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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2강 색불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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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082회 작성일 21-08-09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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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색불이공 


  오늘은 반야심경에서 가장 유명한 4구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이 4구는 반야심경의 핵심이고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팔만대장경에 들어있는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색불이공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색’ 이란 것이 물질적인 것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말하지만 반야심경의 색은 오온의 다섯 가지 중 첫 번째 것으로서 나머지 네 가지까지 공하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색불이공의 색은 우리가 내 몸이라고 하는 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더 이어서 가면 수불이공이 되겠지요. 그래서 수상행식 이 네 가지가 공과 다르지 않다 했을 때 ‘수’는 정신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나에게 적용이 될 때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내 몸과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색불이공을 풀어서 말하면 ‘내 몸과 마음이 공과 다르지 않다.’ 라고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만약 색 하나만 넣고 공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 정신적인 우리의 마음의 흐름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색의 근원은 공이다.’  빌 공(空)자 하나를 제대로 알면 불교를 알게 됩니다. 색은 공에 의지해서 나투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색은 몸뚱이라고 했는데 이 몸뚱이의 최초의 근원이  어디냐고 했을 때 현대 과학적으로는 어머니 뱃속이라 할 것인데, 어머니 뱃속에 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무어라 할 것입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기 전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머니 뱃속에서는 생겼으니까 이것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색의 근원을 더듬어 가면 공인 것입니다.

 공에 대하여 3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 하는데 범부의 형상에 얽매어 집착하고 욕탐을 내는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범부 차원에서 공을 이야기 하고, 그 다음 형상에 얽매이는 차원은 벗어났지만 죽어 있는 경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소승 나한의 경계라 하는데 그러한 경계의 공을 취득한 사람에게는 다시 그 공까지도 부정을 함으로써 대승의 진공묘유를 취득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범부의 견해를 끊어야 되기 때문에 몸뚱이가 자기의 실체가 아니고 인연화합물임을 관찰하게 하는 것, 즉 우리가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밥 한 끼만 안 먹어도 무너지는 것인데 과연 그것을 나라고 집착할 수 있는가라고  하여서 내 몸, 내 것이라는 견해를 깨뜨린다고 했습니다. 

 공의 이해가 분명하지 않은 보살에게 세 가지 의심이 있다. 

첫째는 변계소집성의 공이다. 여러분들이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에 대하여 의미를 매긴 만큼 그것이 실재하다고 믿는 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행복이나 불쾌감을 가졌을 때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공의 측면에서 잘 살펴보면 자기가 그린 만큼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씨가 좋아서 기쁘다고 했을 때 그 기쁜 마음이 날씨에 의해서 날씨를 판단한 분별에 의해서 나온 말인데 사람들은 그 분별은 놓아두고 그 기쁜 마음이나 행복감이 따로 어디 있어서 성취할 대상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 같으면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내 마음이 분별하지 않으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변계소집성입니다. 범부가 가지는 견해가 철저하게 이것인데 이것부터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가 밉다. 왜 미울까?  상대가 나에게 못해서 밉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명상이나 지혜로써 찾아들어가 보면 내 욕구에 상대가 맞추지 않기 때문에 미운 것입니다. 그 첫째 원인은 내 욕탐이 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범부들이 늘 쓰고 있는 마음으로써 변계소집성이며 이것이 공한 것입니다. 

  다음이 의타기성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내가 썼던 마음들이 물질화되어 그러한 인연들이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도 나는 책임이 없고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으로서 일체가 인연의 소산물인데 그것을 모르고 이것이 영원한 실체라고 착각을 해서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데 이것이 범부 중생들이 갖고 있는 의타기성의 공입니다. 

