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분 다시 세상으로 내려와(究竟無我分) > 금강경강의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금강경강의

제 17분 다시 세상으로 내려와(究竟無我分)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288회 작성일 21-07-14 18:41

본문

(17-1)부처님이시여,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합니까?

(17-2)수부티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마음을 내었으면 먼저 <생명 있는 모든 것을 깨달음에 들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17-3)왜냐하면 수부티야,

보살이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이미 보살이 아닌 것이다.

(17-4)그리고 수부티야,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마음을 낸 자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5)수부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연등부처님 밑에서 수행할 때 존재하는 법이 있어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얻었겠느냐?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연등부처님에게 어떤 법이 있어서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17-6)그렇다. 수부티야,

실로 존재하는 법이 있어서 부처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부처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 

‘젊은 수행자여, 그대는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은 실상이 없으므로 연등부처님께서 나를 보시고 ‘젊은 수행자여, 그대는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7-7)수부티야,

여래라는 것은 궁극적 실체를 드러낸 존재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여래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지금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실재로는 깨달음의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17-8)수부티야,

부처가 깨달아 보인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에는 진실한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불법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17-9)수부티야,

일체 법이라는 것은 일체 법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법이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법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일체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7-10)수부티야,

몸이 수미산만 하다고 할 때 몸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몸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17-11)부처님이시여,

수미산만한 몸이라고 말한 것은 몸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몸이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수미산만한 몸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수미산만한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7-12)수부티야, 

보살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내가 많은 생명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들게 하였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닌 것이다. 

(17-13)왜냐하면 수부티야,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허망하여 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냥 살아있는 것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17-14)수부티야,

어떤 보살이 <내가 이 세상을 부처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부처의 나라가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부처의 나라>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처의 나라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부처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해설)

1. 이제까지 앞에서 설했던 것을 총정리하고 있다. 

보살이 되기 위하여 마음을 낸 자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때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관조(정념)하고, 또 존재의 본질에 몰입하여(정정)하여 무아를 인식하고 존재가 연기적임을 알게 되면 육근(안이비설신의)의 나와 육경(색성향비촉법)의 대상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여기서 끝없는 자비가 일어나며 ‘생명있는 모든 것을 깨달음에 들게’하겠다는 서원은 저절로 발하게 되고, 실천하게 된다. 


2. 수기授記

수기는 무한한 가능성의 암시이며, 끝없는 긍정의 세계이다. 

연등불이 젊은 수행자에게 ‘다음 생에 부처를 이룰 것이며, 이름을 석가모니라 할 것이다’의 수기는 모든 생명에게 던지는 깨달음의 메시지인 것이다. 

수기를 통하여 생명있는 모든 것이 다 부처라고 선언한 것이다. 


3.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보게하는 끝없는 자비는 이 세상 그대로가 부처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불법이 아닌 것이 없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불법인 것이다. 


4.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것은 형상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형상은 인연에 의하여 성주괴공할 뿐 원래 없는 것이다. 


5. 장엄莊嚴

부처님께 공양 올리며 자신을 장엄하는 것도,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어 살기 좋은 세상으로 장엄하는 것도 ‘나가 있다’는 생각에서 보면 나도 있고 세상도 있지만 ‘나가 없다’는 무아의 인식에서 보면 나도 세상도 원래 없는 것이다. 인연의 화합에 의하여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할 뿐이다. 단지 홍길동이라는 이름으로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본질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철저히 깨달아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깨달음의 세계로 유도하였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수십번씩 반복해가면서 강조하고 있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여기서는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번역하였는데, 과연 이것들이 무엇이길래 부처님께서 그 만큼 강조하였을까?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제법무아에 대한 인식이다. 

제법무아라는 것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있다는 것의 부정이며, 나라는 것의 부정이며, 영원히 존속되는 나의 본체에 대한 부정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에 의해 생성되었다가 존재하다가 소멸된다는 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이다. 

아함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케마라는 남자 수행자가 병이 들어 코상비의 교외에 있는 고시다정사에 누워 있었다. 다른 수행자들이 문병을 와서 주고 받은 대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한 수행자가 케마에게 물었다.

’어떤가, 견딜만 한가?‘

’어찌나 아프고 괴로운지 견딜 수가 없다.‘

그러자 그 수행자가 케마를 위로할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께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케마의 반응은 천만뜻밖이었다. 

‘아니, 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문제가 되어 나이가 많은 수행자들까지 병상에 나타나 따지고 들었다. 케마가 그들을 설득시킨 논지는 꽃을 비유한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었다.

‘벗들이여, 내가 <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육체가 나라는 뜻은 아니다. 또 이 감각작용이나 의식이 나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떠나서 따로 나가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벗들이여, 그것은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꽃송이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다고 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줄기에 향기에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겠는가. 

모두 틀리지만 그렇다고 꽃을 떠나 향기가 난다고 하겠는가. 어쨌던  향기는 꽃에서 난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육체나 감각이나 의식을 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떠나서 따로 본질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보고 그냥 <나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그래서 연등부처님께서 나를 보고 그대는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할 것이다라 하신 것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행무상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구적이며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에 대한 철저한 인식인 것이다. 사물의 존재실상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변화하는 실체로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세계인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극락이라는 것도 형태를 이루고 있는 형상이 아니라 이름이 극락인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형상은 <나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집착>, <다른 생명들에 대한 집착>, <영원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생긴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나라는 것은 없다>, <형상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수행자로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구를 찾는 것이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묻기를 [여래가 멸한 후오백세後五百世에 만일 사람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자는 어떠한 법에 주住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하여야 합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 해 부처를 이룬 뒤에는 한 중생도 내가 제도한 이가 없는데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능能과 소所의 마음을 제除하기 위함이며, 중생이 있거니 하는 견見을 제除하고 또한 아견我見을 제하기 위함인 것이다] 했다.

