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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분 형상을 꿰뚫고(一相無相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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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2,436회 작성일 21-07-14 18:37

본문

(9-1)수부티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수다원이 능히 내가 수다원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겠느냐? 

(9-2)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영원한 평안에의 흐름에 들어간다’는 이름이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평안에의 흐름에 들어가는 그런 형상을 얻은 것도 아니며, 그런 소리를 얻은 것도 아니며, 그런 냄새를 얻은 것도 아니며, 그런 맛을 얻은 것도 아니며, 그런 감촉을 얻은 것도 아니며, 그런 생각의 대상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수다원이 ‘영원한 평안에의 흐름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상대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대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9-3)수부티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사다함이 능히 내가 사다함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겠느냐?

(9-4)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번만 다시 태어나서 깨닫는다’는 이름이지만 실은 가고 옴이 없습니다. 단지 이름이 사다함일 뿐입니다.

(9-5)수부티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아나함이 능히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겠느냐? 

(9-6)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다시는 태어나 오지 않음’을 이름 하지만 실은 오지 않음이 없습니다. 단지 이름이 아나함일 뿐입니다.

(9-7)수부티야, 너의 생각이 어떠하냐?

아라한이 능히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겠느냐? 

(9-8)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존경받을 만한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9-9)부처님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내가 있다>, <상대가 있다>, <다른 생명들이 있다>,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9-10)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를 미혹이 없는 삼매를 얻은 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존경 받을 만하며, 아예 욕망이 없는 아라한이라는 뜻입니다. 

(9-11)부처님이시여, 

저는 존경을 받을 만하며, 욕망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만일 이러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부처님께서는 수부티는 미혹에서 벗어난 행을 즐기며 다툼을 떠난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9-12)무아이기 때문에 수부티라는 실체가 없으므로 실은 행한 바가 없으며, 이름이 수부티일 뿐입니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이 미혹에서 벗어난 행위를 즐기는 것입니다.



​(해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평범한 진리와 만나게 된다.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책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루의 일상생활일 뿐인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상대방을 위하여’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최선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 밖에 없을 때 최선의 사랑은 이루어지게 된다.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 뿐일 때 생활과 이상은 하나가 되어 사랑이 실천되는 것이다. 출가자가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하여 뼈를 깍는 고행과 명상은 수행한다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상생활인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쉴 때 살기 위해서 숨을 쉬어야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숨을 쉬지는 않는다. 그냥 생각없이 숨을 쉴 뿐인 것이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수행을 할때 나타나는 수행의 결과로 주어지는 과(예를 들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다든가, 전생을 안다든가 하는 것)는 단지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며 수행자는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귀종 선 선사는 임제종의 선사였으며, 곽공보는 뛰어난 시인이며 문장가로 귀종 선 선사의 속가 제자였다. 어느 날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 앞으로 편지를 보내기를 6년 동안 곽공보의 집에서 지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곽공보의 부인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 귀종 선 선사가 안방으로 들어오시므로 ‘아이쿠, 여기는 스님이 오실 곳이 아닙니다.’ 하고 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부인의 말을 듣고 곽공보는 자기 앞으로 온 편지를 부인에게 보여 주었다. 

이상하여 다음 날 아침 스님이 계신 절로 찾아갔더니 어제 밤에 열반에 드셨다는 것이다. 

얼마 후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귀종 선 선사의 선宣자를 따고 늙을 노老자를 넣어 선로라고 지었다. 

생후 일 년이 지나자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누구를 보든지 간에 ‘너’하면서 제자 취급을 하였다. 당시 임제종의 백운 단 선사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세 살 되는 어린아이를 안고 백운선사를 마중 나갔더니 아이가 선사가 들어오자 ‘어, 조카 오네.’하였다. 어이가 앖어 백운선사는 아이에게 우리가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서슴없이 ‘4년 되었지. 이 집에서 3년 하고, 이 집에 오기 전에 백련장에서 일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지!’ 하고 대답하였다.     


<수다원>이란 영원한 평안에의 흐름을 탄 자라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역류(逆流)라고 하며 태어남과 죽음의 흐름에 거슬러 육진에 물들지 않는 다는 뜻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첫발을 들여 놓은 자이다.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마음 먹은 자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발심하였으니

이제 남은 일은 먹고 자는 것뿐

잔잔한 저 강에 배 띄우니 

문득 가을바람 불어 저편 언덕에 돛을 내리네.

 

<사다함>이란 한 번만 다시 태어나서 깨닫는 자라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일왕래(一往來)라고 하며 인간에서 죽어 하늘 나라에 태어나 수명이 다하여 하늘나라에서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의 속박에서 영원히 벗어난다는 뜻이다. 


발심이 무르익어 멀리 그림자 보이니

던져 놓으면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이제는 모든 인과의 열매 결정코 익고 말았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다시는 속박의 그물에 걸리지 않네.

