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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제23강 즉설주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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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052회 작성일 21-08-0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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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강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시무상주(是無上呪)는 이것이 위없는 주문이란 뜻으로써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수많은 주문이 있지만 오직 이것이 가장 뛰어난 주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인도의 용수보살이 저술한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에 반야바라밀다주가 모든 주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있는데 이 주문은 다른 주문과 달라서 부처님 법을 깨닫게 하는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주문들, 능엄주, 신묘장구 대다라니, 옴 마니 반메 훔, 그리고 외도들이 하는 여러 가지 주문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세상의 욕구,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한 방편으로써 주문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 반야바라밀다주만은 세상의 욕구를 뛰어 넘는 것을 목표로 설했기 때문에 반야의 지혜로 세상의 무명과 어리석음, 탐심, 분노, 이런 것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는 주문이라고 하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것도 견줄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상의 많은 주문들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인연사를 얻기 위해서 번뇌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흑마술 같은 것은 주문으로 상대방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티벳의 밀라레빠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대성자가 아니었고 자기 집안의 재산을 빼앗고 핍박했던 친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주문을 배워 많은 사람을 살상을 했는데 세상에서 사용하는 주문이란 결국은 어떤 한 인간,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쓰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주문들은 퍼지면 퍼질수록 사람들을 살상하고 멍들게 하고 또 고통 속에 뛰어들게 하지만, 이 반야주 만은 그것을 뛰어넘는, 마치 탁한 물에 여의주를 넣으면 그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은 그런 공능이 있기 때문에 위없는 주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주문들은 보통 정신을 모아서 되는 그런 주문이 아니고 반야의 밝은 마음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부처님만이 할 수 있고 그래서 시무상주인 것입니다.

  ‘일체만법이 이 마음의 주문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체만법이 이 마음의 주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일체만법이라는 것은 일체 중생들이 쓰는 마음이 바로 일체 만법이며 그 마음들은 다 탐욕과 분노에 물들어 있는데 이 주문을 외우게 되면 그 탐욕과 번뇌 같은 것들이 사그라지기 때문에 이 마음의 주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 무상주인가?’ 그래서 이 무상주의 정체를 알려면 무상주가 무언가를 알아야 되는데 이것을 설명하면 결국은 이 무상주라는 것이 지혜로운 밝은 마음을 뜻하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의식이란 붓으로 색·성·향·미·촉이라는 다섯 가지 대상을 그린 다음 그것을 보고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고, 어떤 때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어떤 때는 마음이나 의식으로 분별하여 각종 분별을 일으킨다. 만약 마음이나 의식이 원래 공적하여 대상으로 보여 지는 모습이 없음을 알면 이것은 도를 닦는 것이다.’

 우리가 도를 닦는다고 했을 때 이러한 것을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니 결국 첫째는 마음에 욕탐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욕탐이 없어진 상태에서 나타난 밝은 마음, 그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무상주라는 것입니다.

  ‘색은 그것이 스스로 색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변화한 것이다.’ 우리가 단풍이 든 산이나 사람을 볼 때 그 산색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한 적이 없는데도 바라보는 사람이 자기 욕구나 조건에 맞으면 좋은 날씨, 좋은 산색, 좋은 사람이라 하고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나쁜 날씨, 싫은 산색, 싫은 사람이라고 분별을 하는데, 우리가 좋거나 싫다고 하는 그 분별이 게재되지 않았을 때 산을 봐야 되지만 그렇게 못 보기에 결국 이것은 색은 스스로 색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지혜가 없이 마음을 닦게 되면 마음을 모으는 연습만 하게 되는데 그것을 ‘고요함에 탐착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고요한 것을 생각하면 고요함이 나타나고, 마음이 공을 생각하면 공이 나타나며, 더러운 것을 생각하면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모든 것이 마음에 의지해 있는데 마음은 일찍이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스님들은 화엄경의 육상원륭(六相圓融:모든 존재는6가지 상, 즉 총상, 별상, 동상, 이상 성상, 괴상을 갖추고 있으며 이 6상은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한 몸이 되어 원만하게 융화 되어 있다.) 에서 그것을 설명할 때 금을 가지고 금사자나 금팔찌를 만들어 좋다고 하지만 금 자체는 금사자도 금팔찌도 아닌 금일뿐입니다. 그래서 이 금일뿐인 마음을 체득을 해야 세상의 어떤 만 가지 법이 오더라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그것을 부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상주이며 결국은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등(等)은 가지런하다, 비슷하다, 대등하다는 의미로써, 무등등주는 어떠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유위(有爲)의 마음입니다. 유위의 마음은 조작하는 마음, 의도적인 마음, 욕탐이 붙은 마음인데 그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마음이나 성현의 마음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현의 마음은 흔들리지가 않지만 중생의 마음은 끊임없이 경계에 따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친하여 서로 의지하던 친구가 나이 들어서는 변해 있고, 또 나이가 들어 의지하는 사람이 옛날에 내가 미워했던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변하는 마음, 유위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쓰는 중생의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선한 마음도 악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고 악한 마음도 선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성현이라든가 부처의 마음은 이 마음이 아닙니다.

