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강 시제법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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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제법이란 것은 모든 존재와 현상인데 이것을 세분해서 구체적으로 불교에서는 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얘기합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법과 물질적인 법 또는 보는 법과 보이는 법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보는 법과 보이는 법,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이것을 통틀어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정신적인 법을 여러분의 마음이라 한다면 보이는 법은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갖고 인식한 내용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 수행을 하거나 관을 통해 마음이나 사물을 관찰하면 그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는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거짓 실체인데, 이러한 것들을 보통 중생들은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거기에 마음이 묶여 수많은 업력을 만들어 다시 생사를 받기 때문에 수행을 해야 하고, 생사를 뛰어넘으려면 제법의 공상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제법의 공상을 안으로 비춰서 수행하게 되면 견성법이라 해서 성품을 본다고 했고, 밖으로 비춰서 수행하게 되면 소승에서 하는 연기법에 의한 수행법이 됩니다. 연기법이라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해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사물의 본성을 볼 때 연기법으로 관찰하게 되면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제법이란 것은 존재와 그 존재를 인식하는 마음, 이 두 가지가 다 제법에 속하는데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보통 소승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형상에 집착을 하므로 사물을 관찰할 때는 인연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있는 남자가 있다하더라도 20~30년 후 지금의 내가 아름답거나 멋있다고 해서 집착했던 그 대상이 필경에는 허물어져 사라지는 것을 관찰해서 마음이 형상에 얽매인 것을 소멸시키게 되면 제법공상 중 객관적인 세계가 공한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다음은 여러분들이 바깥 것에는 집착을 안 해도 자기라는 것에는 끊임없이 집착하게 되는데 그 집착도 수행을 깊이 하여 몸을 인식하지 않고, 또 더 들어가게 되면 마음도 놓아버리게 되는 경계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평생 자기가 내 마음 내 마음 했던 것이 사실은 몸에 의지해서 일어난 연기법이란 것을 알게 되고, 나라는 것에서 마음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 이 제법의 한 부분인 자기 존재 본성에 대해 깨닫게 됨으로써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불교에서 제법이라 했을 때는 몸과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빼놓고는 우리에게 인식되어지는 제법이라는 내용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제법이란 모든 존재현상입니다.
설악산에 봄이 오면 창밖의 연록색이 참 따뜻하고 정겹고 포근하게 느껴지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거나, 좋아하는 맘, 기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마음의 연기를 살펴볼 수 있는데 우리 마음이 좋다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하면 설악산의 풍경들이 여러 가지로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서 설악산이 참 좋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것을 통해서 행복감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감이나 좋다는 것은 결국은 설악산의 풍경에서 나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정작 설악산 자신은 스스로 초록색을 내어서 아름다워 보였다든가 포근해보였다든가 하는 생각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자기 욕구에 맞춰서 봤을 때 욕구에 부합하면 거기에서 행복함이나 좋다는 느낌이 일어나고, 욕구에 맞지 않고 어긋난 풍경이 나타나면 싫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괴롭고 슬픈 느낌 같은 것은 예초에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한 마음의 욕구에 의한 분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이 이것을 잘 관찰하게 되면 자기가 평생 썼던 마음이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이 좋고, 어떤 사람은 싫고, 어떤 것은 행복하고 어떤 것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자기 자신의 욕구에 부합 하는가 부합하지 않는가 하는 입장에서 하는 것이기에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한 것, 또 자기 자신에 관한 것, 여러 가지 것들이 결국은 잠 한번만 깊이 들어도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평가하고, 취하고, 버렸던 모든 것들이 잠 한번 깊이 들면 사라지는 것인데 이러한 이치는 수행하지 않으면 체험이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여러분들이 알아듣는 것 같지만 다시 일상생활에 되돌아와서, 사람을 대할 때 내 입맛에 맞는 가 아닌가 하는 것이 제일 먼저 기준점이 되어 어떤 사람은 좋고, 어떤 사람은 싫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허공에다 꽃을 피워놓고 그 헛꽃 입장에서 또 헛꽃을 보고, 또 다시 헛꽃을 창조하게 됨으로써 이렇게 계속 업력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업력의 결과는 선한 업력을 지었을 땐 천상에 태어나게 되지만 대부분 내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중생의 마음은 선한 행위 보다 악한 행위를 많이 하게 되고, 남에게 기쁨이나 행복을 주기보다 상처를 주는 마음을 더 많이 내기 때문에 몇 생을 윤회하면서 다시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이 삼생을 연달아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대단히 고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오게 되면 스승이나 가르침이 없어도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스스로 알아서 할 줄 압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처음 인간 세상에 온 사람들이라 남의 안목이나 이목 같은 것은 별 관심이 없고 자기 욕심이나 이속을 차리는 행동을 하다 보니 또다시 타락하고 이러한 것들이 연속됨으로써 윤회가 거듭되는 것입니다. 