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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5강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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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649회 작성일 21-08-09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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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반야바라밀다 시 


여러분이 반야심경을 배우는 것은 세간법이 아니고 출세간을 배우는 것인데 이것을 수행하는 차원에서는 생사 법을 배운다고 이야기 합니다. 생사 법은 태어나고 죽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반야라 하는 것은 서역의 언어가 중국으로 넘어와서 뜻글자로 번역하니까 지혜의 뜻인 반야가 되었습니다. 사물에 대해서 조금도 미혹함이 없이 이해하는 마음이 지혜(智慧)입니다. 반야는 진리의 본질을 사무치게 보는 지혜라 했는데 불교에서 가장 큰 진리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즉 사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또 왜 태어났는가? 이런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가장 근원적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사는 삶 을 업보에 의한 윤회의 삶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은 생사를 깨쳤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하는 염불중에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라는 것이 있는데 죽으면 지옥에 간다든가 짐승의 몸을 받는다든가 하는 차원은 틀린 것입니다. 생사의 원인을 몰랐을 때 일으킨 마음에 의해서 편중되어 무거운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천당과 지옥이고, 생사의 원인을 알고 마음이 한 물건에도 속거나 미혹하지 않았을 때 가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냐고 물어 보았을 때 그것은 날 때는 어디에서 와서 죽을 때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화두입니다. 여러분이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부처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해서, 집안에 액을 물리치니까 믿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모두 탐욕의 세계 안에 사는 일이고 그것이 있는 한 생과 사의 원인을 꿰뚫을 수 없습니다. 생과사의 원인을 꿰뚫으려면 탐욕 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벗어나려면 생사의 원인을 확연히 알아야 합니다. 생사의 원인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이 생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면 지혜를 얻기 위해 수행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눈앞의 것을 쫒아 다니다가 헛되이 늙는 것도 모릅니다. 

 서산휴정 스님이 북한 보현산에 계셨는데 돌아가실 때 진영을 손수 그려놓고서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 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써놓고 좌탈(坐脫)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사의 원인을 확연히 깨친 도인이 생사 없는 자리를 생사를 받는 몸에 빗대어 나타낸 말입니다. 

 그 다음 ‘바라밀다’는 해석하면 도피안(度彼岸)인데 저 언덕에 도달 한다는 말로써 지혜를 깨치면 저 언덕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고, 반드시 변하여 사라지며 우주까지도 필경에는 멈추고 무너져서 괴멸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것이든지 만들어지는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곳이 이 언덕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진리 혹은, 근원적인 자리라 해도 되고, 선가에서는 구멍 없는 피리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도피안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얘기하는 궁극적인 자리인 해탈의 자리로 열반의 자리라고 해도 되는데 그것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미혹한 이는 생사의 근심에 돌고 돌아도 깨달은 이는 윤회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면 나고 죽는 순환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업을 지으면 선업에 따르는 천상 세계도 나타나고 좋은 인간도 만나고 좋은 환경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깨치지 못하면 나라는 것을 모르고, 좋은 환경에 있으면 교만해지고 악업을 지어서 한번은 천상에 갈 업을 짓고 한 번은 지옥에 갈 업을 짓는 것입니다. 아침 종송에 삼계유여급정륜(三界猶如汲井輪)이라 했는데 중생들이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가 우물가에 두레박과 같다는 것입니다. 복이 없을 때는 두레박을 던지면 우물 밑으로 쭉 내려가서 열심히 복을 닦아 가득차면 당겨서 우물가에 사람이 쓰게 되고, 복이 다하면 다시 우물 밑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물가의 두레박처럼 인간이 생사를 받아서 윤회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내가 왜 태어났고 죽는가 하는 것을 알면 깨쳤다는 것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 하면 사라지는 법으로 무엇이든지 하면 만들어지는 법이고, 무위(無爲)법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 없는 법입니다. 옛 부터 배움이 끊어진 사람, 무엇인가 배울 일이 없는 사람을 무위도인이라 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유위법을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이라 했습니다. 형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일체유위법인데 돌아보면 꿈같은 것입니다. 환은 거짓과 같고, 거품과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이것이 유위법입니다. 말로 깨친 사람과 마음으로 깨친 사람의 차이점은 말로 깨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 할 때 자신이 그 경지에 가면 자기 욕심에 꽉 붙잡혀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깨쳤다 할 때에 자연과 세상을 잘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뭘 알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서 시(時)는 “때”라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자신의 실체가 없음을 관찰해서 확실히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때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에 얽매였던 마음이 사라지니까 시공이 끊어지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시라고 해도 맞지 않고 시가 아니라고도 설명할 수가 없어 시라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사라지는 곳으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조반야를 드러내는 것으로 반야를 어떻게 수행하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란 정견(正見)으로 볼 때 이다.’ 이 자리를 형상이나 생각으로 알려고 하면 견치에 떨어지게 됩니다. 관조반야 즉 행하면 관조반야를 드러낸다고 했는데 그것은 한 물건도 보지 않고 여러분이 화두나 염불로 관찰하는 마음이 집중되어서 지금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그리고 나와 너가 끊어진 자리 그 상태에 들어 갈 때가 바로 ‘때(時)’입니다. 