  옛날에 동산 큰 스님이 어느 도량의 초청을 받아 조실스님으로 가시어 거기서 한 15년을 담담히 머무르셨습니다. 도를 닦은 사람은 경계가 오면 비춰서 그 경계에 따라서 시절인연을 베풉니다. 아까 어떤 보살이 와서 앉아 있는데 목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아프다고 얘기를 하여 그 사람에 맞춰서 몸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해주었지만, 경계 즉 그 사람이 떠나고 빈방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여러분 같으면 뭘 할 것 같습니까? 내 생각에는 젊은 사람들은 MP3나 휴대폰, 컴퓨터를 만지작거릴 것이고, 나이든 사람은 신문이나 잡지, TV 같은 것을 볼 것이며, 조금 학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도를 닦은 사람은 그냥 담담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것이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그냥 담담히 있는 사람에게는 의도적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쓰는 마음이 훤히 보이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담담히 있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담담한 사람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이 그 사람이 하는 행위입니다. ‘길 없는 길’을 쓴 소설가 최인호가 경허스님이 도를 깨닫고 난 뒤 했던 딱 한마디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에 반해서 이후 경허스님의 일대기를 썼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아무것이라도 하는 것은 뭘까요? 여러분 마음입니다. 그것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뭔가 짓고, 까불고, 얘기하며 생각을 굴리고 하는 것이 모두 여러분들의 마음이지만 도를 닦는다든가 수행을 한다든가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무위라 그럽니다. 그래서 도를 깨달은 스님을 옛날에는 ‘무학(無學)’ 배울 것이 없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동산스님이 15년을 거기 가만히 계셨는데 어느 날 홀연히 정제에 가고 싶어 나갔다가 거기에 누가 쌀을 몇 알 떨어뜨려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원래 우리가 어려서는 쌀 한 톨이라도 함부로 땅에 버리게 되면 그것이 다 썩을 때까지 제석천이 한발로 합장하고 서있다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제석천은 하늘의 하느님인데 그 하느님이 한 발을 든 채로 그 쌀을 들고 다 썩을 때까지 합장을 하고 있다고 하니 쌀 20알만 떨어뜨려 놓으면 한 두어 달은 가겠지요. 지금은 먹는 것이 풍족하여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지만 스님이 승려생활한지 40여년 정도 되는데 그 옛날에 처음에 수계 하고 옷을 받았던 것이 지금으로 치면 그 옷감이 포플린, 새로운 모직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승복이 아주 질기고 좋다고 신나서 동네방네 입고 자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산스님이 그걸 딱 보고는 ‘누가 아까운 쌀을 버렸나?’ 하면서 홀연히 한 생각을 딱 일으켰는데 그때 어떤 노인네가 나타나서 합장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산스님이 ‘노인장은 누구시오?’ 하고 물었더니 ‘제가 이 도량을 지키는 도량신입니다.’라고 하여 ‘그런데 왜 나타났소?’ 라고 되물었더니 ‘아, 스님이 새로 오셔서 스님을 뵈려고 15년을 기다렸는데 볼 수가 없었다가 스님이 염심으로 한번 일으키시니 지금에야 비로소 인사를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도인이 귀신 눈에 안 띄는 도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상가에 가면 귀신 눈에 띄거나 상문살 같은 탈이 붙을까 하고 그 염심을 끊임없이 일으키는데 도를 닦은 사람은 그 염심의 근원을 압니다.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 염심이 실재하지 않음을 자기가 온 몸으로 체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득한 사람은 마음을 쓰지만 물들지 않습니다. 동산스님 정도 되면 조동종을 창시한 분이고 대단히 마음이 깊고 맑으며 고요함이 있는 분이니 설사 부처님이 온다 해도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 스님입니다. 그 경계에서는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물리칠 수 있는 정도로 자기의 맑은 마음바탕에 의지하고 있어야 도인인데 그 쌀알 몇 알 떨어진 것을 보고 홀연히 아깝다는 생각을 일으켰다가 신장의 눈에 띄어버린 것입니다. 앞에서 스님이 어릴 때 쌀 한 알이 썩을 때 제석천이 3일간 합장을 하고 외발로 서 있다고 교육을 받았다고 했었는데 도를 깨달은 사람이 그 행동을 보니까 그 짧은 순간에 그 쌀 한 알이 아까운 생각이 일어나서 귀신의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귀신 눈에 안 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귀신 눈에 안 띄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왜 귀신 눈에 띄는가 하면 귀신은 사람의 몸을 절대 못보고 귀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생각만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귀신을 볼까요? 사람은 귀신의 몸을 절대 볼 수가 없고 다만 사람이 현재의 의식이 어떤 원인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져 잠재적인 마음이 발동할 때 귀신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공동묘지 같은 으슥한 곳에서는 자기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으스스한 느낌과 귀신이나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현재 의식이 약화되면서 잠재의식 세계로 자기가 빨려들어 가게 되고 그 세계에 있는 귀신이 보이는 것입니다. 무당을 영매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사람은 잠재의식에 들어가는 신체적 음체를 타고 나서 현실세계보다는 잠재의식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어떤 귀신이든 쉽게 그 몸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를 닦는 사람 몸엔 못 들어갑니다. 첫째는 반야지혜가 있어서 어떠한 일념이라도 허망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쫓아가지 않아 마음이 항상 텅 빈 허공이 되니 귀신이 그 허공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구름이 일어나야 ‘아, 저것이 흰 구름이다, 탁한 구름이다.’ 라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는 주문이라는 것이 이러합니다. 