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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스님 반야심경 강의

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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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0,421회 작성일 21-08-09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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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에 대하여 


먼저번에 세가지 공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것에 대해 좀더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배우는 것은 나고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결국 공이라는 것은 배우지 않고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이나 꿈속에서 조차도 생사의 업을 멈출 수가 없고 생사의 업에 의해서 항상 윤회의 돌고 도는 인연이 되기 때문에 공에 대한 이해나 깨달음이 없이는 이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도 세속적인 공이 있고 진리적인 공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세속적인 공에는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공이 있고, 진리적인 공은 원성실성이 있는데 이것을 인도의 대보살들이 중생들을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때 반야부 계통 즉 중관 계통의 스님들은 세간성질을 다 공한 것 위주로 설명을 하다 보니까 이 세간법을 무시하게 되고 세간법에 염증을 일으키게 되는 그런 착오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중생의 망념이 공한 것을 기준으로해서 세간법은 인연의 영향 하에서만 인정하는 것이 청변과 호법보살의 공에 대한 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공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변계소집성은 허망하게 일으킨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에 대해 감정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지난밤 꿈속과 같아서 꿈을 깨고 나면 당연히 없는 것이므로 변계소집성인데 이것을 제대로 공의 도리를 이해하게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자기가 쓰는 마음이 변계소집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문득 쉬고 업으로 치닫던 마음이 가라앉기 때문에 바로 이 공을 배우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간단히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지만 공의 참된 의미는 자세히 설명하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음은 세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까지도 인연의 힘에 의해서 중생의 업력만큼 유지됐다가 그 업력의 종자의 힘이 소멸되면 사라지게 되는데 이를 의타기성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은 중생의 공통적인 업으로 만들어진 것은 기세간이라고 해서 이 우주를 말하고, 중생 개인이 스스로 지은 업은 자신의 수명이나 성격, 환경, 일가친척 조건 같은 것을 만드는데 이것도 유구한 것이 아니고 인연생 인연멸이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을 알아서 마음이 속지 않게 하기 위해 의타기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에 대해 여러분들이 이것을 관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지켜보면 이게 변계소집의 공인가 의타기성의 공인가를 알 수 있는데 보통사람들은 변계소집성의 공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한 의타기성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호법보살은 변계소집성의 공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이러한 것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가슴에 와 닿는 사람들이 그러면 근본적인 진리가 뭐냐고 했을 때 자기 마음자리의 상태를 깨닫는 것인데 그걸 견성했다고 하고 그 상태를 원성실성이라고 해서 이것을 쉽게 얘기하면 주관도 공하고 객관도 공하고 그것이 공하다고 하는 견해도 공하다고 하여 이를 삼공(三空)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 공이라는 것은 불자로서 부처님의 제자로서 윤회는 벗어나고 중생을 교화함에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고 이것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모르고 나름대로 정신을 모으고 6식이 뛰어나고 이런 것을 쓰다보면 결국에는 이것이 변계소집을 증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생에서나 다음 생에서 좋지 않은 업의 결과가 되므로 반야심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공의 분류를 다시 시작합니다.

공의 분류는 크게 현상이 공한 것과 본체가 공한 것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상이 공한 것은 여러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대하는 일체 것들이 결국은 자기 생각에 의해서 덧칠해진 것들이고 결국 인연력에 의해서 유지됐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떠한 정보나 지식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주로 수행을 해서 도를 알게 되면 이를 아라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진리적인 공을 깨닫는 이들 만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보살님들이 깨달은 것을 원성실성의 공이라 하고 이것은 진리적인 공인 것입니다. 결국은 공에도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다가 뭔가 깨달은 것 같이 느껴지는데 사실은 변계소집성 안에서 허덕이는 것일 뿐인데 스승이 없다보니 그게 도라고 착각을 합니다.

