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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13강 색즉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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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1,120회 작성일 21-08-09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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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색즉시공 공즉시색


오늘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반야심경에 있어서 이것을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설합니다. 하나는 이치로써 헤아려서 이해시키는 것이고 하나는 직관으로써 자기가 체득하게 하기위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효과가 있을까 했는데, 어느 날 어떤 보살이 전화가 왔었는데 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말로써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저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깊은 깨달음은 아니지만 스스로 말을 토설해놓은 것을 보니 자기가 마음 쓰는 것이 지금 어떤 것인가 이해한 그것을 알게 되니까 저도 기쁘고 앞으로도 선적인 것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쪽으로도 해볼 것입니다.


‘색의 근원은 공이고 공의 나타남이 색이라.’ 여기서 공이라 했을 때 공이라는 것이 따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색의 근원이 비어 없음인데 비어 없음이란 것이 그냥 비어 없는 것이 아니고, 인연이 닿으면 의타기성으로 온갖 사물을 다 만들어내는 연기성을 공성이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색이든지 그것을 따져보면 공성으로 귀결이 됩니다. 어제 제천에 일이 있어 같이 동행한 보살이 기독교 신자와 얘기를 하다 말이 막혔다고 했는데 무엇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일체가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 하여 왜 마음이 만들었냐고 묻는데 대답을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순점이 만약에 하나님이 있어 일체를 만들었다면 컵이나 죽비 같은 것도 하나님이 만들었을 거고 이것은 객관적으로 고정적 실체가 되고 컵이나 죽비에 대하여 짐승들도 같이 컵이나 죽비로써 인식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왜 마음이 만들었냐고 하면 정확한 언어로는 우리가 사물을 볼 땐 자기 욕심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남자든 여자든 기준이 있지요. 내가 만든 기준으로 보는 세계를 남이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고양이가 컵을 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컵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써 이 도리를 깊이 깨달아 들어가면 색즉시공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공은 흔적 없는 자리에서 흔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욕탐이고, 그 욕탐이 실체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이 공이기 때문에 색즉시공 이렇게 말합니다.

색의 근원은 공이라 했을 때 이 공은 연기성을 말합니다. 가령 죽비라는 색의 근원이 왜 공이냐? 스님이 조금 전 연기성이라고 했죠. 죽비가 있고 죽비를 보는 내 욕탐이 부딪혔을 때 이것의 용도에 의한 내 개념이 생긴 것이 ‘죽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컵이건, 남자건, 여자건, 좋든, 싫든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색의 근원은 공이고 공의 나타남이 색이라 한 것입니다. 

 ‘공을 거꾸로 더듬으면 색, 색을 더듬으면 공이라. 자아는 모두 참 성품의 작용이다.’ 이것을 더 직관적 선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일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동국대 2학년 시절쯤, 군에 다녀온 스님이 들어왔는데 고산스님의 상좌였습니다. 이 스님이 어느 날 아침 공양시간에 발우를 펴고는 대중들 앞에서 저보고 ‘~를 잘하세요.’ 하더니 선배 스님들에게도 말을 막 했었는데 평소에 그런 분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점심시간 쯤 같은 방을 쓰는 스님이 방에 들어가 보니 그 스님이 숨을 쉬지 않고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것이죠.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방이 어두운 뒷방인데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절에 들어오기 전에 금강경을 읽고 한 경계를 얻었었고, 대학 4년 동안 ‘율사’라는 별명도 있었을 정도로 그런데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터라 제가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비오는 여름날 밤 누워 있는데, 머리를 산발한 여인이 문을 쓱 열더니 저를 보고 웃기에 누굴 찾느냐고 물었더니 씩 웃고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해서 문을 열고 나가서 누굴 찾느냐고 다시 소리를 쳤는데 기숙사 복도 저 끝에서 다시 씩 웃고 있더군요. 그때 불교방송에 나오는 성본 스님이 동기인데 문을 열고 나오더니 ‘어, 미친년 또 왔네.’라고 하더군요. 비만 오면 머리를 산발해서 기숙사에 와서 아무방의 문을 열고는 씩 웃고 나가곤 했다고 합니다.

