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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분 부처의 마음(知見不生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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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711회 작성일 21-07-1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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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수부티야,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나에 대한 생각>, <상대에 대한 생각>, <다른 생명들에 대한 생각>, <영원한 것에 대한 생각>에 관하여 말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안다고 하겠느냐?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생각>을 말했지만 <내가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의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내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2)수부티야,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은 형상 있는 모든 것의 관계를 보고 알아야 하며, 그러면서도 형상이라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31-3)왜냐하면, 수부티야,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의 관계>라는 것,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고 여래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의 관계>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의 관계>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해설)

앞 장의 결론에서는 형상 있는 모든 것을 철처하게 타파하였다. 여기서는 다시 그 형상의 존재 가치를 강조하면서 형상의 타파에 의한 허무주의에 머무를 것이 걱정이 되어 다시 형상을 긍정하고 있다. 

결국 공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지만 공의 세계의 완성은 형상의 본질을 바로 인식함으로서 형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가 고요하고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번뇌 망상 속에 있는 것이다. 

중국의 대익이라는 사람이 봄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녀도 찾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집 뜰에는 살구 꽃이 만발하여 있었고 새들이 즐겁게 지저기고 있더란 이야기가 있다. 

결국 깨달음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마음으로부터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인 것이다.       

수보리야,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은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의 관계를 알아야 하며, 형상에 머무르면 좋다 크다하는 분별심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형상이라는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생각도

상대에 대한 생각도

다른 생명들에 대한 생각도

영원한 것에 대한 생각도

모두

마음의 여울.


천년을 흐르고

또 천년을 흐른다해도

이 우주에 내가 있을 확율은

지금의 내 모습뿐인데.


무엇을 탐하여  마음을 낼까?

무엇에 집착하여 마음을 낼까?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여래가 이 경을 설하심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반야지般若智를 깨달아 보리를 증득하는 행을 닦게 한 것이다. 범부는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여래가 아我.인人 등의 견見을 설한다] 하면서 여래의 무상無相.무위無爲의 반야바라밀법般若波羅蜜法을 알지 못한 것이다. 여래가 설한 바 아我.인人 등의 견見은 범부凡夫의 아我.인人 등의 견見과 다르다. 여래가 [일체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 설한 것은 참 아견我見이요, [일체 중생의 무루지성無漏智性이 본래 스스로 구족具足했다] 설한 것은 인견人見이며, [일체 중생이 본래 번뇌가 없다] 설한 것은 중생견衆生見이요, [일체 중생이 본래 스스로 부생不生.불멸不滅하다] 설한 것은 수자견壽者見이다.

 보리심을 발한 자는 마땅히 일체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음을 알며, 마땅히 일체 중생의 무루종지無漏從智가 본래 스스로 구족具足했음을 알며, 마땅히 일체 중생의 자성自性이 본래 생멸生滅이 없음을 알 것이다. 비록 일체의 지혜 방편으로 물物을 접接해 중생을 이롭게 할지라도, 능能.소所의 마음은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입으로 무상無相의 법法을 설하지만 마음에 능能.소所가 있으면 법상法相이 아니요, 입으로 무상無相의 법法을 설하고 마음으로 무상행無相行을 행해 마음에 능能.소所가 없으면 이름이 법상法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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