공의 분류. 공용(공의작용-공을 사용하는 법)은 법과 번뇌의 근원이 되는 분별적 사유가 지멸하는 상이다. 이게 조금 전 스님이 이야기한 것을 보면 진리도 공하고 현상도 공하다고 했는데 중생이 어떠한 업을 짓고 어떠한 번뇌를 일으켰어도 근원이 되는 그것은 우리의 분별에 의해서 인식되는 거니까 그런 것들이 사라진 상태는 공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알려면 수행을 해야만 터득을 하는데 수행자들이 이것을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옛 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했던 내용이 바로 공을 터득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터득을 안 하게 되면 어떠한 진리를 들어도 다 독이 되는 겁니다. 가령, 기독교의 신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기쁨과 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나 지옥을 준다 했는데 이것을 공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신은 믿을 만한 신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감정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 교리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잡신이며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 입장은 무엇이냐 하면 분별 사량이 들어가지 않는 자비를 쓸 때  만이 공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스님처럼 여러분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하지만, 여러분 입장에서 누구를 봤을 때 편협한 시각으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상대를 받아들이게 되면 기독교의 신이 받아들이는 내용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이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평등한 신은 인간들이 다가와서 기도를 해도 들어주면 안 되는 게 진짜 신입니다. 인간이 와서 애걸복걸한다고 마음이 움직이면 차별된 마음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태풍이 일어나서 천지는 수많은 생명을 잃게 되는데도 태풍은 과보를 안 받아요. 그것은 내다하는 마음이 사라진 공평무사한 마음자리에서, 진리 자리에서 나타난 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의 신처럼 나를 믿으면 복을 주고, 안 믿으면 복을 안 준다 했을 때, 이미 중생의 마음에 떨어졌고, 삼공(三空)의 도리에 어긋나기에 그것은 압력의 신, 즉 잡신일 뿐입니다. 관음, 문수 같은 분이 중생을 제도할 때 무연선교라 하는데 나와 인연이 없어도 ‘선교’ 즉, 방편을 베풀어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슬람이나 신을 믿는 종교를 보면, 그 종교를 믿어야 만이 어떤 축복도 받고 행운도 얻는다 했는데 보통 인간세상에서 어진 마음을 쓰는 사람조차도 이런 마음은 안 씁니다. 공을 터득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참선이나 수행을 할 때 빠르게 증득할 수 있는 것이 무심이라 했습니다. 누가 나한테 잘해준다 해서 거기에 홀리거나, 나에게 못 되게 한다 해서 거기에 성질을 내는 것은 이미 분별지에 떨어졌기 때문에 무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로는 공을 증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공용(空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용은 업과 번뇌의 근원이 되는 분별적 사유가 지멸하는 상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기도를 할 때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되면 마음의 내면에 들어가서 내면에 있는 여러분의 참된 성품에 있는 여러분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만 매개 수단일 뿐이지 부처님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무엇을 준다 하면 기독교의 신과 똑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기도를 해도 어떤 이는 성취가 되고, 어떤 이는 성취가 안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청탁과 지혜에 달린 것이지 부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것을 다 들어 준다고 했을 때 부처님은 귀가 따가워서 잠도 못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불교신자 중에 애걸복걸 안 하는 신자는 없을 겁니다. 