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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6강 오온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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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639회 작성일 21-08-0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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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오온약설 



대승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공을 설하는 용수반야계통이고 또 하나는 식을 설하는 세친계통이라고 했는데 후계자가 청변보살과 호법보살인데 가만히 이것을 공부를 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여러분한테 왜 필요한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서 다시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넘어 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 진리, 우주 인생에 대해서는 만 가지 견해가 있고 만 가지 이론이 있는데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경전에는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부처님 법외의 법을 진리라고 믿고 수행을 하거나 믿음을 의지 하는 것을 외도라고 하는데 육사외도의 공통점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계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다 죽어서도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겁니다.  이 세계를 누가 창조했냐고 했을 때 전변설 입장에서는 신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고 적취설 입장에서는 물질이 모여서 만들어졌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 당시 부처님이 성불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 중 한 분이 부처님께 가서 14가지 질문을 합니다. 전부 철학적 명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자아가 영원하지 않으냐 영원하지 않느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 신이 천지를 창조했느냐 창조하지 않았느냐 등과 같은 질문으로써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일체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 하시고 가만히 계셨어요. 질문을 듣고 나서 부처님이 제자에게 질문하기를 네가 출가할 때 이런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면 출가를 하겠느냐하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나에게 물어보냐고 하면서 전유경에 비유로 나타나있는데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을 때 독을 먼저 뽑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어디서 날아왔고 누가 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냐? 라고 물어보면서 그 질문을 물리치는데, 다른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스스로  침묵하는 것에 해명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법에 합당치 않고 의에 맞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경전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하는데 이걸 이해하게 되면 부처님과 중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이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스님한테 가서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물을 때 일반학식을 가진 스님이나 수행자 같으면 마음이 부처라고 하고, 뛰어난 승려 같으면 대답을 안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것과 대답을 안 하는 차이점을 알아야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파악을 하는 것이 중생의 소견인데, 가령 세상은 영원하냐? 영원하지 않느냐? 라고 했을 때 만약 영원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세상은 영원한 것으로 결론이 나버리고 영원하지 않다고 하면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결정이 나는데 영원한 것 영원하지 않은 것, 있고 없음이 본인의 분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분별 해놓고 이 분별이 옳으냐? 저 분별이 옳으냐? 이런 것을 물어 보는데 부처님 입장에서는 전부 공리공론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깜깜한 여름밤에 길을 가다가 하얀 것을 보게 되면 여러분 입장에서는 귀신이라고도 하고 다른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걸 보고 와서 부처님한테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면 부처님 입장에서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는 겁니다. 물어보는 사람의 분별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건 질문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잘못 되었는데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한 면을 가지고 세계를 정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분별에 의지해서 정의하는 세계는 실재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것을 부처님한테 가서 이게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물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야심경을 왜 배우느냐 조금 아까 관념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보통 중생들은 자기가 그것을 알았다고 착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부처님 입장에서는 궤변이니까 그것을 알 수 있으려면 분별하려는 주체의 실상을 알아야하는데 그것을 알려면 첫째는 자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분별하고 결론내고 판단내리는 그놈을 모르면서 그놈이 판단내린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시비하는 것이 뭇 종교나 철학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공과 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은 분별이 일절 없는 경지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체가 공하다고 하는 것이고, 식의 입장에서는 일체의 분별을 하지 않지만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존재를 인정하면서 존재 입장에서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도 식의 입장에서 현상계 입장에서 진리를 파고 들어가는 공부를 가르친 것이 유식계통이고 진리 입장에서 진리 외에는 인정 하지 않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침묵한 그 내용을 알려면, 또 누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할 때 어떤 스님은 앞 니빨에 털이 났다고 했는데 이것을 알려면 여러분 본인의 분별이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에 어떻게 미해 있고, 참나, 우주의 실상 등을 깨달을 수 있는지 방법론을 제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 가지 법칙을 설명을 할 건데 변계소집성은 정은 있으나 이치가 없는데  여러분들이 나서 죽을 때까지 쓰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보거나 날씨를 보거나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입장에서 그것을 객유 합니다. 

산속에 선비와 사냥꾼, 바람둥이가 걸어가는데 산속에서  어떤 여자가 튀어나와 도망가는데 옷이 헝클어져 있습니다.

