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분 연기(大乘正宗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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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4 18:34 조회 17,431 댓글 0본문
(3-1)수부티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고뇌가 없는 영원한 평안에 들게 하리라> 하는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알로 생기는 생명, 태로 생기는 생명, 습기로 생기는 생명, 변화하여 생기는 생명, 형태가 있는 생명, 형태가 없는 생명, 생각이 있는 생명, 생각이 없는 생명,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생명 등 모든 생명을 <고뇌가 없는 영원한 평안>에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3-2)이와 같이 모든 생명을 <고뇌가 없는 영원한 평안>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상은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되어 들어온 생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3-3) 왜냐하면, 수부티야.
보살은 존재하는 것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3-4)그러므로, 수부티야.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닌 것이다.
(해설)
1.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목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목적하는 것이 있어야 그것을 향하여 줄달음치고 노력하여 성취하게 된다. 불교를 믿는 자들의 목표는 바로 부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먼저 깨달음의 성취로 부처가 되는 것이 목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가 되기 위한 기본이 자비심이다. 자비심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으로 더불어 잘 사는 마음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고뇌가 없는 영원한 평안에 들게 하리라> 하는 큰 서원이 함께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금강경에서 공에 대한 설명으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atman(자아)를 아상我相, java(개체)를 인상人相, pudgala(개인)를 중생상衆生相, sattva-samjna(살아있는 것들이 실존한다는 생각)를 수자상壽者相으로 번역하였다. 저자는 아상을 <내가 있다는 생각(아상我相)>, 인상을 <상대가 있다는 생각(인상人相 )>, 중생상을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중생상衆生相)>, 수자상을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수자상壽者相)>으로 번역하였다.
3. 이 사상은 금강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이다. 연기사상이 공사상으로 체계화 되는 것이 대승불교의 특징인데, 금강경에서는 아직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부처님 당시 사용하던 용어를 사용하여 공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이 깨친 연기를 이루는 두 가지 속성이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시간적인 관점에서의 인식이기 때문에 이해가 된다. 모든 사물과 생명들을 바라보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수자상이다.
4. 무아사상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중요한 사상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독립된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너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나와 너는 서로 독립된 실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존재의 속성을 바로 인식해보니까 나라고 주장할 독립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이 독립되어 있는 것 같은데 바닷물을 모두 걷어 내고 보면 아시아대륙도 아프리카 대륙도 아메리카 대륙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독립된 실체로써 아가 존재할 것 같은데 공간적인 관점에서 깨달음의 눈으로 바로 인식하면 독립된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성 나타내는 자아, 개체, 개인 등은 아我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단어들을 통하여 무아를 인식시키려고 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꼭 이루어야 되겠다는 서원은 현실에 만족하여 안주할려고 하는 현실주의로부터 벗어나 끝없이 튀어오를려고 하는 용수철 처럼 더 높은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이상주의의 삶을 살게 하는 가장 좋은 묘약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맹세보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은 없다. 던져 놓으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철저한 회귀의 본능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겠다고 서원하면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포기할때
가장 위대한 불멸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서울대에 갈려고 원을 세우고 공부하는 대한이라는 학생과 공부를 하다가 성적에 맞는 대학을 갈려고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민국이라는 학생을 한번 비교해보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을 입학했을때 두 학생의 성적은 반에서 10등 정도로 비슷하였다. 서울대에 갈려고 마음먹은 대한은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꾸준하게 공부를 하였다. 모든 생명들이 깨어나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그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의 유혹도 목표를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으며 공부하였다. 공부가 되지 않을 때도 학교에서 고전 문학이나 철학 책들을 뒤적이면서 마음이 가라 앉아 공부가 될 때까지 기다리곤 하였다. 3년을 그렇게 보낸 대한이는 결국 자신이 목표한 서울대에 합격하였다. 비슷한 성적으로 입학한 민국이는 뚜렷한 목표도 없이 되는대로 공부하였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도 하였으며 공부가 되지 않을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그냥 놀곤하였다. 처음에는 중학교 때 친했던 대한이에게 함께 놀자고 여러번 말했지만 대한이가 듣지 않자 혼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다. 3학년이 되어 다른 친구들처럼 열심하였지만 성적이 향상되지도 않았다. 결국 3류 대학에 겨우 합격하여 자신의 3년 생활을 돌아보니 절실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 때문에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한이와 민국이의 대학시절을 한 번 더 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한이의 대학시절은 밤 세워가며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기도 하며 자신의 하루하루를 절실하게 보냈는데 비해 민국이의 하루하루는 전공 공부를 하던 다른 모임에 나가던 대충 시간 때우기였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결론을 하나 얻게 된다.