스님만 해도 몇 안 되는 신자들이 집안에 무엇 일이 있으면 스님에게 와서 다 물어 보는데, 사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겁니다. 각자 지은 업을 스님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성을 알지 못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또 공성은 주체와 객체, 존재와 미존재, 생사와 열반 등의 극단적 상대적 분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는 무분별지의 지혜이다.’ 이래서 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을 체득을 하게 되면 이것을 알게 되므로 허망하게 바깥에서 구하는 마음이 딱 끊어져 버려요. 그래서 한번 마음을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다른 사람의 언어와 논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것은 지식이지만 자기의 것은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공성의 의미는 무분별지의 지혜에 의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진의 상을 공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진의 상을 유식에서 이야기할 때 원성실성인데 이것을 보았을 때 견성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결국은 이 성품을 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어떠한 도리를 이야기해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종교가 있고 종파가 있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심종, 마음의 법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하나 더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되던, 교리가 되던,  약 이 심종인 공법(空法)을 이해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고치지 않으려 해도 고치지 않을 수 없는 묘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공함을 보면 분별이 소멸하는가?’ 아까 삼공이라 했는데, 자기가 일으킨 생각이 망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변계소집성의 공을 이야기하고, 내 눈에 펼쳐진 객관세계와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것이 인연생, 인연멸이라는 의타기성의 공, 그리고 그런 것이 다 사라져도 그런 것에 영향 받지 않는 자리인 자기의 본래성품인 원성실성의 공, 이것을 알게 되면 분별이 자연히 소멸이 되게 되죠. 이 세 개가 다 분별이 이르지 못해야 만이 깨칠 수 있는 자리기 때문입니다. 공을 알게 되면 분별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함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면 분별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선하는 선방에서는 깨치기 전에 수행하는 것도 다 마군의 업이라고 합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깨친 자리에서 봤을 땐, 그것도 의도적인 마음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좋기 때문에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공함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기 전에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공을 설하는 이유입니다. 공함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기 전에는 누가 여러분에게 잘 대해주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홀연히 일어나고, 빈정대면 나쁘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좋고 나쁜 것은 기준이 내 입장이거든. 그래서 내 입장이라는 것이 공함을 알지 못하는 이상은 여러분들이 일으키는 일체견해가 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마음을 먼저 깨닫지 않으면 다 마군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법처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지혜로써 공을 요별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본성 자체가 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을 순간순간 체득할 수 있는 것이 기대하던 것이 딱 이루어졌을 때 부족함이 없을 때 자기 견해가 안 들어 갈 때의 그 훈훈하고 행복한 마음이 바로 공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함을 알려면 공을 알아야 나오는 것입니다. 

