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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1강 도일체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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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9,865회 작성일 21-08-09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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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사리자 : 


다음은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도는 제도(制度)한다는 것인데, 제도는 건넌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소박하고 철학적 개념이 없었으므로 강가 같은 곳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시곤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욕탐의 세계고 무지의 세계며 어리석음의 세계인데 이강을 건너 저 언덕(피안)은 열반의 세계인데 거기는 욕탐도 끊어지고 어리석음도 끊어진 세계입니다. 이때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제도입니다. 즉 중생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사의 근원을 벗어나 생사 없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생사의 근원은 오온에 의지하고 있는 나의 망념입니다. 욕탐을 벗어나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의 본성에 대한 미혹 때문인 것입니다. 착하게 살지만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의 본성이 자기가 일으킨 망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망념이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도(度)입니다. 

  ‘만약 오온이 공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나고 죽는 생사의 세계에 떨어지게 되고 윤회의 고통을 달게 받는다.’ 오온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온을 쉽게 풀이하면 내다하는 마음과 내 몸이라는 명색(名色)을 말합니다. 중생들이 윤회가 고통인 것을 느끼려면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리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윤회의 고통을 떠나고 싶은가? 분명히 눈앞에 있어 과거, 현재, 미래에 떨어지지 않는다. 알았는가? 머리를 드니 새매가 벌써 신라로 지나갔다.’ 새 중에 가장 날 샌 것이 매인데 다른 새를 잡기 위해선 더 빨라야 되잖아요. 딱 돌아보니 신라로 돌아갔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게 뭘까 하고 머리를 굴리는 순간 이미 어긋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도를 어떻게 닦은 가를 바로 다 드러낸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조견오온개공 해서 도일체고액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의 대의인데 이것을 알아야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의 목표가 확실해집니다.

오온이 공함을 보고 어찌해서 일체고액을 벗어나는가? 

먼저 오온이 색·수·상·행·식인데 색이란 크게 대상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대하는 대상이 있는데 불교 교리적으로 색·성·향·미·촉·법 6가지입니다. 이 6가지가 색인데 공부를 여기서부터 들어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에 대해서 무심하지 못하면 보는 자와 보여 지는 자, 즉 주관과 객관이 갈라지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 12 입처라고  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갈라지는 마음으로 보는 순간에 수억 겁에 걸쳐 쌓았던 업력에 의해서 욕탐이 발동합니다. 불교에서 욕탐이란 것은 여러분들이 돈을 얼마나 갖고 싶고, 맘에 드는 이성을 원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욕탐으로 쳐주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근본적인 욕심은 대상 즉 색에 대하여 무명으로 인해 밝지 못한 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땐 누구나 보는 마음과 보이는 마음으로 대립을 함으로써 보는 것은 나고 보이는 것은 대상(색)이라는 분별을 갖고 마음을 봅니다. 그렇게 보게 되는 순간에 과거에 자기가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해서 그것을 처리를 합니다. 처리를 하면 욕탐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욕망이란 꼭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욕망이라 하지만 싫어하는 것도 욕망입니다. 저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므로 갖기 싫다하는 것도 내 욕구입니다. 이러한 욕구가 주관과 객관이 마음에 부딪혔을 때 쌓여있던 업력만큼 일어나게 되는데 전생에 고결하게 마음을 썼던 사람 같으면 취하고 버리는 마음에 무심하려고 그 순간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의 습관이 좋은 것은 취하고 좋지 않은 것은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원수가 되고 원수가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을 이생에서만 익힌 것이 아니고 수 억 겁 동안 무명의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담겨있는 정보가 그렇게 처리를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관과 객관이 없이 다만 보는 마음만 있다가, 그 다음 단계에서는 보는 마음과 보이는 것이 있는데, 아직 업이 형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여기까진 괜찮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안에 있던 정보가 그것에 대해서 간섭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사물에 대하여 뭔가 의미로써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욕탐입니다. 아주 끈질긴 마음이기에 깊은 수행과 명철한 지혜가 없으면 여기서 헤어날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수행한 제자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근본부터 잘못 된 것임을 철학이나 뭇 종교인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는 마음까지도 무명의 마음에서는 괜찮은데 거기에 자기의 욕구가 딱 붙게 되면 그때 비로소 내 마음이라고 하는 식이 만들어집니다. 그 식을 분별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만들어지면 새로운 상태의 정보를 마음에다 저장을 합니다. 대상 즉 색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게 되는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그 느낌의 정체가 대상을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잘 알게 되면 앉은자리에서 마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부딪혀서 욕탐을 가진 마음으로 대상을 쳐다봤을 때  최초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이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란 것이 참으로 위대하면서도 애매한 것이 이 느낌을 가질 때 비로소 여러분들이 세계, 대상, 경계에 대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존재감이 없을 땐 수온이 사라졌을 때 인데 이것은 대단히 깊은 경지의 수행을 했을 때 가능합니다. 

