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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8강 조견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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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799회 작성일 21-08-09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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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조견색온


반야심경의 핵심은 오온의 극복에 있는데 이것이 집착하는 근본적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온을 크게 나누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있는데 다른 의미로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몸과 마음이 되겠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내용을 보면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는 몸과 마음이 우리의 망상에 의해서 조작 된 것이고, 연기법에 의한 일시적인 인연의 소산물임을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알아 여러 가지 인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속지 않음으로써, 고통의 원인이 앉은 자리에서 끊어지기 때문에 오온을 이야기하고 공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온 중에서 첫 번째 색이라는 것은 유식에서는 열한가지로 분류를 하지만 근본적으로 색은 물질을 이야기 합니다. 불교에서는 지수화풍 네 가지를 근본이라고 합니다. 내 몸이 물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업력에 의해 조합이 되어서 남자, 여자, 또는 지구가 만들어졌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먼저 색을 이야기 합니다.

 사대원소로 이루어진 물질인 육체, 나라고 착각하는 육체도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도 색입니다. 두 가지가 공통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색인데 색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고 소승과 대승으로 나누어서 색이 실재하는 것이냐, 정신적인 것이냐에 있어서 대승에서는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령이 물질로 화한 것을 사진으로도 찍는데 엑토프라즘이라는 물질입니다. 유령이나 귀신이 사람의 눈에 보일 수 있다는 것의 근본도 색인 것입니다.

 색의 내용이 뭐냐 했을 때 색에는 4대가 있습니다. 

첫째가 지(地) 땅의 성품, 둘째는 수(水) 물의 성품이고, 셋째는 화(火) 불의 성품이고, 넷째는 풍(風) 바람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근본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불이다 물이다 하면 틀리는 것입니다. 땅의 성품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견고하게 뭉쳐져서 물질화되었을 때 나옵니다. 가령 볼펜은 일정한 형태로 견고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것이 땅의 성품입니다. 이 안에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형상이 이루어지려면 부드럽게 변형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물의 성품입니다. 물의 성품은 볼펜의 모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볼펜이 되기 위해 불이나 그런 것으로 화합을 해서 우리에게 맞는 형상으로 크기나 중량을 조절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불의 성질이고, 플라스틱이 변질 되어서 쓸 수 있는 것이 바람의 성질입니다. 지수화풍을 우주에서 크게 결정할 때는 흙, 불, 물, 바람이 되지만, 작게는 이러한 사물 하나하나에 인연으로 뭉쳐져 어떤 성질이 많은지에 따라 볼펜도 되고 찬물도 되는 것입니다. 온갖 물질이 지수화풍 4대에서 나왔다는 것에서 큰대(大)를 쓰는 것인데 지수화풍 4대에서도 대승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 마음 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굳은 사람은 지대의 성품, 지혜가 날카로운 사람은 물의 성품이 많고, 활동적인 사람은 바람의 성품을 많이 타고 난 것 같고, 정열적으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은 불의 성질을 많이 타고 난 것인데 그런 것으로 사주를 보는 것입니다. 생년, 월, 일, 시만 말하면 어느 날 어느 시에 4대가 어떻게 뭉쳤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여러분이 평생 살아 온 모습을 분별 합니다. 작용을 주로 다루는 것은 술(術), 작용이 일어난 근본 원인을 다루는 것은 도(道)라고 하는데 원래는 도와 술이 체(體)와 용(用)의 관계인데 사람의 입장이 되면 모두 술로 변해버리니까 스님들이 사주보지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에는 우주의 본질이 다 들어 있는 것 입니다. 색이 물질의 본질이라고는 하지만 대승적으로 보면 우리가 쓰는 마음에 따라서 물질화되는 성질이 틀려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사람은 화의 성질을 많이 가지고 있고, 조금만 먹어도 살 찌는 사람은 수의 성질을 많이 타고 난 것입니다. 결국 4대가 육체 뿐 아니라 환경까지도 그렇게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물질을 견고히 만들게 하는 지대, 물질을 스며들게 하는 것은 수대, 물질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화대, 흔들리는 마음은 풍(風)대를 만들 것이며, 의욕적인 마음은 화(火)대를 만들 것이고, 견고한 마음은 지(地)대를 만들 것이고, 잘 화합하는 마음은 수(水)대를 만듭니다. 

색이라고 해서 색이 아니고 최초는 우리 마음이다. 

선가에서는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면 그 순간에 사대에 의해 수미산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대원소로 이루어진 육체를 오온에서 색(色)이라 합니다. 