‘공은 감각기관이나 마음 작용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마음을 다 감각기관으로 쓰는 마음입니다. 

조금 전 내 방에서 책을 번역 하고 있는데 밖에서 보살들이 고추에 대해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맵고, 빨갛고, 모기가 물고 등등 이것이 고추에 대한 상념들입니다. 결국은 감각기관으로 객관세계에서 물든 상간에 마음자리를 등지고 사는 거라. 이것을 ‘배각합진(背覺合塵’ 이라 하는데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합해진 마음이라. 이러한 마음을 상사심이라 하는데 여러분들이 평소에 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공은 감각기관이나 마음의 작용으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뛰어난 것이 화두선입니다.  옛날에 어느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물었는데 마른 똥 막대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감각이나, 지식, 이성, 이런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뛰어넘으면 부처자리가 나오거든. 그래서 화두법이 가장 빠르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스님이 여러분에게 공이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 친절한 것이 아니고, 우는 아이에게 누런 낙엽을 주면서 이게 돈이라 하여 아이의 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일 뿐이지. 밥이나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두라는 것은 바로 밥이나 떡을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조주 스님에게 ‘달마 스님이 왜 서쪽에서 왔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뜰 앞에 잣나무’라 했거든. 여기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감각, 지각, 의식, 논리 이런 걸로 이걸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그 알 수 없는 한 마음으로 의심해서 들어가 이걸 깨뜨리게 되면 바로 공을 체득하게 되기 때문에 화두선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의심이 일어나려면 교학적으로 준비가 되어야 의심이 일어납니다. 공은 감각기관이나 마음작용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서 감각기관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색수상행식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공을 체득 하려면 대상의 일반적 모습이나 개별적 모습까지 대상화하지 않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도를 못 깨닫고 왜 중생 노릇을 하고 부처가 되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파악해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 습관의 중심이 저것이 나에게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이 제일 첫째 전제 조건입니다. 나에게 이롭은가 해로운가, 이로우면 좋고 해로우면 싫은 것인데, 보통 인간들은 내가 싫으면 다른 사람들도 싫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롭고 해로움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맘의 탐욕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대상화의 조건이 나를 기준으로 하는 대상화인데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쓰는 마음의 낱낱이 이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공을 체득하지 않는 이상은 어떤 수행을 하고, 어떠한 정신 통일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이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아프간에 가서 인질로 붙들렸다 돌아와서도 반성이 없었는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많은 적이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방법은 유일한 방법은 공성을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공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허망한 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을 이야기하는 자체는 허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탐진치에 물든 그 마음을 깨뜨릴 수 있는 묘한 힘이 공 밖에 없기 때문에 공도 여기에선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제조건이 무분별지입니다. 그러면 공을 체득하려면  분별심, 다른 말로 차별심인데 내 입장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한 금강경에 나오는 보살이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무분별지가 일어나면 공함을 보게 되고 이어서 번뇌의 원인인 희론과 분별이 사라지고 공성이 체득 된다.’ 그럼 이 무분별지를 체득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수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왜 하느냐 공성을 증득하기 위해서 한다. 공성을 왜 증득하느냐? 무분별지가 나와야 되기 때문에, 그럼 무분별지는 어떻게 증득하느냐? 마음을 닦아야 되는데 그 닦는 방법을 불가에서는 참선수행이라 합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 이것은 모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서 부처님하고는 아무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가서 옛 부터 내려오는 관습대로 초하루, 무슨 재일 등등해서 불공하고 목탁치고 공양하고 하는데 부처님이 그걸 받아먹겠습니까?  거기 있는 주지스님이 갖다 먹겠지. 그건 불교가 아닙니다. 수행을 가르치지 않고 수행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불자가 아닙니다. 그건 사자 몸의 사자벌레같이 부처님 법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어디 가서 불자라고 하는데  행동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대한 아무 견처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 그것이 미신이고 기복인데, 불교신자는 다 저러려니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안 하면서 절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법 가운데 내법을 망치는 사람은 내법에 대해서 수행을 안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자신충’ 이라 해서 사자가 힘이 세서 어떤 짐승도 사자를 해치지 못하지만 사자 몸 안에 있는 벌레들이 사자 몸을 갉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다닌다 해서 다 같은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다니는 겁니다. 여기서 공을 왜 이야기 하느냐하면 수행을 해야 되는 당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칫 절에 다니면서 본인은 부처님에게 공을 들였다고 생각하지만 부처님입장에서는 법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보면 선교사들이 자기가 선교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를 욕을 먹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모릅니다. 제 마음은 안 들여다보고 남의 마음만 닦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닦지 않는 이상 남에게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닦은 사람은 원만한 지혜와 평등심이 나오기 때문에 광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배우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이 공을 배우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공법을 설하는 것은 악견을 버리기 위함이다’