  부처님 당시 외도들이 세계가 언제 시작되고, 멸하며, 영원한지 아닌지, 사람이 죽으면 사라지는지, 영원히 남는지 이런 것들을 주로 물어봤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 했습니다.  이것이 14 무기로서 불교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침묵으로 일관했는가를 알게 되면 불교와 다른 철학, 종교와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수의 느낌을 가짐으로써 존재감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그 존재감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계, 사람, 성향, 선악 등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느냐 하면 마음이 대상에 부딪혔을 때 욕탐에 의해서 느껴지는 그 느낌을 있다거나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을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있다 없다란 것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느냐 하면 느낌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느낌에 영향 받지 않는 자리는 있고  없음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원한 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기가 느낀 개념에 대하여 그것이 영원한지 아닌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처님 입장에서는 희론일 따름입니다. 개념을 위한 개념, 대답을 하든 안하든 희론이 되기에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있고 없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있고 없음 즉 존재감이란 수(受)라는 즉 부딪혀서 일어나는 느낌에 의지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계가 영원하고 안하고 하는 것도 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수에 의해서 벌어지는 자기 업력만큼의 생각 이것은 이차적인 것이고 , 그다음 부딪힘에 대한 느낌이 좋고 싫은 생각(상:想)이 일어나고 그 이후에는 그것에 대한 취하고 버리려는 의지 즉 행(行)이 일어납니다. 의지가 일어나면 대상에 대한 확고한 개념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식(識)입니다. 즉 분별하는 마음이 만들어지는데 이 마음이 여기서 끝이 아니고 이 마음이 최초로 사물에 대한 욕탐을 일으켰던 그 마음에 정보를 하나 더  첨부해 주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단속하지 않으면 계속 정보를 모아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모든 중생들이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체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공함을 깨닫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건강하고 잘생겼다 하더라도 존재감에 의지하고 있고, 이 존재라는 것이 느낌에 의지하고 있는데 느낌은 무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하고 무아인 것은 반드시 나에게 고통으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수행하려면 맨 먼저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관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삼법인이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오온이 공한 이유를 이렇게 알아야합니다. 수행하는 입장에서 일상생활에서 내가 쓰는 하나하나의 마음이 생사의 원인이고 그것이 밝지 못함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면 그것을 관찰해서 일념을 단속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에서 한 최초의 언구가 조견오온개공 일체개공입니다. 오온이 공함을 비춰보니 내가 존재라고 알고 있던 일체가 내 마음에서 느껴진 바로 그 느낌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상임을 알고 이것에 속지 않는 것이 일념 단속 하는 수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내 마음이라고 했던 것들이 이렇게 존재감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것임을 알게 되면 그것에 속하지 않는 자리는 무엇인가 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이뭣고’ 하는 화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내 마음은 공하고 또 어떠하다고 한 것들이 내 마음의 개념에 대한 존재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온이 공함을 앎으로써 일체고액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일체고액을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인데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죄악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근본이 무명의 마음을 쓰기 때문에 내가 편하려면 반드시 남을 괴롭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다시 고액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수행이나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외도가 되거나 큰 악인이 됩니다. 불법과 외도의 분원점을 모르게 되면 여기서부터 큰 고액이 떨어지기 때문에 반야심경의 대의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일체고액에 들어가는데 일체고액의 단서가 오온이 공함을 지혜로써 여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체 고와 액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원측 스님이 오온이 공함을 아는 것이 첫 번째 이로운 것이고 그 공함을 알게 된 공덕으로 일체 고액을 다 벗어버리는 것이 두 번째로 이로운 것이라 했습니다. 중생들이 갖고 있는 일체 고통의 원인을 간단히 말하면 느낌에 의해서 모든 것을 존재로 파악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전도몽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고액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고액에 대해서 3 가지로 풀이하면