 

<아나함>은 이제는 결코 태어나 오지 않는 자라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불환(不還)이라고 하며 애욕의 집착에서 벗어났으므로 다시는 인간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생에 받은 이몸은 마지막 결판장

집착의 씨앗 애욕의 나무 뿌리채 뽑아버리고

호탕하게 웃으며 증도가를 부르니

하늘에서 먼저 알고 옥피리 불며 마중하네. 


<아라한>이란 집착에서 벗어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무쟁(無諍)이라 하며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조복받아 모든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항상 안과 밖이 적적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자유얻어 천지간을 소요하네

모든 분별 떠나보니 삶과 죽음 하나이며

안과 밖이 따로 없어 어딜가도 적적한데

그래도 중생과 더불어 끝없이 나고 죽네. 


부처님께서는 형상을 꿰뚫고 본질을 보라고 가르친다. 수행의 단계에 따라 나타나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의 4과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서 4과에서 주어지는 결과도 단지 이름에 불과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향한 한마음뿐인 것이다. 이렇게 한마음일 때는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산 바람소리, 계곡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것도 모두 산과 바다, 달과 별 같은 자연과 자연의 질서, 자연의  조화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한 마음일 때 <내가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있다는 생각>,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며  수행의 결과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자에게는 도를 이루겠다는 오직 한마음뿐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한가지 상(相)밖에 없으며, 깨달음에 대한 이 상은 이름이 상일 뿐이지 실제로는 상이 없는 것이다.

수보리야, 진정 도를 이루기를 원하느냐?


도를 이루겠다는 오직 한마음

그 마음이 하늘에 이르면 

결정코 견성할 것이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수다원]은 범어며 한문으로는 [역류逆流]다. 생사生死의 흐름에 거슬러 육진六塵에 물들지 않고, 일향一向으로 무루업無漏業을 닦아 진중塵重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서 지옥과 축생과 수라壽羅의 몸을 받지 않는 것이 수다원과다. 만일 무상법無相法을 요달了達하여 과果를 얻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수다원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보리는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류流]는 성류聖類다. 수다원은 번뇌(八十八使)를 여의었기 때문에 성류를 얻는 것이며 수행하는 사람의 첫째 과다. [이무소입而無所入]은 과果를 얻었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사다함]은 범어며 한문으로는 [일왕래一往來]다. 삼계三界의 결박을 버리고, 삼계의 결結이 다했기 때문에 사다함이라 이름한 것이다. 사다함을 일왕래一往來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죽어서 천상天上에 나고 천상으로부터 죽어 다시 인간 세상에 나서, 이 삶을 마지막으로 삼계三界의 업이 다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大乘의 사다함은 모든 경계를 목도目覩하여 마음에는 일생一生 일멸一滅이 있을 뿐 제 이二의 생멸이 없기 때문에 일왕래一往來라 한다. 전념前念이 망妄을 일으키면 후념後念이 곧 멈추고, 전념에 착着이 있으면 후념後念이 곧 떠나기 때문에 실로 왕래往來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다함이라 한다.

 [아나함]은 범어며 한문으로는 [불환不還]이다. 또한 [출욕出欲]이라 하며 출욕은 밖으로 가욕可欲의 경계를 보지 않고 안으로 욕심이 없어서, 욕계欲界를 향해 수생受生하지 않기 때문에 불래不來라 한다. 실로 오는 것이 없다. 또한 이름이 불환不還이니 욕습欲習이 사라져 생生함을 받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아나함이라 이름한다.

 제루諸漏가 다해서 다시 번뇌가 없음을 [아라한]이라 한다. 아라한은 번뇌가 없어지고 물物과 더불어 다툼이 없다. 만일 과果를 얻었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은 다툼이 있는 것이다. 다툼이 있으면 아라한이  아니다.

 [아라한]은 범어며 한문으로는 [무쟁無諍]이다. 무쟁은 번뇌의 끊음이 없으며 탐진貪瞋을 여읠 것이 없다. 심정心情에 어김과 순順이 없고 심心과 경境이 공해 안과 밖이 항상 적적한 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한다. 만일 과果를 증득했다는 마음이 있으면 범부와 같으므로 [아닙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무엇을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하는가? 아라한이 마음에 생멸법래生滅法來가 없고 오직 본각本覺만 있으면 무쟁삼매無爭三昧라 한다. 삼매三昧는 범어며 한문으로는 [정수正受]다. 또한 정견正見이니 구오종九五種의 사견邪見을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중空中에는 명明과 암暗의 쟁諍이 있고 성중性中에는 사邪와 정正의 쟁諍이 있다. 생각이 항상 바르고(正) 사념邪念이 없는 것이 무쟁삼매無諍三昧다. 이 삼매三昧를 닦는 사람이 으뜸이 되니, 만일 한 생각이라도 과果를 얻었다는 마음이 있으면 무쟁삼매無爭三昧라 이름하지 못한다.

 [아난나阿蘭那]는 범어며 한문으로는 [무쟁행無爭行]이다. 무쟁행無爭行은 곧 청정행淸淨行이다. 청정행은 얻는 다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얻는다는 마음이 있으면 유쟁宥諍이지 청정도淸淨道가 아니다. 얻는다는 생각이 없이 행하는 것을 무쟁행無諍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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