이 윤회의 원인이 제법공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제법의 공상을 알게 되면 매일 저자거리에 나가 사람을 상대하더라도 마음에 한 티끌도 담아두지 않고 저장하지 않으므로 업력이 쌓이지 않아서 천상이나 인간세상 조차도 가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보살이라 하며 이런 사람들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함을 비춰 일체고액을 제도했던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다. 만약 불자로서 수행을 하지 않고 절에 다닌다든가 부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믿는 부처님은 자기 입장에서 자기에게 뭔가 좋은 것을 주는 부처님일 뿐이지 자기의 인격이나 인품, 영혼을 제도하고 인도하는 그런 부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리자야’ 하고 불렀을 때 부르는 그놈, 대답하는 그놈 입장에서 보면 제법이 공한 상이기 때문에 여기서 제법이란 존재와 현상이며 설악산의 풍경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한 것입니다.
제법공상의 ‘공’도 근기에 따라 취득해 들어가는 방법이 다 틀립니다. 범부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 형체가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 공한 모습이고, 소승이나 연각승들에게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인연법에만 속지 않는 것이 소승이 보는 공상입니다. 그런데 대승 보살이 보는 공상은 사물을 볼 때 인연이라는 것도 들어가지 않고 내 마음의 욕구가 없이 또는 어리석음이 없이 사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 상대하고 있는 그대로 펼쳐지기 때문에 시장 네거리에 있어도 한 번도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으로써 무심한 사람의 경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같은 공상이지만 보통 사람, 소승 수행인, 대승 수행인이 인생 무상하다는 것이 각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자기 근기에 따라서 잠깐 잠깐씩 인생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생각 일으키는 순간에 그것이 공한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공이란 존재의 본 모습이다.’ 일체 존재의 본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범부가 보는 존재의 본모습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이고, 소승이 보는 존재의 본모습은 연기하는 것이고, 대승이 보는 존재의 본모습은 본래 공입니다. 왜 본래 공일까요? 산하대지가 있는데 왜 공일까요? 산하대지를 자기욕구에 의해 보지 않으면 산하대지와 내가 하나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기 이전 마음자리에서 산하대지를 보면 그것을 여기서 제법의 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공이라도 이렇게 쓰는 법이 틀리는 것입니다.
존재의 법칙성이라는 것은 한 티끌도 없는 자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두두물물(頭頭物物), 만물을 만들어 내는 법칙성이 있습니다. 그 법칙성이 공의 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공의 자리는 진공(眞空)입니다. 참된 공이라 하는 것은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기 때문에 이것을 둘이 아닌 도리라고 얘기합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법칙 속에서만 존재한다. 즉 연기법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연이 생기는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업을 형성하지만 선과 악에 일찍이 물든 적 없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 선악이 있는데, 마치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가 없으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인선과 악인악과, 산하대지가, 나, 너 이 모두가 그 어떤 한자리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대승에서는 모든 것이 의지하고 있는 근원적인 그 한자리를 깨달은 것을 ‘공’을 깨달았다 하고, 소승에서는 비춰지는 그림자는 일정 시간 연기법에 의해 비추면 나타나고 비추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연기법을 깨닫고, 중생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태어난 다음 반드시 죽는다고 해서 그 그림자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윤리는 불교인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의식을 얘기 하는 것, 윤리, 인생, 세계, 진리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진리관, 인생관, 윤리관은 무엇인가? 윤리관이라 하면 인과관이겠죠. 원인대로 결과가 거둬진다 하는 것. 인생관에 있어서 우리 불교만의 고유한 인생관은 우리도 닦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부처님을 둘이 아니게 동격으로 놓고 보는 것입니다. 간화선과 묵조선 수행방법이 있는데 간화선은 깨치면 부처라 하고, 묵조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지금 이 상태가 부처라고 합니다. 간화선에선 화두를 들어서 깨치려고 하는데, 묵조선에서는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에 그것도 아직은 덜 된 소견이라고 합니다. 이게 불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안목이에요. 우리가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고 피조물이라는 견해와는 다른 견해입니다.