  이 색즉시공이 뭐냐 하면 만약 사람이 죽은 방에서라든지, 비오는 날 밤  산발한 여인이 방에 들어왔을 때 귀신이나 괴이한 생각을 하게 되면 색이 공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일상에서 마음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색이 공이 되는 이치가 마음에 욕탐이 없고 마음이 청정하고 떳떳하게 되면 어떤 경계에 있더라도 사물을 왜곡되게 보질 않습니다. 마치 거울이 깨끗하면 있는 그대로 비치는데 티끌이 묻어 있으면 해석을 하게 됩니다. 저게 귀신일까, 뭘까 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색이 공이 되지 않고 색이 색으로서 온갖 장난을 치게 됩니다. 이게 마음 쓰는 요령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젊었고 4년 동안 율사 소임을 했기에 부처님이 와도 쳐다보고 싶은 생각조차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와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데 이것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색이 공이 되려면 마음 바탕이 떳떳하고 밝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세계든지 있는 그대로 비추게 되고 비춤이 끝나고 나면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가 고요해 지는데 그 자리를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을 여의고는 색이 나타날 수도 없지만 색을 여의고는 또 공을 인식할 수 없는 자리기 때문에 이것을 스스로 보게 하기 위해서 견성법을 말하고 마음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듣게 되면 전에 어떤 분이 뭔가 알게 된 것이 무엇인가 궁금해서 물어온 것인데 자기가 알았다는 것이 진짜 맞는지  틀린지는 제대로 알면 스스로 알게 됩니다. 왜냐 가슴이 시원하고 천근이나 되는 짐이 쑥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체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처럼 귀신 상념이 일어나거나 겨우 한 생각 경계에 의해서 분별심이나 시비심이 일어나게 되면 일체가 망상이 아니고 일체가 자기 욕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닫기 전에는 여러분이 남자를 보든 여자를 보든 자기 욕탐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욕심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평가하는 것도 자기욕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을 다스려서 ‘아! 욕심 없이 살아야지.’하는 것은 안 됩니다. 깨달으면 됩니다. 왜냐 자기가 마음을 잘못 쓴 줄 스스로 깨달아야 비로소 마음자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색즉시공’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근원적 법칙의 표현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 하는 것은 하근기들이 아까 얘기한 공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어리적(語理的)으로 이해를 시키기 위한 것인데, 사실은 말은 전부 어리입니다. 

  ‘이 법칙을 체험하는 수행이 중요하다.’ 한마디를 덧붙이면 요전에 날씨가 따뜻해서 뒷산 대밭에 올라갔다가 땅에 싹이 나는 것을 보다가 ‘싹이 난다.’ 하는 순간에 ‘아! 내가 여기서 속았구나.’ 하면서 또 경계가 달라졌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기 마음이 어떻게 흘러나가서 사물을 규정짓는가 알게 되면 이런 것들이 순간순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마음을 닦는다든가 수행을 하는 것에 대한 진보가 있고 그것이 아주 평범하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이 너무 과대 포장을 해서 수행한다는 것을 대단히 뛰어난 어떤 다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여러분 욕심이 먼저 선행이 돼서 그 단어 자체는 여러분 식으로 다시 포장을 해서 이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색즉시공 했을 때 색의 근원은 공임을 설명하는데 어머니 뱃속에 여러분이 있을 때 어머니가 여러분을 키운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자란 것도 아니며, 바로 인연의 힘, 공의 힘이 여러분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공의 파동은 생명의 근원적인 힘이다. 그래서 이 자리를 깨달으면 일체 고통이 없다.’ 왜 이 자리를 깨달으면 일체 고통이 없느냐 하면 일체 고통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느냐를 내면으로 살펴보면 아주 단순하게 자기 한 생각 일으킴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일으킴이 자기 욕탐인 줄만 알게 되도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체 고통이 여기서 사라집니다. 아주 간단한데 수행하는 법이 두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머리로 ‘아! 그렇구나.’ 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이것을 이해했어도 그렇게 하기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편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수행을 안 하는 것입니다.