 중생이 제도됨을 보면 아상我相이요,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인상人相이며, 열반을 구하리라 생각하면 중생상衆生相이요, 열반의 증함을 보면 수자상壽者相이니, 이 사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아我.인人. 중생衆生.수자壽者의 사법四法을 제除하지 않으면 끝내 보리菩提를 얻지 못한다. [나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여도 역시 아我.인人 등의 법이므로 번뇌의 근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승의 처소에서 사상四相을 제除하지 않고 수기授記를 얻었겠느냐?] 하니, 수보리는 상相이 없는 이치를 알기 때문에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시如是]란 부처님의 뜻에 잘 계합한다는 것이므로 곧 인가印可의 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실로 아我.인人.중생衆生.수자壽者가 없어야 보리기菩提記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만일 보리심을 발함이 있었으면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授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연등불이 비로소 나에게 보리기菩提記를 준 것]이라 하신 것이다. 이 일단문一段文은 수보리가 무아無我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제법여의諸法如義]의 제법諸法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으로 육진六塵 중에서는  잘 분별이 된다. 본체本體는 담연하여 물들지 않고 착着하지 않으며, 변이變異함이 없고 허공과 같이 부동不動하여 원통圓通하고, 맑게 사무쳐 겁劫을 지나도 항상 있는 것이 제법여의諸法如義인 것이다.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에서 말하기를 [?방 謗하고 칭예稱譽함에 동動하지 아니한 것이 여래행如來行]이라 하였고, <입불경계경入佛境界經>에 이르기를 [모든 욕欲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경예敬禮를 관觀한 바가 없다]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은 바 마음이 없어서 보리菩提를 얻었다]라는 것은 얻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보리를 얻은 것이다. 이 마음을 여의면 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실無實]이라 한다. 얻은 바 마음이 적멸寂滅해서 일체一切의 지智가 본래 있고 만행萬行이 다 뚜렷이 갖추어 항하사恒河沙 같은 덕성德性을 사용해도 줄어듬이 없기 때문에 [무허無虛]라 한 것이다.

 모든 법을 마음으로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또한 능能.소所가 없어서 일체법을 성하게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해 일체법이 불법임을 안다. 미迷한 자는 일체법一切法을 탐착貪着하여 불법이라 하므로 일체법一切法이 불법이 아닌 것이다. 또 마음에 능能.소所가 없고 고요하며 항상 비추어서 정定.혜慧를 행하고 체體.용用이 일치하기 때문에 [일체법一切法]이라 한다.

 여래가 [인신人身의 장대長大함이 곧 대신大身이 아니다] 설한 것은 일체 중생의 법신法身은 둘이 아니며 한량이 없으므로 이름을 대신大身이라 한 것이다. 또한 법신法身은 본래 처소가 없기 때문에 대신大身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색신色身이 비록 크나 지혜가 없으면 대신大身이 아니다. 색신色身이 작으나 지혜가 있으면 대신大身이라 이름한다. 비록 지혜가 있으나 행하지 못하면 대신大身이 아니다. 교敎를 의지해 수행하여 부처님의 무상無上의 지견知見을 깨달아 마음에 능能.소所와 한량限量이 없으면 이 이름이 대신大身인 것이다.

 보살이 만일 [나의 설법으로 인하여 저 사람의 번뇌를 없앤다] 말하면 이것이 곧 법아法我요, [내가 능히 중생을 건졌다]하면 아소我所가 있는 것이다. 비록 중생을 도탈度脫하지만 마음에 능能.소所가 있어서 아我와 인人을 제하지 못하면 보살이 아니다. 종종 방편을 설하여 중생을 화도化度 하되 마음에 능能.소所가 없으면 곧 보살인 것이다.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능히 세계를 건립建立하였다] 하면 보살이 아니요, 세계를 건립建立하나 마음에 능能.소所가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성대하게 세계를 건립하지만 능能.소所의 마음이 나지 않아야 보살인 것이다. <최승묘정경最勝妙定經에서 말하기를 [가령 어떤 사람이 백은白銀의 정사精舍를 삼천대천세계三天大天世界에 가득 지었다 할지라도 한 순간의 선정심禪定心만 못하다] 했으니, 마음에 능能.소所가 있으면 선정禪定이 아니요 능能.소所가 나지 않아야 선정禪定인 것이다. 이 선정禪定이 곧 청정심인 것이다.

 저 모든 법상法相에 막히는 것이 없는 것이 통달이요, 법法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이 무아無我의 법이다. 이 무아법無我法을 설한 여래가 참 보살인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베풀고 행하는 것도 보살이지만 참 보살菩薩은 되지 못한다. 해解와 행行이 원만圓滿해서 일체의 능能.소所의 마음이 다하여야 참 보살이 되는 것이다.


(17-15)수부티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것은 없다>, <형상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다> 라고 철저히 깨달아 안다면 그는 진정한 보살이 되는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217
어제
7,616
최대
7,694
전체
1,252,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