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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분 마음을 꿰뚫고(非說小說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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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4,135회 작성일 21-07-14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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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수부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법을 설했다는 생각이 여래에게 일어나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법을 설했다>는 생각이 여래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21-2)수부티야, 바로 그렇다.

<여래가 법을 설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21-3)수부티야,

<법을 설한다>는 것은 원래 설해져야 할 법은 없는 것이니 그 이름이 설법인 것이다.

(21-4)부처님이시여,

이천오백 년 후 바른 법을 믿는 사람이 없을 때 이러한 법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21-5)수부티야, 그런 생각 하지마라. 믿는 마음을 내는 사람은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부티야,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의 실상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해설)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자. 

첫째 종교의 본질은 보편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제 일의적 명제이다. 

종교의 진리는 초역사적인 진리로서 이 땅의 어는 곳에서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의미를 갖는 보편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종교가 어떤 틀을 갖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그 종교를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본질의 입장에서가 아닌 하나의 현상적인 문제인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계절에 맞는 

옷을 갈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며, 시대에 따라 어울리는 옷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함경을 보면 붓다와 한 바라문이 주고 받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죄도 짓었는데 죽을 때 바라문을 찾아와 천당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구원을 청하여 바라문이 천당에 태어나라고 기도해 주면 그 사람은 천당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에 의심을 품고 붓다을 찾아 왔다. 먼저 바라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붓다여, 마음 속에 풀지 못하는 의문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저희 바라문에서는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라도 우리 바라문이 천당에 태어나라고 기도 해주면 그 사람은 천당에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당신은 당신의 제자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계십니까?’

그러자 붓다는 바라문을 데리고 뒤뜰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연못에 돌을 하나 던지면서 바라문에게 물었다. 

‘바라문이여, 저 돌이 어떻게 되겠느냐?’

‘붓다여, 그 돌은 돌의 무거운 속성 때문에 가라 앉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바라문들이 와서 돌아 떠라 돌아 떠라 하고 기도한다면 저 돌이 떠겠느냐?’

‘아닙니다. 돌은 떠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면 그 사람은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며, 착한 일을 했다면 그 사람은 천당에 태어날 것이다. 

바라문이여,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을 하며, 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둘째 종교가 탄생하게 된 주위 배경과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종교는 상대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종교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종교는 기만적이며 절대성을 갖게 된다.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추구를 위해서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위한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미신적인 <종교숭배>의 형태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셋째 종교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생명력과 설득력을 가진다. 종교는 그 종교가 커기에 가장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문화권과 더불어 열매를 맺는 사회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생명력과 설득력은 사회 속에서 역사와 더불어 존재할 때 의미를 가지는 그 종교 특유의 모습이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진리이다. 부처님이 설하는 법은 진리이며 이 진리는 부처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설해져야 할 법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법을 설했다는 것도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이시여, 2,500년 후 사회 윤리가 허물어지고 바른 법이 흔들릴 때도 법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을때 부처님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수보리야, 

그러한 마음을 내는 사람은 당연히 있다. 진리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사람들도 진리가 존재하는 한 있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있다 하더라도 그 시대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말세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 염려 말고 열심히 수행하여라. 

이 우주는 영원토록 종말이 오지 않는다. 진리와 더불어 영원한 것이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범부의 설법은 마음에 얻음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여래의 설법은 마음에 얻은 바가 없다] 한 것이다. 법부는 마음으로 아는 바를 설하지만, 여래는 언어言語와 묵黙이며 여여如如해서, 말하는 언사言辭가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것처럼 범부가 생멸심生滅心을 지어 설법하는 것과 다르다. 만일 여래의 설법이 마음에 생멸生滅이 있다 하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유마경維摩經>에 말하기를 [대저 법을 설하는 자는 설함이 없고 보임이 없으며, 법을 듣는 자는 들음이 없고 얻음이 없다] 했다.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할 때 일체의 명언名言이 다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공성空性 중에 일체의 언사言辭를 조심하여 제법諸法의 무상無相.무위無爲를 연설演說해, 미迷한 사람을 개도開導하여 본성本性을 보는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수증修證케 하는 것을 설법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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