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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0강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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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976회 작성일 21-08-09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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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존재의 본질, 도


  먼저 번에 오온과 법에 대하여 설명을 했는데 여러분들이 이것이 왜 중요한가를 알아야합니다. 불교에서 사람의 신체를 오온이라 했고 그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라 했고 색에 의해서 수가 일어나고, 수에 의해서 상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관적인 느낌, 주관적인 상상이 일어나고, 상상에 의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일어나고, 이어서 식, 즉 분별심이 정립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왜 중요한가를 알고 넘어가야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불경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소용이 없게 되는데, 내가 평소 착하게 마음을 쓰거나 지혜롭게 마음을 써도 항상 거기에는 무언가 남게 되는데 그것이 내다하는 마음입니다. 이 내다하는 마음, 가령 교리적으로 봐서 악한 것을 끊고 선하게 사는 마음은 욕탐을 벗어나는 행위는 되지만, 이것은 ‘유루(有漏)’로써 생사의 원인을 벗어나게 하는 공부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공부와 수행을 하더라도 만약에 생사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욕탐을 벗어나는 것 이외에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이것은 오온에 대한 확실한 고찰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자아가 어떻게 형성 되는가 보면 우리 몸이 바깥 경계에 부딪히는 것을 촉(觸)이라 하며 여기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수·상·사(受·想·思)입니다. 이것이 오온에서 수·상·행·식인데 이렇게 오온이 전개되어서 하나의 분별심이 일어나게 되면 지혜가 없이 마음을 썼던 사람은 거기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애착을 일으키고 그 순간에 그것이 자기라고 집착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것을 세밀히 관찰하게 되면 촉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령 한 사람을 보고 있으면 촉이 일어납니다. 안보면 촉이 아닌데 봄으로써 촉이 생기고 그에 따라서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저 사람은 왜 한산·습득(당나라 선승)처럼 머리카락을 촌스럽게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한산·습득까지 갔을 땐 이미 상이 전개된 것인데 그것은 스님이 예전부터 한산 시 같은 것을 많이 읽어서 거기에 나오는 그림 같은 것을 많이 봤는데 그것하고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상이 일어나고, 그 순간 여자가 왜 머리를 저렇게 하고 다닐까 하고는, 그것을 보기 싫어하는, 즉 좋고 싫은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에 ‘행(行)’이 되어버립니다. 의도하는 마음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식으로, 그것도 억겁동안 내려온 자기가 좋아하는 습관만큼 보는 견해인 것입니다. 

  ‘생명 현상은 육근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세수하고 밥 먹고, 날씨에 맞춰 옷을 입는 것 등 모든 것들이 우리의 육근이 거기에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없으면 생명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감각기관이라 합니다. 대다수의 중생들은 감각기관을 자기라 생각합니다. 아까 오온을 고찰하기 이전 색에 대한 집착입니다. 오온 중에서도 색에 집착해서 자기 몸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인데 가장 거친 상태의 망상입니다. 

  ‘의식 현상은 육입처(六入處)이다.’ 처라는 것은 존재의 바탕이 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는 우리 마음이 인식했을 때만 존재로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여섯 가지로써 작동을 하여 여섯 가지 존재의 영역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의식 현상은 육입처라고 말합니다. 보통 중생들이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 육입처를 말합니다. 일체란 무엇인가 했을 때 이 우주에 있는 온갖 것을 부처님은 12입처라 했습니다. 12입처는 6가지 기관이 6가지 대상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두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쉬게 되면 이 세계도 사라지는데 그것은 선정에 들게 되면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고 그전에는 이 세계가 실재 하는가 ,아닌가를 물어봤을 때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실재하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인식한 내용일 뿐이고, 실재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인식해서 분별해 낸 내용일 뿐이니 이 세계가 실재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인식한 내용이 어떠한 가를 판단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제자가 찾아와서 세계가 영원한 가 아닌가를 물어왔을 때 부처님께서 무기(無記)로 일관 하셨습니다. 물어보는 사람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그 사람이 인식하는 내용물 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대답하는 사람은 물어보는 사람이 인식하는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집을 가면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는데 시누이가 미운 그 감정을 부처님께 와서 시누이가 왜 밉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시누이가 없기 때문에 밉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일체 중생이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자기가 인식한 것 밖에 질문을 못하고 자기가 인식했다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 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부처님께 세계가 영원한 지 안한 지 이러한 질문 자체가 거북의 털이나 토끼 뿔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현상은 육근이고 그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의식현상은 육입처라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우주는 우리의 의식에 의해 조립되어 나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쉬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사라집니다. 참선을 잘하는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있으면 몸이 사라지는데 왜 그런지 물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조립해 놓은 육체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을 때 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명과 따뜻한 기운, 그리고 식이 사라지면 몸은 죽는다.’ 부처님 제자 중 사리불 존자가 있는데 부처님을 제외한 일체 중생이 사리불 존자 지혜의 16분의 1도 못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리불 존자에게 아난 존자가 생명은 무엇에 의존하고 있느냐고 물어왔을 때 바로 위와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사라진 것을 귀신이라 하고,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으면 사람인 것입니다. 따뜻한 기운은 몸뚱이가 있어야 깃드는 것입니다.

