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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분 댓가 없는 행위(妙行無住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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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3,180회 작성일 21-07-1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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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보살은 마땅히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른바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생각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4-2)수부티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하는 것이다. 

(4-3)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보시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4-4)수부티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동쪽 허공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측량할 수 있겠느냐?

측량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4-5)수부티야,

남쪽, 서쪽, 북쪽과 위쪽, 아래쪽 허공의 크기도 얼마나 큰지 측량할 수 있겠느냐?

측량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4-6)수부티야,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보시를 행할 때의 복덕도 이와 같이 측량할 수 없이 큰 것이다.

(4-7)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보시를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해설)

1.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첫째 덕목으로 보시를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 정사에서는 오로지 수행을 행하였다. 금강경이 성립될 무렵 불탑숭배시대에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에 공양 올리는 것이 먼저 선행 되었고, 그 다음 모인 사람들이 함께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금강경 전개에서도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먼저 보시부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보시를 중심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의 실천이 체계화 되고 있다. 


2. 보시, 베풂에는 물질적인 베풂과 정신적인 베풂이 있다. 물질적 베풂은 한계가 있지만 정신적 베풂은 한계가 없다. 베풂을 통하여 연기의 한 현상인 인과를 설명하고 있다. 베풂이 인이라면 베풂의 결과로 본인이 받는 과보는 복덕이다. 산스크리트어로 punya 혹은 guna를 쓰고 있는데 구마라집은 금강경 전체를 통하여 복덕과 공덕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복덕과 공덕에 대하여 인과법칙에서 인을 원인으로 하여 나타나는 결과가 복덕이며, 복덕으로 나타나기 전의 상태인 복덕으로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인 잠재력이 공덕이며 복덕성이다.

물질적인 베풂은 내가 베푼 만큼의 공덕이 쌓이며, 그 공덕이 복덕으로 나타나 써버리면 없어지게 된다. 

정신적인 베풂도 내가 베푼 만큼의 공덕이 쌓이며, 그 공덕이 복덕으로 나타나 써버리면 없어지지만, 베풂의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베풂을 행하며 그에 따른 공덕이 쌓이며 따라서 그에 따른 복덕이 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베풂이 아무리 많다 해도 정신적인 베풂보다 적은 것이다.    


3. 응무소주應無所住에서 응할 응, 없을 무, 바 소, 머무를 주이므로 ‘마땅히 머무는 것 없이’가 되어 집착하지 않고라는 뜻이다. 

   

4. 베풂을 행할 때 나에 대하여 또한 대상에 대하여도 집착하지 않고 베풂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육근인 안이비설신의와 육경인 색성향미촉법을 구체적으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풂을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베품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베품의 뿌리는 행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실하게 느끼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뛰어난 선사로서의 적수선사를 있게 한 적수선사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자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에서도 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적수선사의 스승이 어린 적수에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물통에 물을 채워 놓으라고 하였다. 어린 적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물을 길어 물통에 갖다 부었다. 여러 번 왔다갔다 하여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길어온 바께스의 물이 반쯤 남았다. 적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남은 물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법당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부처가 되겠다고 먹물 옷 입고 수행하는 녀석이 그렇게 행위를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하느냐? 살생하지 말라하는 뜻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생명을 살려라 하는 뜻이다. 그래. 지금 너의 행동을 한번 살펴보아라. 남아 있는 물을 바닥에 쏟음으로서 너는 물을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덥고 가문 날 그 물을 저기 있는 나무에 주었다면 너는 물도 살리고 나무도 살렸을 것이다.’

베품을 행하는 행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엽 딩구는 소리가 너무 좋아 학교 캠퍼스 밴취에 잠시 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긴 의자에 앉아 낙엽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리가 없는 불구자가 몸을 끌고 와서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20대 젊은이에게 구걸을 한다. 식사를 제대로 못해 얼굴이 부황든 사람같았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2000원이 들어 있다. 집에 돌아갈 차비 1000원을 남겨 놓고 1000원을 그 불구자에게 주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해하는 표정이 얼굴에 비친다.

그 불구자는 그 옆에 앉아 있는 40쯤 되어 보이는 중년 신사에게로 몸을 끌고가 구걸을 한다. 그 신사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2000원이 들어 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된다는 생각에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때의 생각은 하지도 않고 2000원을 몽땅 불구자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듯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불구자는 다시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 딩구는 낙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30쯤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로 닥아 갔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구자 곁으로 가더니 오랜  친구를 만난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어떻게 해서 다리를 다쳤는냐고 묻기도 하고,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도 하고, 특히 식사와 잠자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더니 어려운 자식에게 주듯이 자연스럽게 그의 호주머니에 있는 2000원을 끄내 그 불구자의 호주머니에 설쩍 넣어 주었다. 

똑같은 사물을 대해도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고,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자세가 천차만별이듯이 베품을 행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생각에 따라 베품이 행해지는 모습도 천차만별인 것이다. 

내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고  생각하면서 베품을 행할 때는 그 행위의 댓가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배 고프면 밥먹듯이 잠오면 잠자듯이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숨쉬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베품이 행해질 때 그 베품은 행위에 대한 댓가가 없는 베품인 것이다. 

부처님의 전생 수행시절에는 바른 말 한 귀절을 듣기 위하여 몸을 던지기도 했다. 