 선비는 그 여인이 옷차림새가 헝클어졌으니까 촌 여자라서 버릇없는 여자라고 무시하는 이야기를 했고, 바람둥이 남자는 저 여자가 숲속에서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다가 놀라서 허둥지둥 가는 거라고 이야기를 하고, 사냥꾼은 나물을 캐다가 짐승을 만나서 놀라서 도망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 사람이 고개를 넘어 어떤 집이 나와서 들어가 보니 그 여인이 약을 달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아까 왜 그렇게 달아났습니까? 물어보니까 그 여인이 자기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병이 들어서 산에 가서 약초를 캐서 가져다 드리는데 약을 올려놓고 약초를 캐다 보니까 약이 탈 것 같아서 바삐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진실은 이 여인은 약이 탈까봐 달려 내려왔지만 그 여인을 보고 선비나 사냥꾼과 바람둥이는 자기 소견에 맞춰서 개념을 일으킨 것인데 이게 부처님한테 세상이 영원하냐, 영원하지 않느냐라고 묻는 것과 똑 같은 것 입니다.

일체 중생이 마음의 본성을 깨닫기 전에는 이런 맘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의식은 전혀 없어 업을 지으면서도 업인지 모르고 쓰는데 그 첫째가 변계소집성입니다. 자기감정은 있으나 이치가 없으니 시작부터 다 거짓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전도몽상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이 마음을 가지고 쓰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주관적인 실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부처님께 가서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 라고 물을 때 이미 자기가 갖고 있는 소견만큼 개념을 만들어서 판단해 달라는 것이니까 대답을 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 하시는 겁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했을 때 왜 대답을 안 할까? 수행하는 사람하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부처님과 같을까요? 수행을 하든지 하고 있지 않든지 부처에 대한 기본적인 선입감이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감이 뭡니까 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할 것 입니까? 대답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입감이 일어나기 이전 마음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들이 다 해석한 이야기입니다. 요전에 변호사가 왔는데 서울대에 법회 하러 다닐 때 한 학생이 아버지가 현직 목사였습니다. 그때 선우회라는 모임에서 참선을 가르쳤는데 그 아이가 일요일은 수련대회하고 월요일은 교회 어린이 지도를 하러 아침 일찍 가곤 했습니다. 얼마 전에 찾아왔는데 불자 부인을 만나 신혼여행을 인도로 가서 부처님을 모셔왔는데 자기 아버지가 현직 목사니까  부처님을 집에 모실 수 없으니까 나한테 가지고 온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들이 자신의 뜻을 신의 뜻이라고 전하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한적 있습니다. 신이 되지 않고는 신의 뜻을 어떻게 인간이 해석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나 좋은 말을 자기가 이해한 만큼 신의 뜻 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신을 믿는 종교의 가장 큰 오류인 것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무엇이 부처냐고 물어 볼 때 부처가 이런 것이라고 설명을 하면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몽둥이 30대를 맞는다고 했습니다.  이 스님이 알고 있는 부처님하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부처님의 개념이 틀립니다. 변계소집성에 의한 자기 업력만큼 파악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변계소집성이 일단 몸에 딱 들어가서 이 입장에서 사물을 보게 되면 정이 있습니다. 정이 뭐냐 하면 사물을 보고 정이 있다 없다 했을 때 나에게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고 싫은 것을 취하고 버리는 마음은 있지만 이치나 진리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마음은 이런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수행을 하는 근거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라니를 오래하고 마음을 모아서 정신을 통일하고 해도 이건 모두 귀신 굴에 박힌 것입니다.

