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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분 깨달음의 시간성(正信希有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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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252회 작성일 21-07-1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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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부처님이시여, 후세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혹은 글귀를 보고 능히 진실한 믿음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

(6-2)수부티야,  물론 있기 마련이다. 부처가 멸한 이천오백 년 뒤에도 계율을 지키고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있어 이 글귀를 보고 능히 믿는 마음을 낼 것이며, 진실하게 여길 것이다. 

(6-3)보살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한두 분의 부처님 밑에서 착한 마음뿌리를 심어 놓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밑에서 착한 마음뿌리를 심어 놓았기 때문에 이 경전을 보고 한결같이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다.

(6-4)수부티야,

여래는 이러한 사람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으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법이다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며, <법 아니다 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6-5)수부티야,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6-6)만약 법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곧 <내가 있다>, <상대가 있다>, <다른 생명들이 있다>,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6-7)(사구게2) 뜻이 이러하기 때문에 너희 수행자들은 여래의 설법이 뗏목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은 말해 무엇 하겠느냐!



(해설)

1. 진실한 믿음(지계) 

진실한 믿음은 올바른 삶에 대한 확신이다. 

부처님이 설한 법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실 때와 금강경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시간적으로 오백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오백년의 시대적 차이에 의한 불교의 신앙 형태는 많이 달라져 있다. 부처님 당시 남자 출가 수행자인 비구, 여자 출가 수행자인 비구니, 남자 재가 수행자인 우바새, 여자 재가 수행자인 우바이의 4부 대중으로 이루어져 있던 교단이 금강경이 성립될 무렵에는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보살사상이 불교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시대적 차이에서 외형적인 신앙의 형태가 변했지만 외형 속에 들어 있는 진리는 같은 것이다. 시대에 따라 겉 옷은 달라질 수 있지만 내부에 들어 잇는 진리는 부처님 당시나 오백 년 후 금강경이 성립될 무렵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은 시대를 초월하여 생명이 존재하는 한 있기 마련인 것이다. 


2. 후 오백년은 금강경이 만들어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후 오백년을 생동감 있게 금강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 맞추어 이천오백 년 후로 한 것이다. 


3. 무아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눌 수 있다. 

나는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상은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식하는 주체인 ‘나’에서 나라고 주장할 만한 독립적인 것이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인무아이며, 인식되는 대상인 ‘육경’도 모두 독자적인 실체를 주장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법무아이다. ‘법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오백년의 단위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방법과 인간 의식의 성숙단계에 따라 보는 관점으로 나눌 수 있다. 

1. 제 1의 500년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이후 부터 500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는 부처님의 정법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살아있는 시기로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이 그대로 믿고 행하므로서 누구나 쉽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2. 제 2의 500년은 제 1기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티끌 만큼도 의심함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분별이 조금씩 개입되는 시기로서 믿음을 바탕으로 바른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가리켜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기라고 한다. 

3. 제 3의 500년은 부처님의 바른 법에 대한 확신이 한계점에 도달하는 시기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부지런히 공부를 하지만 경전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수행정진하는 사람은 드물고 이치에만 밝아 이론과 행위가 일치  되지 않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가리켜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기라고 한다. 

4. 제 4의 500년은 경전을 읽고 외우고 하는 이도 줄어들고 생각하고 수행하기보다는 부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절을 세우고 탑을 세우며 여러 가지 불사에 동참하여 자신와 가족의 복을 구하는 시기이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지않고 물질적인 것으로 충당함으로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가리켜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기라고 한다. 

5. 마지막 제 5의 500년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거의 쇠퇴하는 시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삼으며, 절의 재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며, 일반 사람들을 교화하여 바른 삶으로 인도할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하는 종교의 허상에 갇혀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기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는 회귀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특징중의 하나도 현상을 부정하면서 그 현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 500년의 단위를 인간 의식의 성숙에 따라 살펴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금강이라는 친구는 어릴 때부터 남한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기 것이 크고 좋아야 하는 욕심 덩어리 아이였다. 자라면서도 오직 자기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부와 권력과 명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써 다른 사람의 희생을  서슴없이 자행하곤 하였다.(투쟁견고시기)  

그렇게 하여 돈과 권력, 명예는 어느 정도 확보 했지만 나이가 듬에 따라  불가피하게 찾아 오는 죽음의 문제가 언뜻언뜻 머리에 스치곤 하였다.  정말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과보로 지옥에 가는 것일까?  차츰 방황과 고민이 깊어지면서 이제까지 열심히 모아 두었던 재물을 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져다 바치고 복을 구하면서 자신을 위로하였다. 이렇게 복을 짓는데 극락에 가겠지!(탑사견고시기)

열심히 복을 구하다가 언뜻 ‘복을 구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이 경전 저 경전을 읽게 되었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했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진리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환희에 빠진다. 자신이 살고있는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괴롭고  힘든 일이 자신의 인생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받아들였고 살아가면서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다문견고시기) 

아무리 경전을 읽고 환희로움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생각뿐이고 행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전에 빠져 한마음으로 읽다가 이것은 단지 깨달음에 이르는 처방전일 뿐 깨달음 자체는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생명을 걸고 수행을 행하게 된다. 물 맛을 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물을 찾아 나서게 된다.(선정견고시기) 

자나 깨나 물을 찾겠다는 한 생각뿐이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물을 찾게 된다. 바로 부처님께서 옆에 계시면서 함께 있는 것과 같이 그대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부처를 이루겠다는 생각에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대로 한 생각으로 믿음을 일으키고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듣는 즉시 깨닫게 되고 보는 즉시 깨닫게 되고 행하는 행위마다  법이 된다.  사람 몸을 받아 궁극적으로 이룩해야  할 일을 마침내 해낸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콧노래 흥얼거리며 그렇게 살 뿐이다.(해탈견고시기)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진실한 믿음을 내는 수행자는 시대를 초월하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정법과 비법이 둘이 아니며, 정법시대와 말법시대가 둘이 아님을 보이시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바른 믿음이 확고할 때 해탈견고의 시대가 되며 믿음이 희미해지고 이기심이 가득할 때 투쟁견고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바른 믿음은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 좋고 나쁘고 하는 모든 분별심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한 믿음을 바탕으로한 진지한 행위만 있을 뿐이지 거기에는 <법이다라는 생각>, <법아니다라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우리 불자들의 삶은 뗏목과 같아야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하는 것. 

