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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7강 공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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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631회 작성일 21-08-09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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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공의 용도 


오늘은 공의 분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공의 분류는 크게 현상이 공한 것과 본체가 공한 것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현상이 공한 것은 여러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대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자기 생각에 의해서 덧칠해진 것이고 인연력에 의해서 유지됐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떠한 정보나 지식도 공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주로 수행을 하여 도를 알게 되면 아라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진리적인 공을 깨닫는 자 만이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살님들이 깨달은 것을 원성실성의 공이라 하여 진리적인 공인 것입니다. 결국 공에도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하다가 무엇인가 깨달은 것 같이 느끼는데 사실은 변계소집성 안에서 허덕이는 것인데 스승이 없으니 그것을 도라고 착각을 합니다.

공의 분류. 공용(공의작용-공을 사용하는 법)은 법과 번뇌의 근원이 되는 분별적 사유가 지멸하는 상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보면 진리도 공하고 현상도 공하다고 했는데 중생이 어떤 업을 짓고 어떤 번뇌를 일으켰어도 근원이 되는 것은 우리의 분별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사라진 상태는 공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알려면 수행을 해야만 터득되는 것인데 수행자들이 이것을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옛 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했던 내용이 바로 공을 터득하기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터득하지 못하면 어떤 진리를 들어도 다 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이나 수행을 할 때 빠르게 증득할 수 있는 것을 무심이라 했습니다. 누가 나한테 잘해준다고 거기에 홀리거나, 나에게 못 되게 한다 해서 거기에 성질을 내는 것은 이미 분별지에 떨어졌기 때문에 무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로는 공을 증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공용(空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용은 업과 번뇌의 근원이 되는 분별적 사유가 지멸하는 상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기도를 할 때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되면 내면에 들어가서 내면에 있는 여러분의 참된 성품에 있는 여러분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만 매개 수단일 뿐이지 부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준다 하면 기독교의 신과 똑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기도를 해도 어떤 이는 성취가 되고, 어떤 이는 성취가 안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청탁과 지혜에 달린 것이지 부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것을 다 들어 준다고 했을 때 부처님은 귀가 따가워서 잠도 못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불교신자 중에 애걸복걸 안 하는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스님만 해도 몇 안 되는 신자들이 집안에 무엇 일이 있으면 스님에게 와서 다 물어 보는데, 사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각자 지은 업을 스님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성을 알지 못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공성은 주체와 객체, 존재와 미존재, 생사와 열반 등의 극단적 상대적 분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는 무분별지의 지혜이다.’ 이래서 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을 체득하게 되면 허망하게 바깥에서 구하는 마음이 딱 끊어져 버려요. 그래서 한 번 마음을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다른 사람의 언어와 논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것은 지식이지만 자기의 것은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공성의 의미는 무분별지의 지혜에 의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진의 상을 공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진의 상을 유식에서 이야기할 때 원성실성인데 이것을 보았을 때 견성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성품을 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는 어떤 도리를 이야기해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많은 종교가 있고 종파가 있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심종, 마음의 법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반찬을 하나 더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되던, 교리가 되던 심종인 공법(空法)을 이해하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의 허물을 고치지 않으려 해도 고치지 않을 수 없는 묘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공함을 보면 분별이 소멸하는가?’ 앞에서 삼공이라 했는데, 자기가 일으킨 생각이 망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변계소집성의 공과 내 눈에 펼쳐진 객관세계와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것이 인연생, 인연멸이라는 의타기성의 공, 그리고 그런 것이 다 사라져도 그런 것에 영향 받지 않는 자리인 자기의 본래성품인 원성실성의 공이 삼공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분별이 자연히 소멸이 됩니다. 이 세 가지는 분별이 이르지 못해야 만이 깨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공을 알게 되면 분별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함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면 분별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선하는 선방에서는 깨치기 전에 수행하는 것도 다 마군의 업이라고 합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깨친 자리에서 봤을 땐, 그것도 의도적인 마음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좋기 때문에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공함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기 전에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공을 설하는 이유입니다. 공함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기 전에는 누가 여러분에게 잘 대해주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홀연히 일어나고, 빈정대면 나쁘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은 내 입장입니다. 그래서 내 입장이라는 것 공함을 알지 못하는 이상 여러분이 일으키는 일체견해가 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마음을 먼저 깨닫지 않으면 다 마군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법처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지혜로써 공을 요별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본성 자체가 공한 것입니다. 이런 공을 순간 체득할 수 있는 것이 기대하던 것에 딱 이루어졌을 때, 부족함이 없을 때 자기 견해가 일어나지 않는 때의 그 훈훈하고 행복한 마음이 바로 공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함을 알려면 공을 알아야 합니다. 

‘공은 감각기관이나 마음 작용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마음은 다 감각기관으로 쓰는 마음입니다. 