악견이라는 것은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악견 중 가장 큰 악견이 ‘내다’하는 마음에 의지해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이나 참선이 잘 안될 때 일상생활에서 겸손하게 한 생각 쉬는 연습을 하게 되면 이 악견이 쉬게 됩니다. 다른 말로 내가 감정적으로 손해를 볼 줄 알면 이것이 악견이 아닙니다. 그런데 악견이란 것이 감정적으로 손해를 안 보려고 하다 보니 생기게 됩니다. 참 단순한데 일상생활에서 참 안됩니다. 부부사이, 친구사이에서도 안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이 악견만 비워도 죽어서 삼악도에는 안 떨어집니다.

우리가 공을 왜 배우느냐? 아공 내가 실재하지 않음을 알아 악견을 비우기 위해 배우는 겁니다. 보살이 되려면 법공까지도 배워야 되고, 부처가 되려면 일체개공까지 배워야 됩니다.

 ‘그런데 도리어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하여서는 안 된다’ 

수행하는 입장에서 가장 큰 악견은, 아견은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기에 문제가 안 되고 수행자가 떨어지기 쉬운 것이 공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공에 대해서 ‘텅 비었다’ ‘말할 수 없다.’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마음을 못 봤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공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이란 것이 우리의 번뇌 망상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란 것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사실은 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분별입장에서 봤을 때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공’이라고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공’이라는 언어에 떨어져서 다시 ‘공하다’라고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공’이라는 언어에 떨어져서 다시 ‘공하다’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건 미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악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속제란 일체의 모든 법은 생기하지 않으므로 본성이 공하지만, 중생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망령되이 집착을 내므로 세간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전도몽상을 한마디로 요약했는데 진리입장에서는 일체 모든 것이 일찍이 난 바가 없는데, 중생은 허망한 허깨비 같은 소견이 붙어 나라는 소견에 의해 세상이 실재하다고 믿고,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삼악업을 짓습니다. 여기서 세속제란 뭐냐? 본성은 원래 공한 것이며, 아까 이야기한 변계소집성, 여러분들이 일으킨 견해는 여러분들 입장에서 얘기한 거니까 공한 것이고, 여러분이 보는 일체 세간은 인연에 의해 잠깐 머물렀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래서 공한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착각을 해서 내일 모레 죽을 사람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세속제가 공한 것을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면 찬물이 있는데 이 찬물의 본성품은 빨간 것도 아니고 파란 것도 아니고 젖는 성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커피나 다른 것을 타게 되면 색이 변하게 되는데 중생은 감각에 의해 판단을 하게 되므로 물의 젖는 성품을 잊어버리고 변한 그 색깔이 실재하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 색깔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그 색깔을 세속제라 하는데 이 세속제의 본성은 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거꾸로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망령된 업이 쌓임으로써 온갖 고통을 다 짊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을 진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 중생들이 얘기하는 세속에 대한 견해입니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세간의 전도 된 성품들을 요달하고 있으므로ㅡ즉 본래 공한 것을 알아요ㅡ어떤 사람을 봤을 때 ‘잘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아, 내가 잘생겼다는 견해로 저 사람을 보는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려서 그 사람은 거울에 비친 형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현성들은 어떠한 사람, 어떠한 경계하고 부딪혀도 자기가 잘못 마음을 일으키는 즉시 알아차려 마음이 즉시 쉬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선가에서는 ‘돈오법’이라 그러는데 몰록 깨닫고 몰록 쉰다는 것입니다. 돈오돈수법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법이 공하며 자성이 없음을 안다.’ 나한테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는 상간에 ‘아! 내 입장에서 이 사람을 판단했구나.’ 하는 생각이 쉬어버리면 기분 나쁜 것은 자성이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공을 요달한 사람은 세상을 이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물을 우유라 해도 맞고 독이라 해도 맞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입장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 그렇게 하게 편협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서 쓰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인에게는 이 제일 의제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견성을 해서 공을 알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을 알아야 마음이 쉴 수가 있고 자유롭게 무심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모든 삼세의 수행인들이 이 마음을 증득하고 이 마음 쓰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여 이제(二제;진제,속제)에 의하여 설법을 하신다.’

윤회, 인과에 대한 것들은 유치원 수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박사 석사 수준의 사람에게는 그런 것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한마음을 보여 깨닫게 하는 것 외에는 얘기를 안 해요. 근기가 안 되는 사람이 반야심경을 들으면 그것을 왜하나, 내가 왜 여기 와 있는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 세속제를 배워야 됩니다. 부처님 법 가운데 세속제를 설명한 것이 12연기, 오온 이런 것들입니다. 오온이 공하다 했는데 세속의 것은 일체가 공하다 이걸 얘기한 겁니다. 오온을 반야심경에서는 나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세상을 설명할 때도 12연기로 다 됩니다. 그래서 12연기나 오온이 실재하다고 하는 것은 제일의제를 모르는 것이고, 즉 원성실성, 우리 마음자리의 참된 진리를 모르는 것이고, 12연기법에 의해서 나와 내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되는데 12연기나 오온이 실재하다고 하는 것은 중생의 고집입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이것을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것이 실재하지 않으면 인과도 없고 선악도 없다고 얘기는 하게 되는데 이것은 세속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두 가지를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중도를 수행하는 사람이고, 한 가지만 취하고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관계를  끊어버리면 이 사람은 밥도 안 먹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사람들이 농사지어 밥을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공에 떨어진 사람이 공의 입장에서 다 허망하다고 하게 되면 인과가 없다고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세속제를 모르게 되어요.