 관조반야라 했을 때 무엇을 관조해야 하는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과 불편함을 없애려면 그 생명체가 의지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실체성이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는 많지만 부처님 외에는 이것을 설명 한 분이 없습니다. 불법 입장에서 보면 방편일 따름입니다. 하근기는 마음 깨닫는 법을 가르치면 못 깨닫습니다. 그래서 착한 일해서 선업을 쌓아서 마음을 맑게 하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불법이 방편이 아니고 실제 들어가는 종교라고 한다면 다른 종교는 근기에 따라서 방편으로 사람들을 끌어가는 보충수업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조견오온개공’, 먼저 교리적으로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관찰하는 지혜에는 두 가지 작용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작용으로 수행입니다. 여러분이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화두를 들고 경전을 독송 하는 것은 전부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행 입니다. 나와 연관 있는 것을 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남을 이롭게 하는 작용으로는 나와 관계없는 중생의 고통까지도 없애 주려고 마음을 말 합니다. 지혜는 이 두 가지 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첫 번째가 안 되면 두 번째는 과대망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이 공함을 밝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온은 이 몸과 마음이 “나”인 것인데, 몸에 의해서 일으키는 생각들이 공함을 밝히는 것입니다. 

 지(智)는 공에 대한 지혜와 유에 대한 지혜가 있어서, 우리 마음의 본성은 공성(空性)입니다. 사물의 본질은 항상 있어야 하는데 물의 본질은 젖는 성품이고, 바람의 본질은 흔들리는 것이며, 불의 성품은 태우는 것이며 땅의 본질은 견고 한 것이며 마음의 본질은 공한 것입니다. 공하다는 것에는 분별지를 없애 주는 것인데 여기서 깨닫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空)이라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을 공이라 하는데 이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고 개념으로 이해 한 것입니다. 

 숭산행원 스님이 서양에서 가르치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제방에서 공부 좀 한다는 사람에게 화두를 돌린 적이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했는데 이것이 허물이 있다 하면 이 허물을 넘을 수 있느냐 란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공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불법에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본체입장에서 깨달아 가는 방법으로 돈 법이라 합니다. 보통 선가에서 화두를 깨달아 가는 법을 돈 법으로 취급을 합니다. 이것이 반야계통, 몰록 깨달으면 내 마음이 부처다 하는 얘기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공이다 하니까 하근기는 모두 텅 비어 없다. 쓸모가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유(有), 즉 현상으로써 지혜를 닦아 들어가는 방법으로 크게 반야중관부와 유식유가부(唯識瑜伽部)가 있습니다. 반야부는 선의 입장에서 보면 여래선과 조사선이 있습니다. 여래선은 중생의 낮은 근기로 인해서 중생의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있는 것, 없는 것, 허망한 것 입장에서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를 가르칩니다. 여래선을 하게 되면 소승선이 되고 이세상이 모두 쓸모가 없고 현상이 모두 공 한 것이 되어 인류사회에 과학도 없고 문학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을 공에 떨어졌다 합니다. 조사선은 입처개진(立處皆眞), 지금 법문을 하는 이 자리가 진실의 자리다하여 웃으면 웃는 것이 법이고 울면 우는 게 법이라 하여 현상을 긍정하지도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파악하면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님께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을 때 어느 정도 불교에 이력이 있고 교학 적으로 지식이 있는 진정한 스님은 “나” 라는 놈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관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 라는 것은 나에 의해 일어난 것은 삼라만상에 의해서 힘을 잃어버리지만 이것보다 더 큰 힘을 얻는 것은 화두선입니다. 