조금 전 스님이 방에서 책을 번역 하고 있는데 밖에서 보살들이 고추에 대해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맵고, 빨갛고, 모기가 물고 등등 이것이 고추에 대한 상념입니다. 결국 감각기관으로 객관세계에서 물든 상간에 마음자리를 등지고 사는 것이오. 이것을 ‘배각합진(背覺合塵’ 이라 하는데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합해진 마음이라. 이러한 마음을 상사심이라 하는데 여러분이 평소에 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공은 감각기관이나 마음의 작용으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뛰어난 것이 화두선입니다.  옛날에 어느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물었는데 ‘마른 똥 막대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감각이나, 지식, 이성, 이런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뛰어넘으면 부처자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화두법이 가장 빠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여러분에게 공이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 친절한 것이 아니고, 우는 아이에게 누런 낙엽을 주면서 이게 돈이라 하여 아이의 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일 뿐이지 밥이나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두라는 것은 바로 밥이나 떡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조주 스님에게 ‘달마 스님이 왜 서쪽에서 왔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뜰 앞에 잣나무’라 했습니다. 여기에 입각해서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감각, 지각, 의식, 논리로는 이것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그 알 수 없는 한 마음으로 의심해서 들어가 이것을 깨뜨리게 되면 바로 공이 체득되기 때문에 화두선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의심이 일어나려면 교학적으로 준비가 되어야 의심이 일어납니다. 공은 감각기관이나 마음작용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감각기관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색수상행식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공을 체득 하려면 대상의 일반적 모습이나 개별적 모습까지 대상화하지 않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도를 못 깨닫고 왜 중생 노릇을 하고 부처가 되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파악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습관의 중심이 저것이 나에게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으로 첫째 전제 조건입니다.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로우면 좋고 해로우면 싫은 것인데, 보통 인간들은 내가 싫으면 다른 사람들도 싫어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롭고 해로움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탐욕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대상화의 조건이 나를 기준으로 하는 대상화인데 여러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쓰는 마음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공을 체득하지 않는 이상 어떤 수행을 하고, 어떠한 정신 통일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 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아프간에 가서 인질로 붙들렸다 돌아와서도 반성이 없었는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좋을지 모르지만 많은 적이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공성을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공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허망한 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공을 이야기하는 자체는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탐진치에 물든 그 마음을 깨뜨릴 수 있는 묘한 힘이 공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도 여기에선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제조건이 무분별지입니다. 그러면 공을 체득하려면  분별심, 다른 말로 차별심인데 내 입장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한 금강경에 나오는 보살이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무분별지가 일어나면 공함을 보게 되고 이어서 번뇌의 원인인 희론과 분별이 사라지고 공성이 체득 된다.’ 무분별지를 체득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수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왜 하느냐? 공성을 증득하기 위해서 한다. 공성을 왜 증득하느냐? 무분별지가 나와야 되기 때문이다, 그럼 무분별지는 어떻게 증득하느냐? 마음을 닦아야 되는데 그 닦는 방법을 불가에서는 참선수행이라 합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 이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써 부처님하고는 아무상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에 가서 옛 부터 내려오는 관습대로 초하루, 무슨 재일 등등해서 불공하고 목탁치고 공양 하는데 부처님이 그것을 받아먹겠습니까? 그 절에 있는 주지스님이 갖다 먹겠지요.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수행을 가르치지 않고 수행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불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자 몸의 사자벌레같이 부처님 법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어디 가서 불자라고 하는데  행동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대한 아무런 견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 미신이고 기복인데, 불교신자는 다 저렇구나 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안 하면서 절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법 가운데 내법을 망치는 사람은 내법에 대해서 수행을 안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자신충’ 이라는 말은 사자가 힘이 세서 어떤 짐승도 사자를 해치지 못하지만 사자 몸 안에 있는 벌레들이 사자 몸을 갉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다닌다 해서 다 같은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을 이야기 하는 것은 수행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것입니다. 자칫 절에 다니면서 본인은 부처님에게 공을 들였다고 생각하지만 부처님 입장에서는 법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보면 선교사들이 선교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를 욕을 먹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모릅니다. 제 마음은 안 들여다보고 남의 마음만 닦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닦지 않으면서 남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닦은 사람은 원만한 지혜와 평등심이 나오기 때문에 광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배우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은 공을 배우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공법을 설하는 것은 악견을 버리기 위함이다’

악견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악견 중 가장 큰 악견이 ‘나다’하는 마음에 의지해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이나 참선이 잘 안될 때 일상생활에서 겸손하게 한 생각 쉬는 연습을 하게 되면 이 악견이 쉬게 됩니다. 다른 말로 내가 감정적으로 손해를 볼 줄 알면 악견이 아닙니다. 그런데 악견은 감정적으로 손해를 안 보려고 하다 보니 생기게 됩니다. 참 단순한데 일상생활에서는 참 안됩니다. 부부사이, 친구사이에서도 안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이 악견만 비워도 죽어서 삼악도에는 안 떨어집니다.