  세 번째로써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근본적인 공, 원성실성의 공입니다.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통해 깊이 들어갔다 나오게 되면 이 세계가 안보입니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분별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의 세계는 나의 분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깊이 한 조각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세계를 대하고 있지만 세계가 보이질 않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큰 거울이 있는데 그 거울에 사물을 비출 때 흐린 거울에 비추면 흐린 만큼 비추게 되고 깨끗하면 있는 그대로 비추게 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비출 때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을 표현 하자면 불성이라 하고, 여기서는 원성실성이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공부를 한 조각으로 깊이 들어가 탁하고 눈을 뜨게 되면 세계가 없어지게 되는데 그 상태를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 하는데 그 냥 공이 아니고 진공, 참된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 속의 사과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어리석은 범부들이 봄날에 사과가 먹고 싶어 사과밭에 갔는데 사과가 없으니까, 사과나무를 쪼개면 사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무를 계속 쪼개었지만 그 속엔 사과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쪼개고 쪼개도 사과가 없는 그 상태가 공입니다. 그런데 원성실성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인연이 성숙되어 원인과 결과가 부합이 되면, 즉 가을이 되면 사과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사과라는 물질은 색인데 그 근원은 저 없는 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색불이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범부의 의심을 끊는 것입니다. 범부의 의심은 한마디로 있는 것에 집착하는 욕탐이기 때문에 그 욕탐을 끊어주기 위해서는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색·수·상·행·식에 대한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공이라 하여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색 밖에 따로 있는 공을 취하여- 보통 색불이공 하면 색밖에 따로 공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공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즉, 정지견이 없거나, 수행에 의한 공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 갖는 세 가지 견해입니다.

  첫째가 물질 밖에 따로 있는 공을 취해서 현상의 세계와 별개로 있는 공을 세우기에- 여기서 공을 세운다는 것은 공을 깨달아라 해서 대승에서는 늘 공을 얘기하고 하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 외에 공의 실재적인 자리가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렇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것이 유신론입니다. 인간 외에 따로 전지전능한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을 불교에서는 상견외도라 합니다. 항상 하게 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법부의 망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고, 세계의 근원이지만 그 공은 실재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공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현상과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신이라든가 하느님, 극락, 지옥 등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착각을 없애기 위해서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현상을 떠나서는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과가 사과나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 색이 공이다 했을 때 공을 잘못 이해하는 병을 고쳐주기 위해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 했는데, 교리적으로는 대부분의 범부들이 갖고 있는 상견외도의 견해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한 보살이 남편이 관음기도를 이 년 가량 했는데 어느 스님이 관음 기도는 많이 했으니 비로자나불을 하라고 했는데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관세음보살과 비로자나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인데 이것이 상견외도의 견해입니다. 여기에 밝지 못하면 미혹해집니다. 남편이 관세음을 부르든 비로자나불을 부르든 무엇을 부르든 변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다. 부르는 놈은 하나지만 부르는 대상은 여러 가지 이다. 부르는 대상이 아무리 거룩한 대상일 지라도 부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지만, 부르는 놈은 부르든 부르지 않든 항상 존재하므로 공부를 하거나 수행을 하려면 마음을 따라가야 되기에 부르는 놈 입장에서 염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보살을 부르면 좋고, 하나님이 낫고 하는 것들은 부르는 사람의 망념, 개념, 변계소집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 모르게 되면 여기서 이야기 하는 현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공, 이것을 진리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실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 밖에 따로 있는 공을 취하는데 그 첫째가 현상과 별개로 있는 공이 있다는 견해를 없애기 위해서 색불이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즉 상견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상이 진공임을 밝히는 것이다.

