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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98중아함염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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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9,802회 작성일 21-07-0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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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중아함염처경(念處經)

  

  

  

이와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쿠루우수의 도읍인 캄마싯담마에 계셨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도(道)가 있어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며, 고뇌를 없애고 슬픔을 끊고 바른 법을 얻게 한다. 곧 사념처(念處)이다. 과거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은 다섯 개(蓋)의 마음의 더러움과 슬기의 파리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바로 사념처에 머무르고, 칠각지(覺支)를 닦아 위없는 정진(正進)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또 미래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다섯 개의 마음의 더러움의 슬기와 파리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바로 사념처에 머무르고, 칠각지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의 여래, 무소착, 등정각이다. 나도 또한 다섯 개의 마음의 더러움과 슬기의 파리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바로 사념처에 머무르고, 칠각지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것이 사념처인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며, 이와 같이 각(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며,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고,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이다.

어떤 것을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다니면 다니는 줄을 알고, 머무르면 머무는 줄 알며, 앉으면 앉는 줄 알고, 누우면 눕는 줄 알며, 자면 자는 줄 알고, 깨면 깨는 줄 알며, 자다 깨면 자가 깨는 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바르게 드나듦을 알아 잘 관찰하고 분별하며, 굽히고 펴거나 낮추고 높이는 몸 가짐은 거동과 질서가 있으며, 승가리(僧伽梨)와 모든 옷 입기와 바루 가지는 것, 다니고 머무르기나 앉고 눕거나, 자고 깨거나, 말하고 잠잠하는 것을 다 바로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한 생각이 나면 착한 법의 생각으로써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하니, 마치 목수나 목수의 제자가 먹줄을 가지고 나무에 퉁기면 날카로운 도끼로 쪼아 곧게 다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 나면 착한 법의 생각으로써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윗잇몸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려,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하니, 마치 두 장사(力士)가 약한 한사람을 붙잡고 여러 곳으로 끌고 다니며 마음대로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윗잇몸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서 마음을 다스려, 다스려 끊고 멸하여 그치게 한다. 

  

이렇게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또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들숨을 생각하여 곧 들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날숨을 생각하여 곧 날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며, 들숨이 길면 곧 들숨이 긴 줄을 알고, 날숨이 길면 곧 날숨이 긴 줄을 알며, 들숨이 짧으면 곧 들숨이 짧은 줄을 알고, 날숨이 짧으면 곧 날숨이 짧은 줄을 알며, 온 몸에 숨이 드는 것을 깨닫고 온 몸에 숨이 나는 것을 깨달으며, 몸의 행을 그치어 숨을 들이쉬기를 배우고, 입의 행을 그치어 숨을 내쉬기를 배운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욕(欲)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커지고 두루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치 어떤 목욕하는 사람이 그릇에 콩가루를 담고 물을 타서 덩이를 만들어 물에 적시고 커지고 두루 하고 충만하여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커지고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커지고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치 산의 샘물이 청정하여 흐리지 않고 충만하고 흘러 넘쳐 사방에서 물이 와도 들어갈 길이 없으니, 곧 그 샘 밑의 물이 스스로 솟아나 밖으로 흘러 넘쳐 산을 적시고 커지고 두루 하고 충만하여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커지고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기쁨이 없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이 몸을 적시고 커지고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기쁨이 없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치 푸른 하늘 연꽃이나 붉고 빨갛고 흰 연꽃이 물에서 나고 물에서 자라 물밑에 있으면, 그 뿌리와 줄기와 꽃과 잎이 모두 젖고 붇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기쁨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몸을 적시고 불우되 두루 하고 충만하여 이 몸 가운데 있어서 기쁨이 없는 데서 생기는 즐거움은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이해하기를 두루 하고 충만하여 성취하여 가진다. 마치 어떤 사람이 칠주(肘)가 되는 옷이나 팔주가 되는 옷을 입어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그 몸을 싸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청정한 마음으로서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광명상(光明想)을 생각[念]하여 잘 받아 가지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하여, 앞과 같이 뒤에도 또한 그러하고 뒤와 같이 앞에도 또한 그러하며, 낮과 같이 밤에도 또한 그러하고 밤과 같이 낮에도 또한 그러하며, 아래와 같이 위에도 또한 그러하고 위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니, 이렇게 뒤바뀌지 않고, 얽매임이 없이 광명심(光明心)을 닦아 마음은 마침내 어두움에 덮이지 않는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관찰하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관찰하고, 누워서 앉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관찰하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이 몸은 어디 있거나 좋거나 밉거나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온갖 더러운 것이 충만해 있다고 관찰한다. 

  곧 내 이 몸 가운데에는 머리털, 터럭, 손톱, 이(齒), 추하고 곱고 엷은 살갗, 가죽, 살, 힘줄, 뼈, 심장, 콩팥, 간, 허파, 큰창자, 작은창자, 지라, 밥통, 똥, 뇌수, 눈꼽, 땀, 눈물, 가래침, 고름, 피, 기름, 골수, 침, 쓸개, 오줌이 있다고. 마치 그릇에 몇 가지 종자를 담은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보니, 벼나 조 종자나 갓이나 무우나 겨자 종자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은 어디 있거나, 좋고 밉거나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더러운 것이 충만하다고 관찰한다. 