청변스님과 호법스님이 왜 대립이 되었냐 하면 청변스님이 공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근기가 낮은 사람은 인과를 무시하게 되거든. 그래서 호법스님이 인과가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를 하여 의타기성에 의해 유지되는 이 세상을 인정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공만 이야기해도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이걸 해라 마라 할 것 없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공이라 해도 허물이 없었는데, 근기가 낮아지게 되면 중생들은 꾀를 부리고 약게 되어 쉽게 뭔가 하려 다보니 공하다고 하면 세속의 선악 같은 것들에는 관심을 안 가져도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용수는 공성의 개념을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적정하며’ - 사실 바로 이 한구에 마음자리를 다 설명한 것입니다. -‘희론에 의해 분별함이 없으며’- 희론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자기 머리만 굴려 이거다 저거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피스트가 희론자입니다. 그러니까 공의 자리는 희론에 의해 분별함이 없음이니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이것이 분별입니다. 그런데 공의 자리는 우리의 참 마음의 성품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의미를 나한테는 나타내지 않는 것, 이것이 진리의 상이다.’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라는 것. 공의 입장에서 보면 중생들이 제 깜냥만큼 선글라스를 쓰고 세상이 붉다, 푸르다, 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인데 빛깔이 없었을 때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게 공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공이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공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면 내가 거기에 내 견해를 넣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나 없음을 증득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증득해야 비로소 현인이고 성인이고 보살이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에 책을 많이 읽고, 말을 잘하고 이거 아무 쓸 데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부처님한테 복 달라고 와서 불공을  드리고, 아무개 스님이 염불 소리가 좋아서 복 많이 받을 것 같다느니 하는 것은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도 안 됩니다. 그래서 해탈은 업과 미혹을 없앤 것이니 고가 소멸하면 해탈이며 해탈의 전제 조건은 반드시 마음의 공함을 깨우쳐야 됩니다.

분별은 업과 미혹을 일으키니 공함을 보면 분별이 소멸한다. 

우리가 반야심경의 공을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걸 배우고 나서 수행을 하여 증득하라는 얘기입니다. 수행의 목표, 방법이 뭔가를 모르고서 수행만 하면 외도가 됩니다. 수행 좀 하던 스님들이 귀신 들려가지고 예언도 하고 큰 박수무당이 되고, 무슨 종파를 만들어서 종정 노릇하는 사람도 많이 봤는데 이것이 수행하다 외도가 된 것이고 마가 든 것입니다. 올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마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한 생각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마인 것을 아는데 거기에 뭐가 달라붙을 수가 없습니다.

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긴 했지만 이건 설명으로만 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첫째 청변 보살은 한 예에서 일삼이라 그랬는데 일이삼사성이라 그렇게 이야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변계소집성이 일이고 두 번째가 의타기성이고 셋째가 원성실성 중에 앞의 두 자성을 내버린다. 이건 철저하게 공에 충실했던 겁니다. 용수보살 계통이기 때문입니다. 청변스님은 반야 중관계통이기 때문에 그걸 내버려서 일체가 공하다 했는데 왜 그런가 하고 참선을 하면서 관을 해보니까 상근기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상근기에게는 마음이 너무 영명하고 밝아서 일체가 공하다 해도 공하다는 상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두 가지 변계소집과 의타기성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청변스님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인과 연에 의한 것은 공하다고 중론에서 말한다.’ 즉 원인과 그 원인에 의한 인연, 이것이 부딪혀서 만들어낸 결과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펼쳐지는 모든 경계는 세간법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용이 됩니다. 원성실성을 성철스님은 중도라 그랬는데, 제일의제 공하되 공하지 않는 자리, 삼라만상이 이것의 힘에 의지해서 춘하추동이 만들어지고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자리기 때문에 공할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무궁무진한 자리인데 인간의 감각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온갖 견해를 없애버릴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인 ‘공’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삼자성의 오온은 모두 공하다. 청변스님은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이것도 이것에 의해서 오온은 모두 공하다 그러는 겁니다. 오온이 뭐냐 하면 여러분이 ‘내다’라고 하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도 결국, 이 논리에 의하면 모두 공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원성실성도 공하다고 했는데 여러분이 그것은 감각이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설명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른 말로 진공묘유라고 합니다.