  ‘육근은 몸에 붙어있는 인식기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인식활동에 대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근은 우리 삶의 행동이다.’ 보통 육근이라 하면 안·이·비·설·신·의 라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생명활동을 할 때 나타나는 6가지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보기 때문에 눈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은 보고 들어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있으면, 보고 듣는 것은 몸 안에 있는 자아이고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몸밖에 있는 세계 속에 존재라고 생각한다.’ 일체 종교와 일체 중생들이 이 감각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온에서도 말했지만 보는 것은 자아가 아니고 보이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자기가 의식한 내용물이란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원효스님이 해골 물을 자기가 보지 않았을 때는 시원하다고 생각했다가 다음날 그것이 해골 물임을 알고 마음에서 더럽다는 생각이 일어나 구토를 하였는데, 아름답고 추함이 앞에 있는 해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하여 판단·의식해낸 내용물에 있는 것임을 알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입각해서 마음도 공하고 세계도 공한 것임을 원효 스님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체 중생은 그 반대로 더러운 것은 바깥에 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생각해서 기피하는 마음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분별심에 있습니다. 모든 수행의 기초는 먼저 일념이 단속되어야 합니다. 그냥 단속하는 것, 그냥 쉬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마음을 닦아도 멍청한 것을 마음 닦는다 생각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마음을 닦으면 무심을 하게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무심과 멍청함의 차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외도는 외부 대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그 대상의 존재의 본질을 문제 삼는다.’ 외부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언제 시작이 되었을 까 했을 때 지혜가 없는 외도들,  기독교의 경우는 하나님이 6,000년 전에 만들었다고 하고, 과학자들은 빅뱅에 의해 200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외부에 있는 대상은 내가 인식한 내용물일 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들어가는 문이 틀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무이견이다.’ 그래서 외도들이 갖고 있는 우주나 진리에 대하여 갖고 있는 견해가 두 가지인데 큰 범주로써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그러나 그 존재라는 것은 인식되어진 내용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있다 없다고 하는 것도 인식 내용물을 갖고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인식 내용물은 어떠한 개념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인식된 내용이 어떻게 인식되는 가를 관찰해서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중도이다.’ 이것이 불교적인 세계나 진리에 대한 태도입니다. 가령 신이 있다고 했을 때 과연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더 선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신이 없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리불 존자가 마승 비구에게 부처님 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단 한 가지로서 모든 것은 연기 즉 인연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에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고 인연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 모든 법의 실체다.’ 라고 답했는데 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입니다. 신이라는 것도 사람이 신이라고 이름을 붙여줬을 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이 있고 없다고 하는 그 놈은 있고 없는 것과 관계없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여기를 들어가는 것입니다. 외도들은 있고 없음에 집착해서 바깥에 인식 내용과 따로 떨어진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언젠가 마음이 맑아지면 상당히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불교식으로 이야기 하면 존재의 본질은 분별심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잠이 푹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일체존재가 존재 하던가요? 여러분도 사라지고 여러분이 알고 있던 이 세계가 다 사라져 버립니다. 수행자는 선정 중에서 이것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여러분들이 지금 눈을 딱 뜨고 있으니 폭포수처럼 분별이 일어나 밖에 있는 것과 나와 관계없는 것 같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는 나라고 했던 그 느낌까지도 사라져 버립니다. 만약에 그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눈이나 귀로써 대상을 촉(觸)할 때 수·상·행·식으로 오온이 발동하면서 그것이 식까지 전개되어 그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면서 ‘이것이 나구나.’ 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의 본래 정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리지 않으면 전도몽상된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와 불교의 차이는 여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중도이다.’ 불교에서 중도는 양끝의 중간이 아니고 오온의 본성을 꿰뚫어 봤을 때 마음이 어떤 것에도 뺏기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 자아라는 느낌에 조차도 마음을 뺏기지 않았을 때를 중도라 합니다. 그래서 존재란 망념에 의해서 허구적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존재는 여러분의 밝지 못한 마음에 의해서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이나 대상이든지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해탈한다는 것은, 깨닫게 되면 여러분들이 지난 밤 꿈속에서 온갖 것들을 만들어 놓지만 꿈을 깨고 나서 부처님께 가서 ‘지난밤 꿈속에서 나타난 것들이 영원한 것입니까 영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허공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눈에 병이 들면 눈앞에 희뿌연 것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허공꽃입니다. 중생이 보는 세계는 중생의 망념에 의해서 허공꽃을 보듯이 펼쳐진 세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12처는 이 허구가 구성되는 바탕이다.’ 그래서 6입처 즉 6가지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사물을 판단하는 그것이 그 허구의 중심축이라는 것입니다. 