수보리야,

강을 건너기 전에는 강을 건너고나서도 뗏목이 필요할 것 같아 강을 건너고 난 뒤 뗏목을 지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길을 가다가 은을 한자루 주웠다. 10리 쯤 걸어가니 금이 한자루 떨어져 있었다. 짐이 무거워 두 자루는 들고 갈 수가 없다. 은을 먼저 주웠다고 은을 들고 가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은을 버리고 금 한자루를 들고 목적지로 갈 것이다. 금을 보고 은을 가지고 가지 않듯이 깨달음의 세계를  체험한 사람은 다시는 강을 건너가지 않는다.


내가 살고있는 시대를 탓하랴?

내가 태어난 이 땅을 탓하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탓하랴?

아서라.

내가 선혜와 같이 지극하면

지금 이 자리가 그대로 불토인데.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수보리가 묻기를 [이 법의 뜻이 깊고 어려워 말세의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 오백세후五百歲後에 사람들이 능히 대승무상계大乘無相戒를 가져 상을 취하지 않으며 생사업生死嶪을 짓지 않고 일체의 때 가운데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해서 상을 여의면 그것이 주住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여래의 깊은 법을 터득한 사람은 오백세 후에도 있기 마련이며 이 사람의 언행은 진실해서 믿음직스럽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일겁一劫 이겁二劫 삼사오겁三四五劫에 선근善根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무량 천만억 겁동안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멸한 후 오백세五百世후에 능히 상을 여의고 수행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은 일이삼사一二三四 오불五佛에게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다]하신 것이다.

 선근을 심은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처소에 일심으로 공양하고 교법敎法을 수순隨順하며 모든 보살과 선지식과 사승師僧과 부모와 나이가 많은 이와 덕이 높으신 이와 존장尊長의 처소에 항상 공경 공양하며, 교명敎命을 승순承順해서 그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이 모든 선근을 심는 것이다. 육도六途중생을 살해殺害하지 않고 사기하지 않으며 경천輕賤하지 않으며 훼방하지 않으며 말을 타지 않고 채찍질을 하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항상 요익饒益을 행하는 것이 모든 선근善根을 심는 것이다. 모든 빈궁하고 인고因苦한 중생에게 자민심慈愍心을 일으켜 가볍게 여기거나 싫어함을 내색하지 않고 수구須求하는 것이 있으면 정성껏 은혜를 베푸는 것이 선근을 심는 것이다. 악한 것과도 화목하고 모순矛順된 것도 받아 들이며 인욕을 행해 환희심으로 만나 그 뜻을 어기지 않고 어긋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이 선근을 심는 것이다.

 신심자는 반야바라밀이 능히 일체 번뇌를 없애는 것을 믿으며, 출세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믿는다. 일체 제불의 출생을 믿으며, 자기의 몸 가운데 불성이 본래 청정하여 염오가 없고 불성으로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믿는다. 육도六途 중생이 본래 상이 없음을 믿고 일체 중생이 능히 성불함을 믿는 것을 청정한 믿는 마음이라 한다.

 여래가 멸한 뒤 보리심을 발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수습修習해 깨달아서 부처님의 깊은 뜻을 아는 자가 있으면 제불諸佛이 알 것이다. 상승법을 듣고 한 마음으로 수지해서 반야바라밀, 무상無相, 무착無着의 행을 행하면 아.인.중생.수자壽者의 사상四相이 없어질 것이다. 

 [무아자無我者]는 受수.想상.行행.識식이 없는 자이며, [아인자我人者]는 사대四大가 진실하지 못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는 자이며, [무중생자無衆生者]는 생멸심이 없는 자이다. [무수자無壽者]는 내 몸이 본래 없으니 어찌 수자壽者가 있을 것인가? 사상四相이 없으면 곧 법안法眼이 명철해서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변二邊을 멀리 떠나서 자심의 여래를 스스로 깨달아 영원히 진노망념塵勞妄念을 여의어 자연히 복을 얻는 것이다. 무법상자無法相者는 명名을 여의고 상相을 끊어 문자에 구애받지 않는다. 또한 무비법상자無丕法相者는 반야바라밀법이 없다고 말할수 없으므로 반야바라밀법이 없다 말하면 이는  법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삼상三相을 취하면 사견邪見에 저著하는 것이니  미迷한 사람이 되어 경經의 뜻(삼상이 空공한 것)을 깨닫지 못한다. 수행인은 여래의 삼십이상三十二相에도 애착하지 말며(취상), 반야바라밀법을 안다고도 말하지 말며(법상法相), 또 반야바라밀법을 행하지 않아도 성불함을 얻었다고 말하지 말라(비법상非法相).

 법자法者는 반야바라밀법이요, 비법자非法者는 천상天上에 생生하는 등법等法이다. 반야바라밀법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대해生死大海를 건너가게 한다. 이미 건너가 주主하지 않는데 어찌 하늘에 나는 등等의 법에 약저樂著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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