 수(受)는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감각작용, 상(想)은 그 감각작용에 대해서 나름대로 마음이 움직이는데 감각이 불편하면 노여움을 일으키고 감각이 좋으면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젊은 청춘남녀들은 같이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수와 상이 뭉쳐져서 ‘행복하다’,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 고 하는 상념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상온입니다. 

경계가 없으면 도저히 존재 할 수 없다. 아리따운 여인이나 잘 생긴 남자가 옆에 없으면 나타날 수 없는 마음이 상온이고 수온이며 그것을 지각표상 작용이라 합니다. 눈을 가리고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미인이라고 하고 돼지 손을 잡고도 따뜻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으로 사물에 대하여 가치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미혹하게 마음을 쓰게 되는 원인인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들 내 마음이라 하고 자기가 판단한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허공을 잡으면 느낌이 있을까요? 허공은 색이 아니니까 감지를 할 수 없어서 수나 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행(行)은 그렇게 상상한 것에 대해서 이끌어가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을 유지해야겠다, 불편하니까 더 이상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행온이라 합니다. 일상에서 이렇게 마음을 씁니다. 행동을 촉구하는 의지 형성 작용입니다. 기쁜 것에는 사랑을 주고 노여움에는 증오를 일으키고 의지적 충동을 일으키는 마음으로 일체중생이 의도적인 마음을 쓰기 때문에 윤회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색·수·상(色受想)은 우리에게 크게 타격을 안 주지만 행온은 크게 타격을 줍니다. 

