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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분 복덕과 공덕(持經功德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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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304회 작성일 21-07-14 18:40

본문

(15-1)수부티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으로 아침에 갠지즈강의 모래수 만큼 많은 베풂을 행하고, 낮에도 또한 갠지즈강의 모래수 만큼 많은 베풂을 행하고, 저녁에도 갠지즈강의 모래수 만큼 많은 베풂을 행하기를 한량없는 세월 동안 행하여도 이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기만해도 이 복덕이 더 큰 것이다. 

(15-2)하물며 이 법문을 읽고 쓰고 깨달아 알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준다면 그 복덕은 말해 무엇하겠느냐!

(15-3)수부티야,

이 법문은 가히 생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공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이익 되게 하겠다는 큰 마음을 낸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법문을 설하며,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큰 마음을 낸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법문을 설하는 것이다. 

(15-4)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깨달아 알며,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다면 이 사람은 진리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없는 많은 공덕을 쌓아 마침내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15-5)수부티야,

믿음이 약한 사람이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이 경을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15-6)수부티야,

이 법문이 있는 곳이면 어떤 곳이든지 그 곳의 하늘과 사람들과 귀신들이 우러러 받들어 공양을 올릴 것이다.

(15-7)마땅히 알아라.

이 법문이 있는 곳은 바로 부처님이 계시는 것과 같으니 우러러 받들어 공경할 것이며, 꽃을 뿌리고 향을 흩어 거룩하게 해야 한다.



​(해설)

1. 복덕福德과 공덕功德 

공덕과 복덕은 인과의 관계이다. 공덕이 인이고 복덕은 과가 된다. 이 생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사는 것은 복덕이며, 잘 살 수 있도록 전생에 착한 행위를 한 것은 공덕이다. 공덕은 복덕을 나타나게 하는 씨앗, 즉 원인이며, 복덕은 공덕의 뿌리로 나타나는 열매인 결과이다. 복덕성은 공덕과 같은 뜻이다.   


2. 무량의 공덕 

경은 무량의 공덕이 있다. 경을 잘 이해하고 인식하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은 세세생생 흘러가면서 언젠가는 모든 생명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에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량의 공덕이 있는 것이다. 


3. 불탑신앙에서 불탑에 공양 올리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의식 행위이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경전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시는 것과 같으며, 불탑을 모셔 놓은 것과 같아서 하늘 나라 사람들, 이 세상 사람들, 귀신들 모두가 꽃을 뿌려 장엄하고 공양을 올려야 한다. 경이 부처 부처인 것이다. 

  

우리는 간혹 이쪽 산과 저쪽 산을 막아 댐을 만드는 것을 본다.  

끋없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공간에 언제 물이 다 찰 것인가? 하고 막연한 생각을 한다.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그 댐이 있는 지역을 지나가다가 보니 댐에는 물이 가득차 있고 배가 떠다니며 군데 군데 낚시꾼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산의 위쪽 골짜기에서 졸졸 흘러 들어오는 조그마한 물줄기가 5, 6년이 되면 끝도 보이지 않는 그 넓은 산 골짝들을 물로 가득 채워 놓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이 흘러 내리는가 궁금하여 물줄기를 따라 산 위로 올라 갔는데 거의 산의 정상쯤 되는 조그마한 웅덩이에서 물이 졸졸 흘러 나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밑에 물이 고여 있는 댐은 복덕과 같은 것이고 산 위에 있는 물이 퐁퐁 솟아 나오는 웅덩이는 공덕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복을 많이 짓더라도 그 복의 과보는 끝이 있는 것이며 아무리 적은 양의 공덕이라도 그 공덕은 눈덩이 처럼 자꾸 불어나 커지는 것이 공덕인 것이다. 

수보리야,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면서도 정말 결과가 그렇게 되겠는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어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면서도 그 일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야구선수가 경기를 하면서 어떤 공을 어떻게 때릴 것인가 하는 한 생각 때는 공을 던지고 때리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지만, 관객을 의식하고 경기의 승패를 의식할 때는 벌써 삶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자신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 하더라도 깨달음 때문에 밝게 빛날 것이며 귀신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이 있는 곳에는 감히 침범하지 못하며   우러러 찬양하는  것이다.

향엄은 재기가 번뜩이고 분석력이 뛰어났고 논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경전과 율장과 논장에 매우 밝았다. 그러나 본래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향엄이 깨닫지 못해 매우 초조해 하는 것을 보고 스승인 위산이 하루는 조용히 향엄을 불렀다.

‘그대는 경전의 한 구절을 보면 열 구절을 이해하는 총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그래서 묻겠는데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에 너는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향엄은 가슴이 탁 막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제 까지 즐겨 보았던 모든 경전을 몇 일 동안 뒤적여 보았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탄식과 절망을 되풀이 하면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향엄을 정처없이 행각을 떠났다. 