  첫째, ‘고는 곧 액이기 때문이다. 유루의 법은 고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액이란 위험한 것을 말합니다. 유루의 법은 앞에서 말한 오온에 의해 창조된 일체의 존재감과 같은 것들을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마음을 쓰는데 이런 것들은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유루인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고통으로 돌아옵니다. 쉽게 애기하면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소견, 능력, 경제력, 건강 등과 같은 것들이 현재 상태만 유지해줘도 좋을 텐데  수 십 년 뒤에는 지금이 좋았다고 그리워하게 됩니다. 지금은 20년 전이 좋아 보이고 20년 뒤에는 지금이 좋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고 지금은 옛날보다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삶의 법칙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어 사는데 이것이 고입니다. 일체중생이 가지고 있는 것은 유루법으로써 결과적으로 나에게 고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존께서 삼계가 고라고 정의하신 이유다.’ 여기에는 3고, 4고, 8고가 있습니다. 삼계 즉 욕계, 색계, 무색계는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니 나는 인연에 관계없이 지금 이상태가 행복하고 영원하니까 붙들고 싶은데 아무리 붙들고 싶어도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중생 세계의 일생입니다. 그때 우리가 느끼는 것이 고통입니다. 

  언젠가 서울의 어느 재벌 집에 갔었는데 그 안주인이 40 여살 인데 말기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살았는데 전생의 업과 이생에서 일으켰던 습관들 땜에 암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까 이 사람의 희망과 관계없이 인연이 다해서 복을 지은 인연이 다하고 나쁜 인연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니까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인연생 인연멸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통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일 지라도 자기가 지은 만큼만 복을 받고,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지은 만큼만 괴로움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자가 되더라도 부자일 동안 그 복을 쓰는데 만 치중해서 복을 짓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살기에 급급해서 복을 짓지 않게 됨으로써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삼계가 고통인 이유가 인연생 인연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인연이 최초로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최초의 자기 마음 씀에서 일어납니다. 남으로부터 내 인생에 관여할 수 있는 삶이 불법도리로 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인연생 인연멸을 다른 말로 무상과 무아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상은 시간적으로 항상 하지 않는 것이고, 무아는 공간적으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볼 때 한 살 때 나이가 오 육십이 되었으니까 시간적으로 무상하게 변했고 또 한 살 때 여리고 예쁘고 선한 모습이 지금은 평생 자기가 쓴 마음대로 추하고 악한 모습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공간적으로 무아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적으로 변하는 법칙이 인연생 인연멸인데 이것은 유루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은 개념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사라온 것을 비추어보면 다 이러한 것입니다. 

  두 번째, ‘고액은 네 가지 액이다.’ 이것은 중생들을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4 가지 근본적인 욕탐입니다. 첫째가 욕으로써 의도를 말합니다. 욕심이 있을 때로서 그것은 하고자하는 마음, 얻고자하는 마음, 바라는 마음 등인데 불교적으로 말하면 의도이고, 오온에서 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오온에서 말했지만 의도에만 속지 않으면 업으로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수·상까지만 진행되면 업으로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의도가 개입이 될 때 업으로 형성이 됩니다. 그다음, 유(有)인데 존재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액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 앞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보면 수에 의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좋고 나쁨, 길고 짧음, 아름답고 더러움 등과 같은 모든 것들이 느낌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느낌은 정신적 흐름에 맨 첫 번째 단서입니다. 세 번째 , 견(見 )인데 사견을 말합니다. 오온이 공한데 오온이 영원하다거나, 죽으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견인데 부처님은 여기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느낌이 영원한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이기에 답을 안 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 무명(無明)인데 앞에 언급한 것들을 모르고 마음을 쓸 때의 밝지 못한 마음입니다. 오온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무명이 들어가서 오온을 쓰게 되면 다음에 다시 태어나는 또 다른 업을 만들지만 깨달은 밝은 마음으로 오온을 자유롭게 쓰면 업이 형성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만약 마음을 쓴다고 무조건 업이 형성되면 죽어야 됩니다. 

