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분 마음의 문을 열고(善現起請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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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그때 수부티 장로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걸쳐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합장하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2-2)거룩하고 행복하신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며, 설한 법을 잘 이해하고 있는 보살에게 부처님 대신 법을 설할 것을 잘 부촉하십니다.
(2-3)그런데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가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2-4)착하고, 착하다. 수부티야,
너의 말과 같이 부처님은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며, 또한 불법을 잘 부촉하느니라.
(2-5) 그리고 수부티야, 자세히 들어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수행하며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하는지 설명해줄 것이다.
(2-6)감사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여기 있는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자 원합니다.
(해설)
금강경의 첫 출발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앞으로 전개되는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수월해 진다.
1. 수보리장로에서 장로는 승가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최고의 존칭으로 아름답고 수행집단에 어울리는 적절한 명칭이다.
2. 보살의 등장이다. 부처님 당시 교단에는 남자 출가 수행자인 비구, 여자 출가 수행자인 비구니, 남자 재가 수행자인 우바새, 여자 재가 수행자인 우바이의 네 부류의 수행자가 있었다. 여기에 새로운 불교 집단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으로 보살이 등장하게 된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시기와 금강경이 만들어진 시기는 시대적으로 500년에서 800년의 시간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보살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부처님의 불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재가 수행자의 집단에서 출발하여 점차 집단이 커지게 되어 원래 있었던 정사들의 세력을 능가하게 된다. 부파불교의 진보 성향이 강한 대중부 정사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흡수병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새로운 흐름인 대승불교를 창출하게 되며, 불교의 새로운 이상상인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 하는 보살상이 등장하게 된다. 보살은 출가, 재가를 통합한 새로운 수행자상으로 부처되기 위하여 맹세를 하고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것이다.
3. 금강경에서 법을 듣는 대중은 1250명의 스님인데, 선남자선여인이 등장하며, 보살이 등장하며, 일반인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선남자선여인과 보살에 대한 법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보살은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자로써 비구, 비구니보다 더 수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선남자선여인은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들이다. 오백년 이상의 시간적 격차가 만들어 낸 교단의 상황을 절묘하게 봉합하고 있는 것이다.
4. 부촉付囑은 줄 부, 부탁할 촉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부처님이 설한 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제자에게 부처님 대신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설할 것을 당부하는 것을 부촉이라 한다. 예를 들어 금강경을 수보리가 가장 이해하고 있다면, 어떤 신도 집에 식사 초청을 받아 갔을 때 부처님께서 참석하시지 못할 상황이라면, 이 초청에 가서 수보리에게 금강경을 설할 것을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당부하는 것이 부촉이다.
5. 희유는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거룩하고 행복하신’으로 되어있다.
6.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먁三菩提는 산스크리트어로는 Anuttar-samyak-samdodhi 로 한문으로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가장 높고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란 뜻이다. 그냥 깨달음이라 해도 될 것을 깨달음에 최고의 찬사를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으로 번역한다.
앞으로 금강경이라고 불리게 되는 부처님의 이 법문은 수보리와는 필연적이다.
이 법문이 설해진 기원정사를 지은 수닷타는 수보리(수부티)의 삼촌이며, 수보리의 질문으로부터 이 법문이 이루어지게 된다.
수보리는 코살라국의 사위성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수마나는 대부호 수닷타의 동생이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성격적으로도 어디 한군데 모난 곳도 없이 원만하였으며 얼굴과 몸매도 부처님과 버금갈 정도로 뛰어났다.
수닷타가 기원정사를 지어놓고 부처님이 오시기로 약속된 날 어린 수보리는 삼촌과 함께 설레이는 가슴으로 부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부처님을 만나 뵙게 되고 부처님으로부터 진정한 삶에 대한 법문을 듣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그 자리에서 결심하게 된다. 밤에만 홀로 피었다고 말없이 지는 달맞이꽃처럼 그는 평생동안을 부처님 곁에서 조용히 수행하면서 지내게 된다. 스승인 부처님을 따라 유행을 하면서 교화도 하고 수행을 하였던 수보리가 한번은 혼자 마가다국의 왕사성을 찾게 되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수보리가 조용히 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두막집을 지어 공양을 올렸다. 왕은 깜박 잊고서 그 오두막집의 지붕을 씌우지 않았다.