  ‘자의식으로 ego(몸이 내라는 생각)가 싹트고 ego에 의해서 근원적 생명이 무너질 때’ 여기서 근원적 생명이 무너진다는 것은 생명 자체가 따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사물을 욕탐으로 볼 때 여러분의 참마음을 가리므로 근원적 생명이 무너질 때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고통이 싹틉니다. 왜냐 욕탐으로 보게 되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한번은 헐뜯습니다. 반대로 자기보다 못나 보이면 바로 교만해지고 오만해집니다. 이 ego에 의지해서 세상을 살기 때문에 고통이라 하는 것입니다. 도를 깨닫는 것은 이것을 기약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과 성실히 했을 때 어느 날 스님의 법문이나 내면의 생명의 작용에 의해서 툭하고 ‘아! 내가 여태 이렇게 마음을 썼구나.’ 하고 그 마음이 탁 쉬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을 쓸 때 자기가 구태여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쓸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냥 자기가 쓰는 마음이 보이거든요. 그렇게 마음이 일어나려 하면 문득 쉬는 것입니다. 이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위빠사나가 관찰인데, 선에서는 하나하나 분석 관찰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분석하는 놈이 아직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몰록 뛰어넘는 것을 말하기에 선에서는 ‘한번 뛰어넘어서 여래의 땅에 들어간다.(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의식’이란 게 뭘까? 기독경에 보면 하나님이 에덴 동상을 만들고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니까 그것에 대한 욕탐이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 되었는데 유일하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생겼고 그것마저도 만족 시키려는 욕구가 생김으로써 그것이 최초의 무명인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기독경에서는 선과 악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인류의 타락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기독교인이 제대로 기독경을 배운다면 선악을 따지면 안 됩니다. 왜냐 그것은 이미 타락이니까. 그런데 불교입장에서는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이미 내 입장, 내 주관, 내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는 게 나타나거든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자기의 욕탐을 본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본 세계입니다. 그래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 이전의 낙원의 세계로 어떻게 돌아가느냐? 내 입장으로 세계를 보는 것을 쉬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하고 분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무심하고 분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무심하지 못하고 분별하기 이전의 내 마음 자리를 한번이라도 맛보라고 해서 그래서 깨달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깨닫기 전까지는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욕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TV를 보면 부잣집 여인이 자기 자식을 인형처럼 키우는데 나중에는 자식들이 부모에게 반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겁니다. 자기욕심으로 상대방을 보게 되니 상대방 욕심하고 부딪히게 되는 것이지요. 아담과 이브가 타락을 한 것은 바로 자기라는 입장에서 사물을 봤기 때문에 타락을 한 것입니다. 선악 이전에 ‘나’라는 ego가 있습니다. ego는 무명에 의해 나온 것이고 그래서 편안하고 행복한 세계에서 축출당한 것인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심으로 다스려야 된다고 한 것이고 그런데 무심이 쉬운 것이 아니라서 이해도 할 수 없으니까 우선에 그것을 맛을 보라해서 불교에서 모든 것에 우선해서 선악에 물들기 이전을 깨달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공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와 어긋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색즉시공’을 한 이유는, 범부는 눈앞에 있는 것을 욕탐으로 보는데, 그 욕탐을 쉬어야하기에 먼저 공을 얘기하여, 색이 공하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나를 주장하게 되면 내 욕탐이 자동적으로 발동하고 그러면 세계는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두 가지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무심을 증득하게 되면 ‘눈은 색을 능히 보지 못하고 다만 진공이 능히 보고, 귀는 소리를 능히 듣지 못하고 다만 진공이 능히 듣고, 코는 냄새를 능히 맡지 못하고 다만 진공이 능히 맡고, 혀는 능히 말하지 못하고 진공이 능히 말하고, 몸은 스스로 감촉하지 못하고 진공이 감촉하고, 발은 스스로 걷지 못하고 다만 진공이 능히 걷고, 손은 스스로 쥐지 못하고 다만 진공이 쥔다.’

진공이 능히 보고 듣고 맡고 감촉하고 걷고 쥔다는 것은 욕탐으로 여러분이 사물을 보지 않고 마음을 쓸 때의 상태를 설명한 것입니다. 진공을 다른 말로 무심이라 할 수 있겠죠. 무심이란 내 욕구 없이 사물을 본다는 것인데,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앞의 예처럼 기숙사에서 비오는 날 기숙사에 산발한 여자가 들어와 식 웃는 것을 보면 내 욕탐에 의해 고통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경계에 대해서 욕탐이 없으면 경계가 비치는 대로 반응을 합니다. 문을 여니까 누굴 찾아왔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고통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큰 고통이 생사의 고통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원인이 사물을 볼 때 욕탐으로 보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알지 못하면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순수하고 깨끗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결국 순수하다는 욕탐,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일 거라는 생각으로 그 속에 물들여져서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면 생사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색이 공인 줄 알면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공인 것을 아는 것이 소승 아라한인데 거기서 끝나게 되면 ‘깨달아 보니 일체가 꿈이고 쓸데없다.’ 이렇게 되어 일체 세상 사람이 사는 것을 부정해 버리는데 이것을 공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공이 곧 색이 됩니다. 공즉시색이 됩니다,

