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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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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8,758회 작성일 21-08-09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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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법이란? _ 행식온


우리가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 그 마음은 그것이 대상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명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닦고자 한다면 누가 미워질 때 그 대상이 없어도 이 미움이 존재하는지 부터지 관찰해야합니다. 대상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내 감정은 무상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대상이 항상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대상에 의해서 어리석게 밉고 고움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관찰을 해서 쉬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생사의 근원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대상에 대한 의식으로써 - 즉 내가 일으킨 모든 견해는 대상에 얽매여 있는 것으로써- 인식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이루고 있음을 관찰해서 나의 마음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관찰한다. 도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무상을 위주로 해서 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무아를 위주로, 또는 고를 위주로 관찰해서 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결과는 같습니다. 상온은 이와 같이 지적인 것으로써 어떤 사물에 대해서 괴롭고 즐거운 것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내용입니다. 느낌이 경험한 것을 이해한 것이 지적인 번뇌입니다. 

행온(行蘊), 앞에 두 가지를 뺀 모든 정신작용은 바로 이 행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수행은 행온을 다스리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행온은 짐짓 쓰는 마음이 모두 행온입니다. 의도적으로 쓰는 마음이 행온인데 이것은 과보를 초래합니다. 앞에 일어난 수온이나 상온 같은 것은 배후 세력으로써는 작용을 하지만 과보로는 크게 나타나지 않고 행온은 과보로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행온을 다스리는 수행을 잘하게 되면 과보를 멈출 수가 있습니다. 

‘행, 의도작용으로서 상온에 의해서 즐거운 것(쾌), 괴로운 것(불쾌)을 생각해낸 그것으로 자기를 이끌려는 정신작용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을 때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은 느낌이 일어난 것인데 좋다는 느낌이 일어난 것 까지는 좋은데 눈이 계속 그리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행온입니다. 행온을 닦은 사람이 제일 초보 도인이고, 상온을 닦은 사람은 조금 깊은 도인이고 수온을 닦은 사람은 대단한 도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유행가 노랫말 중에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행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에 출가한 수행자는 노래하고 춤추지 말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도리로 보면 생사 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이런 생사업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전도몽상이 되어 모르는 것입니다. 누가 한번 미우면 계속 미워지게 작심하는 것이 행온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써봤고 지금도 쓰고 있으리라 봅니다. 결국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도를 닦을 수도 없고 진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고 위빠사나 즉, 지혜로써 들여다봐야 합니다. 선정에 들지 않고 관찰만해서 경험한 것을 마른 지혜라 하는데 그것도 도를 깨닫는 한 방법입니다. 거기에 선정이 들어가게 되면 몸과 마음에 함께 변화가 오게 됩니다. 

 의도작용의 결과는 새로운 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스승과 제자가 바다에 갔다가 게가 바람에 일렁이는 배에 부딪혀 죽는 것을 보고 제자가 스승에게 누구의 죄냐고 물어봤습니다. 이에 스승은 ‘배도. 바람도, 배에 탄 사람도 아닌 바로 너의 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온을 밝히는 것입니다. 의도 없이 봤을 때는 무심히 지나가는 것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게되면 의도에 의한 결과가 나온다. 여기서 인과법이 나오는데 세속법으로 봤을 때 의도를 가졌을 경우에 선한 의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도를 닦을 때는 선한 의도 자체도 생사의 원인이 되니 일으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업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선악을 정의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욕구이다. 선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생사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태어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천상이나 안락한 곳에 태어날 수는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불법을 배우는 것은 태어남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악의 욕구가 다시 태어나는 원동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체험하여 의도의 작용에서 벗어난다. 이 의도가 참으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한 생에서만 익힌 습성이 아니고 이 우주가 수없이 생성을 거듭하는 과정 동안 익혀온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바이러스 같은 것들도 의도가 있습니다. 얼마나 끈질긴 심리작용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녹이지 않으면 도를 깨닫지도 못하고 생사를 없앨 수 없으니까 의도를 정면으로 맞대응해서 정체를 간파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즉 스쳐지나가는 것임을 알아서 한 생각 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도인들이 망상피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라는 것이 앉아서 일으키는 생각만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사람을 자기의도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다 망상입니다. 모두가 생사업이기에 관찰해서 쉬라는 것입니다. 44; 40 그래서 공부를 시작할 때 선방이 필요하고 일정기간 좌선이 필요한 것입니다. 습이 원체 덕지덕지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자기 견해임을 알아서 쉬어야 합니다.  ‘아! 이것도 내 견해이지.’ 하고 쉬고 또 쉬어서 더 쉴 것이 없을 때 이놈이 녹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라한들은 멸진정에서 이것을 녹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온이 공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식온(識蘊), 이런 네 가지를 모아서 마음에 일정한 형상을 만들어서 내가 실제로 있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판단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눈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번쩍 떠지고, 좋다는 느낌이 일어나며, 좋다는 느낌에 의해서 즐거운 생각이 일어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기 위해 눈이 계속 따라가게 됩니다. 이때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바로 식입니다.  명색에서 명은 정신적인 것이고, 색은 물질 작용인데  몸과 마음의 흐름을 종합해서 이 여자는 어떠한 사람이라고 결정을 해서 즉 자기가 결정을 해놓고 만고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하면 좋아하고, 험담을 하면 싫어하게 되는데 이것이 식입니다. 이것이 다 공한데 여러분들이 감당을 할 수 있을까요? 시장에서 물건 하나 가지고도 시시비비 하듯이 마음을 늘 흥정하듯이 쓰면 안 됩니다. 생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네 가지를 모아서 마음의 일정한 형상을 만들어서 내가 실제로 있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이런 네 가지를 모은다는 것 자체가 내가 실제로 있다는 전제하에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아공(我空)이 된 사람 같으면 아름다운 여인이 와도 아름답다는 생각조차 없이 그냥 여인이 왔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수·상·행·식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나타나면 같이 이야기하면 이야기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중생들은 곳곳에서 도적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겉은 화장을 하고 예쁘게 하고 왔지만 마음속은 끊임없이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생사의 업에 머물고 있는지 이해가 갔으리라 봅니다. 선방에서는  도를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마군이라 했습니다. 마의 일을 당연한 것처럼 실행을 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는 법이 마음을 관찰하는 법입니다.