그 텅 빈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알아 볼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 숙종황제 당시에 신통이 자재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전등록(傳燈錄 : 과거 7불부터 인도 28조 중국 6조를 거처 북송 초기에 이르는 1701명 조사들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전집)에 보면 이 사람이 과거 가섭불 시대에 수행자인데 지혜가 없이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만 하다가 그 세계의 산천이 무너지고 개벽을 하면서 용암이 흘러 정에 들어 있는 그 사람을 덮었는데 그것이 굳은 상태로 바위 속에 묻혀 있다가 지금의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까지 한 50억년이 흐른 뒤 중국 사람들이 길을 낸다고 바위를 깼는데 정에 든 사람은 절대 죽지 않으니까 그 사람이 바위에서 툭 튀어 나온 것입니다. 당나라 숙종 황제가 이 사람을 장안으로 데려와 신통을 시험해보니 굉장히 뛰어나 육조 혜능스님의 직제자였던 당시 남양해충국사에게 신통을 잘 부리는 사람이 있으니 한번 만나보기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양해충국사가 그 사람에게 ‘당신이 사람 마음을 아는 타심통을 가졌다는데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한번 알아 맞추어봐라.’ 하면서 장안의 어느 다리 위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우산을 받치고 걸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그걸 맞추었고, 또 깊은 산 속의 원숭이가 뛰어노는 광경을 생각하니까  다시 그것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다가 남양해충국사가 앞에서 얘기한 이 무등등주, 한 생각에도 물들지 않는 자기 본성에 딱 머무르니 ‘자수용신(自受用身:수행이 완성되어 복덕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아 늘 진리를 관조하여 스스로 그 법락을 받는 불신)’이 되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그 자리에 있는데 그 사람의 마음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양해충국사가 ‘자네가 익힌 것은 도깨비 같은 흔들리는 마음은 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꿈에도 못 보니까 너는 아직 도에 멀었다.’고 하며 쫓아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등등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어떠한 것도 비교할 수도 없고 또 따져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주문도 이 주문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 주문은 마음의 본성을 스스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성, 이것을 말로 하면 참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순간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님이 누누이 얘기하지만 이것은 수행을 많이 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행이 없다고 해서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이것은 다만 한 생각 돌이켜 자기 자신을 비추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이뭐꼬’ 화두를 주는데 ‘이뭐꼬’ 화두도 잘못 들어서 계속 이뭐꼬, 이뭐꼬 하는데 그것은 화두가 아니고 ‘화미’라 합니다. 왜 화미라 그러느냐 하면 이뭐꼬 화두를 들 때 ‘이 놈, 밥먹는 것이 이뭐꼬. 나라는 것이 이 뭐꼬.’ 이렇게 하게 되면 밥 먹고 말하는 데 쫓아가게 되기 때문에 경계를 따라가는 마음이 되어버리는데 그걸 이뭐꼬 하면 백년, 천년을 들어도 근본으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럼 화두란 것은 뭐냐? 이뭐꼬 화두를 할 때 밥 먹을 줄 아는 이놈, 밥 먹을 줄 아는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비추면서 이뭐꼬 해야 됩니다. 밥 먹는 것이 이뭐꼬, 무엇을 하는 것이 이 뭐꼬 하게 되어 경계를 쫓아다니면 그것을 화미를 든다고 하여 선가에서는 그것을 죽은 구, ‘사구(死句’라 합니다. 그런 구절로 공부를 해봐야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체는 기본 되는 체가 없다.’ 이거는 말로써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본성을 너무 모르고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하는데 마음의 본성을 깨달으려면 먼저 그 견해가 깨어져야하기 때문에 여기서 마음의 본체는 기본 되는 체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너는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뭐라 할 것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경계에 따라서 아는 마음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오면 제불선원, 스님, 부처님, 반야심경법회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이것들이 모두 여러분들이 일으킨 생각이고 아는 마음인데 만약 제불선원이라 할 때 제불선원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이 제불선원이라는 마음이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누가 예쁘고 곱다고 느껴질 때 그 예쁘고 고운 것이 실재하다고 믿으면 상대방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일어나게 되고, 또 누가 밉고 싫을 때 밉고 싫다는 것이 실재하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쁘고, 곱고, 밉고, 싫은 마음은 내 입맛, 즉 자기 욕구에 맞추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노란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면 다 노랗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면 다 파랗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안경도 끼지 않았을 땐 어떻게 보일까?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닦는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지금 방향을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상을 볼 때 한 꺼풀 씌어서 보는데 그 꺼풀의 기본이 내 마음대로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중생이며, 그 자기 하고 싶은 대로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다’라는 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나라는 것을 비우면 나라는 마음으로 지어놓았던 그 업력이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참된 것이고 업이 바로 소멸되는 가장 빠른 첩경입니다. 옛 스님은 그런 마음을 무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아는 마음은 현상이 비춰진 것일 뿐이다.’ 현상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어떠하다는 분별심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일체법이 있다고 생각할 때도 그것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있다고 독단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무등등주를 알고 싶은가? 삼이 세근이다.’ 