 이제 의타기성입니다. 이건 목탁인데 목탁이라고 보는 것은 앞의 이론으로 보면 변계소집성의 입장에서 본겁니다. 불교신자니까 목탁이라고 하지만 그런 개념 욕구가 없을 때는 목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주관적으로는 실재하지 않지만 객관적으로는 실재합니다. 이것을 설명 하는 것이 의타기성입니다. 이 형상은  어떤 장인이 이것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객관적인 실상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은 연기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이걸 필요로 하는 욕구와 조각해서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가 부딪쳤을 때 목탁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을 의타기성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는 것으로서 서로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인연이 있을 때만 나타나고 인연이 다하면 없는 것 입니다. 원래 실상은 없는 것인데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공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변계소집성의 공이 있고 의타기성의 공이 있는 것 입니다. 주관적인 실상도 공하고 객관적인 실상도 인연이 있을 때만 있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므로 공이라고 합니다. 인과 연에 생하기에 인연으로 있고 그래서 의타기성입니다. 지금 존재에 대한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주관적인 존재는 전부 없는 것이고 객관적인 실상은 인연이 있을 때만 존재하고 인연이 없을 때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존재는 인연과 관계없이 허망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원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허공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깨달음에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변계소집성을 깨달아야합니다. 수행을 쭉 하다보면 아공이 되고, 더 들어가면 의타기성 즉 객관적인 세계가 실재 하는가 실재하지 않은가 인데 실재한다 해도 틀리고 아니라 해도 틀립니다. 삼매 가운데 깨닫게 되면 인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의타기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다음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이 완전히 공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마음의 본모습이 원성실성입니다. 이것도 공인데 공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텅 비어 없는 것을 얘기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원성실성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치가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변계소집성이나 의타기성의 마음으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에 의거하여 모든 것이 자성이 없다 하였고, 여러분들이 쓴 마음은 다 내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고, 지난밤 꾼 꿈은 여러분한테 입력된 정보만큼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적경에서 만약 모든 법을 들어서 무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도저히 치료할 수없는 자라 하였는데, 이것은  수행할 때 모든 법을 들어서 모든 것이 다 없어 성품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진리관 조금 전 변계소집성에서 보면 이 사물에 대한 ?추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 욕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처지에 따라 나타나는 수행 방법론을 쭉 써 놓은 것이 유가사지론 인데 모든 법들은 자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기초 수행을 할 때 이것을 물고 늘어져야합니다.  변계소집성에 의해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은 자성이 없으므로 일념단속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옳고 저것이 틀리다고 해도 나와 저것 사이에 일어난 허공꽃이고 존재의 본성이나 실성이 아닙니다. 이것이 수행의 초기 덕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변계소집성은 모두 분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허망분별이 있다. 이것은 둘은 전혀 없고 오직 공성만 있을 뿐이다.’ 이라 했는데 여기서 둘이란 옳고 그름,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등과 같이  내가 분별한 후에 나타나는 의식, 즉 의식 되어진 이후에 나타나므로 오직 공성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성만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수행을 많이 하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인데 화두는 바로 이 공성을 보게 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이 침묵하신 내용이 나중에 수행방법론으로 나가게 되면 화두선이 되는 것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뭡니까 했을 때  앞니빨에 털 난 놈이다 했는데 여기에는 여러분들의 분별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 그러나 저것에서 이것이 있다. 그러니 모든 것은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있고 없음이 있는 연고로 중도에 들어맞는 것이다. 이십유식에서 모든 법이 일체 종자도 없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법무아에 들어간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법부가 변계소집의 자성차별에 제법에 아가 없다고 통달하면 법무아에 들어가는 것이다.’

