 진리가 현전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한 것이므로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서 색 그 자체가 공한 것이니 색즉시공이라’ 이것을 간단하게 경의 대의로써 설명 하겠습니다.

내가 가을 단풍을 봤을 때 단풍이 아름답다고 한 것은 내가 일으킨 생각에 의지해서 나의 욕구만큼 나타낸 것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없는 것입니다. 나한테만 있는것이기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연에 따라 가을이 되면 분명히 단풍이 듦니다. 그래서 공한 것 가운데 색이 있는 것입니다. (공즉시색)

공즉시색인데 또다시 인연이 닿으면 단풍도 사라지고 겨울 산에는 앙상한 나무 밖에 없습니다. 원래 모습은 공한 것으로 이것을 ‘원성실성’ 이라 합니다.

이것을 일상생활에 적용 하여. 마음을 닦을 때 어디서부터 마음이 어긋났는지 잘 살펴보는 것 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내 욕구에 의지해서 판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 판단에 의한 것이고 내 머리 속에만 있을 뿐 이것을 잘 알면 무엇이 자신을 더럽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평생을 나는 올바르게 마음을 썼다, 착하게 썼다고 하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실제는 평생 마음을 더럽혔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색 자체는 공한데 여러분들이 색에 마음을 빼앗겨 휘둘린 것입니다.

‘차별적  평등’ 이라고 할 때, 원래 평등한 것을 여러분들이 차별심으로 대했기 때문에 차별이 생긴 것입니다. 한마음 쉬게 되면 거울과 같이 있는 그대로 비춰지고 평등한데, 마음이 흔들리니 차별이 생긴 것입니다.

‘일체 사물은 연기공(緣起空)에 의한 것이므로 공을 떠난 색이 따로 있을 수 없기에 

‘공즉시색’ 이라 합니다.

 그런데 색즉시공은 ‘변계소집성’으로 우리가 망령되게 일으킨 것에 의해서 집착하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색즉시공 이라 했습니다.

공즉시색은 현상이 없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나타날 수 있습니까? 

마음이란 것은 백지와 같아서 거기에 어리석음을 그려놓으면 인연 따라 나타나는데 바깥의 세계라 하여 남이 나와는 별개의 세계라고 여겨 남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법의 연기관을 깨닫게 되면 내가 쓴 만큼 나에게 펼쳐지게 됨을 알아 

한 생각 쉬게 되고 업력이 소멸하게 됩니다. 반대로 쉬지 않고 달라붙으면 업력이 증폭되어 결국은 그 업력에 의해 우비고뇌 즉 괴롭고 슬픈 것들을 맛보게 됩니다. 결국 한 생각 쉬는 것이 가장 큰 업력을 소멸하는 제도입니다. 기신론에서도 가장 큰 참회가 무념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일체 사물은 연기공에 의한 것이므로 공을 떠난 색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타기성’ 이라 합니다.

변계소집성은 망념에 의해 실체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것도 공한 것입니다. 공즉시색은 연기에 의해서 임시로 있는 것인데 영원히 있는 것으로 집착하지만 이 또한 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공한 것임을 완벽하게 소화를 하게 되면 우리 마음의 본성 즉 ‘실상반야’가 바로 드러나게 되 이것을 ‘원성실성’ 이라 합니다. 



마음을 쓰는 것을 도를 닦는다고 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혜가 나타나는데 다섯 가지

입니다.

첫째 ‘실상반야’입니다. 진리당체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고 스스로 

취득해야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본체인데, 중생들은 모든 것을 이 본체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생각, 망상, 아집에 덮혀서 이 실상반야가 있는  줄 모릅니다. 

둘째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라는 것은 ‘비추어 본다’라는 뜻인데 수행을 하면서 조금씩 터득하는 반야입니다. 실상반야가 있음을 법문이나 교학, 실제 수행을 통해 조금씩 터득해나가는 반야로서 부처와 보살과 중생이 각각 제 수준만큼의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중생의 지혜는 탐진치 삼독에 묶여 있는 지혜이고, 부처의 지혜는 나다 너다라는 일체가 끊어진 자리, 허공과 같은 자리가 부처의 지혜인 것입니다.

셋째 ‘문자반야’는 진리를 설명하기위해 문자나 말로 만들어낸 모든 내용들이 문자반야입니다. 법문CD, 팔만대장경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넷째 ‘권속반야’ 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야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여러 조건들이 있는데, 중생들의 반야는 탐욕에 묶여있어 참된 반야가 아닙니다. 그래서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보시를 행하잖아요. 이 보시행이 권속반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율을 잘 지켜 올바르게 사물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인욕, 정진, 선정 등 6바라밀행이 권속반야가 되는 것입니다.

보살이 수행을 하는데 권속반야가 매우 중요합니다. 근본지를 드러내는 데는 각각의 병에 따라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6바라밀 수행, 8정도 수행, 염불, 참선 등 사람마다 필요한 수행이 다 따로 있게 됩니다.

다음은 ‘방편반야’가 있습니다.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 중생을 제도할 때 쓰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각각의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가르쳐야 최단기간에 반야를 성취할 수 있는가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방편반야입니다. 여러분들이 방편반야를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공부를 쉽고 올바르게 할 수 있지만, 공부를 안 하고 방편반야만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본인 죽고 남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방편반야를 실험해보는 화두가 있는데, ‘곡불장직(曲不藏直)’ 이라는 것으로 ‘꼬부라진 것 가운데 곧은 것이 있는 도리를 일러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심성의 바탕을 보는 것으로, 거울이 맑으면 있는 그대로 비춰집니다. 공부를 해서 깨달았다고 한 사람에게 이것을 물어 대답을 하면 조금 인정 해주게 됩니다.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은 어떤 행위의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동기를 봅니다. 마음 바탕이 맑아지면 꼬부라진 것 가운데 곧은 것이 있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상 다섯 가지 반야가 부처가 되기까지 거쳐야 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는 본체이고 나머지는 그 본체를 쓰는 작용, 방편, 수단이나 이를 기록해 놓은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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