‘이것들이 유정을 얽매어 -유정은 자기 의지대로 무언가를 하려는 생명체인데- 고를 벗게 하는 것이 수레의 멍에와 같다.’  

  세 번째, ‘고 와 액을 따로 지칭하는 것이다.’ 일체고액에서 그 고액을 교가에서는 하나하나 분석을 했는데 선가에서는 일념이 망념인 것을 깨달으면 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으키는 생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생각이 경계인 것을 알아야 마음을 쉽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 대상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존재감(개념)을 일으킨 것을 알면 그것에 속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일으키고 자기가 속는 셈입니다. 화두는 선악을 내가 만드는데 과연 만드는 이놈은 무엇인가 하고 근본적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일체개고에서 고를 설명하는데 먼저 3고를 설명하겠습니다. 3고는 행고, 괴고, 고고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행고는 일체 중생이 살아 있는 한 뭔가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입니다. 뭘 해도 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행고입니다. 보통 부부가 같이 살다보면 권태감이 일어나는데 이것의 정체가 행고입니다. 똑같은 것을 반복함에 따른 우울증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행고입니다. 

 그다음 괴고, 평생을 노력하고 무엇을 했어도 결국엔 다 무너져버립니다. 젊어서 살찐다고 다이어트도 하고 온갖 것을 다해도 몇 십 년 뒤면 쪼글쪼글해져 버립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입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것입니다. 

 세 번째 고고, 그래서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인생이 고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3고입니다. 일체중생 누구나 겪는 고통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다음은 4고 인데 생·노· 병· 사입니다. 그런데 생이 왜 고통일까요? 태어남으로 인해서 이제까지 얘기한 모든 고통을 다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법도리로 보면 태어난 것도 전생에 제대로 닦지 못해 다시 태어난 것이라 축하 받을 일은 아닌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도 여러분의 존재감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망념이 안 깨어지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법을  잘못 배울 경우 불법을 깨닫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개념은 존재감을 만든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놈은 뭐라고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있다거나 없는 것으로 한쪽으로 개념을 몰고 가는 순간 불법하고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불립문자라 하는 것입니다. 문자나 개념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체험할 뿐이지 무엇이 영원하다거나 어떻다거나 단정적으로  말한 것은 모두 개념에 의해서 존재화 된 것입니다. 

팔고는 생노병사의 큰 네 가닥에 네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는 누구나 다 겪는 것인데 하물며 도를 닦는 사람조차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데 대한 고통을 받습니다. 자기 수준만큼 다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안 그런데 자기만 그런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음은 오음치성고(五陰熾盛苦)로서 오음이 치성하는 것을 중생들은 행복이라 생각하는데 엄격히 말하면 TV, 오락 같은 것들이 천마와 같습니다. TV 드라마 같은 것을 통해 보여 지는 세계가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온이 공한 것을 아는 사람 같으면 그런 것을 봐도 속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별리고( 愛別離苦)가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아끼던 물건을 항상 곁에 두고 싶은데 언젠가는 떨어져야하는 고통입니다. 자기가 욕구하는 것과 오래 머물 수 없고 헤어져야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가 쌓아놓은 업력만큼 밖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사람뿐 만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환경, 재산, 능력, 건강 등 모든 경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원증회고(怨憎會苦)인데 앞의 애별리고는 자기만 가슴 아프면 되지만 원증회고는 남도 아프게 만듭니다. 내가 싫어하는 경계와 부딪히는 것인데 이것 역시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경계를 포함합니다.