어느 날 남양지방을 행각하다가 남양 혜충의 부도탑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북바쳐오르는 환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그 곳에서 몇 일을 머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루는 부도탑 근처 잡초를 깍고 있다가 잡초사이에 버려져 있는 깨어진 기왓장이 있어 멀리 던졌는데 그것이 묘하게도 맞은 편 대나무에 맞아 딱! 하는 맑은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에 향엄은 이제까지 메여 있었던 나와 상대와 모든 생명과 영원에 대한 분별적인 집착을 벗어나 태어나기 이전의 소식인 <참나>를 보게 되었다.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하는 소리에

문득 나와 우주가 하나 되고 보니

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옛길을 넘나드니

내가 걷는 이 길과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옛 길이 둘이 아니네

가는 곳마다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빛과 소리를 벗어난 몸짓이네

천하의 도를 아는 이들은 

그냥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네.


향엄은 위산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면서 말했다.

’스승이시여, 만일 그 때 저에게 말해주었다면 저는 죽을 때까지 <참나>를 보지 못하고 말의 노예가 되어 이 생을 허송세월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야 진정한 삶이 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토록 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말법末法의 시대에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信心을 거스러지 않으면 사상四相이 생기지 않는다]했으니 이것이 곧 부처님의 지견智見이다. 다겁多劫에 신명身命을 버린 공덕보다 승勝하여 백천만억百千萬億으로도 가히 비유하지 못한다. 경을 듣기만 하여도 그 복이 큰 데 하물며 능히 쓰고, 수지受持하고, 독송해 남을 위해 해설하면 그 복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분명히 성취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이같은 경전을 설하여 모든 相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니 그 공덕이 끝이 없는 것이다. 대개 다겁多劫에 신명身命을 버려도 제상諸相의 본공本空을 요달하지 못해 능사能捨와 소사所捨의 마음이 있으면 원래 중생의 견見을 여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을 듣고 도를 깨쳐 我아.人인이 돈진頓盡하면 언하言下에 부처님을 뵐게 될 것이다. 몸을 버린 유루有漏한 복은 경을 지닌 무루無漏한 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비록 십방十方의 보배를 모으며 삼세三世에 몸을 버려도 이 경의 사구게四句偈를 갖는 것보다 못하다.

 경을 갖는 사람은 마음에 我아.所소가 없다. 我아.所소가 없기 때문에 부처의 마음이다. 그래서 공덕은 [가히 칭량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승자大乘者는 지혜가 광대廣大해서 능히 일체법을 건립하는 것이다. 최상승자最上乘者는 더러운 법을 싫어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깨끗한 법의 구함도 보지 못하고 중생의 제도함도 보지 못하며 열반의 증득함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도 짓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는 마음도 짓지 않는다. 또한 최상승을 일체지一切智.무생인無生忍.대반야大般若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이 발심해 무상도無相道를 구하여 무상無相 무위無爲의 법을 듣고 신해信解.수지受持해서, 사람을 위해 해설하고 깊이 깨쳐 훼방毁謗하지 않고 대인력大忍力과 대방편력大方便力을 얻으면 이는 경을 유포流布함이 되는 것이다.

 상근上根의 사람이 심오한 이 경전을 듣고 부처님의 뜻을 깨달아 자심경自心經을 내어 견성見性할 것이다. 또 능히 이타利他의 행을 일으켜 사람을 위하여 해설하고, 모든 이로 하여금 무상無相의 理이를 스스로 깨달아 본성本性 여래如來를 보게 하여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룰 것이다. 법法을 설說하는 사람의 공덕은 끝이 없어서 가히 칭량할 수가 없다. 경을 읽고 가르침과 같이 수행하고 사람을 위해 널리 설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無相 무저無著의 행을 깨달아(얻어) 수행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행하면 곧 대지혜大智慧 광명이 있어서 진로塵勞를 여읠 것이다. 그러나 진로塵勞를 여의나 진로塵勞를 여읜다는 생각을 짓지 않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그래서 여래를 가담苛擔한다라고 이른다. 이 경을 갖는 사람은 스스로 무량무변 불가사의의 공덕이 있는 것이다.

 소법小法을 즐기는 자는 이승성문인二乘聲聞人이 소과小果를 즐겨서 대심大心을 발하지 못하고 대심大心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如來의 깊은 뜻을 수지受持 독송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으로 반야般若를 외우고 마음으로 반야般若를 행해, 재재처처在在處處에 항상 무위無爲 무상無相의 행을 행하면, 이 사람이 있는 곳에는 불탑佛塔이 있는 것과 같다. 일체의 인천人天이 공양을 올리고 예禮로써 공경하고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감득感得할 것이다. 능히 경을 수지受持하는 자는 마음 가운데 세존世存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불탑묘佛塔廟와 같다] 이른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의 지은 바 복덕은 무량 무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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