 두 번째, 공의 경계는 색을 다 멸하여 없앤 단멸의 공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 물질적 현상이 본질이고 진공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색불이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동국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고 익진 교수라고 계셨는데 그분께서 ‘사람들은 공이라고 하면 물질이 다 닳아서 없어져 사라지면 공이라고 하지만 내가 깨쳐보니 그것이 아니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다 공이더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공하다고 하면 있는 것과의 반대의 개념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모두 자기가 일으킨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없음을 일으키는 개념 자체는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공입니다. 즉 색불이공입니다. 여기 구슬이  여러분들 눈에는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고 만약 구슬을 감추어 버리면 사라지는데 그렇게 없어지는 것이 공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구슬이 눈에 보여서 있다고 하는 것과 안보여서 없다고 하는 것조차도 그것을 지켜보는 자의 분별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색이다, 공이다 하는 것 자체가 분별망상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공이 물질처럼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공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려는 의심을 꺽기 위해서 - 반야심경이 공을 이야기 했을 때는 중생의 망념이나 연기에 대한 무지와 같은 것을 끊기 위해서 공이라고 했는데, 공이라는 것이 어떤 물질처럼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때 보조스님이 마지막 확철대오를  어떻게 했느냐 하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 마음이 지극히 고요해지고 경계에 대하여 무심해졌지만 이것이 수행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조금 불편한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해스님의 어록 속에서   ‘선이란 견문각지(見聞覺知: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에 있지 않고, 견문각지를 여읜 곳에도 있지 않다.’ 라는 구절을 보고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즉 공이라는 것을 있다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면 공을 영원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아,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박장대소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뱃속에 아이를 잉태했을 때 아홉 달 동안 음식을 잘 먹고 조리를 잘하게 되면 엄마가 관여를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밖으로 박차고 나오려고 산통을 일으키고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뱃속에서 머리가 생기고 손발이 생겨 자라나며 때가 되어 밖으로 나오게 하는 그 힘은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공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은 말로써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있다 했을 때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요즘 금값이 많이 올랐는데 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무덤을 파보면 금은 그대로 있거든요. 이러한 금의 썩지 않는 성품을 있고 없음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금반지를 보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반지를 녹여 금팔찌를 만들면 금반지가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있고 없음은 이 수준입니다. 반야심경의 공은 금반지가 있다고 해서 이것은 더하지도 않고 금반지를 녹여 팔찌를 만들었다 해도  덜하지 않습니다. 그 썩지 않는 성품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의 입장에서는 썩지 않는 성품이 공이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물건도 걸쳐있지 않고 망상이 없는 상태가 공입니다. 이 상태를 실재하다고 해도 틀리고 실재하지 않다고 해도 틀린 것입니다. 우린 있고 없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려는 의심을 끊기 위해서 색불이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색불이공이 뭡니까?  색이 곧 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죽비를 개나 고양이에게 보여주면 죽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비에 대한 개념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나 고양이에게는 죽비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한 것입니다. 이처럼 처처에 공인데 우리는 처처의 공을 무너뜨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게 공이 아닌 이유는 여러분이 욕탐으로 죽비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마음에서 욕탐만 제거하게 된다면 바로 산하대지가 공이 됩니다. 모든 것이 공입니다. 그래서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심으로 간절하게 마음을 파고 들어가면 문득 ‘툭’ 하면서 다 끊어집니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보면 다 공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지긋지긋한 생사가 끊어집니다. 생사가 무엇에 의지하고 있느냐하면 능엄경에서는 공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의 생사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을 아는 것을 견성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로서 공이라고 하니까 ‘없는 것’ 이렇게 생각 하는데, 없는 것이라는 것은 있는 것의 반대  개념입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있고 없다는 마음의 개념에 떨어지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평상심이라 해도 되는데 일심으로 간절하게 들어가야 알 수 있습니다. 들어갔다 탁 티어 보면 세계가 있음에도 공입니다. 여기서는 천하의 부처님까지도 공인 것입니다. 예전에 해인사에서  어느 스님이 200여 명의 대중을 모아 놓고 법문을 하는데 ‘삼세제불이 다 내 입에서 나왔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해인사 도인이었던 스님이 사미였는데 ‘그러면 스님의 입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거기에 대답을 못하고 창피해서  법상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공에 대하여 진실로 이해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이해하기는 쉬워도 자기가 그 경계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다른 식으로 찔렀을 때 모르게 됩니다. 삼세제불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 내가 만들어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입이라는 개념조차도 사라져야하는데 그것은 안 사라졌으니까 내 입에서 나왔다 그랬거든요. 스님의 입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답할 것입니까? 이런 것을 타파를 했을 때 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이것은 종지 즉 반야심경의 대의를 말하고, 뒤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바깥의 의문을 끊어주는 것이다. 아직 색불이공에 대한 설명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 방법으로 여러분들에게 공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심으로 간절하게 한 시간 만이라도 한 생각 한 생각 공부를 했다면 이 말을 듣는다면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색불이공을 다시 물질로 비유를 들겠습니다. 태평양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데 여러분들은 그것을 보고 파도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바람이 멈추어 잔잔하면 파도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도가 일든 일지 않든 거기에 영향 받지 않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태평양 자체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과 관계없이 태평양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람에 의해 일어났던 거품과 파도는 그때그때 인연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작용이라 하고, 바람이 부는 것과 관계없는 변하지 않는 것을 본체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은 이 본체입니다. 일체 중생이 생사를 받고 미혹한 것은 본체를 놓아두고 작용에 집착해서 작용에 따라서 선악을 일으켜 그 업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작용에 미혹한 이는 본체를 몰라서 그런 것이기에 본체를 먼저 깨닫지 않는 이상 누구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중생이 파도를 자기 모습이라 주장하여 아견을 세워 무수한 악업을 짓지만 파도 자체가 물을 떠나진 못한다. 이것이 색불이공의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마음자리에 일으킨 하나의  흔적의 모습이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는 그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을 세심하게 잘 관찰을 해보십시오. ‘내가 아무개다.’ 라고 한 것은 바람 없는데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이 파도인 것만 알아도 견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누구라고 해봐도 숨이 딱 끊어지면 내가 나라고 했던 것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럼 어디로 갈까요? 본처로 돌아가는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장자가 아내가 죽었을 때 관 앞에서 웃으며 노래를 불렀는데 친구들이 의아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장자는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것을 짊어지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던 것을 이제는 인연이 다 소멸이 되어 본처로 돌아가는데 그 얼마나 편안 하겠는가?’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온갖 바람에 휩쓸리다가 파도가 사라지니 물의 본원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공에 편중된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범부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이것이 특출한 견해입니다. 