  곧 내 이 몸 가운데에는 머리털, 터럭, 손톱, 이, 추하고 곱고 얇은 살갗, 가죽, 살, 힘줄, 뼈, 심장, 콩팥, 간, 허파, 큰창자, 작은창자, 지라, 밥통, 똥, 골, 뇌수, 눈꼽, 땀, 눈물, 가래침, 고름, 피, 기름, 골수, 침, 오줌이 있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경계[界]를 관찰하여, 내 몸 가운데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공의 요소, 의식(意識)의 요소가 있음을 안다. 마치 백정이 소를 잡아 껍질을 벗겨 땅에 펴고 그것을 여섯 토막으로 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요소를 관찰하여, 내 몸 가운데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공의 요소, 의식의 요소가 있음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저 송장이 1, 2일, 혹은 6, 7일이 되어 까마귀나 소리개에게 쪼이고 승냥이나 이리에게 먹히며, 불에 살리고 땅에 묻히어 다 썩어 문들어지는 것을 관찰한다.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해골은 푸른빛으로 썩어 문들어지고, 남은 반의 뼈사슬은 땅에 뒹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가죽과 살과 피를 떠나 오직 힘줄만이 서로 이어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뼈마디가 풀리어 여러 곳에 흩어져 발뼈, 장단지뼈,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어깨뼈, 목뼈, 머리뼈들이 제각기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비구는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뼈는 희기는 마치 소라와 같고 푸르기는 집비둘기 같으며, 붉기는 피를 칠한 것 같이 하여 그것을 본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 있어서 마침내 떠날 수가 없다’고.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고, 바깥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만일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면, 이것을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 하는 염처(念處)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각(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즐거운 감각을 깨달으면 곧 즐거운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알고, 괴로운 감각을 깨달을 때에는 곧 괴로운 감각을 깨닫는 줄 알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깨달을 때에는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즐거운 몸, 괴로운 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과 즐거운 마음, 괴로운 마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마음과 즐거운 거리[食], 괴로운 거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거리와 즐거운 거리도 없고 괴로운 거리도 없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거리도 없고 괴로운 거리도 없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거리도 없고, 즐거운 욕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욕심과 즐거운 무욕각(無欲覺), 괴로운 무욕각도 또한 그러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욕각을 깨달을 때에는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욕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각(覺)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고, 바깥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각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만일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면, 이것을 각을 관찰하기를 각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다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는 참뜻을 알고,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다는 참뜻을 알며, 성냄이 있고 성냄이 없는 것과 어리석음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과 더러움이 있고 더러움이 없는 것과 모임이 있고 흩어짐이 있는 것과 낮춤이 있고 높임이 있는 것과 작음이 있고 큼이 있는 것과 닦고 닦지 않음과 정(定)하고 정하지 않은 것도 또한 그러하며,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 해탈하지 않은 마음의 참뜻을 알고 해탈한 마음이 있으면 해탈한 마음의 참뜻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고, 바깥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마음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면, 이것을 마음을 관찰하기를 마음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법을 관찰하기를 법다이 하는 염처라 하는가. 눈은 빛깔을 반연하여 안의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다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번뇌가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안의 번뇌가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도 또한 그러하며, 뜻은 법을 반연하여 안의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다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번뇌가 없으면 안에 번뇌가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안의 번뇌가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안의 번뇌가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안의 번뇌가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고, 바깥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샅이 하여, 생각을 세워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안의 육처(處)이니라.

  

비구는 법을 관찰하기를 법다이 한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욕심이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욕심이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와 같이 성냄, 잠, 들뜸도 또한 그러하며, 안에 진실로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있는 참뜻을 알고, 안에 진실로 의심이 없으면 의심이 없다는 참뜻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의심이 생기면 그 참뜻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의심이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 참뜻을 안다. 

  

이와 같이 비구가 안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고, 바깥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오개(蓋)이니라.

  

비구는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한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염각지(念覺支)가 있으면 염각지가 있다는 참모양을 알고, 안에 진실로 염각지가 없으면 염각지가 없다는 참 모양을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염각지가 생기면 그 참 모양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염각지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또 쇠퇴하지도 않고 더욱 닦아 더하고 넓어지면 그 참 모양을 안다. 

  

이와 같이 택법(擇法), 정진(精進), 기쁨, 쉼, 정(定)도 또한 그러하며, 비구는 안에 진실로 사각지(捨角支)가 있으면 사각지가 있다는 참모양을 알고, 안에 진실로 사각지가 없으면 사각지가 없다는 참모양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사각지가 생기면 그 참모양을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사각지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고, 더욱 닦아 더하고 넓어지면 그 참 모양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고, 바깥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여, 생각을 세워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것이라 하나니, 곧 칠각지(覺支)이니라.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면, 이것을 법을 관찰하기를 법과 같이 하는 염처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7년 동안 마음을 세워 바르게 사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2과(果)를 얻을 것이요, 혹은 현재에서 아라한의 구경(究竟)의 지혜를 얻고, 혹은 남음이 있어 아나함(阿那含)을 얻을 것이다. 7년, 6, 5, 4, 3, 2, 1년은 그만 두고,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7개월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사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2과를 얻을 것이며, 혹은 현재에서 아라한의 구경의 지혜를 얻고, 혹은 남음이 있어서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7개월, 6, 5, 4, 3, 2, 1개월은 그만 두고, 어떤 비구, 비구니가 이레 낮, 이레 밤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사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2과를 얻을 것이며, 혹은 현재에서 아라한의 구경의 지혜를 얻고, 혹은 남음이 있어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이레 낮, 이레 밤, 육일, 오일, 사일, 삼일, 이일은 그만두고 하루 낮, 하룻밤도 그만 두고, 만일 어떤 비구, 비구니가 잠깐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사념처에 머물러, 아침에 이렇게 행하면 저녁에는 반드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며, 저녁에 이렇게 행하면 아침에는 반드시 이익을 얻게 될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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