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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분 빈 손 빈 마음(無法可得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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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14 18:44 조회 12,97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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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수부티야,

여래는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하는데 성취된 무엇이 있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의 성취>에는 이루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22-2)그렇다. 그렇다. 수부티야,

깨달음의 성취에는 성취했다고 인식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이름이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인 것이다.




​(해설)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남악 회양(677 - 744)이 하루는 6조 혜능을 찾아 갔다. 혜능이 회양에게 물었다.

‘한 곳에 틀어박혀 수행이나 할 것이지. 그래 어디서 왔느냐?’

‘숭산에서 수행을 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여기에 왔느냐?’

혜능의 이 물음에 회양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묻고 싶었던 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금니을 깨물며 물러 나왔다. 8년의 세월이 흘렀다. 혜능에게서 들은 어떤 물건이 여기에 왔느냐?하는 물음이 한 시도 회양을 떠나지 않았다. 낙엽이 지는 어느 가을 날 회양은 떨어지는 낙엽을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길로 바로 혜능을 찾아 갔다.

‘저는 깨달은 것이 있어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래,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야단스러우냐? 깨달았으면 그만이지.’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어떤 물건이 있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해도 이 세상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달라지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이 철저하게 달라져 있을 뿐이다.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원래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확장일 뿐이다. 숫자를 100까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공부를 하여 숫자 

1000까지 익히는 것과 같은 문제이다. 100까지 알고 있을 때는 100이 전부일줄 알고 100이 가장 큰 숫자 일줄 알고 모든 것을 100으로 표현할려고 하였다. 1000까지 알고 난 다음에는  100이라는 숫자는 수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작은 영역인줄 알게 된다. 또한 100이라는 숫자는 1000에 포함되는 부분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인식이면서도 깨달음과 계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남악 회양이 부처가 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정진하고 있는 마조를 찾아 갔다. 조그마한 암자에는 젊은 수행자가 혼자서 오로지 좌선만을 하면서 정진하고 있었다. 몇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누가 찾아 온 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변소에 갈려고 깨어났다. 회양이 먼저 물었다. 

‘젊은 수좌여, 무엇이 될려고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는가?’

‘오직 한가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좌선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회양은 주위를 둘러보고 깨어진 벽돌 한장을 주워 와서는 돌에 갈기 시작했다. 마조는 그 스님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여 변소 가는 것도 잊은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스님, 벽돌을 갈아 어디에 쓸려고 하십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스님! 벽돌을 아무리 간다해도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자네는 앉아만 있다고 부처가 되는줄 아는가?’

검은 고무신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흰 고무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벽돌을 아무리 열심히 갈아도 벽돌일 뿐이며 거울이 되지 않는다.

이미 거울이기 때문에 갈고 닦으면 깨끗한 거울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더럽혀져 있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처를 갈고 닦아 밝게 드러나게 할 뿐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부처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도달해 있는 부처라는 목적지를 깊이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부처가 될려고 한다는 생각은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이미 부처인 것을 정말 부처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인 것이다. 

깨닫지 못한 미혹의 세계와 깨달은 부처의 세계는 숫자 100과 1000에 대한 인식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에 의한 형상이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인 미혹의 세계와 형상에 의한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인 깨달음의 세계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숫자 100이 미혹의 세계라면 숫자 1000이 깨달음의 세계이다. 미혹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부처인 것이다. 


별빛이 쏟아지는 야밤 삼경인데

저기 저 숲속에서 댓바람 절로이고

‘뎅그렁’ 풍경소리 허공을 헤메는데

법당에서 졸고있는 부처만 한가롭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수보리가 [얻은 바 마음을 다한 것이 보리]라 말씀드리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내가 보리에 희구希求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얻은 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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