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성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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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작성일 21-07-22 08:11 조회 11,214 댓글 0본문
8. 사성제공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공한 가운데는 고와 고의 원인인 집과 고가 해결된 멸과 멸에 이르는 실천 방법인 도(사성제)도 없으며,
(해설) 고의 상태에서 고가 해결된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이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과제의 제시이며, 집은 고가 발생한 이유이다. 즉 왜 고가 생겼는지 근본 이유를 밝히는 것이며, 멸은 고가 극복된 상태이며, 도는 집을 소멸하여 멸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에서 연기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인 것이다. 고, 집, 멸, 도 사성제는 다음과 같이 경전에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은 고다. 노는 고다. 병은 고다. 죽음은 고다. 시름, 근심, 슬픔, 불행, 번민은 고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은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를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가 그것이다. 그것에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서 아무 집착도 없는데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팔지의 도가 그것이니,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니라.”
이 고집멸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들이 불교적인 방법으로 살도록하고 수행하고 인식하게 하는 인식방법의 기본구조이기 때문에 수천번을 강조해도 괜찮다. 구체적으로 고집멸도를 실천하고 인식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1) 붓다 : 고행을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느냐?
비구 : 얻지 못했다.
붓다 : 무엇 때문에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 : ?
붓다 :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이유는 집착 때문이다.
비구 : 잘 모르겠다.
붓다 : 너의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라.
집착에는 세 가지가 있다. 탐심, 진심, 치심이 그것이다.
너의 마음은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아니다.
붓다 : 너의 마음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그렇지 않다.
붓다 : 너의 마음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느냐?
너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의 상태를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느냐?
비구 : 그렇지 못하다.
붓다 : 그렇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나 평안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하는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근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집”의 성제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렇게 고행을 하는데도 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너는 고행하여 천당에 태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오래 살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비구 : 그렇다.
붓다 : 우리가 고행을 하고 수행을 하는 목적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 천당에
태어나려고,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내가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 잘못되 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이다. 바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인 것이다.
비구 : ?
붓다 : 그렇게 고행을 하는데도 왜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그것은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상대방은 틀린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화내는 마음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수행자로서 모든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화내는 마음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구 : ?
붓다 :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우리들은 저절로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문제가 해결된 상태, 생각의 자유로움과 마음의 평안을 얻은 상태가
“멸”의 성제이다.
이 “멸”에 성제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가 최선의 방법일까?를 생각하고 결정하여 실천하는 것이 “도”의 성제이다. 제대로 실천을 하려고 하면 일어난 현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먼저 이러한 능력이 내 속에서 성숙되어야 올바른 실천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행위하면 된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며,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며,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다.
비구 : 그런 것 같다. 이해가 된다.
(예2) 붓다 : 너희들 둘은 어제 다투고 화를 내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었느냐?
비구 : 내가 탁발하여 온 공양을 상대방이 더 많이 먹으려고 하였다.
붓다 : 6 년을 함께 고행한 벗들인데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진정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었으면 다투었겠는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조금 더 먹으려고 할까? 하는 자비심이 너의 마음에서
일어났다면 너의 공양을 한술 더 떠 주었을 것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인 “자비심”은 수행자에게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비심이 없으면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이 된다.
수행자에게 “자비심”이 충만 되어 있으면 저절로 “도”의 성제는 이루어지지만,
“자비심”이 없으면 천년을 다리 틀고 앉아 수행한다 하더라도 지옥에 갈 죄만 더 하는 것이다.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관조하여 “일어난 근본 이유”를 찾는 것도 “최선의 실천”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자비심” 속에는 이미 “고의성제”와 “집의 성제”가 해결되어 상대방을 100 % 위하는 “실천의 도”가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나면 최선의 해결책이
생기게 되며, 또한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 알겠느냐?
이것이 바로 고집멸도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국자가 국 속에 천년을 있어도 국맛을 모르듯이 우리 불자들이 천년을 절에 왔다갔다 한다해도 불교적인 방법으로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불교하고는 전연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깊이 느끼고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 속에 불교의 향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천년이 걸릴지라도 처음 시도가 제대로 되어야 그 다음부터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결국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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