제법의 공상 입장에서 보게 되면, 즉 불교적 세계관에서 보게 되면 세계란 중생의 업력이 물질화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를 불교적으로 봤을 땐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이 악하면 그 세계도 악하게 되고 점점 기후가 변하고 음식물, 공기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맑으려면 내가 맑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산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물을 잘 쓰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물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각자가 만들어 낸 세계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산에 살아도 어떤 사람은 곡식이 귀하고 어떤 사람은 곡식이 흔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세계란 자기가 지은 업력만큼 자기한테 영향을 미치는 자기마음이 물질화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법당에 여러 수십 명이 앉아 있지만 각자 누리는 경계는 다 틀립니다. 똑같은 세계라면 똑 같이 누려야 되지만 각자가 다 틀리는데 이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부처님 법에서는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조차도 여러분 업력이 선택한 겁니다. 업력이 뭘까요? 그 자리에 앉아 있겠다고 판단하는 그 마음도 업력입니다. 자기 깜냥만큼 가서 앉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맨 앞에 앉고 어떤 사람은 구석에 앉고 어떤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오고 어떤 사람은 검소하고 그것이 업력입니다. 그 업력이 세계를 만들고 세계를 유지하고 파괴합니다. 매스컴에 조류 독감, 광우병 같은 것들로 시끄러운데 그러한 것들이 옛날엔 없었는데 지금은 왜 있을까요? 몇 천 년 동안 없었는데 인간이 악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게 살면 그 악함이 업력이 되어 인간을 위협하는 물질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게 되면 불자로서 참으로 정밀하고, 겸손하며, 맑게 살려는 노력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든 것까지도 제법의 공상 입장에서 보면 지난밤 꿈속 일입니다. 꿈을 딱 깨 보면 ‘아! 내가 지난밤 악몽을 꿨구나.’ 또는 또 천상세계 살았다 꿈을 깬 사람은 ‘지난 밤 내가 선몽을 꿨구나.’ 라고 할 것입니다.
불교진리관이란 뭘까?
마음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사라지며, 사라지는 그 경계는 언어나 개념, 또는 문자로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런 자리를 터득해서 다시는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만나게 되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제도 할 수 있는 그런 사상, 즉 자기가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함으로써 이 세계를 참으로 깨끗한 국토로 만드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에 대한 용처입니다.
‘운명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고뇌도 과거와 현재 업이 제거되는 과정이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이 있고, 이런 것들이 삼세 입장에서 보면 과거에 지은 업이 현세에 소멸되는 과정에서 우리한테 심리적으로 나타나는 느낌이 고통입니다. 지금 괴로우면 다음 생은 안 괴롭고, 과거에 지은 업장이 소멸되어가고 있으니 희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적극적으로 더 빨리 쉽게 업이 소멸시키기 위해 염불, 기도를 하거나, 복을 짓고 지혜를 닦게 되면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기까진 미치지 못하니까 전생에 내가 업을 지었으면 현생에 뼈 빠지게 고통을 받고 그 다음 생엔 빚진 것이 없으니 새로 시작하는 정도인데, 애석하게도 도나 진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전생에 지은 업이 소멸되면서 또 새로운 업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괴로울수록 수행 정진을 놓지 않으면 다음 생에는 지금보다 나아진 삶이 되겠지만, 중생들은 지금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다음 생에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혹한 중생은 괴로움이 자기 잘못이 아니고 세상이 잘못됐고 남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세상인데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데 세상이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자기 욕탐을 전생에 함부로 썼기 때문에 제어 되지 않는 그것이 남한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게 되는데, 그러한 것들이 큰 죄라든가 힘든 고통인줄 알려면 이생에서 자기가 맛을 봐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끝내면 자각이 안 되니까 다음 생에 또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부지런히 도를 닦아야 되는 것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운명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고뇌도 과거와 현재 업이 제거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희망적이긴 하지만 업을 새로이 짓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법공상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선방이나 참선 수행하는 도량에서 마구니라고 하는 이유가 깨닫지 못하고 쓴 마음은 어떻게든지 업을 마음에다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을 지켜내면 과거의 카르마는 소멸하게 된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음이 나타나는 경계에 물들지 않도록 일념으로 수행 정진하는 것입니다.