수보리는 왕의 정성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수행하였다. 간혹 삼촌 수닷타가 처음 부처님을 만났던 장소가 이곳 왕사성이라는 생각이 날 때마다 삼촌과 자신에게 얽혀 있는 묘한 인연을 생각하면서 혼자 빙긋이 웃곤 하였다.
수보리가 지붕이 없는 오두막집에서 살고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다. 수보리는 지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냥 수행만 하였다.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던 곳에 몇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를 조사하다가 수보리가 수행하고 있는 오두막집에 지붕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그 다음 날 바로 지붕을 올려 주었다. 몇 일후 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왕사성의 사람들은 좋아 야단인데도 수보리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 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히 수행만 하고 있었다.
우리의 생명이 백년 남짓한 것을 영원한 것인 줄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만약 자신의 생명이 하루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이라도 떠날까? 아니 하루 밖에 없는 생명인데 아까워서 안돼.
직장에 나가서 밀린 일이나 정리할까? 그렇게 하기에는 하루 밖에 없는 생명이 너무 아까워.
그러면 잠이나 한번 실컷 자보고 죽을까? 어차피 내일이면 깨어나지 않는 영원한 잠속으로 떨어지는데.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까?
결국 우리는 이제까지 살아왔던 대로 밥 먹을 때가 되면 밥 먹고 차를 마시며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인연이 있었던 가까운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이 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부처님의 위대성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면서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일깨워주는 설법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위의를 갖추시고 마을로 내려가 밥을 빌으시고 공양을 마친 다음 선정에 드시는 많은 수행자들과 다름없이 수행자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똑같이 행하시는 부처님의 평범한 하루 생활이 정말 위대한 삶의 모습이다 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된 것이다.
공양을 마치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수행하고 있는데 수보리는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에게 나아가 진정으로 예를 올리고 말씀을 드린다.
‘거룩하십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수행자를 잘 보살펴 주시며 평범한 생활속에서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 모든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십니다.
지금 여기 각자 자기자리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닮고자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는 천명이나 되는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처님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자신이 충고 해주고 격려 해주는 설법에 의지하여 수행해오던 제자들이었는데, 수보리가 오늘 갑자기 자신이 행하고 있는 평범한 생활이 거룩한 수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수보리는 이날 일생동안 가장 큰 행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단지 깨달음에 이르는 처방전일 뿐이며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길은 생활속의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직후 오교진녀를 찾아가 존재의 실상(諸行無常---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영원한 것은 없다, 諸法無我--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에 의한 관계일 뿐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은 연기의 관계라는 것을 오교진녀에게 苦(인생은 괴로움이다),執(괴로움은 집착으로부터 생긴다), 滅(우리가 도달해야할 목적지는 괴로움이 극복된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계), 道(평화롭고 자유로운 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청정한 수행을 행해야 한다)라는 사성제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한달이나 걸려 이해시켰을 때 만큼 큰 기쁨이 가슴가득 넘쳐 흘렀다.
이미 깨달음의 숲에 들어 청정한 유마에게는 수행을 밥먹듯이 하는 보살들과 함께 있든,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이 가득찬 평범한 우리들과 함께 있든, 몸을 파는 창녀들과 함께 있든, 자신의 이익 밖에 모르는 지옥세계에 있든 유마가 있는 곳은 유마로 말미암아 맑고 깨끗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바른 법이라도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하면 악한 법이되는 것이며 아무리 악한 법이라도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하면 바른 법이 되는 것처럼,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의 평범한 생활은 이미 철저한 수행인 것이다.
무슨 미련이 있어 힐끔힐끔 세상을 뒤돌아 보는가?
한줄기의 절실함이 모든 매듭을 풀어주는데.
