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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분 깨달음의 존재성(無得無說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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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344회 작성일 21-07-1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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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수부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7-2)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이라고 하는 법을 여래는 지금 깨닫고 있는 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여래가 가르쳐 보여 주셨다는 법도 없습니다. 

(7-3)왜냐하면 여래께서 깨달으시고 설하신 법은 인식할 수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7-4)왜냐하면 모든 성인들은 조작함이 없는 그대로의 법에 의해서 드러내지기 때문입니다. 





(해설)

1.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무위법無爲法과 유위법有爲法이 있다. 

깨달음의 눈으로, 무심無心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때는 무위법이고, 번뇌망상으로 덮힌 눈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위법이다. 행함이 있고, 작용이 있고, 업의 분별심이 작용하여 유위법이다. 

깨달은 성인은 어떠한 행위를 하든 마음을 써든 무위로써 하지만, 깨닫지 못한 현인과 범부들은 어떠한 행위를 하든 마음을 써든 유위로써 한다. 그러므로 현성이 무위로써 차별을 두게 된다. 


우리는 선불교의 화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조주무자’ 화두를 만나게 된다.

조주 종심(778 - 897)의 제자 중에 달정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온 힘을 다하여 참선 수행을 하였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하루는 참선을 하고 있는데 법화경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의 모든 생명체에게는 깨달을 수 있는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이라는 말에 의심이 생겼다. 이렇게 수행을 해도 응답이 없는 자신에게는 부처의 성품이 없는 것 같았다. 도저히 그대로 참선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어 스승에게로 달려 갔다. 스승을 보자마자 자신을 개에게 빗대어 물었다. 

‘스승님, 개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무(無)’

절망에 빠진 제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물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위로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법화경에 나오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부처의 성품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대답했다.

‘잘 들어라. 전생의 업 때문이다.’

여기서 벽에 부딪힌 제자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몇달 후 다시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유(有)’

더 혼돈된 달정이가 물었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면 어째서 개로 태어났습니까?’

‘잘난체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제자가 조주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기 뜰 앞에 있는 잣나무에도 부처의 성품이 있습니까?’

‘암, 있고말고.’

‘그러면 언제 부처가 됩니까?’

‘하늘이 땅에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부처가 된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늘은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부처될 때를 기다렸다가 떨어진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묻고 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조주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깨달음이란 잃고 얻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인식인 것이다.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다시 불교의 위대성을 만나게 된다. 

‘부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부처님께서 평생 보이신 설법은 움직이고 있는 과녁을 맞추는 살아있는 법문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이해시켜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갖고 물어오는 상대방의 문제를 공동 관심사로 하여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 상황을 철저하게 인식시킴으로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진리의 표현은 시대에 맞게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몸소 보이신 깨달음은 초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가르침의 해석은 끊임없이 연구되어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과녁을 꿰뚫을 수 있는 살아있는 법문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때 불교는 역사와 사회와 더불어 살아있는 설득력 있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뇩다라는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我아.所소만 없으면 바로 아뇩다라에 들어가게 된다. 병이 나면 약을 처방해 주는 것처럼 인연따라 설할 뿐이지 정定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의 무상정법無上正法에는 얻음이 없으며 또한 부득不得도 없다. 중생의 소견所見이 여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여래가 중생의 근성根性에 응해 방편으로 개유開誘 화도化導를 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게 한 것이다. 일체 중생의 망심妄心이 생멸生滅하고 경계를 쫓아 앞의 생각이 문득 일어나면 뒷 생각이 마땅히 깨달으니, 그 깨달음이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견見도 없어진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정법定法을 여래의 설함이라 할 것인가? [아阿]는 마음에 망념妄念이 없는 것이요 [욕다라辱多羅]는 마음에 교만이 없는 것이며, [삼三]은 마음이 항상 정정正定에 있는 것이다. [예]은 마음이 항상 정혜正慧에 있고 [삼보리三菩提]는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한 것이니 한 생각에 범부의 마음이 문득 없으지면 불성을 볼 것이다.

 여래의 설한 바 문자장구文字章句에 집착하지 않고 상相이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알음알이(知解)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가취不可取]라고 말한 것이다. 여래가 종종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근기에 따르고 양量을 따를 뿐이지 어찌 언설言說이 정해질 수 있겠는가? 학인學人이 여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교법敎法만을 독송하고 본심本心을 깨닫지 못해 성불하지 못하니 [불가설不可說]이라 말한 것이다.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곧 비법非法이요,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해 마침내 얻을 것이 없으면 곧 비법이 아니다.

 삼승三乘의 근성根性을 알지 못하면 깊은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차별差別이 생기게 된다. 부처님이 설하신 [무위법無爲法]은 곧  [무주無住]요, 무주는 [무상無相]이요, 무상은 [무기無起]이며, 무기는 [무멸無滅]이니, 공적하여 조照와 용用을 함께 비추어 참으로 걸림이 없는 것이 해탈 불성佛性이다.

 불佛은 각覺이며 각覺은 관조觀照며 관조觀照는 지혜며 지혜는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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