우리가 공을 왜 배우느냐? 아공, 내가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 악견을 비우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보살이 되려면 법공까지도 배워야 되고, 부처가 되려면 일체개공까지 배워야 됩니다.


 ‘그런데 도리어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수행하는 입장에서 가장 큰 악견은, 아견은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지만 수행자가 떨어지기 쉬운 것은 공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공에 대해서 ‘텅 비었다’ ‘말 할 수 없다.’ 등 여러 가지로 말 하는데 그 마음을 못 봤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공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이란 것은 우리의 번뇌 망상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사실 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분별입장에서 봤을 때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공’이라고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공’이라는 언어에 떨어져서 다시 ‘공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공’이라는 언어에 떨어져서 다시 ‘공하다’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미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악견이라고 합니다.

‘세속제란 일체의 모든 법은 생기하지 않으므로 본성이 공하지만, 중생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망령되이 집착을 내므로 세간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전도몽상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진리입장에서는 일체 모든 것이 일찍이 난 바가 없는데, 중생은 허망한 허깨비 같은 소견이 붙어 나라는 소견에 의해 세상이 실재하다고 믿고,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삼악업을 짓습니다. 여기서 세속제란 무엇인가? 본성은 원래 공한 것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변계소집성, 즉 여러분들이 일으킨 견해는 여러분 입장에서 얘기한 것이니까 공한 것이고, 여러분이 보는 일체 세간은 인연에 의해 잠깐 머물렀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착각을 해서 내일 모레 죽을 사람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세속제가 공한 것을 비유하자면 찬물이 있는데 이 찬물의 본성품은 빨간 것도 아니고 파란 것도 아니고 젖는 성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커피나 다른 것을 타게 되면 색이 변하게 되는데 중생은 감각에 의해 판단을 하게 되므로 물의 젖는 성품을 잊어버리고 변한 그 색깔이 실재하다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 색깔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그 색깔을 세속제라 하는데 이 세속제의 본성은 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거꾸로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망령된 업이 쌓임으로써 온갖 고통을 다 짊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을 진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 중생들이 얘기하는 세속에 대한 견해입니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세간의 전도 된 성품을 요달하고 있으므로ㅡ즉 본래 공한 것을 알아요ㅡ어떤 사람을 봤을 때 ‘잘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아, 내가 잘생겼다는 견해로 저 사람을 보는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려 그 사람은 거울에 비친 형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현성들은 어떠한 사람, 어떠한 경계하고 부딪혀도 자신이 잘못 마음을 일으키는 즉시 알아차려 마음이 즉시 쉬어버리게 됩니다. 이 것을 선가에서는 ‘돈오법’이라 하는데 몰록 깨닫고 몰록 쉰다는 것으로 돈오돈수법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공하며 자성이 없음을 안다.’ 나한테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는 상간에 ‘아! 내 입장에서 이 사람을 판단했구나.’ 하는 생각을 쉬어버리면 기분 나쁜 것은 자성이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공을 요달한 사람은 세상을 이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물을 우유라 해도 맞고 독이라 해도 맞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입장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 그렇게 하게 편협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서 쓰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인에게는 제일의제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견성을 해서 공을 알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을 알아야 마음이 쉴 수가 있고 자유롭게 무심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삼세의 수행인들이 이 마음을 증득하고 이 마음 쓰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여 이제(二제;진제,속제)에 의하여 설법을 하신다.’