 식(識)은 앞에서 색·수·상·행에 의해서 체험된 것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새로운 판단이 생기고 관념이 생기는데 이것을 식이라고 하고 의식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진선미(眞善美), 위악추(僞惡醜)는 다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다음 버릇인 식별 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에 한국 사람이 외국에 가서 그곳 문화를 보고  어떻게 저렇게 살까 하는 식(識)을 일으킵니다. 보고 들은 것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식별작용이라고 합니다. 식별작용도 우리의 경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경계가 없으면 원래 없는 것인데 중생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체험한 경계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됨으로써 반드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게 되면 마음을 써도 평상심을 쓰는 것이 아니고 차별심을 쓰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뜰 앞에 잣나무가 평상심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이런 이치를 알고 이야기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평소에 쓰는 마음을 평상심이라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오온이 왕성하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까지 나타났을 때 드러나는 것이 ‘내다’ 하는 존재감입니다. 일단 나타나면 아무리 잘난 사람도 나보다는 귀한 사람이 아니고 아무리 똑똑한 사람을 보아도 내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윤회를 멈추려면 이 오온의 성질을 잘 이해하여 하나하나 경건하고 진실하게 닦아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고통의 원인을 없애 버릴 수 없고 고통이 계속 생겨납니다. 따라서 오온이 공한 것임을 알아야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해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없애버렸다고 했습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나의 오온에 의해서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지금의 북인도에 있는 계빈국의 왕이 사자존자의 목을 쳐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사자존자는 부처님 법을 전해 받은 24대 조사스님입니다. 사자존자가 어느 날 야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계빈국왕이 잠깐 잠이 든 사이 왕을 모시는 궁녀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자존자가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법문을 청해 듣고 있었습니다. 계빈국 왕이 깨어나서 보니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어 고독하고 처량하여 슬픈 생각이 들면서 시녀들을 찾았는데, 시녀들이 스님 옆에 고요히 둘러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괘심한 생각과 질투가 나서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자존자는 부처님 법을 공부 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왕은 부처님 경전에 오온이 공하다고 했는데 너는 그것을 얻었느냐 묻습니다. 사자존자가 얻었다고 하자 그럼 내가 너의 목을 쳐도 되겠느냐 하니 쳐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자존자의 목을 쳐버렸는데  목에서 흰 피가 나왔고, 십일 후에 전쟁이 나서 계빈국은 전멸 당했다고 합니다. 오온이 공함을 알았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공의 소산물이고 망상의 소산임을 철저하게 깨닫은 사람은 나고 죽는 것에 집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공함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의 공포인데 그런 공포까지도 초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마음이 평화로워져 바깥에서 들어오는 일체의 경계에 수·상·행·식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데 이것을 무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리불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 제일이라 부처님 다음으로 뛰어난 분인데 하루는 변제천녀라는 천상의 천녀를 만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도가 높으면서 여자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어 봅니다. 남자가 되어야 성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입니다. 천녀는 내가 도를 깨닫고 딱 12년 되었는데 그동안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온을 깨닫은 사람의 말입니다. 오온이 공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의 형상을 보고 판단합니다. 깨닫은 사람은 여자의 모습도 남자의 모습도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흩어지는 오직 오온이 공함을 아는 지혜뿐입니다. 남녀 상을 떠난 사람에게 왜 남자모습으로 바꾸지 않느냐고 묻는 말에 그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경천화상이란 분이 있는데 이 스님이 어느 절에 주지로 있을 때 하루는 수돗가에 쌀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행자들이 쌀알을 함부로 버렸구나 하면서 줍는데 어떤 노인이 절을 하기에 누구냐고 하니 그 산에 사는 토지(土地)신이라 합니다. 왜 나타났냐고 하니까 스님이 주지로 오셨는데 그동안 스님을 뵐 수 없었는데 지금 스님을 처음 뵙는다고 했습니다. 스님이 20년 동안 절에 있었는데 왜 처음 본다고 하느냐 하니까 스님이 한 생각 오온이 발동하니까 그 모습을 보고 토지신이 인사를 드린 것 입니다. 그전에는 오온이 공한 마음이니까 귀신이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경천스님은 현사사비 스님에게서 도를 깨달았습니다. 현사스님을 찾아가서 도를 깨달으려고 해도 방법을 모르겠는데 어떻게 도를 이룰 수 있느냐고 여쭈자 ‘너는 저 흘러가는 개울 소리를 듣느냐’고 묻기에 ‘듣습니다’ 라고 하니 경천스님에게 개울속으로 들어가서 닦으라고 했습니다. 경천스님은 그 얘기를 듣고 오온이 공해버렸어요. 그 후 토지신이고 산신이고 스님을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 산신, 용왕 이런 것들은 다 삿된 것입니다. 오온이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귀신도 볼 수 없다는 도리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원효와 의상스님의 이야기인데 의상스님은 화엄종주 이기 때문에 하늘의 천공을 받아먹고 팔부신장이 호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원효 스님이 의상스님을 찾아갔는데 의상스님은 원효 스님을 대접하려고 하늘에 천신이 음식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는데 천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원효스님이 가고 나서야 천신이 천공을 가지고 왔기에 왜 지금 오냐고 했더니 아까는 대승보살이 계셔서 감히 들어 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팔부신장들이 빽빽하게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오느냐고 했습니다. 원효 스님은 팔지 보살 입니다. 오온이 공하기 때문에 하늘의 천신도 접근을 못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단계에서 귀신 눈에 띄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경계를 보고 소견을 일으킨 것이 바로 귀신인 것입니다. 생각이 바로 수·상·행·식의 전개입니다. 색을 보고 느낌을 받고 생각을 하고 그것에 의해서 자기 나름대로 짜증을 내고 판단을 하는 것 그것이 오온입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일념 단속을 하라고 하며 교가에서는 생각, 마음을 일으켜서 미혹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식과 이론이 아닙니다. 천신 토신 귀신이 못 봤는데 이런 사람을 누가 어떻게 하겠어요?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은 한길로 생사를 뛰어넘는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승조스님은 구마라습(九摩羅什)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인데 자질이 특이하고 뛰어났습니다. 그 당시 요진(姚秦) 임금이 승조법사를 환속시켜 재상으로 삼으면 천하가 요순세계로 돌아가 태평시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마라습 스님에게 청하고 승조법사에게도 간청하였습니다.

승조대사가 끝내 허락하지 않고 재상이란 꿈같은 것이고 무상대도를 얻어 영원토록 자유자재하여 일체중생을 위해 살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옥에 가두고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래서 꼭 죽이려면 일주일만 여유를 달라고 하면서 그 동안에 보장론(寶藏論)을 지었습니다. 

자기로서는 사대가 주인이 없고 오음은 본래 비어 일체가 다 공함을 깨쳐서 불생불멸하고 대도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허공은 열 번 쪼개고 부술 수 있어도 자기는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죽는 것 같지만 실제로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며, 자성을 확실히 깨쳐서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칼로 천번 만번 내리쳐도 자기한테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창과 칼을 만날지라도 항상 탄탄하다는 것은 승조법사의 이러한 경계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뜻뿐 아니라 자성을 깨치면 영원토록 생멸이 없는 경계는 항상 탄탄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중에 왕이 후회를 하고 승조 스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는지 물으니 죽기 전에 시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음이요