 이것은 선구로써 참선 수행하는 사람들한테 수행 주제를 주기 위해서 나온 건데 동산수초 스님이 삼을 들어 

달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스님이 도인스님한테 와서 ‘어떤 것이 불법의 진짜 뜻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삼서근이다.’ 이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이 무등등주를 알 수 있습니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이것을 알게 되면 능히 일체 고통을 제거한다. 얼마 전에 어느 스님이  전화가 와서 도를 못 깨달아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는데 이런 고통이 도를 깨달으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삼세제불이 출세하신 것은 중생의 일체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일체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일체고통은 내 욕구, 내 분별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분별에 의지해서 거기서부터 내 생각이 나오고, 내 생각에 의해서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나오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나옴으로 인해서 욕심이 이루어지면 즐겁고 그렇지 않으면 괴로워서 눈물도 흘리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없애는가?’  삼세제불이 중생의 고통을 무엇으로 없애는가 하는 것인데 바로 지혜로 없애는 것입니다. 그걸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이 내가 지은 죄를 없애준다든가 하는 것은 정신적인 사기입니다. 

 ‘원래 그림의 도구 속에는 두려워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망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어린아이들이 절에 잘 가려하지 않는 이유 중에 절에 가면 신장과 같이 무서운 그림을 탱화에다 그려놓는데 어른들은 몰라도 어린아이 입장에선 그게 진짜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이 세상에 대하는 태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원래 바깥에는 실재하는 것은 없어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 스스로 망령되이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에 마음이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천한 것도 있게 된다.’ 이것은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내가 비천하게 살 수 있는 것도 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행복하려면 행복과 비천, 두 가지 다 추구하지 않아야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동산스님이 떨어진 쌀을 보고서 마음을 일으키기 이전 마음과 같이, 귀천에 대한 것을 한 생각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마음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싫은 것도 있게 된다.’ 절간에 보살들이 특히 누가 맘에 들고 누구는 싫고 이렇게 입방아를 찧고 하는데 그러면 그 상대는 자기를 그렇게 생각 안할까요? 여러분들이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이 딱 부딪힐 때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오로라와 내 오로라가 먼저 접속을 하여, 내가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느낌으로써 벌써 상대에 대하여 어떻게 대해야 되겠다는 것이 스스로 컴퓨터처럼 다 계획이 돼 있다가 겉으로 나타납니다.  미혹한 사람은 그게 얼굴에 다 나타나고, 조금 지혜로운 사람은 입으로는 그래도 비단같이 말은 하거나 웃고 떠들고 하는데 그렇지만 감각에 예민한 사람은 2m앞에서 서로 부딪히면 서로 몸에서 나타나는 방사체가 있어서 대상의 내면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너무 탁하고 어둡게 살아서 그걸 모르지만 공부를 오래오래 혼자 해보면 그런 것들이 예민하게 느껴지고 대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되는지 계산 없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꾸짖을 사람은 그때 꾸짖고 칭찬할 사람은 칭찬하고 달아볼 사람은 달아보고 합니다.