‘인간 운명의 좋고 나쁨은 인간의 태도가 존재의 법칙에 들어맞는가에 있다.’ 존재의 법칙은 제법의 공상, 즉 제법은 어차피 비어 없는 자리인데 지난 밤 꿈속과 같이 우리 안에 들어있던 엄청난 양의 무명과 탐진치가 물질화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태도는 현재의 조건을 만들고 현재의 태도는 내세의 조건을 만든다.’ 이런 것들을 알게 되면 시간이 없어서 수행을 못 하겠다든가 좀 나이가 들어 정신 차려서 공부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가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공부를 19살 때부터 했는데 젊어서 10년 한 공부가 나이 들어 30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대충 느낄 겁니다.
‘제법의 공상은 업의 법칙성을 말한 것입니다.’ 제법의 공상을 모를 때는 업의 법칙이 우리를 얽어 매기 때문에, 반드시 ‘사리자야?’ 할 때 제법의 공상을 알라는 뜻입니다.
아래 게송은 티벳의 밀라레빠 성자가 지은 게송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 덧없고 무상하여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하리.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내 나이 어렸고
내가 성인되니 그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하리.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하리.
어머니 살아계실 때 나는 집을 떠나 있었고
나 이제 돌아오니 그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 못하리.
나는 불멸의 행복 찾아 수행하리.
티벳의 성자였던 밀라레빠 성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아버님이 물려준 재산을 큰아버지와 친척들이 다 뺏고 가족들을 종처럼 부리고 핍박하자 증오에 찬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라는 부탁을 받고 인도 전국을 돌아다니다 흑마술을 배워 와서 자기 친척 약 100여명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갚기 전에는 원수를 갚는다는 그 망상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생각 하지 않다가 원수를 갚고 나니 공허감과 함께 아무 할 일이 없어지게 되자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도 무섭고 괴롭고 지옥에 갈 행동임을 알고 스승을 찾아 헤매다가 그 당시 마르파(Marpa)라는 뛰어난 수행자를 만나 도를 깨치고 날아다니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와보니 자기한테 원수를 갚아 달라 했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자기 아버지는 자기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는데 도를 깨달은 입장에서 관조해보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나이가 어려 세상사를 의논할 수 없었는데 자기가 어른이 되니까 이미 세상에 없고, 또 원수를 갚아 달라하고, 미워하고, 저주했던 그 어머니도 자기가 도를 통하고 와보니 이미 세상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밀라레빠 입장에서는 지난 밤 꿈속 일이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도를 깨달은 입장에서 이런 꿈속 일을 다시는 휩쓸려야 되지 않기 때문에, 생하고 멸함에서 벗어난 불멸의 수행을 찾고 행복을 찾아 수행하겠다고 자기가 게송을 읊은 것인데, 우리 입장에서도 주위에 보면 일가친척, 형제, 자매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때는 그랬어.’ 이렇게 되고 그 한마디면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어.’ 했을 때 10년 동안 수행을 했던 사람 같으면 앞으로 ‘그때는 그랬어.’에 속지 않을 텐데 중생은 어리석으니 지난 세월을 보면 ‘그래.’ 해 놓고도 눈앞에 경계가 나타나면 다시 속아버립니다.