  여러분들이 내다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본처를 나다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작용의 모습을 파악해서 이것을 내 모습이라 하여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업이 일어나고 악업이 일어나니까 다시 일파만파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파도가 일어나게 되면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만 가지 파도가 일어날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고 죽는 것입니다. 나고 죽는 것은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없습니다. 생사를 여의기 위해서는 파도가 곧 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색불이공의 정의입니다. 

  허망한 분별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별을 취하거나 취할 대상은 없다. 그 허망한 분별 가운데는 공성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것은 분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분별이 쉬게 되면 그 쉰 자리를 공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숭산 행원스님이 미국에 계셨을 때, 어느 부부의 7살난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키우던 고양이가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엄마에게 고양이가 죽어서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 졸업 후 천일기도 할 때 우리 스님과 같이 같은 방을 썼는데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켰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와 촛불을 끄게 되었습니다. 우리 스님께서 저에게 ‘야, 촛불이 어딜 갔냐?’ 하고 묻길래, 스님께서 알고 묻는 줄 알고 ‘촛불이 어디로 갔지요?’ 하고 되물었더니, ‘어디로 가긴 어딜 가, 꺼졌지 이놈아.’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스님의 경계를 알고서는 제가 ‘스님은 꺼진 것만 봤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위에 경우 엄마가 아이의 질문에 할 말이 없으니까 숭산 스님께 여쭤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숭산 스님께 여쭙자, 스님께서 아이에게 몇 살이냐고 물으니 7살이라고 답했습니다. 다시 7살 되기 전에 어디 있었냐고 물으니 엄마 뱃속에 있었다고 답을 해서, 또 다시 엄마 뱃속에 있기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10살이 넘은 아이였다면 