오온본래공(五蘊本來空)          오음은 본래 비었음이라

장두임백인(將頭臨白刃)          머리를 흰 칼날 아래 내미니

흡사참춘풍(恰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


조주 스님은 제자가 스님은 죽으면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을 때 지옥에 간다고 하면서, 지옥에 있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차 한 잔 먹는 것과 똑같다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지옥에 간다하면 벗어나려는 생각부터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주스님 같은 분은 그것이 내가 꾼 꿈이다. 꿈 깬 사람에게는 꿈일 뿐이지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다고 했습니다. 성철스님이 열반했을 때 열반송을 기독교인들이 잘못 이해해서 다 후회한다,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트집을 잡았지만 그만큼 위대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간지옥을 생각만 해도 치를 떠는데 성철 스님은 스스로 떨어지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에서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평생 쓰는 마음은 선한 생각이거나 악한 생각인데 선한 생각이 더 많았다 하면 좋아 하겠지만,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는 어떤 것이 여러분 마음인가 이것을 끌고 들어가면 오온이 공함을 깨닫을 것입니다. 선가에서는 간단하게 수행법을 가르치지만, 감당이 안 되는 중생한테는 교학적으로 낱낱이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이제 오온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을 합니다. 대승법으로 태어나기 전에 네가 무엇이냐고 하면 전생에 닦은 업이 있어야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범부들은 악업이 많거나 업력이 두터워 공부를 해도 눈에 보이거나 들리지 않고 마음이 거칠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 하나 분석해서 마음 쉬는 공부를 가르치는데 그것이 위빠사나 수행법입니다. 나무는 물과 비료와 태양을 인연하여 생겨난 것이며 나무의 본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인간도 똑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혼자 잘난 척 하지만 뭇 인연이 없으면 존재 할 수조차 없습니다. 서로를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 에 없는 중생계 물질세계는 다 그런 것입니다. 연기법에 의해 나타난 것이지 실재로써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4대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입니다. 수의 요소는 살에 영양분을 주는 피와 같은 것을 만들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람의 작용, 피가 식지 않게 하는 것은 화대의 작용이기에 내 몸은 지수화풍 4대지 내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관찰해서 거친 집착, 몸을 자기라고 착각하는 집착을 없애 버리는 것이 소승 수행방법입니다,

 중생은 오온의 인연의 화합으로 몸과 마음의 자체를 거짓으로 세운다. 

오온이라는 것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내 몸이라 하고,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에 의지해서 나타나고, 경계가 없으면 나타나지 않은 마음입니다. 무조건 중생의 판단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부모 자식이든 부부간이든 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서 실체가 없습니다. 결국은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순간순간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꽉 잡고, 그것을 지키려고 상대에게 내 마음을 따라하라고 하면 상대방도 마음이 있어서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실체가 없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울 때 조용히 앉아서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저 사람이 미운데 왜 미울까? 자기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욕탐에 의해서 상대방을 평가하기 때문이며 욕탐이 있으면 반드시 상대방에 대해서 사랑과 미움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희락과 갈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욕탐으로 탐착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중생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만약 도를 깨닫거나 수행을 한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욕탐으로 한 경계를 만들고 있구나 하는 순간에 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선방에 가서 12시간 잠 안 자고 앉아 있는 것은 귀신 굴에 떨어진 것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는데 그게 무슨 수행입니까? 선방에 있을 때는 마음이 정화되어서 누구한테 욕도 안하고 잘 할 것 같다가 집에 와보니까 며느리가 설거지도 안 하고 집안이 엉망인 것을 보고 욕을 하게 되면 시어머니는 선방에서 12시간 공부한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관찰하는 법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관찰을 하지 않으면 자기도 속고 남도 속습니다. 여러분이 염불을 한번시작하면 세 시간 네 시간씩 한다는데 그것은 귀신 굴에 떨어진 것입니다. 앉아 있고, 염불하고, 절을 한 공덕이 일상생활에서도 적용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멍하니 있다가 온다면 일상생활에서 끝없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업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온의 정체는 무엇인가?  색온은 4대 원소가 인연에 의해서 물질에 대한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신체와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인 시각적 형상, 소리, 냄새, 맛, 만져서 느껴지는 촉감과 마음의 대상인 생각과 개념들이 물질적인 색입니다. 이것을 법처소색(法處所色)이라 하는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의지하고 사는 마음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전도 되었다 하는 것은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우지 않으면 꿈에서도 알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을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윤회를 배워도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 어떻게 미혹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닦을 수 없고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생사의 원인이 오온에 대한 미혹에 있고 일상생활에서 오온을 함부로 썼으면서도 자기 마음이고 자기 몸이라고 끝없이 보호하려고 악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은 우리 몸에 갖춰진 것이며 육진은 바깥의 경계인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인 안이비설신 5가지가 있고 종합해서 판단하는 의근이 있습니다. 그래서 육근인데 그것의 상대되는 경계인 눈에 보이는 색, 소리, 맛 감촉 이런 것들이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육근 육진이라 합니다. 육근 육진에 대해서 아견을 일으키므로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했다고 하며, 나라는 견해를 추상적으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화두에 나라는 것을 깨트리기 위해 “너는 누구냐?” 라고 물으면 자기 이름을 대거나 누구 엄마다 누구 딸이라고 합니다. 다시 이름을 얻기 전에 누구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말을 할 것인가? 이것이 화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름을 인식하기 이전, 즉 이름을 얻기 이전에 여러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바로 부르는 것일까? 제대로 대답하면 인과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오온이 공함을 체득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나라는 마음을 쓰는데 그때 알아채고도 자꾸 쓰고 싶어지것은 오랫동안 길들여져서 그렇습니다. 그때 나라는 마음을 자꾸 내보이려하는데 과연 나는 누굴까 하고 반문하라는 것입니다. 