  ‘색을 색이라고 하면 참색이 아니다.’-색은 스스로 색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스스로 자기 욕탐에 맞춰 어떤 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라 하는 것도 색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색을 색이라 하면 참색이 아닌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다.’ 라고 해놓고 그 다음은 그 망상을 깨뜨리기 위해 ‘산은 산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아라한까지 깨닫는 단계고 대보살들은 다시 ‘산은 산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공을 공이라고 하면 참공이 아니다.’-그런데 소승은 공을 공이라고 하는 여기에 빠져 버립니다. 그래서 공부를 할수록 산속에 숨고 고귀한 명예욕에 떨어집니다. 제 도반을 몇몇 만나보면 공부를 별로 안 한 것 같은데 본인은 대단한 도인으로 착각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공에 떨어진 것입니다.

  옛날에 반산 보적 선사라고 계셨는데 이 스님의 제자가 포대화상입니다. 포대화상은 원하는 것을 자루 속에서 다 끄집어내어 준다고 했는데 미륵 부처의 화현이라고 합니다. 반산 보적 선사가 두 차례에 걸쳐 도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루 종일 방안에서 참선만하다가 저자거리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어느 사람이 여주인한테 고기를 주문해서 받아보니 자기 맘에 안 들었던지 좋은 고기는 없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여주인이 언짢아서 남편에게 ‘어떤 것이 좋은 고기냐?’ 하고 물었는데, 남편이 ‘어떤 것인들 좋은 고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소리를 듣고 스님이 마음이 탁 쉬어 버렸습니다. 무심지를 체득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해야 됩니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면 일단 입문구, 마음자리의 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스님이 마음을 깨닫고 난 뒤 어느 날 다시 산에 오르다가 상여행렬을 만났습니다. 상두군이 상여 소리로 ‘북망산이 어디 매냐, 인제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이 멀고먼데 지금 어디까지 가고 있느냐’ 하고 죽은 고인에게 묻는 소리에 따라가는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 하는 소리를 하는 순간 다시 홀연히 마음을 깨달았었습니다.

  앞에 깨달은 것과 뒤에 깨달은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것은 마음의 체성을, 뒤에 것은 마음의 작용을 깨달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지금 어디가고 있냐고 물었는데 상주가 ‘아이고’ 하는 소리를 듣고 반산 보적선사는 공에서 빠져 나온 것입니다. 대개 마음을 닦게 되면 처음엔 공에 떨어지게 되거든. 이것이 공즉시색인 것입니다. 공이 곧 색인 도리를 알지 못하면 공부하다 모두 귀신 굴에 떨어집니다. 일 없고 고요함에 빠져서는 스스로 큰 공부했다고 헛소리를 하는데, 거기까지도 알음알이가 들어간 것임을 본인이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 마음이 편하고 시원하니까. 그런데 자유롭진 못합니다.

그래서 옛 스님은 성문(공을 깨달은 사람)은 숲속에 있어도 마구니가 틈을 보는데 보살은 저자거리에 있어도 마구니가 틈을 못 본다고 했습니다.

  옛날 어느 큰 스님이 우물가에 떨어진 쌀알을 보고 누가 이랬냐하고 주우려 하는데 웬 노인이 나타나 절을 하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절을 수호하는 토지신인데 십년동안 스님을 찾다가 오늘 처음 뵙는다고 했습니다. 이 스님이 쌀에 대해 한 생각 일으킨 순간 토지신이 스님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귀신한테 그렇게 띄는 것입니다. 만약 아까 기숙사에서 귀신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귀신이 나를 봤을 것이고 꿈속에도 나타나고 현실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한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무심자리에 멈추어 있으면 공동묘지에서 잠을 자더라도 귀신이 나를 못 봅니다. 이것이 공즉시색입니다.