대충 ‘천국에요,’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이미 물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어려서 천국이라는 개념도 없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마음이 쉬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스님께 가르쳐 달라고 하였는데 ‘네가 만약에 생각을 내면 모든 것은 다 이름과 모양을 갖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 중에 이름이나 모양을 갖고 있지 않는 것 찾아보십시오.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은 다 여러분이 이름과 모양이 주어졌을 때 파악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을 내지 않으면 모든 것은 다 똑같다.’ 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여기 까지 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도 하고, 다양한 광경도 봤을 텐데, 만약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여러분들이 알고 있던 일체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을 면밀히 생각해보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할 때만 있고, 없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일으키면 내 욕구만큼 이름이 붙습니다. 고양이나 개가 욕구가 없으면 죽비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한방 맞은 짐승은 몽둥이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용도가 있기 때문에 욕구로써 파악을 하기 때문에 죽비가 됩니다. 그런데 죽비라는 생각이 없게 되면 여기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숭산 스님께서 아이에게 과자를 먹느냐고 묻자 아이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과자는 공장에서 밀가루로 만드는데 빵도 되고 과자도 될 수 있지만 그 근본은 밀가루라는 하나이다. 인제 너는 고양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겠느냐.’ 라고 하니, 아이가 ‘고양이가 어디로 갔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네요.’ 라고 답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참 빠른 아이지요. 이에 스님께서 ‘네가 나에게 고양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고 물어봐라.’ 하시니 아이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방바닥을 한번 치셨습니다. 그 아이가 그걸 알아듣고서는 그 뒤로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도 방바닥을 치고, 부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방바닥을 쳤습니다. 이 방바닥을 친 뜻을 알면 여태껏 한 이야기를 다 알 수 있습니다. 방바닥을 친 자리에는 일체의 개념이 들어간 자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지혜가 뛰어나거나 수행력이 있는 사람은 한마디에 깨달을 수 있는데 공부를 안 한 사람은 잔머리만 늘고 불교를 다 아는 사람처럼 떠들고 다닙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에 힘이 없는데 공부에 힘을 얻으려면 한줄기로 깊이 파고들어 체득을 해야 합니다. 

  일체는 공도 아니며 공 아닌 것도 아니다. 허망한 분별은 유이며 능취소취는 무이다. 능취는 능히 취하는 마음으로써 주관을 말하며, 소취는 취할 바 즉 대상,객관을 말합니다. 주관과 객관은 무이고 즉 본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내지 않으면, 즉 그것이 무엇이라는 개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의 개념이 없으므로 안과 밖, 나와 너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또한 공성은 유이기에 그것은 중도이다. 이러한 것을 원성실성이라 합니다. 조금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쓰는 마음이 파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파도인 줄 모르고 내 마음 내 생각인데 할 때는 파도를 얼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공의 진실이란 외부 환경이나 감각에 의해서 혼란되지 않는 마음의 고요함, 즉 개념적 사유와 어도(語道)의 분별이 종식된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을 어리선이라 하는데, 헤아리고 이치로써 겨우 이해하게된 것으로 이것은 지식이지 깨달은 것이 아닌데 법문을 오래 들은 사람은 이것이 자기 것이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원수와 만났을 때 자기 마음이 부동한가를 살펴서 부동하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속았다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여래의 본성은 공하므로 또한 사유할 수 없나니- 즉 부처님의 본성은 공하므로 생각으로써는 부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해서 모든 걸 알려고 하다 보니 내 입맛에 맞는 생각만 주로 하게 되어 악업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는 실제 수행을 통해서 한길로 간절히 들어가 봐야 압니다. 