법의 상을 남김없이 버려 공을 관하는 문입니다. 공부를 하려면 나라는 것을 정밀하게 관찰을 해야 합니다. 관찰하는 것은 오온이 공함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상근기라면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너는 누구냐? 딱 한 마디만 물어보면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가 하는 의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하는 대상이 사라지는 그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법집이 사라진 상태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심오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모든 법은 다 공하며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본래 적정하고 우리의 자성이 열반이다. 또는 일체 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다. 마음이 분별하기에 모든 법이 모두 바르지 않으며, 마음이 분별하지 않기에 모든 법이 모두 바르다.’ 공을 관함에 있어 하근기는 사물의 물질을 관해서 그것이 실체 없음을 관하지만, 오온을 관할 수 있는 상근기는 내게 무엇이 있다는 것이 나의 분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관찰합니다. 중론(中論)에서 불공(不空)이 있기에 공이 있지만, 불공도 없는데 어찌 공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여기서 공이다, 공이 아니다 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공이라 하면 상대적 개념 중 한쪽만 취하여 의지해서 그것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사선에서는 새가 허공을 나는데 허공을 날고 나면 자취가 없듯이 마음을 깨달아야 공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보살이 될 수 있는 근기에게는 아(我)가 실재함을 설하고, 하근기에게는 비아(非我)를 설하는데 그것은 하근기는 짓는 모든 악업의 진원지는 내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아를 설하시지만 법의 실상에는 아와 비아는 없고 단지 내가 일으킨 개념 뿐 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은 실체가 없는데, 깨닫기 전에는 설명할 수도 이해 할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고 생기하지 않는 것은 허공에 나타나는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위라는 것입니다. 

 공의 입장에서 중생을 제도 할 때 이렇게 설명을 하고 호법보살은 공의 집착을 드러내기 위해서 유를 설했습니다. 용수보살이 백론 12문론, 중론을 설하고 소승불교의 유지 실제 하는 개념을 깨트리게 되는데 하근기는 공하다는 개념에 떨어져서 모든 것은 다 공하다 하여 해탈 하려면 괴로움도 너도 나도 다 끊어지는 자살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것을 단견외도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공하지만 우리의 생각 생각들이 업으로 형성 되어서 우리를 옥죄어서 잘나고 못나고 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데 이것을 유식이라고 합니다. 

‘식을 세워서 경을 버리고 공을 밝히는 관문에서 사물은 무상이고 무아라고 이야기 하는데 유식의 입장에서는 사물이 그냥 공이 아니고 내가 마음 쓴 대로 표현되어 물질화 된 것입니다. 사물의 실제 주인공은 마음이다.’ 공을 드러내기는 하는데 방법이 틀린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법은 있음에도 없음에도 통합니다. 유식에서 수행하는 방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형상인데 반야심경에서 보면 변계소집성이라 하는데 변계소집성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불법을 수행하기 전까지 여러분이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마음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자기 입장애서 봅니다. 이것을 깨지 못하면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지혜가 나 올 수 없고 생사의 근원을 깰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앉아서 마음을 모으면 다 되는것이 아니고 지혜가 있어서 사물을 볼 때 미혹 하지 않아야 됩니다. 변계소집성은 정(情)은 있으나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지(知)적인 작용은 없고 정적인 작용만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두 가지를 다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지적인 것과 정적인 것에 의지적인 작용이 들어가게 되면 사람은 조화가 되어서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행동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 합니다. 오온 중에서 수(受)온은 정입니다. 정은 우리의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좋고 싫음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상(想)온은 지적인 마음 행(行)온은 의(意)적인 마음이 나오는 것이고 도는 오온이 공한 자리에서 나오니까 지정의 까지도 소멸이 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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