절실한 사람은 평생을 한결같이 절실하게 보내는데 비해 절실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절실하지 못하게 보내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삶은 절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 뿐만아니라 모든 생명들을 깨달음을 이루게하여 영원한 자유와 평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어떻겠는가!
높고 큰 서원만큼 자신의 삶을 절실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가난한 한 여인이 있었다. 가진 것이 없는 이 가난한 여인은 이 집 저 집 다니며 품을 팔았지만 성실하고 거짓없이 살았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온 성이 떠들썩하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석 달 동안 성안에 머무신다고 합니다. 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석 달 동안 옷과 음식과 침구를 공양하며 오늘 밤에는 수 만개의 등불을 켜서 연등회를 연다고하여 이렇게 성이 축제 분위기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가난한 여인은 그날 품팔이로 받은 동전 두 냥으로 몽땅 기름을 사버렸기 때문에 저녁을 굶어야 했다. 작은 연등을 만들어 부처님이 머물고 계시는 처소에 나아가 등불을 달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서원을 하였다.
’보잘것없는 등불이지만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나도 부처가 되어지이다.’
밤이 깊어 모든 등불은 다 꺼졌는데 가난한 여인의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난이 이 등불을 아무리 끄려고 애를 썼지만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다. 그 여인은 이 등불의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대왕은 급히 부처님을 찾아와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올린 자신의 공덕은 가난한 여인의 공덕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기에게도 깨달음의 수기를 달라고 부처님을 졸랐다.
‘대왕이시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쉽고도 어려운 것이오. 그것은 하나의 지극한 베품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수천의 베품으로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스스로 겸손하며 남을 존중해야 하오.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되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닦으면 뒷날에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오.’
결국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큰 서원은 깨달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괴로움이 없는 영원한 평안의 세계에 들게 하리라>하는 분명한 서원은 깨달음의 세계에 계합하는 관문인 것이다.
생명있는 모든 것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에서부터 조류, 이끼, 진균류, 종자식물, 해면동물, 강장동물, 편충류, 성충류, 연체동물, 전항동물, 완족동물, 환형동물, 이끼동물, 극피동물, 절지동물, 척추동물, 영장류 인간에 이르기까지 약 백칠십만종에 이르는 모든 생명들을 괴로움이 없는 영원한 평안의 세계에 들게 하겠다고 서원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에는 먼지나 돌과 같은 무생물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배가 바다를 항해할 때 목표가 정해져 있으면 쉽게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처럼 서원이 분명하면 그 서원 따라 쉽게 목적지인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목적지에 다달았을 때 주어지는 댓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온통 목표뿐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존재 본질에 대한 바른 인식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
(諸法無我)가 금강경에서는 諸法無我에 대한 견해를 <내가 있다는 생각(我相)>, <상대가 있다는 생각(人相)>,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衆生相)>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諸行無常에 대한 견해를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壽者相)>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영원과 절대를 부정하고 초월하므로써 존재 본질의 세계 -- 공(空)의 세계 -- 를 열고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에 얽메여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추구한다면, 또 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추구한다면 그는 존재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존재의 본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쫓아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존재의 본질은 연기로서 나타내어 진다.
이것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걱이 없고
이것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수행자란 바른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앞 생각이 청정하고 뒷 생각이 청정한 것이 보살菩薩이요, 생각마다 퇴타하지 않고 비록 진로塵勞가 있으나 항상 청정한 것이 마하살摩하薩이다. 또한 자비를 희사와 종종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보살이요, 능화能化와 소화所化에 취착取着함이 없는 것이 마하살이다. 일체 중생을 공경하는 것이 항복기심降伏其心이다.