  ‘만약 마음이 어떤 것을 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일체의 것은 불선이 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으로 선이라고 했을 때는 자기주관으로 만든 선일 따름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전쟁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폭격을 하여 민간인 어린아이들이 죽고 다쳐도 그 사람들한테는 그게 선이야. 그러니까 만약 선이 있다고 하면 나머지 것은 다 불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바꿔 얘기하면 독일이 과거 유태민족을 학살했을 때는 독일 입장에선 그게 선이었고 자기네는 그때 불선을 당했는데 그런 것은 까마득하게 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경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을 보게 되면 그런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머물지 않으려면 선이나 악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살리라고 했습니다. 어디에? 깊게는 자기 무지한 마음에 머물지 않아야겠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선악을 분별하는 자기마음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눈앞에서 자기 흉을 봐도 마음이 거기에 머물지 않으니까 밝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릇이 완전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하나의 것과 친하지 않으면 일체의 것은 미움이 된다. 만약 이 색에 머물지 않으면 색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색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고 부처님이나 하나님한테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 경우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이런 것에도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밥을 안 먹는데 자기 배가 부를 수 없음을 압니다.

 ‘만약 마음에 머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얽매임이다.’  한 터럭 끝이라도 마음에 무엇을 붙들려고 하면 그건 무명(無明)이란 말입니다. 스님이 옛날에 남산 독서실에서 금강경을 읽다가 깨달은 얘기는 많이 해서 다 알 것이고 그러다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1학년 때 남해 보리암에서 21일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가삼이라는 비구니스님이 한 15년인가 30년 공부를 했다고 해서 그 스님 공부가 어떠한지 얘기 해보려고 가는 도중에 그이가 능엄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전에 깨달은 도리가 있어 모든 것을 머무는 바 없는 자리 거기에 비추어봤습니다. 그런데 능엄경에서 ‘마음도 아니고’라는 소리를 탁 듣는 순간 이제까지 내가 마음이 도라고 했던 생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도를 닦는데 있어서 마음이 도라고 하면 그 마음까지도 의지하는 바가 되어버리게 되기에 그것까지도 사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라져야 비로소 천지와 내가 한 뿌리가 되는 그런 기특한 도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얽매임이다.’ 그래서 도라는 것에까지도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친 도리까지도 거기에 머물면 그것은 자기가 맛본 것이기에 자기가 사라진 다음의 도가 아닌 내가 깨달은 도, 내 입장에서의 도라는 것입니다. 도를 수행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이 종종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런 것들인데 공부를 하다가 어떤 시원한 경계라든가 완연한 경계를 탁 맛보게 되면 알았다고 하는데, 안 것까진 좋은데 누가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알았다고 하면 아직은 그건 도가 아닙니다. 그 내가 알았다는 마음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공하되 공하였다는 그것조차도 공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순진하여  티끌 없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어느 스님한테 몇 십 년 공부를 했고 도를 닦고 법문을 들었다고 말 하는 것은 그건 자기 탐욕일 뿐입니다. 오죽 못났으면 몇 십 년을 도를 닦는데도 그 스님의 도를 못 보고 못 깨닫고 있을까요?. 탐욕이 많고 어리석어서 못 보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대상을 가지면 그것은 계박이다.’ 이것은 얽혀서 꼼짝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도조차도 그것을 주장하면 얽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이와 같이 한 마디로 딱 그려놓았습니다.

 ‘수보리야 네가 아라한과를 얻었느냐?’

 ‘아닙니다. 저는 얻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하면 부처님께서 저를 아라한 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얻을 내가 사라지고 없는 그것이 참 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아는 사람은 상대방 언구만 봐도 이 사람이 책을 많이 보고서 하는 말인지 조금은 도의 맛을 봤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나오는 언구 자체가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내 입장에서 하는 얘기와 그것이 사라진 것을 맛보고 하는 얘기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체고통이 여기를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깨달은 도까지도 용납을 안 하는 자리인데 중생의 욕탐이나 어리석음이나 분노로 만들어진 고통, 그것이 여기에 설자리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체 고통이 지난밤 꿈 속 같은 것이고, 아침이슬과 같으며, 번갯불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도인도 몸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물질의 영향을 안 받는다면 그것은 외도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번갯불과 같음을 알아서 그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고통은 있되 근심은 없는 것이 도인의 몸입니다. 중생은 근심도 있고 고통도 같이 갖고 있는데 이것이 깨닫지 못한 사람의 단상입니다.