그래서 장진론에는 ‘무위는 실체가 없어서 생하지 않는 것이 허공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허공꽃은 눈에 병이 든 사람만 보이지, 병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허공에 꽃이 없습니다. 이건 진제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 다음 호법보살은 첫째 세 종류의 오온 중 오직 변계소집성의 오온만 내버림으로써 공성을 판단한다. 그런데 낮은 근기들은 공하다 하니 머리 깎고 산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도 닦는다고 착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스님들도 도반들 간에 두 부류가 있어서, 하나는 고고하게 산 속에서 공부하는 스님도 있고, 공부도 하고 시절의 인연을 따라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스님은 후자를 선호합니다. 전자를 선호하는 사람은 해제 때 되면 만나서 꼭 한판 선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후자 입장에서 법을 설하는 게 바로 호법 보살의 유식 계통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망념 중 변계소집성이 없으면 의타기성이 중생을 물들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진공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앞의 변계소집성만 부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것이 공한 것을 모르더라도 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일으키는 감정이나 판단을 절대적이라고 착각만 안 하면 변계소집성에 속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근기들이 공부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선 인연에 의해 잠시 머무르는 몸이나 세계는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인정한다고 해서 진짜로 인정하는 게 아니고, 모두를 알아서 잠시 인연에 의해 머무르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입장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용수보살 계통에선 그것  조차도 다 쳐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문을 듣는 근기차이고, 법문을 듣는 근기 자체가 몇 백 년 뒤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소화를 못하니까 방편을 나타낸 것입니다. 

지금부터 오온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스님이 거꾸로 공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나서 오온을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온은 존재의 다섯 가지 조건이야. 어떤 생명체가 존재하려면 다섯 가지 쌓임이 있어야 존재로서 실재한다. 그래서 여기서 오온은 존재의 다섯 가지 조건으로 인연으로 나타난 생명작용이다.

그래서 오온을 크게 나누면 물질적인 육체와 정신적인 작용인 수상행식인데, 이것을 12연기에선 명과 색이라 합니다. 명(名)이란 이름인데, 개념적인 것으로 정신적인 작용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색은 물질적인 것이야. 어떤 물체가 있을 때 다른 물체가 그것을 통과할 수 없는 것이 색입니다. 이 우주관에는 일체의 것을 크게 나누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있는 것의 내용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배우는 것은 매우 근원적인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존재의 두 가지 양면이라는 것입니다.

오온의 문자적 뜻이 무더기 또는 집단이지만, - 그러니까 다섯 가지 무더기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의 의미는 정신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때 더 잘 전달된다.’ 사실은 정신과 물질적인 구성요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에서 첫 번째 구성요소는 물질, 색입니다. 

‘물질로서 개체성의 분리된 존재의 시작이며 주관과 객관으로 들어가는 경험의 경계선이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냐하면 물질 즉, 내 몸을 기준으로 해서 개체라는 감각이 일어납니다. 그 감각이 일어남으로써 나와 남이 갈라지는데 이것이 여기서 얘기하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는 제일 초입이 바로 ‘색’이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게 되면 공부 깊이에 따라서 색온이 녹아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고 수온이 녹아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고, 각각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목탁을 쳤을 때 목탁은 물질인데 소리는 물질일까요, 아닐까요? 이것도 물질입니다. 물질이라 하면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만 물질이라 하는데 귀에 들리는 것도 물질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해내는 영상도 물질입니다. 그것을 법처소색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물질에 의해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 듣는 자와 들리는 자, 생각하는 자와 생각되어지는 영상이 분리가 되죠. 주관과 객관이 물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나와 남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에 이걸 깨트리지 않고 진리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어떻고 도가 어떻고 하는 것은 악견입니다. 이걸 깨트리려면 수행을 해서 증득을 해야만 합니다. 