  ‘일러봐라.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여러분 마음자리에 체성도 설명했고 작용도 설명했는데 도대체 이게 뭘까? 모를 때는 그 모르는 마음을 끌고서 가는 것을 화두라 합니다. 어느 한 보살이 몇 번 법문을 듣고서는 자기 남편과 상의해 보고는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했었는데, 제가 답을 가르쳐 줄 리가 없지만 그런 사람은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 한 생각으로 끌고 가다 보면 문득 욕심으로 보던 경계가 사라지게 되고 마음이 ‘아! 이게 내 마음인가.’ 하게 되는데 그래도 아직은 한 방망이를 더 맞아야 됩니다. 비어 없음만 알고 작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큰스님에게 고관대작이 와서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큰스님이 가만히 있었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못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자가 ‘할’을 했는데 큰스님이 지금 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자가 ‘먼저 정으로 묶고 혜로써 뽑아 버립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깨달으려면 먼저 고요함이라는 정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도는 아닙니다. 그다음 ‘혜’, 작용으로써 그 마음을 본성을 확연히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조사구라 하는 것인데 수행자들끼리 토론하면 상대방 경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러보라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온몸이 통체로 이것이고 전신이 모두 이것이다.’ 마음을 깨닫게 되면 이게 그대로 드러납니다. 스님이 평생 작게는 여러 번 크게는 세 번을 깨달았습니다. 최초는 고등학교 때 금강경을 보고 마음의 본성을 처음 깨달았고, 두 번째는 대학 1학년 쯤 남해 보리암에서 일체종지를 얻게 하리라 하고 관음기도를 하는 도중 누가 능엄경을 읽는데 ‘마음도 아니고’하는 그 소리를 듣고 천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깨달았고, 그 후 너무 쉽게 알아버려서 도가 별거 아닌 것 같아 별로 안 닦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후회가 되어 이 자리에서 10년 정도 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산에 오르다 땅속에서 풀이 나는 것을 보는 순간 번뜩하면서, 비로소 천하가 태평해졌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니까 ‘전신이 모두 이것이다.’ 라는 것이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옛 스님이 ‘산색문수안(山色文殊眼)’ 이라 했는데 봄날에 연두색 잎이 피고 온산이 푸르게 장식되는 것이 문수보살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도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두두물물이 모두 문수보살의 안목인데 여러분들 눈에는 욕탐으로 보니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라 하여,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관세음보살의 귀라고 했습니다. 능엄경에 보면 도를 닦는 가장 빠른 방법이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이 있는데 소리가 들리면 그 듣는 자리를 비춰보는 방법으로 이것을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합니다. 그것이 관세음보살이 도를 닦는 방법입니다. 여러분들도 스님이 하는 얘기가 잘 이해되지 않으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부르는 놈을 비추어 듣는 연습을 하시길 바랍니다. 옛날 금봉스님이 ‘산색문수안(山色文殊眼),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 금일세연진(今日世緣盡:오늘 내가 세상의 인연을 다 했는데), 의구수동류(依舊水東流: 옛것에 의지하여 물은 동쪽으로 흐르더라)’  이 게송을 읊고서 해인사 계곡에서 앉은 채로 돌아가셨는데 이 동쪽으로 흐르는 도리를 알게 되면 조사의 구를 깨닫게 됩니다.

  ‘공즉시색’, 공이 곧 색이 되는 이것을 알아야 고요하다, 비었다, 깨끗하다는 잡다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에 떨어진 소승 아라한들이 대승보살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공즉시색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일체중생 속에 어우러져 살면서도 귀신 눈에도 안 띕니다. 이런 사람은 내다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거나 부처님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같이 살아가는 이웃사람 정도로 인식하지, 대도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기에 귀신 눈에 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즉시색의 도리입니다.

  ‘공이 어떻게 색이 되는가?’ 물론 사물을 볼 때 무심으로 보게 되면 공이 곧 색이고, 색이 곧 공이 되는 도리지만, 수행자 입장에서 공을 한번 맛보게 되면 그것을 떨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이렇게 안락하고, 행복하고, 만족한데 왜 시끄러이 법문하고 시비에 말릴 필요가 있는가 하는 공에 떨어지게 됩니다. 근데 공즉시색을 알게 되면 삶 자체가 공이면서 색인 것을 알게 됩니다.