 육근 육진에 대한 아견을 일으키므로 색온에 대한 인연을 관찰하여 극복하여야 한다. 

이 몸이 나라는 집착은 뿌리가 깊어 몸이 생기자 마자 집착 한 것으로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백골관을 합니다. 자장율사가 백골관을 했다고 합니다. 백골관으로 관찰하면서 내 몸을 지수화풍으로 나누어 봅니다. 고름과 침과 타액과 오줌은 수대이고, 딱딱한 뼈는 지대이고, 따뜻한 온기는 화대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풍대로 이렇게 4대가 뭉쳐서 내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일으킨 망상만큼 조합이 된 것 입니다. 인연관도 되고 백골관도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중생은 백골관을 해야 합니다. 어려서 노스님들이 여자만 조심하면 공부는 잘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자를 보면 뚫어지게 보아 그 여자가 팔십이 됐을 때를 상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상에 집착해서 마음을 뺏기는 사람에게 백골 체험으로 가르쳐 준 것입니다. 나중에 공부를 해보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만 비추면 생각에 영향을 안 받으니까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칠십, 팔십이 되어 중풍으로 벌벌 떠는 것을 관찰해보십시오. 그리고는 결국 죽습니다. 이렇게 관찰을 해서 자기 마음이 사물에 뺏기지 않도록 하는 이것을 임제 3구에서는 하근기는 경계를 없애서 도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즉 하근기는 경계가 추악한 것을 관찰하게 하였고, 중근기는 경계는 놔두고 마음 즉 생각을 빼앗아 버리게 합니다. 상대에 대해서 분별하는 그 마음이 실체가 없음을 관찰해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상근기는 바탕이 천진하고 맑으며 진실하기 때문에 한마음 딱 지키면 무엇이 나타나도 무심한 것입니다. 상근기가 수행하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그래서 하근기에게는 소승 수행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욕탐에 물들거나 어리석을 때 진실하게 실행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공부를 하려면 공부한 사람한테 배워야 쉽습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를 안 하게 되면 여러분 수준만큼의 이상형이 나타납니다. 스님들이 공부를 하게 되면 뜬금없이 서울에서 여행 온 여대생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스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생선장사합니다. 그 여학생 눈에는 스님이 가장 멋진 사람으로 보였고, 그 스님은 오랫동안 공부만 하다보니까 외로웠고 따뜻한 말로 위로를 받아보지 못하다가 여자가 교태를 부리니 바로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불법을 정법으로 배우지 못하고 자기가 들은 것을 불법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욕탐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똑똑해도 여러분의 욕망을 못 이깁니다. 욕망을 이기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세월이나 업력이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하게 됩니다. 몸에 대한 신견인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없애야 하는데 특히 여자들 몸이 나라고 생각해서 씻고 바르고 하는데 세월의 힘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거기서 무상을 느끼고, 내가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미모가 아니고 성격과 품위와 지혜라고 생각하면 평생이 편해집니다. 