  ‘만약 마음이 이치를 중요하게 취급하면 이치가 그대를 억압하고,’ 이건 여러분들의 수준이 아주 하열하니까 여러분 수준에 맞춰서 얘길 해야 되겠습니다. 가령 절 도깨비 보살들이 특히 절에 처음 오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방석을 조금 삐뚤게라도 하면 큰일 날것처럼 와서 꾸짖고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은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참으로 진실할 것 같으면 자기가 바르게 해 놓으면 되는데 꼭 와서 시비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 마다 자기는 안하면서 그건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고 합니다. 만약 이같이 이치를 주장하게 되면 나머지 사람은 다 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과 왜 적을 만들게 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물을 해석하는 순간 자기의도가 들어가서 그것과 맞지가 않으면 화가 나게 됩니다. 도인은 아예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해석을 하는 순간부터 나와 너, 나와 하늘, 이렇게 주관과 객관으로 반드시 편이 갈라져 버리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습성 중에서 제일 제어하기 어렵고 힘든 것이 의미를 갖고 상대방에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그때부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와 친하게 잘 지내다가도 누가 ‘그 친구가 너를 속였어’ 라는 말을 듣고서 괘심한 생각이 들고 화가 나서 ‘너 왜 나 속였냐?’ 라고 하면서 의미를 주는 순간에  친구는 ‘내가 널 언제 속였냐?’하고 서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냥 물과 같이 높은데 있으면 내려가고, 낮은데 있으면 고이고, 막힌데 있으면 돌아가고 자기주장이 없이 의미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높은데 있으면 높은데 있다고 뭐라 하고, 낮은데 가면 낮은 곳에 있다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전도몽상입니다. 스님이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 수준에 맞춰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치에 그렇게 억압을 당하며 살면서도 ‘아, 나는 그래도 착하고, 올바르고, 도를 닦고 살고 있어.’ 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데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나란 것이 일어나면 이치를 따지게 됩니다. 내가 사물을 볼 때 무심히 보지 않고 사물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 하려합니다. 그래서 도를 깨달을 수 없는 사람 중에서 한 예로 시인들은 사물에 대해서 끊임없이 미추를 보기 때문에 도를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가 정서적으로 아주 각박하여 시를 쓴다고 하면 우아해 보일 수도 있고 정서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도 닦는 입장에선 좋은 것과 싫은 것에 대한 강한 편 가르기 하는 심상만 키울 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어느 마을에 갔는데 서커스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높은 장대 위에서 서커스를 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울렸다 하다가 장대 위에서 부처님을 보았는데 그 위의가 너무 훌륭하여 서커스를 마치고 내려와서 부처님께 궁금한 것을 여쭤보았습니다. 

 “부처님, 저는 평생 사람을 즐겁게 했으니까 우리 선배들 얘기로는 다음생에 죽으면 천상 간다는데 맞습니까?” 했는데 부처님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을 물었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막 조르니까 부처님이 “너는 법에 의지해서 지옥에 갈 것 같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사는 법과 성현들이 생각하는 법이 다른 점입니다. 언뜻 봐서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긴장도 풀게 했으니까 좋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는데 이런 것들을 두고 반야심경에서 여러분들이 전도몽상 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너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그 집착심을 더 심어주었을 뿐이지 마음의 욕탐이나 번뇌가 쉬는 것을 방해한 죄가 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얘기입니다. 그래서 처음 스님이 되어 받는 사미 10계에 보면 노래하고 춤추지 말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은 마음 바탕이 원래 명정한 것인데 그 명정한 것에 어떤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 그것이 좋은 곳이라고 물고기 떼처럼 계속 몰아가서 마음을 더럽히게 되고 마음을 닦을 생각을 일으키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제대로 도 닦는 사람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TV나 컴퓨터 등 매스컴이 아주 발달되어 있는데 서구에서 들어온 이러한 물질문명은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하늘이 만들어준 마구니, 천마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거기서 못 벗어납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웃고 울며,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런 것들 밖에 하지 않습니다. 이게 그 얘길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언가를 하나 존중하면 마음은 반드시 천한 바를 갖게 된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행복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인과적으로 전생에 지은 복이 없이 추구하다 보니 허망한 것이 되고, 또 행복하고 좋은 것을 갖는다 해도 그것은 자기가 지어놓은 복을 소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돌아갈 길 만나게 되니 언제든지 그 자리가 고향인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도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이것이 당연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법문을 듣는 이 자리, 미한적도 없고 또 깨친 적도 없는 이 자리, 선과 악이 물들지 않는 자리 바로 그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 자리가 현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를 잘 비유해서 말해주는 옛날 중국 원나라 때 한시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종일심춘불견춘 망혜답파영두운 귀래소연매화후 춘재지두이십분