어제 제천에 절터를 닦기 위해 고사를 지내러 갔는데 젊은 시절 같았으면 고사를 지내지 않고 죽비 세 번치고 내려왔을 텐데, 나이를 좀 먹어서는 신중하게 처리를 하고 싶어서 주변 스님에게 집을 새로 신축하려면 어떡하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화엄신중’에게 불공을 드리고 ‘산신청’을 해서 불공을 드리라고 하기에 제가 웃었는데 그 스님이 ‘이게 그래도 묘한 법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산에 올라갔다가 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이건 해야 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도리를 설명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 바탕을 깨닫게 되면 마음이 텅 비고, 고요하고, 깨끗하고 하는 이런 언어조차도 붙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거긴 일 없는 자리거든, 그런데 거기에 주저앉게 되면 이것을 귀신 굴에 빠졌다고 합니다. 아까 말한 그 절터에서 염불을 했는데 염불 내용을 보니 하늘에서 팔부신장, 토지신, 산신을 다 불러냈는데 이게 곧 공이 색이 되는 도리입니다. 마음 바탕 입장에서는 한 물건도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데, 욕탐, 즉 필요에 의해서 팔부신장을 맘에 일으키는 순간에 팔부신장이 딱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불공에서 거불이라 해서 부처님을 청하는데 청하기 전에는 부처가 없지만, 청하게 되면 한 생각, 즉 이것을 진성연기라 하는데 참 성품에서 연기법에 의해서 한 조각, 한 생각이 일어나 만약 부처를 염하면 부처가 일어나고, 화엄신중을 염하면 화엄신중이 일어나며, 산신을 염하면 산신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없는 자리에서 내가 일으키는 대로 형상 즉 색으로 인식이 됩니다. 이것이 공이 색이 되는 도리입니다. 이게 보살들이 일체중생들을 교화할 때 방편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출가해서 35여년 만에 처음으로 화엄신중과 산신을 청해 축원을 해봤습니다. 그 전에는 나랑 화엄신중이 별 관계가 없었고 있어도 제 호위병 정도로 생각했는데 집을 짓기 위해 내가 필요할 때는 나보다 힘이 더 세더군요. 이게 현상계인데 현상계 일을 할 땐 현상계의 법칙에 따라서 마음을 쓸 수 있어야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공즉시색’ 할 때 아까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라는 물음에 입을 다물고 침묵한 것은 ‘공’인데 이것을 중생이 못 알아들으니까, 옆에 있던 제자가 할을 해서 깨닫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으로써 번뇌 욕탐을 먼저 쉬게 한 다음 할로서 지혜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적용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화엄신중과 산신을 청해 염불을 한 것이 진성연기란 것입니다. 한 생각도 없는 자리에서 한 생각이 홀연히 일어나면서 사바세계가 있는 일체 삶과 만상이 거기서 현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현상을 분리해서 수행을 하게 되면 반쪽 수행이 되고 현상이 곧 진리인 것을 알게 되면 현상을 살면서도 그것이 곧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보살은 일체 수행과 어울려 살면서도 물들지 않습니다. 그 도리를 설명한 것이 공즉시색입니다.

  ‘제불보살 시방세계가 하나의 공계’- 기본적으로 수행자는 무심이니 공의 마음을 갖고 삽니다. 그러니까 공계라고 합니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일체세간이 공계, 비어 없는 세계이고, 중생은 모양에 집착해서 인연이 생기면 있다하고 인연이 없으면 없다고 합니다. 즉 있고 없음에 의지해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중생의 업력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분별을 해서 이것에 의해 생사를 따르는 것입니다.

  ‘알겠는가? 공도 없고 색도 없도다.’ 그저께 산신청 염불할 때는 공도 없고 색도 없는 경계인데 아무나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이 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 여러분이 할 때는 산신에 대한 욕탐이 있기 때문에, 즉 산신은 높은 사람이고, 나는 낮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산신은 산신이고 여러분은 여러분입니다. 만약 도를 요달한 사람이 할 경우에는 그냥 내 한 생각 연기에 의해서 나타나고, 내 필요에 의해서 쓰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이 틀리는 것입니다.

  ‘내재하는 이 마음은 하늘처럼 순수하여 붉은 구름, 하얀 구름 저절로 사라진다. 어디에도 두루 있는 이 마음은 허공 같아 태어나지 않는 영역과 나눠지지 않나니.’ 태어나지 않는 영역과 나눠지지 않았으니 나도 난바가 없습니다. 옛날 효봉 스님이 이승만 대통령이 스님의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을 때 나도 난 바가 없다고 한 대답과 같은 도리입니다.