윤회, 인과에 대한 것은 유치원 수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박사 석사 수준의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한마음을 보여 깨닫게 하는 것 외에는 얘기를 안 합니다. 근기가 안 되는 사람이 반야심경을 들으면 그것을 왜? 해야하나,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 세속제를 배워야 됩니다. 부처님 법 가운데 세속제를 설명한 것이 12연기, 오온 입니다. 오온이 공하다 하는 것은 세속의 것은 일체가 공함을 얘기한 것입니다. 오온을 반야심경에서는 나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세상을 설명할 때도 12연기로 다 됩니다. 그래서 12연기나 오온이 실재하다고 하는 것은 제일의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즉 원성실성인 우리 마음자리의 참된 진리를 모르는 것이고, 12연기법에 의해서 나와 내가 만들어져 12연기나 오온이 실재하다고 하는 것은 중생의 고집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것이 실재하지 않으면 인과도 없고 선악도 없다고 하게 되는데 이것은 세속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두 가지를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중도를 수행하는 사람이고, 한 가지만 취하여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관계를  끊어버리면 이런 사람은 밥도 안 먹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밥은 세속사람들이 농사지어 밥을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공에 떨어진 사람이 공의 입장에서 다 허망하다고 하게 되면 인과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세속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수는 공성의 개념을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적정하며’ - 사실 바로 이 한 구절에 마음자리를 다 설명한 것입니다. - ‘희론에 의해 분별함이 없으며’- 희론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머리만 굴려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피스트는 희론자입니다. 그러니까 공의 자리는 희론에 의해 분별함이 없음이니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이것은 분별입니다. 그런데 공의 자리에서 우리의 참 마음의 성품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의미를 나한테서는 나타내지 않는 것, 이것이 진리의 상이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라는 것은 공의 입장에서 보면 중생들이 제 깜냥만큼 선글라스를 쓰고 세상이 붉다, 푸르다, 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인데 색깔이 없었을 때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공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공이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면 내가 거기에 내 견해를 넣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나 없음을 증득해야 가능합니다. 그런 것을 증득해야 비로소 현인이고 성인이고 보살이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책을 많이 읽고, 말을 잘하고는 이것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한테 와서 복 달라고 불공을  드리고, 아무개 스님은 염불 소리가 좋아서 복 많이 받을 것 같다느니 하는 것은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도 못 됩니다. 그래서 해탈은 업과 미혹을 없앤 것으로 고가 소멸하면 해탈이며 해탈의 전제 조건은 반드시 마음의 공함을 깨우쳐야 됩니다.

분별은 업과 미혹을 일으키니 공함을 보면 분별이 소멸한다. 

우리가 반야심경의 공을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배우고 나서 수행을 하여 증득하라는 얘기입니다. 수행의 목표,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고서 수행만 하면 외도가 됩니다. 수행 좀 하던 스님들이 귀신 들려 예언도 하고 큰 박수무당이 되고, 무슨 종파를 만들어서 종정 노릇하는 사람도 많이 봤는데 이것이 수행하다 외도가 된 것이며 마가 든 것입니다. 올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마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마인 것을 아는데 거기에 어떤 것도 달라붙을 수가 없습니다.

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긴 했지만 이것은 설명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 연에 의한 것은 공하다고 중론에서 말한다.’ 즉 원인과 그 원인에 의한 인연, 이것이 부딪혀서 만들어낸 결과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펼쳐지는 모든 경계는 세간법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용이 됩니다. 원성실성을 성철스님은 중도라 그랬는데, 제일의제 즉 공하되 공하지 않는 자리, 삼라만상이 이것의 힘에 의지해서 춘하추동이 만들어지고 우주가 성주괴공하기 때문에 공할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무궁무진한 자리인데 인간의 감각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온갖 견해를 없애버릴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인 ‘공’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삼자성의 오온은 모두 공하다. 청변스님은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이것에 의해서 오온은 모두 공하다 했습니다. 오온은 여러분이 ‘내다’라고 하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도 결국 이 논리에 의하면 모두 공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원성실성도 공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감각이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설명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른 말로 진공묘유라고 합니다.

장진론에는 ‘무위는 실체가 없어서 생하지 않는 것이 허공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허공꽃은 눈에 병이 든 사람만 보이지, 병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허공에 꽃이 없습니다. 이것은 진제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으로 집중된 실재가 수동적일 뿐 아니라, 능동적인 재반응을 통해 더욱 복잡하게 변한다. 이것이 세 번째단계인 상(想 )이다.’

상이란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느낌에 대해서 이 스님이 부드러운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강한데 한 발짝 물러설까 하는 이것이 상입니다.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이것을 다 쓰잖아요. 이것을 깨트리는 것이 도 닦는 것이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행동지침을 깨트리는 것이 도 닦는 것으로 스님이 일념단속하라는 것은 바로 이 오온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닦게 되면 어디를 가든지 진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감각 상태에서 자아가 자극을 느끼면 자동적으로 그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하는데 그것이 네 번째 구성요소인 행(行;의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업이 형성 됩니다. 조금 전까지는 느낌이나 생각에서 멈춰지는데, 행에 도달하게 되면 취사선택하는 마음이 툭 튀어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행이며 업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업력이 형성되지 않는데, 그것은 과거의 습관대로 그냥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행’에서 부터는 자기 의도가 들어갑니다. 이 의도도 엄격히 말하면 과거에 자기가 했던 습관만큼 의도가 들어가게 됩니다. 남의 흉보기 좋아하던 사람은 무슨 얘기가 나오면 남을 흉 보게 되는데 이게 행입니다. ‘그것은 물건을 모으고 성격과 행위의 패턴을 조성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식하는 감각과 마음의 결합인 의식이 있다.

색에 대해서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면서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에 대해서 자기생각이 들어가고, 생각에 의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행(의지)이 만들어지게 되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을 때 생깁니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무엇이라고 결정짓는 마음을 ‘식(識:6식, 현재 의식)’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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