 (終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嶺頭雲 歸來笑然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해마다 봄이 오기에 봄을 찾아서 하루 종일 봄이 어디 있는지 보지 못하고 고갯마루 구름 속을 짚신신고 헤매다가 지쳐 돌아와 매화 향기 따라 웃으며 사립문을 열고 가보니 뜰 앞 매화가지 끝에 매화가 핀 것을 보고 천하에 봄이 왔음을 알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드러난 일을 무엇 하러 이리저리 생각하리요.’ 깨달음의 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기에 바깥에서 찾을 일도 아니고 찾아서 되는 일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깥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한 생각을 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젊은 애기보살이 자기 뜻대로 앞으로 인생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예언을 받고 몇 날 동안 울었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자기 마음의 의미를 찾아가지고 자기 인생을 설계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중생세계의 일이고 도를 닦는 문에서는 그 생각을 딱 놓아 버리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천년만년 쓸 세월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접할 기회도 없고 알 수도 없으니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분하고 서러워서 계속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뜻만 놓아버리면 천하가 태평입니다. 그래서 도인의 경계를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라 하고 이외에 다른 것을 찾는 것 자체가 자기 욕탐을 연장시키는 것이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사람은 욕탐을 이긴 사람입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자기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우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진실불허(眞實不虛), 이러한 주문들이 진실해서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세제불이 이것을 다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경의 맨 앞 관자재보살부터 여기까지가 현설반야(顯說般若)인데 이것은 언어로써 현실적으로 반야에 대해 설명을 해준 부분입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 주 즉설주왈(故說 般若波羅蜜多 呪 卽說呪曰) 여기서 부터는 ’밀설반야(密說般若)‘ 로써 은밀하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주문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밀교에서는 주문을 좋아하지만 현교에서는 주문을 전혀 쓰지 않는데 깨닫게 하길 위해서 다시 밀설반야를 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불허까지가 229자 이고 그 다음은 깨우침을 주려고 거듭해서 ‘고설 반아바라밀다 주’ 이렇게 한 것입니다. 

  주문도 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통 다라니나 주문, 진언 같은 것들이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신비한 힘이 자기의 어떤 업력을 다스리려고 할 때 주문하는 것을 ‘주력(呪力)’, 주문의 힘을 쓰는 것이고, 그리고 주문을 하면서 주문을 할 때 주문이 나오는 그 자리를 지켜보면 그때는 마음을 근원으로 돌이키기 때문에 주력이 아니고 ‘주력선(呪力禪)’이 됩니다. 그래서 같은 주문을 가지고도 수행하는 방법이나 정신세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설하겠다고 해놓고, 즉설주왈, 곧 주문을 설하겠다는 것입니다.

  ‘진언도 진리 자체가 음성적으로 나툰 모습이다.’  진언이 왜 효과가 있는지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이건 물론 동양의 음양오행으로 따져서도 설명 할 수가 있는데 우선 근본적으로 진언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세계적으로 통하는 공통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뜻하는 그 글자에 ‘ㅇ’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ㅇ’자는 태초의 소리라 하여 인도에서는 ‘옴’자가 모든 주문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신비스런 주문에는 반드시 옴자가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맨 날 ‘옴~옴~옴’ 이렇게 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생리적으로 보면 옴을 하면 두뇌가 진동을 하고 뇌파가 이것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 이전에 우리의 마음의 본성이 소리로 나올 때 최초의 진동음을 옴이라 하는데 이것은 진리가 자기 자신을 소리로써 나투었을 때 옴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으로 나투었을 때는 부처로 나오고 소리로 나투었을 땐 옴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물로는 물, 바람과 같은 사대(四大)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도 진리자체가 자기를 나툴 때 근원적인 모습으로 자기를 형상화 시킬 때, 근본적인 진리로 나올 때 나타나는 음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알고 주력을 하게 되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주력을 왜 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재·색·식·명·수의 오욕(五慾)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느냐, 아니면 업장을 참회하기 위해서 하느냐, 도를 얻기 위해서 하느냐에 따라서 주문도 틀려지겠지만 그 주문에서 실려 오는 기운이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일으키는 마음이 바로 그 주문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6대 선지식이었던 수월스님 같은 분은 ‘신묘장구대다라니’ 하나로 도를 깨달았습니다. 그 스님이 만주에 가서 산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마을사람들이 불이 났다고 하면서 불을 끄러 올라와보니 그 스님이 혼자 앉아있었고 몸에서 화광(火光)이 충천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도를 닦는 사람은 주문이 도의 수단이 되고, 일반사람들은 업장 참회나 자기 욕구를 만족 시키게 해 달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주문을 남을 해하는데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언이 근원적으로 진리자체가 음성적으로 나툰 모습이라는 이런 전제하에서 주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란 어떠한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 우리 마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내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한다고 할 때 내 마음자리가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간절히 하게 되면 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업력 때문인데 내 마음의 본바탕에서 하면 업력이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내 마음 이라고 하면 허공에 온갖 색깔의 구름이 일어나듯이 업력이 일어나는데 주력을 하면 허공에 바람을 일으켜 구름이 쓸려가 버리면 허공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문, 밀설반야입니다. 