참 됨에 처하는 것이 이름이 불변不變이요, 여여如如에 계합하는 것이 이름이 불이不異이며, 어떤 경계를 만나더라도 마음의 변이變異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진여眞如다. 또한 밖으로 거짓 되지 않는 것이 眞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 것이 如며, 생각마다 어긋남이 없는 것이 是다.
난생卵生은 미迷한 性이요, 태생胎生은 습習한 性이며, 습생濕生은 阿를 쫒는 性이고, 화생化生은 변화하는 性이다. 미迷하기 때문에 업을 짓고 습하기 때문에 항상 유전하고 阿를 따르니 마음이 일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고 나아감에 빠지고 떨어짐이 많다. 마음을 일으켜서 옳고 그름을 망령되게 보며 안으로 무상의 이치에 계합하지 못하는 것을 유색有色이라 한다. 안으로 마음의 정직함만 지켜서 공경 공양을 행하지 않고 진심을 부처로 보고 복과 혜를 닦지 않는 것을 무색無色이라 한다. 중도中道를 요달하지 못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법상法相에 애착하여 입으로는 부처님의 행을 말하지만 몸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유상有想이다. 미혹한 사람이 좌선을 하는데 단번에 망상을 없애려고만 하고 자비희사와 지혜방편을 배우고 행하지 않아 목석木石과 같이 작용이 없는 것이 무상無想이다. 또한 두 가지 법상에 애착하지 않는 것이 약비유상若非有想이요, 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약비무상若非無想이다.
만 가지의 번뇌는 다 다르고 더러운 마음이며, 몸의 형상이 수 없이 많으나 이름하여 중생이라 한다. 그러나 여래가 대비大悲로 널리 화해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는 것이다.
멸도滅渡라는 말은 여래가 삼계三界 구류九類에 있는 중생들에게 열반 묘심妙心이 있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무여에 들게 한 것이다. 즉 무여無餘란 습기 번뇌가 없다는 말이다. 열반涅槃이라는 말은 삼덕三德이 원만하고 삼혹三惑이 청정하여 일체의 습기를 멸진함으로써 다시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度는 생사고해를 건넌다는 뜻이다. 부처의 마음은 평등해서 일체 중생과 함께 원만청정한 무여열반에 들어가 생사대해를 함께 건너 모든 부처의 증證한 것과 같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록 깨닫았지만 소득심所得心이 있어 도리어 아상我相을 낸 것을 법아法我라 한다. 이 법아를 다 제하는 것을 멸도滅度라 한다.
여시如是는 앞의 법을 가르키고 멸도滅度는 대해탈이다. 대해탈大解脫은 번뇌와 습기와 일체의 모든 업장이 멸해서 남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량 무수 무변중생이 일체 번뇌와 탐진의 악업은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으로 이를 끊지 못하면 해탈은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시멸도 무량무수무변중생如是滅渡無量無數無邊衆生이라 한다.
미혹한 사람들이 자성의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상을 보지 않고 자신의 지견을 두지 않는다. 어찌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다만 범부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해, 상에 집착하여 무위진리無爲眞理를 요달하지 못하고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없애지 못하여 중생이라 한다. 만일 이 병을 여의면 중생은 멸도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망심妄心이 없는 곳에 보리가 있고 생사열반이 본래 평등하니 또 무슨 멸도가 있을 것인가?
중생과 불성이 본래 다르지 않는데 사상四相으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이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부처인 것이다. 또한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다. 미혹한 사람은 재산과 학문과 족성族姓을 믿고 모든 사람을 경멸 하기 때문에 이름이 아상我相이다. 비록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하나 스스로뜻이 높다고 하여 공경을 행하지 않고 [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하기 때문에 마땅히 상대를 공경하지 않는다.]하는 것이 인상人相이다. 또 좋은 일은 자기 공으로 돌리고 나쁜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다. 경계를 대하여 취하고 버리는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이니 이것이 범부의 사상四相이다. 수행자에게도 사상이 있다.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 중생을 경멸하는 것이 아상我相이요, 스스로 계행을 잘 지킨다고 믿으며 파계한 사람을 경만 하는 것이 인상人相이며, 삼도三途의 고苦를 싫어하고 제천諸天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다. 그리고 부지런히 불법을 닦아 오래 살기만을 원하여 집착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이다.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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