 법무아란 보통 불교에서 수행에  처음 들어 갈 때 나 없음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어느 정도 수행이 되면 그것보다 큰 문제는 이 세계가 실재 하는 것인가,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의문이 일어납니다.  소승에서는 객관세계는 실재한다고 하고, 대승에서는 객관세계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법무아입니다. 우리가 인식한 내용과 똑같은 세계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가 밉다고 했을 때 미운 대상의 아가 실재 한다고 믿고 있는데, 실제는 그것이 아니고 여러분 욕구에 맞지 않았을 때 밉게 보는 망정만 있다는 것입니다. 아가 없는 것인데 아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달하면 법무아에 들어간 것인데 내가 인식한 내용, 인식한 방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을 놓아두고 바깥 세계에 어떤 고정적인 실체를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식한 세계는 여러분들이 인식한 세계일뿐이지 객관적인 실재 세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씨가 시원하다 했을 때 객관 세계가 스스로 시원하다 한 적은 없는데 내 입장에서 습도라던가 온도가 내 욕구에 맞으니까 시원한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도를 깨닫기 전까지는 자기가 인식한 내용물을 객관세계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자기가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이 상대방한테 있다고 생각을 하고, 세계에 적용하면 자기가 인식한 내용만큼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것은 서로 보완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색이 공이다 했을 때 객관적인 실재 입장에서는 색이 공이지만, 공이 색일 때는 그것이 존재로 펼쳐져 나타날 때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공도 유도 아닌 중도의 진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중도를 깨닫는 것이 목표인데 중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의 분별사량이 들어가지 않고 세계나 사물이나 진리가 파악될 때 중도라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찾으면 없지만 분명하게 활동을 하기 때문에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것입니다. 조견은 안으로 마음의 성질을 비추어 보는 것인데 수행할 때의 마음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고 싶으면 앉은자리에서 ‘내다.’ 라는 느낌이 있는데 그걸  놓치지 않고 비춰보고 실상을 깨달으면 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은 경계에 의해 마음일 뿐 경계가 없으면 스스로 사라진다.’ 여러분들이 내 마음 내 마음 하는 그 마음이 언제 사라질까요? 죽거나, 기절 하거나, 잠이 깊어졌을 때 사라졌다고 생각할 건데, 왜 사라진다고 생각 했을까요? 마음이 경계에 대하여 분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경계에 대하여 분별을 할 때 그 분별심이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사라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심이 되는 겁니다. 경계에 의해 요동치거나 영향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 중생은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마음은 의도가 있을 때 마음일 뿐 의도가 없을 때는 이미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무심이 도라 했는데 무심은 의도가 없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분류하면 경전이 비록 많지만 삼법인이 표준이다.’

삼법인은 부처님 법하고 다른 법하고 비교 했을 때 그것이 삼법인에 맞으면 그 사람이 영어로 말을 하든 기독교적인 성경을  말하든 불법이 되고, 삼법인에 맞지 않으면 불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입니다. 제행무상은 시간적으로 시간이 항상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합니다. 죽으면 영원히 천당에 있다고 합니다. 영원이란 것은 상(常)인데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을 설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상견외도라 부릅니다. 즉 세계가 영원하다, 죽은 후 천당에 태어난다는 등의 생각을 믿고 의지해서 따르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 상견외도의 견해입니다.  그것은 아까 말했지만 주관적인 분별에 의해서 나온 결론입니다. 제법무아는 공간적으로 고정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으로 이 또한 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개고는 무아고, 무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고라는 것입니다. 열반적정은 무상 하고 무아 한 것, 이 두 가지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열반적정이 됩니다. 이 중 제행무상은 오직 유위법만 밝혔는데 유위법은 의도적인 법, 뭔가 욕구가 있는 법을 말합니다. 시간은 항상 하지 않고 늘 변하는데 그래서 현실세계의 법을 바로 밝혔다는 것입니다. 열반적정은 무위법 즉 진리의 세계만 밝힌 것입니다.  여기 한 잔의 물에 커피를 타면 커피색이 되는데 이걸 먹고 소변을 보면 커피색은 없어집니다.  그래서 유위법이라 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가 됐든 오줌이 됐든 물의 젖는 성품은 변함이 없는데 이것이 무위법입니다. 도를 깨닫는 것은 이 무위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제법무아만이 유무에 통하여 있다. 즉 유위법에도 무위법에도 통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상도 공을 이야기 한 것이고 열반적정도 공을 이야기 한 것인데 제법무아는 둘 다 공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제법무아인 줄 알면 열반적정이 나옵니다. 나없음을 깨달으면 그것이 열반세계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현상세계를 분류 할 때 오온, 12처, 18계입니다. 이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색수상행식입니다. 명색(名色)이라고 하는데 상근기는 이 오온만 듣고도 바로 깨닫습니다. 그것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면 몸뚱이를 기준으로 바깥의 6가지 경계와 안의 6가지 경계를 보는 마음을 묶어 십이처를 설하는데  물질에 미한 중생은 십이처를 설해 마음을 깨닫게 하는데 이는 중근기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18계는 몸과 마음에 다 미한 사람을 위해 설하는 것입니다. 6근과 6경이 부딪혔을 때 아는 마음(식識)이 일어나는데 이를 18계라 합니다. 

 오온, 십이처, 18계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 다른 종교는 이 세계를 브라흐만이나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를 전변설이라 하고, 또 하나는 요가계통에서는 물질이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적취설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연기된 세계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무명으로 연기한 망령으로 본 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는 중생의 업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경제적 상황, 아들딸의 모습이 각각 다른 것도 본인이 일으킨 업력이 물질화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거나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이야기 합니다. 