  ‘삼계로 윤회하는 근원을 잘라버린다.’ 만약 그 도리를 알게 되면 생사심이 끊어지니 저절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윤회하던 근원이 잘라진다는 겁니다.

  ‘색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것.’ 여러분들이 색을 보는 것은 여러분들의 욕심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그 자체로 마음이 아니고 색으로 인한 마음인 것이다. 색은 그 자체가 색이 아니고 마음으로 인한 색인 것이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을 보는 것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옛날 극장에 가면 영사막 위로 수많은 인생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영상이 끝나면 영사막만 남게 됩니다. 그 영사막은 우리의 본래모습이고, 그것을 스쳐간 수많은 영상들은 여러분들이 여태껏 써왔던 업력에 의해 현상화 된, 연기성에 의해 현상화 되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무상하고, 무아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공한 것도 그러한 차원이고, 그렇다고 우리의 본성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 있는 영화의 내용인 유무는 사라지지만 유무에 속한 적 없는 하얀 영사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하얀 영사막인 상태로 존재할 때의 마음자리를 체득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들이 뭔가 하는 것이 ‘이 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만 얘기한 것이 아니고 나머지 수·상·행·식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니까 색이 그러하면 색에 대해 일어나는 느낌, 상상, 의지, 그에 의한 사물에 대해 완벽하게 알았다는 ‘식’ 분별력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깨닫기 전에는 다 색·수·상·행·식을 자기로 알고, 자기 생각으로 알고, 그에 의지해서 살았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일지라도 결국 꿈속에서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괴롭고 즐거움의 감수도, 감수에 의한 상념도, 상념에 의한 현행과 의지와 충동도, 이것을 종합한 인식과 지식도 근원적인 공의 표상이다.’ 앞의 색즉시공에서는 일체를 다 끊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바탕의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맛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은 그 맛본 것에 의해서 어떤 경계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므로 색·수·상·행·식을 써도 이것이 공의 표현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보살의 경지입니다.

  ‘수·상·행·식은 생명의 의식과 정신작용이다.’ 이것은 의타기성에 의해 만들어진 작용입니다. 이 의타기성은 전생의 업력만큼의 의타기성입니다. 이것을 염의타기성이라 합니다. 부처님도 의타기성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태어나서 밥도 먹고, 세상도 보고 하는데 이것은 정의타기성이라 합니다. 의타기성은 인연에 의해 사물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인데, 부처와 중생이 여기서 갈라집니다. 중생은 의타기성에다 자기 욕탐을 붙여서 사물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으로 흘러버립니다. 그런데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이 사라지면 의타기성 그자체가 원성실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현상계가 바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고, 중생을 어둡게 만듭니다. 원성실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삶 자체가 원성실성입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다 변계소집성을 덧 씌어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욕심으로 보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한 것은 바로 현상이 곧 진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방불교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현상이 진리인 법이 없습니다. 현상은 무상하고 무아하고 공한 것이라 색즉시공이 맞습니다. 그러나 공즉시색은 맞지 않습니다.

  아기가 고와 락을 느끼고(수,) 느낌에 따라 좋고 싫은 이미지를 형성하고(상), 이미지에 따라 취하고 버리려는 자기의지와 자아의식이 형성되고(행), 자의식과 더불어 주위환경으로부터 지식을 얻고 선악의 구별을 하므로 비로소 판단력이 생기는데(식),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이대로 써도 괜찮은데 중생은 같은 오온을 써도 물든 마음을 쓰기에 이것이 업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온 자체가 기능적인 것이므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능적인 것인데 여기서 욕탐이나 무명에 의해서 생사업을 만드는 것은 중생이고, 기능적인 것을 기능적으로 쓰는 것은 도를 닦거나 깨달은 수행인인 것입니다. 같은 산신을 불러도 기능으로써 부르는 것은 도인이 하는 것이고, 중생은 산신을 불러서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을 똑같이 써도 중생이 쓰는 오온은 불행을 형성하는 오온이 됩니다. 