  ‘보기 때문에 눈이지 눈이 몸에 있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눈이 본다고 생각하지만 눈으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것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오온에 대해서 다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촉을 통해서 수·상·사(受·想·思)가 생기면- 오온의 수·상·행인데 사(思)라는 것이 생각인데 그것이 의도적인 생각이므로 오온으로 이야기 할 때는 행(行)으로 합니다. - 오온이 형성이 되고 오온에 애착을 일으켜서 그것을 자기라고 집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나라는 느낌이 그래서 쉽게 없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정에서 깨닫거나 확철대오하여 오온에 물들지 않아야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적으로 나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초지보살에서 가능하고 영원히 나라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칠지보살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육근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 즉 인식 활동이다. 육입처는 욕탐으로 인해 보는 것을 자아로, 보이는 것을 세계로 생각하는 허망분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도 망념이라는 것입니다. 

  ‘식은 12처가 있을 때 우리 마음에 발생하는 의식현상일 뿐 눈·귀·코·혀 등을 통해 외부를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오온을 설명할 때 색이 있고, 접촉이 생김으로써 수라는 느낌이 일어나고 ,수에 의해서 수를 평가하는 상상이 일어나며, 상상에 의해서 의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의도하는 마음에 의해서 그것을 분별하는 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식이라는 것은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식이라는 것이 몸 안에 있어서 보고 듣게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지의 발생이 육식이다. 식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식은 사라진다.’ 여기서 식은 여러분들이 마음이라고 하는 그 마음을 식(6식)이라 그럽니다. 

  옛날에 어느 스님이 업장이 두터워 공부가 잘 안된다고 생각하여 100일 동안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100일 기도 마지막 날 기도를 끝내고 법당 밖 계단을 내려오다가 뭔가 물컹한 것을 밟았는데 개구리를 밟아 죽인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100일 기도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속을 태웠는데 그것이 꿈속에 까지 나타나 스님이 괴로워 하다가 아침에 날이 밝아 개구리를 묻어나주자는 생각으로 그 곳에 가보니 그것은 썩은 오이였습니다. 마음속에 이미 개구리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밟은 것이 무엇이라는 판단을 했었는데 그것은 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스님은 여기서 허망분별이 나를 괴롭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식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 이 얘기입니다. 조건이라는 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쌓아온 업력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눈이 푸른 빛깔과 접촉할 때 시각적 의식이 일어나서 빛깔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푸르다고 한 것은 상(想 ), 즉 생각이 움직인 것인데 바깥에 푸른 것이 존재한다고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푸르다고 한 그것은 그 스스로 푸르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푸르다고 했을 때는 푸른 것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물을 평가한 분별심입니다. 자기가 평가한 사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의식한 내용물 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든지 자기가 분별해낸 만큼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을 실재하다고 상정하고 사는데 과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실재하느냐는 것입니다. 

