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십이연기공(시공간적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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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십이연기공(시공간적 연기)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공한 가운데는 무명도 없으며 무명의 다함인 지혜도 없으며 그리고 노사도 없으며 노사의 다함인 열반(십이연기)도 없으며,
(해설) 연기(Paticcasamuppada)란 재미있는 말이다. 그것은 말미암아(綠, Paticca, grounded on)라는 말과 일어나는 것(起, Samuppada, arising)이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이며,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그가 깨달은 존재의 법칙이었으므로 결국 연기란 부처님의 존재론을 말한다. 즉 긴긴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 앉아 “진지하게 사유한” 결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계속 명상에 잠겨 생노병사가 생기게 되는 더 근원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관조하여 ‘12연기’를 분명하게 밝혔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형성력이 생기고, 형성력으로 말미암아 재생의 식이 생기고, 재생의 식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 생기고,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6식이 생기고, 6식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생기고, 접촉으로 말미암아 느낌이 생기고, 느낌으로 말미암아 갈애가 생기고, 갈애로 말미암아 집착이 생기고, 집착으로 말미암아 업의 생성력이 생기고, 업의 생성력으로 말미암아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노병사가 있다.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하였다. 무명이 무엇인지 모르고는 천년을 절에 다녀도 불교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알기쉽게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왜 늙고 죽음이 있는가? → 태어남 때문에
왜 태어나는가? → 업의 생성력 때문에
업의 생성력은 왜 생기는가? → 집착 때문에
집착은 왜 생기는가? → 갈애(애욕) 때문에
갈애는 왜 생기는가? → 느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은 왜 생기는가? → 접촉 때문에
접촉은 왜 생기는가? → 6식(눈귀코혀몸뜻)이 있기 때문에
6식은 왜 생기는가? → 영혼과 육체의 결합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왜 생기는가? → 재생의 식 때문에
재생의 식은 왜 생기는가? → 모든 행위는 형성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성력은 왜 생기는가? → 무명 때문에
12연기를 역으로 무명으로부터 관조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무명에 의해서 ← 형성력이 생기고
형성력에 의해서 ← 재생의 식이 생기고
재생의 식에 의해서 ←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생기고
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의해서 ← 6식이 생기고
6식에 의해서 ← 접촉이 생기고
접촉에 의해서 ← 느낌이 생기고
느낌에 의해서 ← 갈애가 생기고
갈애에 의해서 ← 집착이 생기고
집착에 의해서 ← 생성력이 생기고
생성력에 의해서 ←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에 의해서 ←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12연기는 전생의 과(果)가 현생의 인(因)이 되고, 현생의 과(果)가 내생의 인(因)이 되어 끝없이 윤회하게 된다. 도식화해면 다음과 같다.
세세생생 살아가면서 내가 아는 것만큼 행복하다. 간혹 산에 갔을 때 멀리서 볼 때 울창했던 산을 깊이 들어가 볼 것 같으면 그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을 나와 보면 산의 모습이 보인다. 산속에 들어갔을 때 다르고 산속을 빠져나와 전체 윤곽을 볼 때 다른 것처럼 진리도 전체 윤곽을 볼 때 진리를 본 듯하다. 비가 올 때 비를 아무리 쳐다 봐도 비의 본질을 잘 알 수 없는데 그 비를 흠뻑 맞으면 비의 본질을 훨씬 잘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산속에 깊이 들어가서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는 그 자체가 오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양면성으로 내가 알면 알수록 삶은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게 된다. 왜 불교가 좋은가 하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본질을 명쾌하게 밝히기 때문이며, 명쾌하게 밝힌 것을 바탕으로 해서 종교적인 틀을 씌운 것이 바로 불교이다.
무명이라는 것
모르는 것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불안이며, 그 불안을 극복해가는 방법은 자기화이다. 자기화라는 것은 주위나 상대방을 자기 자신이라 인식함으로써 변화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작용의 뿌리가 불안의 근거이다. 불안이라 하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움직이다. 불안은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을 막아 자기에게로 끌어다 붙이는 행을 만들어낸다.
행이라는 것
무명 다음에 오는 행은 바로 변화를 막으려는 결합작용이다. 존재의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결합행위가 바로 행이다. 그래서 무명이 없으면 행은 발생하지 않는데 이 무명 때문에 행이 발생하게 된다. 무명이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만들었듯이 무명 때문에 행이 발생한다. 부처님께서 깨치시고 난 다음 제일 먼저 갈파한 것이 연기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는 것이다. 12연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연기의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고 한 말의 구체적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행이 있음으로 무명이 있다. 이것이 없음으로서 저것이 없어지고 무명이 없음으로 행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잘 외우고 있는 네 줄의 연기내용이 12연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연기법이다. 어떤 경우에는 무명에 의해 행이 생기면 무명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없어져 버리고 행만 나타나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식이라는 것
행이 있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임이 있게 된다. 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결합된 것, 즉 불안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인식을 형성해야 되는데 이때 새로운 식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행 다음에는 식이 오게 된다. 이 식은 육근과 육경이 부딪힘으로 생기는 식으로 그래서 식은 행이 결합된 것이다. 결합되기 전에는 무명이고 결합된 것은 행이고 결합되기 전은 무명으로 행과 무명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식인 것이다. 식의 근본 속성은 모든 것은 항상 다르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식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항상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누적되어 있는 업의 형태만큼 식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식이라는 것은 결합된 것, 행과 결합되기 전의 것, 무명을 완전히 다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오온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고 난 후의 식이라면 식이 12연기의 앞부분에 나오지 않는다. 무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식이 생기게 된다.