부처님의 전생 호명이란 이름으로 히말라야산에서 홀로 정진하며 수행하고 있는데 제석천왕이 나찰로 변하여 부처님의 수행력을 시험하였다. 나찰은 수행자의 반대편 나무 위에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아서(諸行無常)

끝없이 났다가 없어지나니(是生滅法)


이 소리를 듣고 수행자의 가슴은 환희로움으로 가득차 버렸다. 누가 이 법을 말하는가?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험상굳게 생긴 나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수행자는 나찰에게 게송의 나머지 반을 마져 읊어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나찰은 몸을 던져 보시한다면 나머지 반을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게송의 뒷 부분을 읊었다.


나고 없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生滅滅已)

진리의 바다 고요하여 즐거우리라.(寂滅爲樂)


수행자는 이 소리를 듣고 조용히 합장하며 자신의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지자 그 곳에서 깨달음의 꽃이 피어났다. 

베품은 입으로 하는 예배가 아니다. 베품은 말과 마음과 행동이 하나된 자기 봉사인 것이다. 진지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라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결과에 대해 집착하는 바가 없이 순수한 동기와 올바른 수단을 취하는 것이 바른 베품인 것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동물이나 고기와 같은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도 살생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던져버리고 도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살생이듯이 궁극적이고 진정한 베품은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려 자신에 대한 베품이 행해질 때 진정한 베품이 된다.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빛의 경계를 떠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품을 행하게 된다. 

귀의 도적을 막으면 소리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며 스스로 구속 속에 있으나 구속에서 자유로우므로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베품을 행하게 된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향기로운 좋은 냄새와 악취가 나는 나쁜 냄새에 균등하여 자유롭게 길들여지므로 냄새에 집착하지 않고 베품을 행하게 된다. 

혀의 도적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읊고 강설하되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맛에 집착하지 않고 베품을 행하게 된다.

몸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모든 애욕에 초연하여 요동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므로 접촉에 집착하지 않고 베품을 행하게 된다.

뜻의 도적을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생각이 깨어 있어 행하는 모든 행위가 법에 맞으며, 모든 공덕을 즐겨 닦으므로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품을 행하게 된다. 


***

(혜능의 해설)

육조 혜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범부의 보시는 다만 신상身相의 단암端巖과 오욕五欲의 쾌락만을 구하기 때문에 과보가 다하면 곧 삼도三途(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진다. 세존은 무상보시無相布施로 행을 가르쳐 신상의 단암과 오욕의 쾌락을 구하지 말고, 안으로 간탐심을 버리고 밖으로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서로 응할 때 부주색不主色 보시라 한다.

 반드시 상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능히 주는 마음도 없고 주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의 분별도 없는 것이 부주상不主相 보시다.

 보살이 보시를 행하되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으면 그 복은 시방十方 허공과 같아 가히 헤아리기가 어렵다.

 부차復次라는 것은 앞을 이어 뒤를 일으키는 말이다.

 일설에 보布는 보普로 시施는 산散으로, 가슴 속에 망념과 습기와 번뇌를 없애 사상四相이 끊어지고 쌓은 바가 없는 것이 진실한 보시라 했다. 다시 말해서 布는 普로 육진六塵경계에 머물지 않으며 또 유루有漏의 분별이 없고 오직 청정함에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한 것이다.

 만일 이 뜻을 요달하지 못하면 업만 더하기 때문에 안으로 탐애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하여 내외內外가 상응할 때 복이 무량하다. 사람들의 악행을 보고도 그 허물을 보지 않으며, 자성自性에서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  相상을 여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하되 마음에 능能과 소所가 없어야 선법善法이다.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능,소의 마음이 불변하면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반야지를 행하면 그 복이 무량무변하다.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사람과 하늘의 공경과 공양을 받을 것이다. 이것을 [복덕됨]이라 이름 한다. 항상 부주상不住相 보시布施를 행해서 일체 중생을 널리 공양하면 그 공덕은 가히 측량 할 수 없다. 부처님이 동방東方의 허공으로써 비유하여 수보리에게 [동방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수보리가 [동방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허공은 끝이 없어서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보살의 무주상無住相 보시로 얻은 공덕도 허공과 같아 끝이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허공보다 큰 것이 없고 일체성一切性 가운데 불성보다 큰 것이 없다. 왜냐하면 형상이 있는 것은 크다고  이름하지 못한다. 허공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크다고 이름하고, 일체 제성諸性은 다 한량이 있어 크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성佛性은 한량이 없어 크다고 하는 것이다.

 허공 중에는 본래 동서남북이 없다. 만일 동서남북을 분별하면 주상住相으로 해탈을 얻지 못한다. 불성에는 본래 我아, 人인, 중생衆生, 수자壽者가 없다. 그러므로 사상四相을 있다고 보면 이는 중생상이요 불성이라고는  이름할 수 없으며 이는 또한 주상住相 보시다.

 비록 망상으로 동서남북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치理致에는 맞지 않는다. 이른바 동서가 진실이 아닌데 어찌 남북이 다를 것인가? 자성이 본래 공적空寂하여 분별이 없기 때문에 여래가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을 깊이 찬탄한 것이다.

 응應은 순順의 뜻으로 위에 설한 바와 같은 교훈을 수순해 무상보시에 주하는 것이 곧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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