어차피 인간은 서로 영원히 만나고 영원히 사귈 수 없습니다. 스님도 법문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10년 이상 스님을 따라와서 법을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몇 명 있는 분들은 특이한 사람들인데 이것은 상대가 좋고 나쁨이 아니고 인연법입니다. 인간 세상은 어차피 자기업력만큼 필요한 사람을 만났다가 업력이 다하면 흩어집니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은 인생 8고 중 애별리고에 해당된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이 고통이란 것을 알고 제법의 공상을 이해해서 깨닫자, 수행하자,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도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조용히 앉아 돌이켜 생각하라. 이 오온을 비추어 보면 참으로 아무것도 있는 바가 없도다. 털끝만큼도 깨닫고 닦을 것이 있다면 다시 생사에 빠지리.’ 조용히 돌이켜 생각하라 했는데 이것은 먼저 이치적으로 분별을 하기 위해 생각하라 한 것이지 도는 생각해서 닦는 것이 아닙니다. 오온을 비춰보라 했는데 이 오온은 몸과 마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몸뚱이를 비춰보면 어렸을 때 그 포동포동하고 밝고 영리했던 몸이 이미 없어졌습니다. 또 이 몸에 의지해서 받았던 느낌, 생각 또 그 생각을 의지해서 끌고 나가려 했던 욕구, 그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새로운 지식, 즉 식인데 참으로 아무것도 있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을 스님이 한마디 노래로 정의해보면 조용필의 단발머리 노래 맨 끝에 가면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삼법인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월이 무상하고, 그 소녀가 없어졌으니 무아며, 밉다는 마음이 일어났으니 고통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을 얘기한 것인데 무상, 무아, 고. 마음이 좀 허탈하게 되면 ‘인생사가 원래 이런 것이구나!’ 하고 달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기에 빠져 우울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 포동포동 하고 초롱초롱 반짝반짝 했던 그 소녀가 아내가 되어 옆에 있어도 없어진 것이고, 그 세월이 미운 것입니다. 이것이 삼법인입니다. 제행은 무상하고 제법은 무아며 일체가 고임이 인생의 실상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수행을 안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긴데 여러분들이 참선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내면으로 정밀하게 향하면 일상사에서 자기가 일으켰던 미세한 생각까지도 하나하나가 탁탁 눈치를 채게 되는데, 그 입장에서 보면 뭘 깨닫는다, 깨달았다 하는 것까지도 내 입맛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맘이 뭔가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참 미묘한 얘기로써 수행을 안 하면 백날 얘기해도 모르고 수행을 꾸준히 하면 지금 스님이 한 얘기를 알게 되어 ‘털끝만큼도 깨닫고 닦을 것이 있으면 다시 생사에 빠지리.’ 하는 이 말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이기에 닦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물들지 않게만 한다는 입장에서 마음을 비추어 쉬는 것이 묵조 수행입니다. 그런데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잘못되면 공에 떨어지고, 귀신굴에 떨어지는 병폐가 지대함으로 인해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화두선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사명스님이 서산스님이 묘향산의 유명한 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다루어본다고 서산스님을 찾아가 두 가지를 물어봤는데, 이것은 선구에서는 반드시 마음을 깨달으려면 어떤 개념이나 일상적인 사량 분별로써 사물을 이해하려면 마음이 멀어지므로 절대 깨달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질문 자체도 사량이나 분별로 풀 수 있는 문제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는 사명스님이 서산 스님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가다가는 갑자기 한쪽 발은 방안에 다른 한 발은 밖에 놓고 서서는 서산스님께 ‘제가 방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나가겠습니까?’하고 물었는데, 이에 서산 스님은 날아가는 새를 손으로 잡아가지고 ‘내가 이 새를 죽이겠느냐? 아니면 살려 보내겠느냐?’ 라고 하면서 장군 멍군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서산스님을 당할 수가 없으니까 다시 능엄경에 있는 얘기를 물어보았습니다. 불교에선 스님이 얘기했듯이 이 우주를 우리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마음이 우주를 만들어 낼 때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업력만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명스님이 이것을 딱 들어서 서산스님께
