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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4강 관자재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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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250회 작성일 21-08-09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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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관자재보살 


오늘부터 반야심경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공부하는 본문의 내용은 중생들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혀 그것을 뛰어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반야심경의 큰 뜻을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험하고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의 마음입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치부했었는데 수행을 하면서 내 마음에 들어가 보니 모든 악이나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강물이 모여 바다에 들어가듯이 어떻게 불법에 귀의 했든지간에 최후의 목표는 생사를 뛰어넘어 부처가 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데 있습니다. 영적으로 덜 성숙한 중생은 자신의 안락이나 고통 때문에 불법에 귀의하지만, 영적으로 깊은 삼매나 깨달음을 얻게 되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참다운 수행이 나올수도 없고 참다운 지혜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원인이 남이 잘못한 탓이지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고통의 원인이 결국은 내 마음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내 마음은 내 입장에서 내 입맛에 맞게 쓴 것입니다.

「대지도론」에 보면 성냄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분노란 무엇인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인식해서 멀리하는 것은 분노이고 깨끗하다고 인식해서 가까이 하려는 것은 탐욕이다. 성냄, 탐욕, 어리석음 같은 것들은 결국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지혜 없음에서 비롯되는데 이 모두가 ‘나다’라는 한 마음에 의지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대의는 험하고 무섭고 악독한 것이 내 마음이고, 이것의 정체를 알아야 비로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험하고 악독한 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녹이는 수행을 통해 생사를 뛰어넘어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대의입니다.

다음은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 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설명하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반야심경은 구역과 신역이 있는데 구마라즙이 번역한 구역에는 관세음보살로, 현장 스님이 번역한 신역에는 관자재보살로 되어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범어로는 ‘아바로귀따 이수바라’인데 아바로귀따를 한역하면 관(觀)이 되고 아수바라는 자재(自在)하다입니다. 즉 관찰하는데 자재한 보살이란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고 할 때는 중생의 고통을 관찰하는데 자재한 보살이 되고, 관자재보살이라고 할 때는 중생의 고통의 원인을 관찰하는데 자재한 보살이 됩니다. 즉 중생을 정적으로 제도할 때는 관세음, 지적으로 제도할 때는 관자재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행(行)은 수행, 실천함으로 반야심경의 내용을 모르고 행하면 모방만 할 뿐입니다.

심(深)은 ‘깊다’, 반야는 ‘지혜’ 바라밀다는 ‘저 언덕’ 시(時)는 깊은 수행을 할 때, 조견은 안쪽으로 비춰 본다는 뜻이고, 오온은 일체중생이 나와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표현합니다. ‘공’은 이런 것들이 다 공하다는 것이고, 도는 건너다, 일체고액은 중생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고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는 것은 일체 중생이 어떤 삶을 살아야 고통이 없는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느냐 했을 때 지혜를 닦아야만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온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것이고 원래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불법에서는 인연에 의해 펼쳐진 연기의 산물이지 고정적인 실체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도 인간이고 천상가도 인간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이것을 먼저 해체해야 되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찰하는 주체를 밝힌 것으로써 수행을 할 때 내면을 관조해보는데, 관자재보살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관세음인데, 중생이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면, 보살은 중생의 소리를 듣고 고통을 관찰해서 없애주기 때문에 관세음이라 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지은 업을 관찰해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안으로 이공(二空)을 증득하고, 밖으로 삼업(三業)을 관찰해서 저절로 자재하게 합니다. 이공(二空)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입니다. 아공은 고통을 없애려면 내가 공해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악독한 것이 마음이라 했는데 이 내 마음이 인연의 소산물임을 알게 하여 그것에 속지 않는 마음이 아공입니다. 소승에서는 이것을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둘째 법공은 아라한과가 부족하여 인연에 의해 펼쳐진 오온에 의해 ‘나’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을 법(法)이라고 하고, 이 법도 공함을 알아야 보살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주관이 공함을 알면 아라한이 되고 세계가 공함을 알면 보살이 되며, 나와 세계가 공하다는 견해까지도 공함을 알 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말만 관찰하기 때문에 신앙적인 보살이고, 관자재보살님과 마음과 뜻, 세 가지가 모두 공함을 관찰해서 깨달으면 관자재라 합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지혜를 쓸 때 나오는 이름이 관자재보살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삼존의 한분으로서 지극히 염하게 되면 현세에서는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어 내세에는 정토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비의 화신으로서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주시니  불자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이 관세음보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주기 위해 수행의 방법과 내용을 설해 주시는 것입니다. 음(音)은 소리로서 듣는 것인데 어찌 관(觀:본다)한다는 것인가? 이것은 수행의 아주 묘한 가르침인데 도를 깨달은 사람은 소리를 눈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하고 외울 때 소리를 듣는 줄 알지만, 사실은 한 생각 ‘관세음보살’하고 일으키는 그 염(念)을 관찰하고 듣기 때문에 관(觀)이라 하는 것입니다. 견(見)이라 했을 땐 눈으로 보는 것이고 관이라 했을 때는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마음으로 염을 하게 되면 관세음보살과 서로 소통이 됩니다. 이것은 외형이 아닌 그 본질의 파동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은 보살에 대해서 3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보살은 범어로 ‘보디 사트바’의 음역이 보살입니다.