근기에 따라 마음이 어리석은 사람은 오온을 설해서 깨치게  하고, 몸이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십이처를 설해 깨치게 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미한 자는 18계를 설합니다. 

 ‘오온이라고 함은 우리들의 아집에 다섯 가지가 있음을 설한 것이다.’

 우리 자체가 아집이라는 것이지. 기독교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생긴 원죄란 바로 변계소집성에 의한 분별심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할 때 자기 입장에서 사물을 본 것일 뿐입니다.  

첫째, 신체에 갖추고 있는 6근 6경의 법에 아집을 일으키는 것이다. 6근 6경이 부딪혀 식이 나오는데 이를 18계라 하고, 이 18계에 대해서 낱낱이 색수상행식이 나타나서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일체중생이 쓰는 마음입니다.

둘째, 경계에 대하여 고락을 느끼는 지각적 작용, 심소의 아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의 첫 번째 것은 색에 대하여 아견을 일으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수(受느낌)인데 이 지각작용은 수의 작용이 우리마음의 바깥으로 물질화되어 나타날 때 정적인 작용을 나타냅니다.

셋째, 여러 가지 사상에 의해서 온갖 언어 개념에 아견을 일으키는 것. 어떤 개념이 일어났을 때 취하고 버리는 마음 인데 이게 우리 마음의 지정의 중 지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것으로 오온에서는 상온(想蘊)에 해당하는 겁니다. 결국 이것도 수행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세속에서 얘기하는 지정의가 발달되었다는 것은 불법 입장에서는 그냥 범부일 따름입니다.

네 번째, 여러 가지 선,불선의 행위를 하면서 아견을 일으키는 것. 기독교 선교사들이 탈레반에 붙들려 간일을 예를 들면 그들로 봐서는  봉사활동을 하고 선교활동을 한 것이 자기 종교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만 거기엔 자신들의 의지가 들어갔으므로 이것이 바로 행온(行蘊)입니다. 그 마음이 전도된 마음으로서, 행온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업을 형성시키고 업의 사슬에 돌고 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서 어떤 어부가 배를 항구에 대다가 게를 치었는데 어떤 스님이 노스님에게 저게 누구 잘못이냐 하니까 어부의 잘못도 아니고 게의 잘못도 아니고 바람의 잘못도 아니고 너의 잘못이 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벌써 거기에 의도를 일으켰기 때문인데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상과 인연을 맺음으로써 업이 형성된 것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이왕 업을 지으려면 선업을 짓고 도를 깨달으려면 선업까지도 놓아버려야 하는 겁니다.

다섯 째, 이러한 4온의 의처가 되는 것이 식입니다. 여기서 대승과 소승이 갈라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것을 봤을 때 수상행식이 펼쳐져 아는 마음, 판단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소승에서는 여기까지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지은 업은 어디에 머물러 있다가 나타났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이식을 심의식(心意識)으로 나누고 다시 6식, 7식,8식 세 가지로 나눕니다. 

‘식은 심상의 실아에 망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을 하고 판단을 내려놓고 부처님에게 가서는 이것이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부처님이 뭐라 하겠습니까?  부처님에게 묻는 모든 질문들이 이런 질문들입니다. 즉 오온에 의해 판단된 내용을 가지고 물어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교와 다른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실아는 자기에 대한 실아도 되지만 자기가 일으키는 개념에 대하여 실재하다고 믿고서는 그것이 영원하다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질문자체도 모순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진실이라고 믿고 질문하는 것이기에 모순입니다. 둘 다 자기가 판단해낸 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범부는 거짓 화합의 몸과 마음에 어리석은 집착을 일으켜서 실재의 내가있다고 생각하므로 그것이 오온의 인연상임을 가르쳐서 그 견해를 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어떤 것을 보고서 견해를 일으킨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물이나 철학 같은 것들이 되었을 때는 실아가 실체가 있다고  믿고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고, 자기한테 들어올 때는 자기가 일으킨 그 개념이 자기라고 착각한 것이 색수상행식에 연결되어 원인에 의해 자꾸 연기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 한다.’