고(苦), 고통이 왜 생기느냐? 생명의 잘못된 조건으로 생기는데 그럼으로써 노(怒), 분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의식을 형성시키고, 자의식을 형성시키면 증오하게 되고, 그러면 마음이 삐뚤어지고, 그다음은 악하게 되고, 악의업(惡意業)을 만들게 되어 남을 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해하면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고통을 주게 되면 타인으로부터 그 고통이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생명의 잘못된 조건으로써 오온을 쓰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행복을 형성하는 오온은 생명의 바른 조건인데, 부처님은 생명의 바른 조건으로 사는 것을 팔정도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살면 오온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바른 조건이 있게 되면 희(喜), 기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올바른 정신으로 키워져서 선하게 되고, 그러면 행동이 올바르게 되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게 되고 그 기쁨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으로 반야심경을 가르칠 때 쓰는 경우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직감적으로 ‘아! 내가 한 생각 이것이 망념이구나.’하고 바로 깨달아야합니다.

  ‘만약 생사를 끊고 윤회를 쉬고자한다면 한 뿌리를 환하게 비추어라. 4대 오온이 깨끗하여 다 벗어지면 모든 것이 텅 비어서 나란 것이 없게 되어 그 자리에서 바로 공적하게 되리라.’ 결국 생사윤회를 끊으려면 마음의 공성을 깨닫지 않고는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많은 공덕을 짓고 보시를 해도 유루법입니다. 현상계의 복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부처님이 누리는 무위의 열반락은 누릴 수가 없습니다. 또 그런 것들은 생사를 끊을 수 있는 힘조차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사 쪽으로 계속 마음을 쓰게 하는 그 본체가 자아인데, 그 자아는 오온이 올바른 도에서 떨어진 곳에서 생기는 인간의식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라고 하는 이것 자체가 우리의 본성을 몰랐을 때 나타나는 불성의 그림자, 즉 본성의 작용을 자기라고 착각했을 때 일으키는 인간의식인 것입니다. 고양이는 고양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의식을 지키려고 전쟁도하고 싸움도하고 온갖 짓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확고히 주장하면 광겁의 윤회가 발생한다.’ 오온이 공함으로써 관자재보살이 일체고액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오온만 항복시킬 수만 있다면 모든 고액이 의지할 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의식이 많은 사람은 주위를 불쾌하게 하고 추악한 마음을 형성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잘 보지 못해도 남이 일으키는 자의식은 잘 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보살을 데리고 원주에 항아리 파는 가게에 갔다가 일을 보고 오는 도중에 그 보살이 도자기 파는 여주인이 자기 눈에는 아주 내숭쟁이로 보인다고 했었는데 자기하고 아무관계도 없는 사람을 왜 내숭쟁이로 봤을까요? 그것이 자의식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써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업력을 쌓고 있습니다. 자의식은 어리석어서 자기마음의 추악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은 자랄수록 방자해지고 성격이 삐뚤어져서 정신연령이 유치해진다. 결국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자아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의 조건 그 자체를 파괴한다.’ 존재의 조건 그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은 우리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욕할 때 상대방의 존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말인데, 사실은 내가 남을 욕하려면 내 맘에서 욕하는 개념이 먼저 떠오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먼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려면 내 맘에서 남을 칭찬하려는 개념이 먼저 떠올라야 됩니다. 그 개념을 남에게 입으로 말한 것일 뿐이지, 사실은 자기가 먼저 받은 것입니다.

  ‘이 자의식을 소멸하는 것이 참선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수행을 안 하게 되면 법문을 수없이 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법문을 듣고 제대로 깨달았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되는데, 존경받는다는 것은 내가 절에 많이 다니고, 오래 다니고, 스님과 많이 안다는 것으로는 존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건 현상계의 일일뿐입니다. 존경의 대상인 것은 내가 나를 비워서 상대방이 나로 인해 편안하게 될 수 있을 때 존경의 대상이 되는데 도를 닦으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자연히 나오고 그걸 지혜라 합니다. 수행을 제대로 하게 되면 자기가 어리석게 마음 쓴 것을 간파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얼마 전 어느 보살이 자기가 평생 속아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러한 것을 조금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한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만 들어봐도 이 사람이 뭘 봤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 중에 생명의 근원적 작용이 일어나고,’ 여기서 생명의 근원적 작용은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마음의 지혜로써 일어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수행을 제대로 하게 되면 몸의 기혈이 훈훈하게 일어나서 몸과 마음이 화평하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근원적 작용입니다.

  ‘거기서 생명을 올바르게 유지하려는 작용이 생긴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를 보지 남을 보지 않습니다. 남을 볼 틈이 없습니다. 자기가 남에게 한 행동을 보고 자기 마음이 일으킨 생각이 불법에 맞는가를 보게 되므로 자연히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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