 모든 법, 의미, 개념은 마음의 기억작용에 의해서 기억된 것을 모아서 구성된 것으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고통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소승법에서 한 것이고, 대승법에서는 일념이 본래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서 딱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쓰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예류과에 바로 들어갑니다. 다시는 형식과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견해에 사견이 들어가지 않으며, 의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수다원과입니다. 지견이 바로 서게 되면 수다원과인데, 일곱 번만 인간 세상에 나고 죽으면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수다원과를 얻은 사람은 다신 악도에 떨어지는 일을 하질 않습니다. 오온이 이런 것을 확연히 알기에 어찌 종을 얻으려고 주인을 버리겠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법이란 의식의 대상, 즉 객관의 총칭이다.’ 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출세간법과 세간법입니다.  출세간법은 진리자체를 드러낸 법이고, 세간법은 육법전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 인식한 내용물이 중생에게 실재로써 다가오기 때문에 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이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개념이나 존재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러한 법칙을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객관세계를 존재라고 하지 않고 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알고 있는 객관세계는 마음에 비친 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법은 모든 마음 작용에 의해서 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자체로는 존재하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마음을 관할 때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이 깨달았다는 것도 시원한 물이라고 마셨는데 해골 물을 보는 순간 시원하다고 정의 내렸던 어제의 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사람은 대승보살이 되어서 하나하나 관찰도 안합니다. 물론 선정 수행 과정에서 업이 녹고 수·상·행·식이 녹아지는 경계는 있습니다. 돈법으로 깨달은 사람은 원효 스님처럼 깨닫고, 점법으로는 하나하나 관찰해서 끊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펴 관해서 제법이 무아임을 깨닫는 것이다.’ 불법과 다른 법의 중요한 교차점이 있는데, 무상·무아·고를 말하면 불법이고 그렇지 않고 반대로 이야기하면 외도법입니다. 우리 마음을 깨달아 보면 무상하고 무아임이 고통의 원인인데 중생들은 그것을 움켜쥐고서 한평생 행복하려고 하니까 악업을 짓고, 곧 사라질 것인데 오래오래 살 것을 생각해서 돈과 사람 등 무엇을 계속 긁어모으려고 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삼사십년 뒤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눈이 밝았을 때 젊을 때 깨닫게 되면 마음이 그만큼 밝아지고 지혜로워지는데 이런 것을 반야라고 합니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어떤 사물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이며 이것은 사물에 존재하지 않고 의근(意根)에 있다.’ 대승에서는 제 7식을 의근이라고 합니다. 의식이 나타나기 위해서 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의근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의식입니다. 자의식에 의지해서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에 내가 실재한다고 착각을 함으로써 악업을 짓습니다. 법칙이 사물에 존재하지 않고 의근에 있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은 내가 조작해낸 법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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