음식은 객관이고 우리 몸은 주관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라고 하는 주관은 객관인 음식물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자동차도 휘발유가 없으면 못 움직이듯이 나의 몸도 똑 같습니다. 나의 몸이 아닌 음식도 내가 먹으면 내 몸이 됩니다. 내 몸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물질이었는데 내가 먹는 순간 피와 살이 됩니다. 내 몸의 세포도 눈물과 오줌으로 배설하면 객관이 됩니다. 집에 있는 쌀을 보고 ‘쌀이 나 일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여기서 하근기는 경험을 통해서 나에 대한 애착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을 관하는 관입니다. 그다음 몸 바깥 것을 관찰해서 나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으로 나의 몸을 중심으로 배설된 땀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서로 뒤바뀌어 어느 것이 나의 주체이고 실체라고 할 수 없음을 관해서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몸은 무상한 것이고 무아 한 것임을 자각해서 아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한다 했을 때 이것은 오온에서도 첫째 색온인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으로 관찰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부터 스님에게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물으면 안 되겠지요? 이것이 조견색온으로 우리 몸에 대한 미망과 집착을 다스리는 수행입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느냐 하면 이 형상을 나라고 착각한 무지 때문에 태어난 것 입니다. 그 무지를 없애려면 관찰을 해서 무지에 속지 않는 지혜가 일어나야 하고, 그 지혜가 실행이 되어야 나고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 중에 첫 번째가 색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신자 분에게 반야가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여러분에게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배운 대로 하면 지혜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지혜가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지혜는 우리말로 슬기로움인데 만약 확실하게 인과를 알고 선업을 닦아나간 사람이면 지혜란 착한 것은 따르고 악한 것은 물리치는 것으로 답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불법에 처음 입문했을 때 신도들이 마음을 닦아나가는 방법입니다.  만약 중근기에게 지혜가 뭐냐 물으면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고 합니다. 이 도리로부터 들어가야 지혜를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상근기는 지혜가 뭐냐고 물으면 거꾸로 지혜가 무엇이냐고 되물어봅니다. 근기에 따라서 지혜를 공부하는 방법이 이렇게 틀린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이해한 사람은 어떤 법문을 들어도 이 세 가지로 다 회향할 수 있지만, 이것을 회향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근기만큼 불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몸에 대한 집착인데 그것을 색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데 이것이 다음 생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의 경전을 보니까 도를 깨달은 사람의 7가지 특징은 있는데 첫 번째 특징이 생명을 일부러 죽이지 않는 것이고 도를 깨달은 사람은 의식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식은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할 때의 의례 같은 것인데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은 굉장히 단순해지고 명쾌해집니다. 지혜가 생겨나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람을 대할 때는 형상이나 위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심보만 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수온(受蘊)에 들어가는데 반야심경의 오온을 배운다는 것은 생사의 원인과 생사의 원인을 벗어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법을 배우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지식일 뿐이지만 그래도 들어두면 이 인연으로 이생이나 어느 생에서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배워야합니다. 

 수온은 받아들임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느낌에 의지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느낌이 바로 수인데 수는 혼자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어떻다 하는 것은 다 느낌이고 경험이지만 대상 없이 존재하는가를 관찰 해보세요. 대상이 없으면 느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밤 꿈속에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는 어떤 경험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것은 느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잠이 깊이 들었을 때는 대상이 없으므로 느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수 자체도 공한 것인데, 보통 중생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이 느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을 쓰게 됨으로써 오탁악세에 물드는 마음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두 법칙 중에서 앞에서는 물질(색)이 자기라고 착각한 것을 깨트리는 법칙이었고 지금은 정신적인 현상(명:名)을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을 부수는 법칙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함을 비춰 일체고액을 벗어나게 했다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여러분들이 느끼는 고와 락은 없는 것입니다. 느낌의 두 가지 성질은 고와 낙입니다. 사람들은 사물에 대한 느낌을 고와 낙으로 판단을 합니다. 

 ‘수온에 의해 아집을 일으킨다.’ 느낌은 대상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인데 자신에게 고유하게 있는 어떤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감각들의 모임인 유쾌와 불쾌 등 육체적 정신적 기관들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경험한 것으로 모두 6가지가 있습니다. 눈으로 봤을 때 느낌은 밝거나 어둡다, 귀로 들었을 때 소리가 크다 적다, 코로 맡았을 때 향기가 나거나 악취가 난다, 입으로 먹었을 때 맛있거나 맛없다, 몸으로 부딪쳤을 때 좋거나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법도리로 봤을 때는 이 느낌이 바로 생사의 원인인 것입니다. 이제 세간법이 통용될 수 없음을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인과법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그저 남한테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마음을 쓰면 좋은 과보를 받으니 이런 것이 그렇게 걸리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벗어나고 불법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미묘한 어리석음과 마주쳐야 하는데 그중에서 정신적인 첫 번째 단계가 수온입니다. 수온을 닦아가는 방법으로써 첫째는 고와 낙의 성질을 가진 존재가 대상으로써 존재하고 그 존재로부터 그 성질을 수용하는 감정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고락을 느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중생들은 고락이 대상으로써 존재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고와 낙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이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것도 바로 수온을 깨달은 것입니다. 해골 물은 눈으로 보지 않은 깜깜한 상태에는 갈증을 풀어준 시원한 물이였지만, 대낮에 보니까 그 물이 해골에 들어있었고 그것을 마셨다고 생각하니까 구역질이 일어난 것입니다. 경계를 보기 전까지는 청정하고 시원했던 물이 보고난 후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물이 되어버렸는데 과연 그 대상에서 그런 것이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느낌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자신이 어떤 견해를 일으킬 때 이 견해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를 먼저 관찰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밉다. 왜 미울까? 내 맘에 안 드니까 미운데, 내 마음이란 것이 영원한 것이냐? 눈 한 번 감아도, 잠 한 번 들어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나도 없고 너도 없는 도리를 이렇게 이해하여 깨치면 윤회의 원인 종자가 점점 소멸 된다는 것입니다.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고 지혜를 갈구하는 사람한테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되고, 대단히 지혜로운 말입니다. 부처님 법과 외도의 법이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외도의 법에는 이런 것은 없고 그저 즐겁고 행복한 것만 이야기 하고 미래만 약속하여 즐겁고 행복한 것을 받아들이는 느낌에 대한 반성은 없습니다.