  여래는 멸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이미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부처님을 물질로 생각한 것이고 있고 없음의 양단의 한 개념으로써 부처님을 파악하려 한 것입니다. 두 개념을 비워버리고 비웠다는 그 견해까지 쉬어야 참된 공이 됩니다. 중생은 일체를 유무로 판단하는데, 금의 변하지 않는 성품은 유무에 의지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공성이라 합니다. 유무는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분별되어진 것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재와 비실재가 -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천당과 지옥, 하나님과 부처 등- 마음으로 일어난 개념일 뿐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이 공의 이해이다. 선가에서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은 거룩한 모습인데 거기에는 거룩한 이라는 자기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색이라는 현상은 공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고 공의 차원은 색이라는 세계의 참모습이다. 우리는 색이라는 세계만 알고 공의 세계는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 생사 윤회하는 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공을 이해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수행입니다. 실제 수행을   안한 사람은 금방 잊어버리게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절대 자기견지가 변하지 않습니다. 

 옛날 정강 스님이라고 계셨는데 어느 스님이 공부를 해서 인가를 받으려고 몇 번을 찾아갔지만 인가를 받지 못하자 칼을 목에 대고 인가해달라고 했습니다. 정강스님께서 인가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네가 이런다고 너한테 뭔 도움이 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이같이 수행은 업을  맑히는 것인데 인가라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욕탐을 만드는 것이 중생의 습성입니다. 그래서 이해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처럼 자세히 설명해서 이해를 시키는 것을 어리선(語理禪)이라 합니다. 어리로써 마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인데 이것은 잠 한 번 들면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립니다. 깨닫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그래서 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밀레라빠라는 티벳의 대성자께서 ‘만약에 공의 깨달음이 확고하다면 감각기관을 자유로이 움직여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공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겠지요?  색·수·상·행·식은 몸과 마음의 감각입니다. 공을 깨닫게 되면 몸과 마음을 써도 즉 감각기관을 써서 좋은 건 좋다, 싫은 것은 싫다 하더라도 마음을 거기에 뺏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평상심입니다. 그래서 집착은 욕탐에서 나오기에 욕탐을 더는 수행을 해야되고 , 욕탐은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기에 우선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신비로운 견해를 일으켜도 제 욕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은 좋은 산 나쁜 산 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견해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라고 한 것은 좋고 싫음은 우리 분별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 연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것인데

이것은 소승 아라한의 경지로써 공은 이해했지만 공의 작용은 이해를 못한 것입니다. 만약 더 깊이 들어가면 진공의 경지가 나오는데 그때는 그저 산은 산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경지가 다 틀리지요? 여러분 경지에서는 산은 산이 아닌 경지만 알아도 다행인데 이것만 알아도 변혁생사는 없어집니다. 이로써 색불이공은 끝났습니다.

  다음은 공불이색인데, 앞의 색불이공은 현상 입장에서 진리를 비춰본 것입니다. 현상 입장에서 보니 모든 현상의 근원은 공으로써 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상에 집착해서 공을 판단하는 범부의 견해를 끊기 위한 것입니다. 공불이색은 어느 정도 수행을 하게 되면 마음이 고요하고 담담해지는 냉정해질 때가 있는데 이것을 참된 공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면 썩은 고목이 되어버립니다. 