‘이미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만들어졌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그럴듯한 질문이죠. 왜냐하면 이 세계는 마음이 선하거나 악한 것에 의해 영향 받아 만들어 졌는데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데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만들어졌는가 하고 물어보니 서산스님이 큰소리로
‘청정본연한데 어디서 산하대지를 봤느냐?’하고 되물었는데 사명스님이 여기서 깨닫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답을 하게 되면 깨달았다거나, 닦을 것이 있다거나, 생사라고 하는 것이 붙을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여러분들이 비로소 어느 누구도 자기를 속인 적 없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속인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비로소 마음을 닦을 수 있습니다. 책을 많이 보고 법문을 많이 들어서 스님이 ‘아!’ 하면, ‘어!’ 하며 꿰뚫어 다 알아도 자기 스스로가 물을 먹어봐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본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시제법공상’은 제법의 공한 모습입니다. 이 공상은 첫 번째 불생불멸입니다, 우리 보통 중생들은 사물을 이해하는데 시간적, 공간적, 질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중생이 의지하고 있는 그것을 다 빼앗아버리는 것으로써 이것을 임제삼구에서는 경계도 빼앗고, 사람도 빼앗는 수법을 교리적으로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중생이 되는 이유가 경계도 갖고 사람도 가지려고 하는 그것이 중생이 되는 연입니다. 중생에서 벗어나게 되려면, 부처가 되려면 경계도 놓아버리고 사람도 놓아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얘기합니다. 놓아버리는 방법이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가 다 틀립니다. 교리적으로 ‘불생불멸’ 함으로써 시간적인 집착을 놓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내 나이 는 여러분 나이가 아니고 여러분 망상의 나이입니다. 그 망상 때문에 몸을 만들었으므로 엄격히 얘기해서 여러분이 꿈꾸는 나이, 즉 이생에 와서 꿈꾼 나이가 지금 나이입니다. 옛날 스님이 젊었을 때 당시 아흔이 넘은 수덕사 혜암 노스님께 찾아가서 첫 번째 한 질문이 스님의 진짜 나이가 몇이냐고 한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꾼 나이를 빼앗아버려야 꿈을 꾸지 않은 그 나이를 알 수 있으므로 ‘불생불멸’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 제법의 공상은 ‘불생불멸’, 즉 시간적으로 생하거나 멸한 적이 없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서나, 지금이나, 더 나이가 들어서도 시간에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며, 시간에 영향을 받은 것은 여러분의 육체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려고 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육체는 늙었어도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추우면 옷도 입고, 더우면 부채질하는 그 마음은 사라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상근기는 이 얘기를 들으면 마음을 확 깨달아 버리는데, 중·하근기들은 마음을 깨닫는 것에 대해 환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단순하고 맹랑한 것인가 하면서, 또 무슨 그윽한 무엇이 있는가 하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니까 도를 가르치는 사람은 장사를 하게 됩니다. 한번 말해서 알아들으면 되는데 모르겠다고 계속 찾아오니, 장사치고 이것처럼 밑천 없이 하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보로 칠 수 없는 보배를 지니고 있다고 하여 무가보라 합니다.
‘생명처럼 태어나서 죽고 다시 내세에 태어나는 과정을 공의 차원에서 깨달을 때까지 생사과정을 반복한다. 영혼의 본질은 불생불멸하기에 마음이 공 차원에서 색 차원으로 작용하면 생명체가 실체화된다.’ 여기서 영혼이라 하면 안 되고 마음이라 해야 됩니다. 영혼이라 하면 자아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에 물의 젖는 성품에 비유했습니다. 물의 젖는 성품은 그것이 얼음물, 구정물이 됐든, 눈이 됐든, 물이 됐든,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얼음, 구름 ,찬물이 될 때 변화가 있으니 물이 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생한 적도 멸한 적도 없습니다. 또한 생명체만 실체화 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체가 의지하고 살고 있는 기세간, 이 세계 우주까지 실체화가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은 진리의 시간적 본성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성이 되었을까요? 현대 과학에서는 물체가 있기에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물체가 없을 때는 시간이 사라집니다. 시간은 물체가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과정의 측정 단위가 시간입니다.