  이제까지 말했던 모든 것들 중에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맛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고통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아서 이런 것들이 고통인줄 모르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도 안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이 고통임을 깨달아 벗어나려고 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오온이 공함을 깨달으면 이러한 것들이 끊어집니다. 앞에 말한 모든 것들이 오온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온의 맨 먼저 실마리가 수(느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감은 느낌에 의해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많이 오면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있는 반면 괴롭고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자기가 일으킨 존재감에 자기가 취사선택한 업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여러분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다가 광명이 보이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하는 따위도 다 느낌일 뿐입니다. 깨달음은 자기 마음에 미혹함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서, 산을 보면 산이 보이는데 그전에는 내 느낌에 맞는 산만 보이게 됩니다.  가령 좋은 차를 갖고 싶은 욕구가 있으면 길을 가면서도 차에 계속 관심을 두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온에 속은 것인데 이런 맘으로 세상이 바로 보이질 않습니다. 자기 소견만큼 보니까 그 만큼 업력이 쌓여서 그것이 다시 태어나고 죽음의 원인이 되는데, 다시 태어나더라도 선업을 지었으면 그나마 지낼만하겠지만, 악업을 지었으면 평생 동안 무수한 시련을 당해야 합니다. 

누가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는 말을 얼마나 잘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 사람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느낀 만큼 나오는 것입니다.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까지해서 이상이 반야심경의 대의로써 고통을 없애려면 마음 안에 있는 오온의 흐름부터 깨닫고 차단하고 녹여버리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구하는 것이 불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어느 길로 가야 행복에 도달하는지 가르쳐주는 안내자일 뿐이라고 화엄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욕탐이 많아서 자기 맘대로 부처님을 해석해서 내가 1000배 정도 하면 부처님이 돌아다보겠지 하고 해량합니다. 성철스님 같은 분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삼 천배를 하라고 하셨는데, 수행하는 사람은 중생을 대할 때 수행 입장에서만 대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불법이 살기 때문입니다. 불법에 대하여 간절한 사람은 삼 천배를 합니다. 삼 천배를 하고나면 오온의 흐름이 멈춰진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너무 힘들어서 욕탐이 끊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한마디 해주게 되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당신이 위대하니까 삼 천배를 하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저는 다른 방법을 쓰는데 여러분들이 정말 공부를 하고 싶어 오는 것인지, 그냥 늘 다닌다고 단골손님으로 착각해서 내가 뭔가를 파는 장사치로 생각해서 나를 상대하는 지 그런 것을 봅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에 대하여 자기가 단골손님이라고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이 공부는 여기 아니면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상이 경의 대의로서 오온의 공성을 파악하고 수행하여 그 이익을 얻음을 설한다.’ 오온의 공성을 파악하면 일체고액이 다 떠난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의 4덕이 있는데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하니까 근기가 낮은 사람은 체험이 아닌 머리로 헤아림으로써 불교는 아무것도 없다는 소견을 일으키게 됩니다. 수행을 하게 되면 평화롭고 여유로우며 적적한 경지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을 언어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안 하고 글공부만 하게 되면 공에 떨어졌다거나 귀신굴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표와 주제가 무엇인지 이제 분명해졌으리라 봅니다. 여기까지 해서 대의를 설명했는데 상근기는 여기서 깨닫습니다. 마음을 한번이라도 철궤를 한 사람은 번뇌가 저절로 끊어집니다. 마음을 쓰다가도 가짜임을 알기에 쉬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은 마구니 짓이라 하는데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는 어떤 수행을 하든지 자기소견이 덕지덕지 붙기 때문에 불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오온개공에서 깨닫지 못한 중하근기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이 파사분(破邪分)입니다. 중생의 삿된 부분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열거해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이면서도 무엇이 삿된 것인지 지혜가 없어 알 수가 없습니다. 