첫째 각유정(覺有情), 깨달았는데 아직은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볼 수 없는 법신보살으로 각유정은 중생을 깨닫게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법신보살이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나’라는 상념 하나를 끊을 때 나라는 분별은 초지보살에서 끊어지지만 분별하기 전에 나라는 아상을 끊으려면 칠지 보살에 도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본능적인 나까지도 소멸되는 것입니다. 팔지 보살이 되면 세계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는데 이때는 불이 와서 태우지 못하고 물이 와도 익사를 못 시킵니다. 법신 보살은 팔지 보살 이상이어야 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팔지 보살의 위치에 도달한 분은 원효스님이 유일합니다. 

둘째, 남을 제도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을 보살로 이야기하고 셋째는 생명 안에 부처성품이 있음을 자각하고 깨달음의 길을 가는 분입니다.

요즘 여자 신자를 보살이라 하는데 원래는 절에 도움을 주는 여인이라 하여 보사라고 했었습니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염할 때 관자재보살을 친견하면 같이 기뻐하고 같이 소리칩니다. 알겠습니까?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알게 되리라.”

근래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청담 스님이 살아계실 때에 우리나라에서 세계 불교도 대회를 한 적이 있어 그 때의 태국의 승정(종정)을 초청하여 공양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태국 스님들은 고기를 먹는데 청담스님이 중이 무슨 고기를 먹느냐고 물으니 태국 승정이 ‘죽은 고기도 제도 못하면서 산고기는 어떻게 제도할 것 입니까?’ 라고 되물어 청담스님이 여기서 막혀버렸습니다.

태국 승정 일행이 범어사를 방문했을 때 당시 하 동산 스님이라고 계셨는데 청담스님 이야기를 들은지라 돌사자 앞에서 돌사자를 가르키며 ‘저 돌사자가 보입니까?’하고 태국 승정에게 물으니 ‘보입니다’ 하여, 다시 ‘그러면 저 돌사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까?’ 라고 물었는데, 아무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만공 스님의 법제자인 금봉스님이라고 계셨는데 이 스님이 열반하실 때 남긴 열반 송을 보면

산색문수안(山色文洙眼) : 푸른 산은 문수보살의 눈동자이요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 : 흐르는 물소리는 관세음보살의 귀이니라

금일세연진(今日世緣盡) : 오늘 내가 세상의 인연을 다했으니

의구수동류(依久水東流) : 옛것에 의지하여 물은 동쪽으로 흐르더라

이렇게 적어놓고 해인사 계곡 옆에 앉아 좌탈입망하셨습니다.

돌사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이 열반 시에서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반야심경을 배우고 수행을 해서 험하고 악독한 마음을 벗어나면 지금 한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불법을 설하고 외워도 문자승일뿐입니다.