 한겨울이 되어 눈이 많이 내렸을 때 부자는 스키장에 놀러갈 생각을 하고, 가난한 사람은 난방비 걱정을 하게 됩니다. 똑 같은 겨울인데 한쪽은 즐겁고, 다른 한쪽은 춥고 괴로운 겨울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바깥에 실재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부처님께 와서 영원한지 안한지 물었을 때, 원래부터 없는 것을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고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하게 되면 공이란 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여러분들이 인식한 내용물일 뿐이고, 그 인식 내용은 마음의 분별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을 찾아보면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라시대 때 ‘찬기파랑가’ 라는 유명한 향가를 지은 충담사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해마다 봄이 되면 미륵부처님께 차를 공양했다고 합니다. 이 스님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적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나는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면 부처를 내놓아라.”

“부처는 내 마음 속에 있다.”

“너의 몸을 갈라서 마음을 가져가겠다.”

“해마다 봄이 되면 배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배가 열리는 데, 어리석은 사람이 봄에 배를 얻기 위해서 배나무를 쪼개고 쪼개 봐도 그 속엔 배가 없더라.”

이것이 연기법을 노래로 설명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몸속을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활동을 하면 나타납니다. 이것이 진공묘유입니다. 찾으면 없기에 공이지만 일상생활에서 활동을 하므로 색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부처란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찾아서 보이면 이미 부처가 아니고 망상이 됩니다.  

 

 공을 이해하는 데는 3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업장의 두께로 인해서 공을 설명을 해도 제 근기만큼 이해하게 됩니다. 경전에서 공을 말하는 것은 중생의 근본적인 무명의 마음을 없애는 데는 공을 얘기하는 것이 가장 빠른 치료약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여기서의 공은 오온 색신이 인연의 현상인데 이것에 집착하여 참된 진리를 망각하기에 먼저 오온에 대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해서 설한 것이다.’ 오온은 중생이 자기라고 집착하는 몸과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몸과 마음은 인연의 소산물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 세계존재의 본성은 망념이라고 했습니다. 그 망념이 자의식에 비춰지게 되면 자기 몸과 마음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몸과 마음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력의 소산물입니다. 하근기 중생에게는 그렇게 자기가 아끼는 몸, 재산, 재주 등 모든 것이 인연의 소산물이고 망념이라는 것을 알게 해서 그 사람이 나라고 하는 것에 주저앉는 것을 깨뜨려줘야 합니다. 이렇게 인연의 소산물임을 가르치는 것을 유식에서는 의타기성이라고 합니다.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밥을 안 먹게 되면 아마 20일 만에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고 밥과 물과 따뜻한 기운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밥보다 낳을 것 없습니다. 여러분을 유지 시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고 밥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의타기성으로 관찰하는 법이라 합니다. 나무는 물과 비료를 인연해서 연기한 법이지 나무라는 실재 존재가 아니다. 여러분들은 물과 밥과 따뜻한 온기에 의해 연기된 존재로서 우리에게 인식되어진 내용물이지 실재로 고정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이 의타기성으로써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존재는 이렇게 존재합니다. 이러한 존재를 영원한지 안한지 물어보는 사람이 미혹한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아는 현상은 의식과 사유로 나타난 것을 나타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탁한 사람은 나타난 현상을 자기 입장에서만 봅니다. 앞에서는 그저 자아 입장에서만 봤는데 여기는 자기 욕탐 입장에서만 봅니다. 편을 갈라 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보면 목숨을 걸고 이기려고 하는데 그것은 변계소집성 때문입니다. 우주인 있어서 지구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면 참 우스울 것입니다. 예전에 고종 황제가 서양인들이 들어와 배드민턴 경기 하는 것을 보고 서양 대사들에게 ‘하인들에게 시키면 될 것을 왜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하고 있느냐?’ 하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 입장에서 사물을 평가하는 변계소집성입니다. 이것은 물든 생각입니다. 앞에서 기도하는 스님이 오이를 개구리로 착각한 것이나, 원효 스님이 해골물을 샘물로 착각한 것도 모두 변계소집성 때문입니다. 결국 사물의 가치가 자기의 내부에서 나온 의식의 내용물이라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은 법계 즉 우리 마음이 그려낸 존재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서 마음에서 연기한 법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화 시켜 인식하고 자아가 존재하면서 증장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에 의지하여 보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을 앞에서 망념이라고 했는데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망념도 욕탐에 의해서 나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알았을 때는 내 욕탐 만큼 본 것입니다. 여기 목탁이 있는데 이것이 목탁이려면 목탁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만이 목탁으로 압니다. 개나 소는 목탁에 대한 욕구가 없으므로 목탁인 줄 모릅니다. 객관적으로는 목탁이 아닌 것입니다. 