 맨처음으로 ‘사리자야!’ 라고 했습니다. 사리자는 교화 받는 사람을 표방한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법을 설하기 위해서 ‘사리자야’ 하고 부른 것입니다. 왜 십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의

사리자가 나왔느냐 하면 반야심경의 가장 큰 가르침은 지혜로써 번뇌를 깨뜨리는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감당할 사람은 사리자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선구로 얘기하면 ‘사리자야!’ 하는 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르는 자가 있고 듣는 자가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부르는 자리가 있고 듣는 자리가 있습니다. 선으로는 ‘사리자야!’ 하는 소리 끝에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고려 보조국사께서 정혜사에 계실 때 보조국사의 법을 이은 진광국사가 처음으로 보조국사를 찾아가는 길에 보조국사를 보기도 전에 깨달았다고 했는데, 보조국사가 토굴에서 시자를 찾는 고함소리를 멀리서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49;50

  둘째로 관찰자는 대상을 밝힌다. 첫째 앞의 사구에 의해 공성(空性)을 밝히고 뒤에서는 여섯가지 의미로 공상(空相)을 밝히는 것이다. 파사분의 전체 내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사리자’에서부터 뒤로 사구가 쭉 있는데 그것은 공의 근본성질과 정체성을 밝히고, ‘공즉시색’ 뒤에서는 공의 여러 가지 현상적인 모습을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교화 받는 사람을 나타내고, 뒤에서는 공성을 바르게 밝힌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살의 법을 설하는 반야경에서 어째서 보살을 부르지 않고 사리자를 부르는가?’ 사리자는 소승 아라한이고 성문 제자입니다. 대지도론에 ‘세존을 제외한 일체 중생이 사리불의 지혜와 다문을 16분의 1도 따르지 못 한다.’ 라고 했고, 다르게는 ‘소승을 대승으로 향해 가게 하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앞에서 ‘주인공아!’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야’  하는 것의 선적인 의미입니다.  

  ‘진리의 체험자인 관자재보살이 지혜제일의 사리자에게 공의 실상을 설명한다. 공의 명상 속에서 부처님의 진리가 솟아오른 상태-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 말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공을 명상한다 했을 때는 이미 공이 아닙니다. 공을 명상 했을 땐 공을 의식한 마음입니다. 느낌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을 명상한다니까 공에 대한 개념을 떠올리는 순간에 오온개공의 공하고는 완전히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세계가 무너져도 이것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도리입니다. 반야심경의 공이 소승에서는 비어 없는 것이지만 대승에서는 살리는 것이 되는데  참선법에서는 오직 한 가지 성품인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을 알려고 하면 답이 ‘저 멀리 삼계 밖에 홀로 뛰어 넘어 다시는 사바세계를 생각지 말아라.’ 인데 이것이 수행의 요결입니다. 앞에서 오온개공을 설명한 이치로 이것을 떠져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삼계는 느낌에 의지하고 있는데, 삼계 밖에 홀로 뛰어넘으라는 것은 느낌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들은 죽을 때까지도 느낌에 의지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며 울고 웃고 할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됩니다. 도 닦는 사람은 담담해야 되는데 생각이 없으면 담담한 것이 아니고 명철하게 오온이 공한 지혜를 아니까 어떠한 느낌이 와도 그것을 쓰되 거기에 속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예리한 칼이 어린아이한테 가면 다치게 되겠지만, 칼을 잘 쓰는 장인에게 가면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느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느낌을 실재하다고 착각하고 거기에 속아 마음을 쓰는 무명의 마음이 나쁜 것입니다. 

  티벳의 성자 밀라레빠는 주술로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마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발심을 해서 성자가 되어  하늘을 날아 다녔습니다. 오온이 공함을 깨닫고 나서 자기가 꿈속에서 저질렀던 일에 대한 죄책감이 완전히 소멸된 다음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분이 ‘허공과도 같이 법신은 모든 생명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업의 맹목성은 -이것은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오온을 말하는 것으로서, 밝은 마음 없이 느낌과 생각, 의도, 분별에 의해서 세계를 판단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취하고 버리는 맹목성입니다. - 그들을 윤회 속으로 몰고 간다. 자만심과 이기심은 극복하기 어렵다. 자만심과 이기심이 극복되지 않으면 그냥 짐승처럼 산속에서 살아라.’ 라고 했습니다. 오온의 특징이 내다하는 마음입니다.  내다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은 자만심과 이기심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거지도 자만심이 있습니다. 수행자로서 자만심과 이기심이 극복되지 않으면 그냥 짐승처럼 산속에서 살라고 한 것은 아직 덜 익었으니 산에 있음으로써 짐승처럼 편안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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