‘유생유멸, 즉 생이 있고 멸함이 있는 것은 현상계의 차별된 모습이다.’ 이 제법의 공상에서는 시간적으로 변동 없는 자리입니다. 변동이 없기 때문에 이 자리를 아는 사람은 생사를 벗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과 사는 바로 시간적 개념이잖아요. 내가 태어났고 내가 죽었다는 이것이 생사이고 그 시간의 단위인데, 중생은 그것을 생멸이라 합니다. 그래서 깨닫고 보니 생한 적이 없으니 멸한 적이 없는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허물어지지 않는 그림자를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선적으로 다시 설명해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 그림자 빗질에도 섬돌 먼지 안 쓸리고.’ 저 유명한 금강경오가해에 부대사(傅大士:497~569 중국 양나라 때 승려)가 주석을 달 때 나온 말인데, 대 그림자란 해가 뜰 때 그림자가 생서 해가 움직이면 대나무그림자가 따라 움직이는데 아무리 그림자가 지나도 계단 섬돌 위의 먼지는 쓸리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본성은 시간이 오고가도 그것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둥근 달빛 꿰뚫어도 물에는 자국 없네.’ 보름달이 밝아서 옹달샘에 꿰뚫어 비췄어도 옹달샘 자체는 흔적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습니다. ‘알겠는가! 이 경계를’ 이것은 스스로 깨닫게 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냥 이 자리일 뿐인데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모를 때 ‘이 뭣고?’ 하는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꿈속의 수많은 인연도 깨고 나면 흔적조차 없느니라.’ 흔적조차 없다는 이것이 사실 흔적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여러분 나이만큼 꿈을 꾸고 있는데 이 꿈을 딱 깨고 보면 어디로 갈까요?
‘아자자자!!!’ 이것은 선에서 개념이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본성을 그냥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나오기 전 한 몇 백 년 전 마니교라는 종교가 있었는데, 그 마니교의 성자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에 대해 질문하는데 세계를 누가 창조했으며, 왜 이 세계는 고통 속에 뛰어드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답변한 것인데 이것은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 진리관, 인생관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진리관을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를 겨냥했다고 보면 됩니다.
‘전능의 신이며, 끝없이 선을 베푸시는 분은, 만물을 만드신 분이 하느님 아버지 입니까?’ 라는 질문 이었는데, 이러한 사상은 중동지역에서는 기독교가 성립되기 전부터 몇 천 년 동안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니라는 사람이 답하기를
‘그분이 어떻게 선하면서 동시에 전능할 수 있겠는가? 문둥병과 전쟁을 창조한 분이 그분이더냐?’ 선하다고 하면 그런 것을 창조할 수 없겠지요.
‘아이들이 죽어가게 놓아두고 무고한 사람을 학대한 사람이 그분이더냐?’ 이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인도의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느 교회 목사는 예수 안 믿어 죽었다고 했는데 나를 안 믿어 죽인다고하면 그것은 살인자고 강도입니다.
‘어둠과 어둠의 신을 창조한 분이 그분이더냐?’ 선하고 전지전능하다면 그러한 것들을 창조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분이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왜 그리하지 않았느냐?’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욕계 육천의 타화자재천의 천주를 마왕파순이라 얘기했고 이곳이 욕계의 최정상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어둠을 없애지 않는 것은 그분이 끝없이 선하지 않기에 그런 것이고, 그렇게 못하는 것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이 욕계천 천주의 한계입니다.
이것은 원시종교인데 고도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면 그러한 허물들이 보이는데, 보통 사람들이 산에 가면 산신, 바다에 가면 용신을 모시듯이, 그와 같은 차원에서 신을 모셨던 사람들이 가장 위대하고 힘 있는 신이라고 창조해낸 것이 하나님과 같은 신입니다.
‘창조물의 존재는 인간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마니라는 인물은 부처님과 같이 인간 심성의 중요성을 설파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어둠을 물러서게 하는 것은 인간하기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실상을 제대로 깨닫는 것, 즉 나와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 깨닫는데 있고, 나와 시간적 개념을 깨닫는 것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불생불멸은 진리의 시간적인 모습을, 불구부정은 진리의 질적인 모습을 깨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끗하다 하고 어떤 이는 더럽다고 하는데, 진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물듦이 없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양단론(兩斷論)으로써 선 아니면 악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어떤 여인이 있어 아이를 대할 때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남편을 대할 때는 현명한 아내로. 어른을 대할 때는 며느리나 딸로서 나타나는데 이사람 모습을 어떻게 얘기해아 맞을까요?