 색은 물질인데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우주의 근본 요소를 지수화풍 네가지라 했습니다. 우주를 만드는 4가지 위대한 종자란 뜻입니다. 4대는 견습난동(堅濕煖動)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땅의 견고한 성품, 물의 젖는 성품, 불의 따뜻한 성품, 바람의 움직이는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색에는 근경법처(根境法處)의 구별이 있다.’ 색의 종자는 견습난동이고 그것이 물질화 됐을 때 3개로 나누는데 여러분의 몸 6근, 6경인데 우리가 세계를 판단할 때 안의비설신의를 빼놓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정에 들면 안이비설신의에 영향 받지 않는 자리가 나오는데 그걸 공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법처인데 무표(無表)라 하여 색으로 나타나지 않은 세계입니다. 스님이 젊었을 때 천일기도 중에 한 스님과 반야심경의 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스님이 색이 물질이라고 하는데 물질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색이라는 것은 내가 일으키는 일체 개념도 색에 들어가기 때문인데 이것이 법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일으킬 때 마음에 형상이 그려지는데 그것이 법입니다. 그려진 이미지는 색이고 물질로 보이진 않지만 법으로서 형성되기에 법처인 것입니다. 

‘놓인 곳을 알 수 있고 다른 것의 장애가 되기에 색이라 한다.’

 수는 느낌으로 안이비설신의로 받아들이는 건데, ‘촉소생수(觸所生受)’라 하여 부딪혀 생하는 바가 수라는 겁니다. 6가지의 수가 있는데 이 중 의(意)는 눈으로 볼 수는 없고 어떤 사물에 대해 좋고 싫은 판단을 하는데 이것도 고락(苦樂)을 느끼므로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몸으로 느끼는 수는 고통이나 즐거움이고, 마음으로 느끼는 수는 기쁨, 슬픔,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수(捨受)를 합하여 오수라 합니다.

 그 다음 상(想), 상이란 상상하는 것인데 지적으로 사물을 포장 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 사람이 누굴까 하는 것은, 상이 발동되기 전에 저 사람이 어떻다 하는 개념으로 정리가 되는데 이것이 상온입니다. 이것도 안이비설신의 촉소생상(觸所生想)입니다. 대상경계를 파악해서 어떠한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인 것입니다. 부처님께 세계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등과 같은 질문을 한 것도 상온인데, 상온은 인연에 의해서만 일어나는데 즉 연기법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인데 모순된 질문을 하니 부처님이 가만히 계셨던 것입니다. 상은 식이 대상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영상을 취하여 집착하는 정신 작용입니다.

행(行)은 색수상식을 제외한 일체의 정신 작용이다. 유식계통에서 보면 심소법이 다  이 행온을 이야기합니다. 행온은 의도적인 마음, 포장하는 마음, 어떻게 해야겠다는  조작의 뜻이 있다. 이 조작으로 인해 업이 조장되는 것입니다. 소승은  5위 75법 가운데 42심소와 불상응행의 14법 까지고 대승은 49심소와 24불상응행법 까지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안이비설신의 촉소생행입니다. 이 행은 유식에서는 사(思) 라고 합니다. 생각도 되지만 의도적인 마음도 됩니다. 이것은 마음을 움직여서 선악을 짓게 하는 작용이다. 만약에 전생에 선한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선한 쪽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식(識)은 대상을 파악하고 경계상을 모두 모으는 작용입니다. 색에서 행까지 만들어진 여러 가지를 모아서  이것이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중 소승에서는 육식으로, 대승은 심의식으로 나누는데  심은 오온, 12처, 18계에서 훈습한 일체의 종자를 포함한 아뢰아식이고, 의는 일체 의식 즉 아뢰아식을 반연하여 사량하고 염정을 생각하는 것이며, 식은 6전식으로 봅니다. 온(蘊)은 쌓여 모인다는 뜻입니다. 오온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 째 변계소집성의 오온으로 망정만 있고 진실한 이치는 없는 것으로 인식 내용 자체가 망념인 것을 깨우치기 위해 설해진 것입니다. 다음은 의타기성의 오온으로 일체 존재가 인연 화합에 의해 가유로 만들어진 것임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원성실성의 오온은 본성 차원의 오온 입니다. 본성 차원의 오온은 공한 것이고, 존재 차원, 인식 내용 차원 에서도 모두 공한 것이기에 용수 보살은 일체가 다 공하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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