  예전에 어느 스님이 산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한 노파가 십년 동안 매일 자기 딸을 시켜 공양을 올리며 시봉을 했습니다. 어느 날 노파가 스님이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자기 딸을 시켜 화장을 하고 예쁘게 차려 입혀 스님께 공양을 올리며 뒤에서 꼭 껴안으며 스님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시킨 대로 하고서는 스님께  물으니 스님이 차가운 바위에 마른 나무가 부딪힌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딸이 스님이 공부가 잘 된 것 같다고 하고 그대로 이르니 노파가 ‘이 중이 공부를 잘못 했구나.’ 하면서 암자를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이 공안이 유명한 공안인데 참선을 하다가 마음을 닦다가 공에 떨어진 것을 구제하기 위한 공안입니다. 이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면 참공을 알 수 없습니다. 불교 TV에서 어느 스님이 간화선 강의를 하면서 이 공안을 얘기하면서 공안 속의 스님은 공에 떨어져서 그렇다고 하던데  제 소견으로는 공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 봅니다. 여러분 입장에서 볼 때 그 스님이 잘못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동국대에 다닐 때 화계사 조실이던 덕산 스님에게서 이 화두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몇 번을 요청해서 받은 화두 인데 이것을 주시면서 일러보라 하시기에 그땐 화두가 뭔지 제대로 모를 때라 생각을 하려했더니 벽력 같이 고함을 치시며 생각을 굴리면서 대답을 하면 틀린다고 하셔서 얼떨결에 아는 대로 ‘크게 꾸짖을 겁니다.’라고 답을 했더니 ‘너 제법이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을 아는 사람과 짐작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만약에 이 아가씨가 십년 동안 돼지에게 먹이를 줘서 키우게 되면 돼지가 이 아가씨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좋은 감정이 있겠죠? 그러면 십년 동안 시봉을 해온 아가씨가 뒤에서 껴안았을 때 이 스님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이것이 공안인데 공을 알면 여기에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차

가운 바위고 아가씨가 마른 나무와 같다고 한 것은 공부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스스로 결정을 해놓고 거기에 맞추어 현상에 대하여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억누르고 참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석 달 동안 먹이를 주면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본래 마음인데,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토목와석(土木瓦石)입니다. 큰 거울이 있어 거기에 한나라 사람이 오면 한나라 사람이 비추어지고, 예쁜 사람이 오면 예쁘게 비춰지는 것을 알아야 도인입니다. 예쁜데 예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교묘히 마음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떳떳한 사람은 어떠한 행동을 해도 마음에 걸림이 없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떳떳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떳떳한 모습을 얘기를 하게 됩니다. 

공불이색이 이러한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소승에서 무아를 알았다고 해서 그것은 부처님이 가르치고 싶어 한 그런 무아가 아니고 방편의 약 처방을 안 것입니다. 공에 떨어진 것이 아니고 공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불이색이라 했는데 본체를 안 사람이 현상에서 본체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 깨달은 도가 일상생활이나 사람을 대할 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조주 스님 같은 경우 제자가 스님이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을 때 지옥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공을 깨달은 사람이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지옥이라는 것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잖아요? 도인은 스스로는 지옥 간다하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극락간다고 합니다. 차이가 있잖아요? 아까 공안의 스님이 차가운 바위에 마른나무가 닿았다고 한 것은 극락 간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젖는 성품이 파도와 같다. 물의 젖는 성품이 작용으로 변하면 파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파도와 물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는 소승의 견해를 끊는다. 소승에서는 없는 것을 알아 마음이 쉬어서 중생이 갖는 오욕은 없지만 참법에 대한 밝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속박은 해도 중생을 해탈 시킬 수가 없습니다. 

  존재를 초월하면서 존재를 나타내려는 의지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는 것이 공이다. 이 공이 파동 치는 곳에 물질이 형성되고 우주가 나타난다. 밀레라빠가 말하기를 모든 현상은 물위에 비친 달과 같다고 했습니다. 천강유수 천강월이라 했는데 천강에 떠있는 달은 진짜달이 아님에도 원숭이가 그 달을 잡으려고 물을 움켜잡는 것 처럼, 우리가 움켜쥐려고 하는 것이 마치 본성의 달이 우물가에 비춰졌는데 그 달이 우물가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움켜쥐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언제나 평등한 지혜를 내면 일체가 공이다. 어떻게 평등한 지혜를 낼 수 있을까요? 

욕탐은 내가 인연의 소산물임을 모르고 나 있음을 주장하고 마음을 쓰게 됨으로써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쓰는 마음입니다.  공이 되지 않음은 나와 세계를 내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한 법도 보지 않는 그분을 그래서 관자재라 한다. 관찰함에 자재하여 한 법도 보지 않으니 보일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나하나가  다 보일 대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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