그래도 미심쩍거든 천년을 묵묵히 앉아 있는
저 돌부처에게 왜 사냐고 물어 보려무나
나는 그저 웃는데 돌부처는 따라서 웃네.
***
(혜능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왜 장로長老라 하는가? 덕이 높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장로라 한다. [수보리]는 범어이며 한문으로는 해공解空이라 한다. 대중들이 따라 앉았기 때문에 즉종좌기卽從座起라 하고, 제자가 법을 청할 때는 다섯 가지 의식을 선행해야 한다. 첫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둘째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셋째는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걸쳐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며, 넷째는 합장하고 존안尊顔을 우러러며 눈을 잠깐도 돌리지 않고, 다섯째는 일심 공경으로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희유希有하심이란 첫째는 능히 금륜왕위金輪王位를 버린 것이다. 둘째는 신장이 장육丈六이고 자마금紫磨金의 모습으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 삼계三界에 비할 바 없다. 셋째는 性이 능히 팔만사천법八萬四千法을 삼키고 토하여 삼신三身을 두루 갖춘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뜻을 갖출 때 희유希有라 한다. 세존世尊은 지혜가 삼계를 초월해 능히 미치는 자가 없으며 덕이 높아 위가 없어서 일체가 다 공경하므로 세존이라 한다. 호념護念은 여래가 반야바라밀법으로 모든 보살을 호지護持해 생각하는 것이요, 부촉付囑은 여래가 반야바라밀법으로 모든 보살에게 부촉하는 것이다. 선호념善護念은 여러 학인에게 반야지般若智로써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호념해, 망령되게 증애憎愛가 일어나고 바깥 육진六塵에 물들어서 생사고해生死苦海에 타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중심에 생각이 항상 정定해서 삿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자성 여래를 스스로 잘 호념하는 것이다. 선부촉善付囑은 전념前念이 청정해서 후념後念도 청정하여 끝내 해탈하는 것이다. 여래가 중생과 대중을 가르쳐 항상 이를 행하게 하는 것을 선부촉이라 한다. 보살菩薩은 범어이며 한문으로는 도심道心이 깊은 중생衆生을 가르키며 각유정覺有情이라고도 한다. 도심은 항상 공경을 행하여 준동함령蠢動含靈에 이르기까지 경애하며 자만심이 없어 보살이라 한다.
선남자善男子는 평탄한 마음이며 정정正定한 마음으로 능히 일체 공덕을 성취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다. 선여인善女人은 정혜正慧의 마음으로 능히 일체 유위有爲, 무위無蔿의 공덕을 내는 것이다.
수보리가 묻기를 [일체의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어떻게 주하여야 그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습니까]하니, 일체 중생이 어지럽게 머물지 않는 것은 매우 적고, 요동하는 마음은 표풍飄風(회오리바람)같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수행하면 항복받을 수 있을 것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은 수보리가 내 뜻을 얻었다고 찬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고자 할 때마다 듣는 이들은 항상 경계하여 한마음으로 정묵靜黙하기 때문에 [너희들 잘 들어라. 내 마땅히 너희를 위하여 설한다]고 했다.
아阿라는 말은 무無요, 욕다라褥多羅는 상上이며 삼三은 정正이고 먁이라는 말은 변變이며 보살菩薩은 지知을 뜻한다. 無는 모든 티끌과 물듦이 없는 것이요 上은 삼계에 능히 비할 바가 없다. 正은 정견이고 變은 일체 지며 知는 일체 유정有情이 불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니, 능히 수행하면 성불함을 얻는 것이다. 佛은 곧 위 없는 청정의 반야바라밀이다. 이것으로 일체 선남자 선여인이 만일 수행하고자 하면 마땅히 위 없는 보살도를 알아야 한다. 마땅히 위 없는 청정반야바라밀법을 알아서 이로써 그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다. 유연唯然은 응낙하는 말이고 원락願樂은 부처님께서 광설하여 상하의 근기로 하여금 다 깨달음을 얻기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樂은 불법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욕문欲聞은 자비로운 가르침을 목마르게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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