다음은 「행심반야 바라밀다」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찰하는 주체인데 무엇을 관찰하느냐 하면 반야바라밀다 로 관찰되는 지혜의 본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신라시대 고승 원측 스님의 반야심경찬에서 지혜의 본체는 ‘반야바라밀다이고 지혜의 작용은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근원적인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것은 신앙이나 믿음,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지혜를 실천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행심(行深)이라고 한 것입니다. 깊음은 멸진정에 들어가는 것으로 자의식이 소멸한 의식상태, 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의식인 무분별지로서 지혜의 본체가 무분별입니다.

인간이 왜 가장 악독하고 허망한 것입니까? 고통의 원인은 무엇 입니까? 나라는 것을 기준으로 손해와 이익을 저울질하기 때문입니다. 탁 놓아버리면 그 순간 무심인데 손해 보는 것 같은 내 마음 때문에 그것이 잘 안됩니다. 무분별지로 이공을 증득합니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주관과 객관세계 실체하지 않은 것임을 알 때 이공을 증득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행과 행하지 않음을 떠났기에 깊다고 할 것입니다. 왜 떠났느냐 하면 이미 내가 공해졌으므로 행했다는 견해가 없어져 버립니다. 둘째는 경계의 깊음인데 깨달은 경계가 깊다는 것입니다. 범부는 나도 있고 세계도 있고 소승은 나는 없지만 세계는 있으며, 대승은 나도 없고 세계도 없는데 부처는 그 두가지 조차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있어 만물이 그때 창조되었다 하여 있음의 원천은 하나님께 두지만 없음의 원천은 둘 수가 없습니다. 부처 없음까지도 여읜 자리인 것입니다. 유무의 상을 여의었고 희론(희롱하는 말, 농담, 궤변 등)도 여의어 버린 반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터득한 경지는 우주가 생하고 사라지는 것에 영향 받지 않는 경지입니다. 불교에서 이 우주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끝없는 성주괴공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어디부터 우주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것조차도 마음자리에서 보면 허공 가운데 한 가닥 물거품이 일어난 것과 같다는 것이라고 능엄경에 나와 있습니다. 참으로 광대한 우주관입니다.

반야(般若)는 한역을 하면 ‘지혜’입니다. 바라는 ‘저 언덕’, 밀다는 ‘도착하다’로 행심반야바라밀다는 깊은 지혜로 저 언덕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시‘時’는 ‘때’로써 관자재보살이 마음을 관찰해서 무명의 원인을 제거하는 순간을 ‘때’라고 합니다.

 달마스님은 마음이 모든 수행을 통설한다 했는데, 수행은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데서 시작해야지 다른 것을 하게 되면 방편만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불교는 승속을 막론하고 방편을 잘 써야 등 따습고 배부르기 때문에 대부분 그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행(行)은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인데 이 한걸음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내가 마음을 써도 본적이 없고 더욱이 눈으로 소리를 본적이 없기에 마음을 써도 마음이 뭔지 모릅니다. 이 한걸음을 알기 위해 여러분께 ‘부모가 나를 낳아주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내겠습니다. 다른 말로 바둑의 흑과 백이 나누어지기 전에 어디에서 나누어질까라는 문제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이 일어나기 전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이라고 하면 틀립니다. 보통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마음만 이야기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규정짓기 이전에 본성이 무엇인가. 흑백이 나누어지기 이전 ‘바둑의 한수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관조반야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수행을 위해 있는 것이지 중얼중얼 외우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오가해에서 대나무 그림자로는 섬돌 위에 먼지가 쓸리지 않는다 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본성자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생 살면서 일으키고 일으켜도 영향 받지 않는 자리가 있는데, 바로 그 자리를 관찰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 할 때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불법을 배우는 것은 단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생사를 뛰어 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세세생생의 삶을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공부입니다.

이생에서 탐욕만 만족시키는 불법을 만났기에 다음 생에서는 먼지처럼 흩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를 배우면 다음 생에도 지혜를 배우는데 흥미를 갖게 되듯이 세세생생이 지금 이 한순간에 달려있음을 알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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