 ‘외부대상과 접촉하는 상태에서 고락이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여 나의 느낌이라는 것이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체험한다.’ 이것이 느낌을 다스리고 느낌을 뛰어넘는 수행법입니다. 사람들이 스님에게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고 했을 때 일념을 단속하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몸에 대한 일념, 자기 느낌에 대한 일념이 있습니다. 그 느낌은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관찰해서 그것이 무상하고 무아이며 고통의 원인인 것을 판단할 때만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 알아 정견이 이루어질 때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에게는 수다원과가 그리 심오한 경지는 아닙니다. 예류과 즉 성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단계입니다. 다시 정리를 하면 외부대상과 접촉을 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자기 판단, 느낌이 일어나는데 크게 고통스러운 것과 즐거운 것으로 일어납니다. 같은 물이라도 여름에 손을 담그면 시원하고, 겨울에 손을 담그면 뼛속까지 시립니다. 하나는 즐거움, 하나는 고통으로 느낌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이라는 것이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느꼈을 때만 존재합니다. 이렇게 관찰을 해서 자기 느낌이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 즉 자기가 느끼는 고와 낙에 대하여 속지 않는 수행방법을 수온을 관찰한다고 표현합니다. 중년의 여자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수온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수온자체가 고와 낙이고, 고락은 자기 판단, 분별, 경험에 의해서 일어난 것임을 알고 쉬어야 합니다. 이 상태를 도를 닦는 입장에서는 무심이라 합니다. 무심이라하여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와 낙의 느낌에 마음이 뺏기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보살이 어떤 스님이 매일 공(空)이다, 공(空)이다 해서 공양때에 빈 그릇을 가져다 주었다고 했는데 저보고 어떻게 하면 여기에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물어본 보살은 그 공이라고 한 의미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제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 같으면 그 사람에게 슬며시 그릇을 밀어 넣겠소.’ 라고 했더니 거기서 대답을 못했습니다. 어떤 선문답을 하더라도 반드시 연고가 있고 즉답이 있는데 이 느낌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 느낌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느낌이 활발하게 여러분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느낌에 대한 생각을 단속하게 되면 도를 닦는 것이고 도의 종자를 심게 되는 것입니다. 구태여 어렵게 화두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써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이라는 것이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즐겁고 괴로운 것은 대상에 의해 받아들여진 경험을 내 상태로 정리한 것으로 대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간파 함으로써 느낌에 의지하여 사물을 판단하는 것을 쉬면 정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면 좋은 느낌을, 나쁜 의미를 주면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수온을 다스리게 되면 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질긴 것이 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이 아니고 무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이야기하지만 여성들은 사람이나 환경을 판단할 때 주로 정에 의해 판단을 하기 때문에 좋고 싫음만 이야기 하고, 남성들은 사회생활을 주로 하기에 때문에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수온 다음의 상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수온은 정에 해당하는 됩니다. 우리 마음의 진선미가 지정의입니다. 결국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마음의 진선미도 이루고 지정의도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견해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 하고 느낀 것인데 경험된 것은 여섯 감각 장소의 접목에서 생기고 느낌은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가 여섯 대상에 딱 부딪쳤을 때 나타나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화두 가운데에 여러분들이 잠이 들어서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법문 듣는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이 있습니다. 잠이 푹 들어서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는 여섯 감각이 작용을 하지 않을 때입니다.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그놈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것이 느낌에서 벗어난 내 마음 상태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을 깨치고 나면 도를 통했다고 인가를 받습니다. 이것도 상근기의 공부방법입니다. 불법지견이 아주 많은 사람에게는 이런 화두를 줍니다.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어느 것이 너이며,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의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느낌에 대해 관찰을 해서 느낌을 뛰어넘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이 접촉을 하게 되면 12연기법으로 보면 거기에서 갈애가 생겨납니다. 느낌이 생기면 느낌에 대한 애착이 생깁니다. 싫어하는 것도 느낌에 대한 평가이므로 애착입니다. 