서울에 있는 어느 보살이 공부를 해서 마음이 좋아졌다고 하며 어버이날 e-mail로 ‘스님, 불성은 모성과 같아요.’라고 보내왔는데, 사실 불성이 모성과 같다고 하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맞다 하면 불성은 모성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불성이 어떠한 것에도 속하지 않아야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툴 수 있습니다. 그 보살이 불성이 모성과 같다고 했을 때 자기 견해가 딱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본 불성을 불성이 봐야하는데 자기가 봤거든. 불성은 모성과 같다는 것이 나쁜 답은 아니고, 단지 진리를 증득하거나 깨닫는데 있어서는 함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불구부정이라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수행을 해서 어떤 내용을 마음을 깨닫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이 뭐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것과는 어긋나게 됩니다. 마음의 진리의 질적인 모습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어서 이것은 마치 하얀 도화지와 같아서 지옥을 그리면 지옥이 나타나고 천국을 그리면 천국이 나타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옥은 싫고 천국은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도화지 입장에선 그것도 때에 불과하고 흔적일 따름입니다. 마음을 수행할 때는 이런 것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공을 체득한 사람은 마음의 깨끗함이나 더러움을 초월한다.’ 이것을 내면적으로 잘 관찰하면 더러움이나 깨끗함은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더럽다는 오물도 변소간 구더기 입장에선 더러움이 아니고, 우리가 짜다는 바닷물도 바다에 사는 물고기 입장에선 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항상 내가 있어서 너와 내가 갈라지고, 나와 세계가 갈라지고, 나와 진리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 견해가 깨어져야만 진정으로 고통의 원인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고통의 원인이 소멸되는데 어떤 불보살이나 신이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사기꾼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느끼는 고통이나 즐거움 그 자체는 자기가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남이 해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사기꾼이 자기에게 천원만 투자하면 백만 원 만들어준다고 약속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그 성품이 인간의 뇌수에 의해 나타나면 마음이 된다.’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선악, 불구부정하는 그 성품이 우리 인간만이 갖고 있는 대뇌의 흰피질에 적용해서 나타났을 때 인간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물고기의 뇌는 가장 간소한 뇌세포인데 거기에 우리의 본성이 의존하면 물고기 수준의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 영장류에는 흰피질이 없고 큰 뇌만 있는데 그 뇌에 본성이 적용되면 원숭이 수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을 탁하고 어둡게 쓸수록 탁하고 어두운 뇌에 갇히게 되며, 맑게 쓸수록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 중에도 다른 사람보다 총명하고 똑똑하고 뛰어난 인물이 됩니다. 그 성품이 인간의 뇌수에 의해 나타나게 되면 마음이 된다. 우리가 마음, 마음 하는 것은 인간의 뇌에 의지해서 변형되고 굴절되어 나타나는 것을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얘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뇌피질 자체가 수·상·행·식을 움직이는데 이것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마음은 주위의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한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대할 때는 참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고, 남편을 대할 적엔 여우같은 아내가 되듯이 조건에 의해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형성시키는 성품은 더럽혀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는다.’ 이 성품을 깨닫지 않으면 뇌에 이미 갇혀 버렸기 때문에 이 마음을 제대로 제어할 수가 없어서 본능적으로 나타나버립니다. 뇌에 의해 성품은 이미 질이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성을 꽃으로 비유하면 더러움도 깨끗함도 마다하지 않는 불교의 상징적인 꽃인 연꽃으로 비유합니다.
‘중생성품은 긴 것도 짧은 것도 아니고(부장부단:不長不短), 모난 것도 둥근 것도 아니며(불방불원:不方不圓), 탁한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무탁무정:無濁無淨), 오랜 세월동안 여여하다.(장겁여연:長劫如然)’ 이것은 우주는 시초가 없고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은 변동한 것이 없습니다. 의상스님의 법성게 맨 끝에 보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라 하여 옛 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움직임이 없는 자리라 하였습니다..
‘요견마(了見麽)?’ 이것을 보고자 하느냐?
‘가을하늘 밝은 달은 오색구름에서 벗어나있고,’ 여러분들이 보통 먹구름, 흰 구름은 많이 봐도 오색구름은 잘 볼 수 없을 텐데, 상서로운 이 구름은 가을하늘 달에서도 벗어나 있다 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마음은 나이에 관계가 없도다.’ 이 자리로 돌아가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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