  ‘따라서 산하대지가 모두 진공의 표현이다.’ 이 입장에서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산하대지 경계 하나하나가 우리 마음바탕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한 법도 버릴게 없는 것입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심경이 이 밀설반야 구절을 하기 위해서 이때까지 쭉 했던 것입니다. 밀설이라고 한 것은 감춘 것이 아니라 수행을 안 하거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비밀하기 때문에 밀설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도 설명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경전을 해석할 때 주문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주문을 해석하면 묘한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 주문을 굳이 해석을 하면 ‘아제 아제’는 ‘가자 가자’라는 뜻인데 수행하는 사람이 가자는 것이니 여기서는 ‘수행하는 이여, 수행하는 이여, 피안으로 가기위해 수행하는 이여, 피안으로 온전히 가서 부디 깨달아 지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걸 왜 해석을 했느냐면 일체중생은 사물에 대해서 어떤 것인지 의미를 갖고 있어야 자기가 알았다고 하기 때문에 우선은 여러분 입장에 맞춰서 이걸 설명해 준 것일 분입니다. 그런데 이 주문의 뜻을 설명해주면 이 주문의 힘이 사라져버립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마음 본바탕에서 나온 소리에 의미가 들어가면 그땐 이미 개인적인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업에 휩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원래는 ‘가자 가자 어서가자’ 이렇게 했었는데 스님이 번역하다보니 내 입장에서 ‘수행하는 이여, 수행하는 이여’ 이렇게 되어버리듯이 개인적인 입장으로 하면 어리선(語理禪)이 됩니다. 즉 따져서 분별하여 아는 지혜로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밀교식으로 이것이 마음바탕에서 나온 신비한 소리라고 했을 때는 그냥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렇게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이때는 마음이 선악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참선하는 수행자들에게 ‘누구냐? 주문을 외우는 자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확실히 더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주문이라도 하근기는 ‘가자 가자 어서가자 열심히 노력해서 빨리가자’ 라고 해서 수행하고자 하는 념을 일으키게 하고,  도를 닦는 사람한테는 ‘아제 아제 ~’ 하면서 그것에 몰입하는 순간 선악, 미추, 생멸 등 온갖 분별을 다 잠재워버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물에 파도가 쳤다가 파도가 그냥 없는 물이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되면 공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선구에서는 ‘누구냐, 주문을 외우는 자는 누구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비밀한 주문의 뜻입니다. 이 주문을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의미가 있어야 ‘내가 배웠다. 알았다.’는 것이 표가 나니까 이것을 다시 분별을 해 가지고 이렇게도 해석을 해놓았습니다. 첫 번째 아제는 주관이 공한 것이고, 두 번째 아제는 객관이 공한 것이며, 세 번째 바라아제는 일체가 공하다 는 그것까지도 공하다는 것입니다. 스님이 옛날에 남산도서관에서 금강경을 읽다가 깨달은 도리가 몇 년 뒤 남해 보리암에서 기도하다가 어떤 비구니가 독송하던 능엄경 한마디에서 과거에 깨달은 도리가 문득 사라졌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것이 일체개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라승아제는 이리하여 나타나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경계이며, ‘모지 사바하’는 본성, 불성이 공한 줄 깨닫는 것입니다. 모지는 보리를 뜻합니다. 우리가 보통 ‘모지사바하’라고 하는데 사실은 ‘보리 사바하’ 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은 상태가 보리이고 사바하는 모든 것이 성취되어 이 자리는 천 부처님도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부처가 중생을 보는 것은 중생이 망념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데, 중생이 망념이 없으면 이미 중생이 아니니 중생이라는 생명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부처와 부처는 서로 보지를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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