명색이라는 것
식이 있어서 이 식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모여지며, 그래서 이 식 다음에는 명색이 오게 된다. 명색이라 할 때 이 몸뚱이가 색이고 명은 우리의 정신이다. 정신과 육신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냐? 하면 식이 가지고 있는 그 능력만큼 명색이 만들어진다. 모든 색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름은 색이 사라져도 남아있게 된다. 모든 색이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리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님을 지금 이렇게 한번 알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스님을 사리불로 알게 된다. 세월이 흘러 사리불이 죽고 나서도 사리불의 이름은 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이생이 끝나 다음 생에 가더라도 한번 인식 한 것은 내 속에 저장되어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억겁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한번 본 것은 다 저장되어 있다. 색이 사라져도 인식은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태아가 엄마 몸속에 있을 때 처음에는 형체도 없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체를 만들어가게 되며, 형상은 정신을 육신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섯 개의 능력체인 육입이 만들어진다.
육입이라는 것
육입이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의가 나타날 수 있는 근거인 육입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6근을 말 할 때 안이비설신의는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인식기관, 맛을 볼 수 있는 인식기관, 들을 수 있는 인식기관, 볼 수 있는 인식기관 이런 것들이 다 명색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육입단계이다.
촉이라는 것
육입이 만들어지고 나면 주위에 있는 모든 것과 부딪침으로써 촉이 일어나게 된다. 여섯 가지 인식할 수 있는 기관이 명색으로부터 진화된 단계에서 육입이 만들어지고 이 육입을 통해서 부딪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촉을 느낄 수 있다. 6근과 6경과 6식이 부딪혀서 촉이 만들어진다. 촉의 단계에 오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깨뜨리고 앞에 선행했던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것이 촉이다. 그러니까 6경과 6근과 6식이 항상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새롭게 부딪힘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자동차 문을 닫아 놓고도 자동차 문을 내가 닫았는지 안 닫았는지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 촉의 단계이다. 촉에서 기억들이 깨어지는 것은 살아 있다가 죽는 것이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전생을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전생에 있었던 것을 기억 못하는 것이 바로 촉 때문이다.
수와 애과 취
촉이 있고 난 다음엔 항상 수가 일어나게 된다. 느낌이 있고 난 다음엔 애욕이 생기게 된다.
애욕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형상에 대한 애욕, 감정에 대한 애욕으로 결국 취를 만들어 낸다. 애욕은 자꾸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 한다.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애욕에 의해 물질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감정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취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애욕이 생김으로서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취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압어다라이며, 다라는 것은 ‘주다’의 뜻인데 ‘어’가 붙어 부정의 뜻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며, 압은 ‘가까이’ 라는 뜻이다. 그래서 취라는 것은 가까이에서 받는 것을 말한다. 애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고 몸에 부딪치고 가까이 있는데서 애가 일어나서 ‘취’하는 것이다.
유라는 것
취가 생기고 나니까 유가 온다. 유라는 것은 욕망이 충족되는 행위이다. 결국 존재라 하는 것은 바로 유로 표현된다. 취가 이루어짐으로써 가까이 있는 것을 자꾸 자기것으로 할려고 하는 유가 온다. 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존재가 유가 되는 것이고 살아있음으로서 새로운 행위를 하고 새로운 업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유가 된다.
생, 노, 사
유는 태어나는 생이 되며, 다음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죽음이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생 때문이며, 이렇게 돌아가서 12연기가 된다. 우리가 12연기를 인식하게 되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인 인과응보를 알게 된다. 인과응보의 기본 개념은 착한 행위를 하면 착한 과보를 받고 나쁜 짓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인데, 정말 우리가 착한 일 하면 착한 과보 받고 나쁜 일 하면 나쁜 과보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인간 존재의 생주이멸이 그렇고 우주의 존재법칙 성주괴공이 바로 이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에서부터 무생물까지 모두 이 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연기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면 인과응보가 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속담은 모두 연기법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식이 없는 사랑으로 중세 전역을 흑사병으로 몰고 간 것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전쟁은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수행은 미혹으로 몰고갈 것이며, 수행이 없는 삶은 우리를 지옥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12 연기의 처음인 무명에 의하여 결국에는 삶과 죽음이 있게 되며, 이 무명이 해결된 상태가 연기인 것이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관계는 무명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불교란 “무명과 연기”의 끊임없는 반복 성찰 확산으로 구체화 되어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나와 남과의 관계인 것이다.
불자는 부처님과 같이 견성성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믿으며 오계를 지키면서 진지하게 수행하여 우리의 가슴 깊숙히 흐르고 있는 욕심 내는 마음과 성 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의 줄기인 중류의 물줄기를 끊어버릴 때 모든 집착과 분별심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수행에 의하여 집착을 없애가는 방법으로 수행하여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며 나아가 생사의 문제가 해결되고 결국에는 스스로 화두를 들게 되며 화두를 들게 되어 무명을 타파하고 견성성불하여 부처를 이루게 된다.
선불교에서 참선으로 성취되는 견성성불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하는 ‘이뭣고?’의 화두에 목숨을 걸고 몰두함으로써 근본 무명을 타파하여 견성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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