부연 설명을  하면 ‘지금 외부세계에 대하여 발달되지 않은 자각이 있다.’ 발달되지 않은 자각(self Aware)이란 아는 자기, 아는 마음인데 이것이 어떤 경계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았을 땐 아는 상태로 그대로 있기 때문에 자각조차 못하는데 그게 자기의 참모습인데, 이걸 선가에서는 ‘공적영지’, 텅 비어 없지만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자리가 있어요.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성이라 합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인데 그것이 자각되지 않은 자리에서 색이 나타나서 색을 보는 순간 비로소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보는 마음과 보이는 세계, 주관과 객관이 만들어 지면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만들어집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지만 불교에서는 마음법을 들여다보게 되면 천지는 내가 매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해 내가 판단한 내용물들이 업에 의해서 형성이 되면 다음 생에 자기가 살 수 있는 세계가 물질화되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색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외부세계에 대하여 아직 발달되지 않은 자각이 있다. 이 순간 자아는 주변 환경에 대하여 반응을 한다.’ 주변 환경에 대하여 반응할 때는 여기서 유식계통에서 유식의 제 8아뢰아식, 무명식인데 그 마음이 자기라고 착각한 그 마음이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라식입니다.  이것을 두 번째 단계에서 느낀다. 반응한 결과가 뭐냐 하면 어떠한 대상을 보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느낌을 받아 색에 의해서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고 그 색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스님의 목소리를 CD를 통해서 들으면 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가 와서 보니 강하게 생겼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라는 색에 의해서 듣는 자와 들려지는 자가 만들어지고, 거기에다가 정보가 하나씩 만들어지는데 느낌이 만들어져요.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인 수(受 )입니다. ‘이것은 단지 본능적인 좋아함과 싫어함, 또는 무관심 같은 것으로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감정이다.’ 여기서 본능적인 것이란 본래 깨끗한 그런 뜻이 아니고, 무명에 의해 더럽혀진 내 입장에서의 본능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느낌이라도 내 입장에서 봤잖아요. 이미 더럽혀진 무명 입장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길들여 놓은 만큼 느끼는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끊었다가 술집 옆을 지나갈 때 냄새를 맡게 되면 침이 흐르게 되는데,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오온의 내용은 자기 업에 의해 형성된 만큼의 오온입니다. 자기가 잘생기고 못생기고 지혜롭고 어리석고 함에 남 탓할게 하나도 없고. 부모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 애들은 왜 우리부모는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부모 탓이 아니고. 자기가 그런 부모를 택해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부모가 미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부모가 미안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직 충분히 발달되자 않은 감정이다.’ 했는데, 전생에 심어 놓은 느낌만큼만 느끼기 때문에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생에서 살면서 자기 나름대로 기호가 생겨서 자기식의 느낌을 넣을 수는 있는데 그건 조금 있다는 거지.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으로 집중된 실재가 수동적일 뿐 아니라, 능동적인 재반응을 통해 더욱 복잡하게 변한다. 이것이 세 번째단계인 상(想 )이다.’

상이란 생각이잖아요. 예를 들면 느낌에 대해서 이 스님이 부드러운 줄 알았더니 실제로 보니 강한데 조금 한 발짝 물러설까 하게 되는데 이게 상입니다. 사람이 순간적으로 이걸 다 쓰잖아요. 이걸 깨트리는 것이 도 닦는 것이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행동지침을 깨트리는 것이 도 닦는 것이니 스님이 일념단속하라는 것은 바로 이 오온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걸 닦게 되면   어딜 가든지 진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감각 상태에서 자아가 자극을 느끼면 자동적으로 그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하는데 그것이 네 번째 구성요소인 행(行;의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업이 형성이 됩니다. 조금 전까지는 느낌이나 생각에서 멈춰지는데, 행에 도달하게 되면 취사선택하는 마음이 툭 튀어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행이며, 이것이 업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업력이 형성되지 않는데, 그것은 과거의 습관대로 그냥 나타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에서 부터는 자기 의도가 들어갑니다. 이 의도도 엄격히 말하면 과거에 자기가 했던 습관만큼 의도가 들어가게 됩니다. 남의 흉보기 좋아하던 사람은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자기가 안 하려해도 남을 흉을 보게 되는데 이게 행입니다. ‘그것은 물건을 모으고 성격과 행위의 패턴을 조성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식하는 감각과 마음의 결합인 의식이 있다.

색에 대해서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면서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에 대해서 자기생각이 들어가고, 생각에 의해서 그것을 실천하는 행(의지)이 만들어지게 되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을 종합적으로 이것은 무엇 이라고 결정짓는 마음을 ‘식(識:6식, 현재 의식)’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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