  옛날 수산성념(首山省念) 스님이 대중들에게 죽비를 들어 보이며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죽비라는 이름(욕탐)에 떨어지는 것이요, 죽비가 아니라고 하면 용도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도를 아는 사람 같으면 이것을 정확하게 얘기를 합니다. 이것은 머리로 듣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경지에 들어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도리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도리가 이치 없는 것이 아니고 이전에 설명한 내용 중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모든 것이 욕심입니다. 참선을 하면 맨 먼저 끊어지는 것이 욕심입니다. 욕심이 끊어지면 대단히 선한 사람 같지만 불교에서는 초선의 경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욕심이 끊어져도 남아 있는 것이 존재에 대한 미혹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깨뜨려야 더 깊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미혹이 남아 있는 한 욕심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상태이므로 다시 욕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존재라는 것은 욕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욕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아야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깨닫는다는 것을 바로 이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밖에다 놓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 맘 안에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수행을 할 때는 일념을 단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두 가지 공에 대하여 얘기했는데,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일시적인 것이기에 공한 것이고, 욕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한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오온 자체가 공의 작용이요,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의 표현임을 아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이나 대승 불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이 이것을 바로 설명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가령 ‘마음이 부처다.’ 라고 했을 때 대부분 중생들은 착각을 합니다. 자기 마음이라는 것은 욕탐에 물든 마음인데 그것을 어찌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변계소집성의 마음입니다. 선가에서 마음이 부처라 했을 때는 원성실성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마음자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물들지도 않고 선악에 물들지도 않으며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특별하게 괴롭지도 않고 천상에 있다 하더라도 특별히 즐겁지도 않은 자리입니다. 이것을 원성실성이라 하여 원만한 성품이 참 성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이 경지를 설명할 때 일체가 개공(皆空)이라고 한 것입니다.  

  ‘색의 세계를 성립시키는 법칙성’,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것이 일체개공 자리가 아니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색의 세계를 성립 시키는 법칙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일전에 의사를 만났는데 ‘찻잔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을 하겠습니까?  저는 ‘찻잔도 불성의 한 부분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이 일체 색까지도 우리의 원만실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일체 색은 원만실성의 나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극미의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에서는 하나의 중심에너지, 즉 공이라는 것에 의해 유지된다. 공이란 존재가 인연으로 성립하도록 작용하는 힘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주기적으로 유지가 되는데 그 힘이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바깥에서 찾으면 우주력이라 할 수 있고, 내 안에서 찾으면 내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부처란 공의 인격적 표현이다.’ 부처님이라 했을 때 진리적인 몸, 즉 우주 자체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지 나는 아니고’- 흔히 내가 얘기하는 내 몸은 내가 아니고 공의 실체가 표현된 것인데 중생들은 큰 바닷물의 젖는 성품은 보지 못하고 무지에 의해 수많은 파도가 일어날 때 그 파도 가운데 하나를 ‘나’라고 여깁니다. 그 파도가 나라고 했을 땐 물의 젖는 성품을 망각 했을 때입니다. 그러나 젖는 성품을 알았을 때는 일어난 모든 파도가 내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이 되어서도, 천상에 있어도, 지옥에 있어도 부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란 이름을 붙이면 망상이 일어나니까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내 생각이지 나는 아니다.’ 여러분들은 내 생각이라 했을 때 그 생각을 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았을 때, 최초의 무명 상태가 언제냐 하면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 자체로만 있을 때가 있는데 그 땐 나라는 것이 사라지니까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세계도, 하나님도, 부처님도 모두 사라지는데 그것이 여러분들의 원래 모습입니다. 이것은 죽는 것도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 자체가 산다는 것의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체가 소멸된 상태에서는 죽는다는 현상까지도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가장 편할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잠들었을 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근본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살아서 이 경지를 터득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부처님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밖에 주무시질 않았는데,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그날 제도할 중생을 관찰해 두었다가 그 중생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리다 만나서 제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이 부처님께서는 꿈도 없고 생각도 없는 자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장경(長慶) 혜능(慧陵) 선사의 오도송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상지중독로신(萬象之中獨露身 ; 만상 속에 홀로 드러난 법신이여)’- 바닷물에 온갖 모양의 파도가 일어나지만 거기서 홀로 드러난 성품은 젖는 성품입니다.  온갖 망상이 벌어졌어도 그 망상을 인식하는 그 자리는 물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미움, 기쁨, 분노에 마음을 동하지만 동하면서도 동하지 않는 자리가 있는데 그것이 만상 속에 홀로 드러난 법신, 진리의 몸입니다. 