갈애가 생기면 거기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존재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왜 태어나고 죽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존재가 만들어지면 반드시 태어남이 생기고, 또 늙고 죽음이 생기는데 그 사이에 우비고뇌(憂悲苦惱)인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마음을 닦지 않고, 마음의 지혜를 얻지 않고서는 안 태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끈질긴 인연들과 환경때문에 도를 닦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눈앞에 극락을 약속하고 좋은 과보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우는 아이에게 누런 낙엽을 주고 이것이 돈이니까 받고 울음을 그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것이 아니라 바로 사탕을 줘서 울음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수온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울음을 그치기 위해서 닦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생 동안 이런 부처님 법을 듣는 것은 처음일 것입니다. 이 법을 배워야 생사를 벗어나는 이치를 알고 도를 닦는 발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온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상(想)이라는 것은 느낌이 일어나게 되면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느낌에 대해서 우리 마음은 고통스러운 느낌에 대해서는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고, 쾌감에 대해선 즐거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상온입니다. 수온이 더 원초적인 마음의 작용이며 상온은 2차적인 마음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상온은 수온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정신작용이며 수온은 색온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정신작용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낱낱이 끊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은 지각의모임, 즉 고통스럽고 즐거운 것을 깨달아 아는 것으로 여섯 가지가 있다. 육체와 정신에 여러 가지 사상에 의해 온갖 언설 상의 아견을 일으키게 하는데 느낌에 따른 마음의 움직임이다.’ 여기서 아견은 중요한 것입니다. 느낌이란 것도 나를 중심으로 한 느낌입니다. 색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견을 없애는 것을 수행방법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선 괴로움, 쾌락에 대해선 즐거움을 생각하게 된다. 느낌에 대해서 생각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량분별이라 하는데 분별심이 자꾸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업의 종자가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진다. 우리가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 즉 마음은 그것이 대상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의식으로써 인식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이루고 있음을 관찰해서 나의 마음이 무상·무아함을 관한다.’ 사람마다 이상형인 남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속으로 그려 나타났을 때 잘생겼다,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이 생기는데 그것은 일차적인 사물에 대한 경험이고, 아름다우니까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은 이차적인 상온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상온이 발동하면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행온입니다. 즉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눈이 의도적으로 계속 좇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내관을 한 사람은 아름다운 여인이 왔을 때 아름답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자기가 그 마음을 일으킴을 알아 문득 쉬어버립니다. 이것은 도인들이 도를 깨닫고 나서 마음을 쉬는 방법인데 보통 사람들은 안 됩니다. 아름다우면 계속 봐야하니까 아름다운 것에 마음의 평형이 깨어지고 집착이 일어나는 것 입니다. 이때 수행방법으로써 아름답다는 것이 생기게 된 이유를 찾으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이 어디서 일어났을까? 느낌에서 일어났구나! 느낌은 대상이 없어도 존재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을 보지 않았을 때는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상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무상하여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볼 때만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스쳐지나가는 것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경전에서도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관찰을 해서 마음을 쉬는 수행방법을 점수법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얘기한 일념단속을 하는 것은 돈오법이고, 하근기들은 점차적으로 닦아 들어가야 마음을 쉴 수 있습니다. 상근기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리고 마음을 쉬어버립니다. 그만큼 마음을 내관하는데 날카롭고 미세하기 때문에 상근기라 합니다. 즉 자기 마음의 번뇌를 쳐다보는 것이 날카로워 생각 마다 자기가 쓰는 마음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입니다. 하근기는 그에 비해 띄엄띄엄 관찰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우면 좀 더 보기도 하고 미운 것이 있으면 버려야 하니까 이것은 버려야지 하면서 느슨하게 삼아승지겁을 닦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온은 주로 지적인 자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지적인 자각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들은 맹신을 합니다. 자기가 어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지나칠 때 고집불통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고집불통의 원인이 상온에 있음을 알아서 수행방법을 상온을 관찰하는 것으로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상온의 공함을 무상, 무아, 고, 공(空) 중에서 한 면으로 계속 관찰하여 속지 않으면 일념단속 하는 수행이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간단하고 명쾌한 수행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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