‘유인자긍내방친(唯人自肯乃方親 ; 스스로 긍정해야 비로소 친하리라.)’ - 이것은 말 몇 마디 듣고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을 해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부산의 참선하는 한 보살이 분심이 일어났던 경험을 스님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한 번 앉으면 보통 8시간 정도 참선을 하는데, 한 처사분이 한 번 앉으면 14시간씩 앉아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분심이 일어나고 가슴이 막 뛰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동한 것인데 이제 까지 자기보다 잘 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처사가 14시간 앉아서 마음이 성성적적 한 것을 체험했다고 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보살은 그것조차 끊어진 자리를 본 모양입니다. 그런데 끊어진 자리를 제대로 봤으면 상대방이 앉아서 100일을 지내든 어떻게 하든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식된 내용임을 알고 마음을 바로 쉬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보살이 14시간 동안 앉아 있는 처사를 보고서는 자기 스스로 있지도 않는 자아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비교함으로써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이야기가 자장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상 속에 홀로 드러난 법신이라고 했는데, 법신은 상대가 14시간을 앉아 있든 얼마를 앉아 있든 드러나 있는 자리입니다. 일체 것이 자기가 인식한 내용물이라고 앞에서 이야기 했는데 자기가 한 생각 일으킴으로써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석년류향도중멱(昔年謬向途中覓 ; 예전엔 잘못 알아 도중에서 찾았더니)’- 이러한 경지를 알기 전까지는 빛이 보이거나, 꿈을 꾸거나,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등과 같은 신기한 이야기가 도중 경계인데 이것도 자기가 인식한 내용물인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금일간여화리빙(今日看如火裏氷 ; 오늘에야 알고 보니 불꽃 속에 얼음인 것을)’- 이것이 참 묘한 것인데 불꽃 속에 얼음이 들어가면 흔적이 없는데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허공에 도장을 찍으면 흔적이 없는데 허공에 도장을 찍을 줄 알아야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오온을 작동 시키되 그것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 생각이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나를 통해 우뚝하며’ -천지까지도 내가 인식한 내용일 뿐이라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천지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일체가 내 마음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효스님의 ‘일체유심조 일도출생사(一體唯心造 一道出生死 ; 일체는 마음이 지었기에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라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물이 나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내 마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잖습니까? 자기 마음자리가 이렇게 귀중한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자기라 생각해서 자기가 부처라 그러는데 그건 착각입니다. 

  ‘생사는 존재하는 바의 생사가 아니라,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즉 인식 되어진 존재의 생사이다.’ 우리가 나고 죽는다는 것은 자아가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한다고 착각한 망상이 나고 죽는 것입니다. 스님이 시다림 법문 가서 한 얘기를 여러분께 해드리겠습니다. 생사는 존재하는 자아의 생사가 아니고 즉 내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놈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내가 그려놓은 그놈, 인식 되어진 존재의 생사입니다. 생사를 끊으려면 망념이 공한 것을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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