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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 97중아함대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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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9,550회 작성일 23-02-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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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중아함대인경

97중아함대인경(大因經)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쿠루수[拘樓瘦]에 유행하시면서 쿠루수의 도읍인 캄마싯담마[劒磨瑟曇]에 계셨다. 그때 존자 아난다는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고요히 앉아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연기(緣起)는 매우 기이하여 지극히 깊고 알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그런데, 내 관찰로는 매우 쉽다’ 이에 존자 아난다는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지금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고요히 앉아 깊이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연기는 매우 기이하여 지극히 깊고 알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그런데, 내 관찰로는 매우 쉽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아난다야, 너는 그런 생각을 말라. 연기는 지극히 깊고 알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아난다야, 이 연기를 참다이 알지 못하고 실다이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들은 베틀이 서로 얽매는 것 같고 넝쿨풀이 어지러운 것 같으며, 바쁘고 부산하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며, 갔다 왔다 하면서 생사(生死)를 뛰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난다야, 그러므로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분명하며, 매우 깊은 것이다. 

아난다야,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 연(緣)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늙고 죽음에는 연이 있다’고 대답하라. 또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생(生)에 인연한다.’고 대답하라. 

아난다야, 어떤 이가 ‘생에 연(緣)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생에도 또한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어떤 이가 ‘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유(有)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다야, 어떤 이가 ‘유(有)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유에도 또한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어떤 이가 ‘유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수(受)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다야, 만일 어떤 이가 ‘수에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라. ‘수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만일 어떤 이가 ‘수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애(愛)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다야,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며,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노사(老死)가 있으며, 노사를 인연하여 걱정과 슬픔이 있고, 슬픔과 걱정, 괴로움, 번민은 다 노사를 인연하여 있다’고. 이와 같이 구족하여 고로움의 오음[苦陰]이 생긴다. 

아난다야, 생(生)을 인연하여 노사가 있으면 이것을 ‘생을 인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말한다. 아난다야, 만일 생이 없다면, 모든 중생이 저마다 곳을 따라 생(生)이 없을 것이니, 저마다 생이 없으면 생을 떠나더라도 노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이 노사의 원인, 노사의 근본, 노사의 인연은 생이다. 무슨 까닭인가. 생을 인연하므로 노사가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유(有)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면 이것을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고 말한다. 아난다야, 만일 <유>가 없으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이면 용 종자, 신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이렇게 아난다야, 저 중생들이 저마다 곳을 따라 유가 없으니, 제각기 유가 없으면 유를 떠나더라도 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생의 원인, 생의 근본, 생의 인연은 유다.’ 유를 인연하므로 생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수(受)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면 이것을 ‘<수>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수>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 아난다야, <수>가 없어 제각기 <수>가 없으면 수를 떠나더라도 ‘유가 있고 유가 없다’고 주장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이 <유>의 원인, 유의 근본, 유의 인연은 <수>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수>를 인연하므로  <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애(愛)를 인연하여 수가 있으면 ‘<애>를 인연하여 <수>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애>를 인연하여 <수>가 있다.’ 아난다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으면 애를 떠나더라도 다시 수가 있고 수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이 수의 원인, 수의 근본, 수의 인연은  <애>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애>를 인연하므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애(愛)를 인연하여 구(求)함이 있고,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고,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 아낌을 인연하여 집[家]이 있고,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는 것이다.’ 

아난다야,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칼과 작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으며, 한량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구족하면 오로지 괴로운 오음[苦陰]이 생긴다.

  

아난다야, 지킴이 없어 제각기 지킴이 없으면, 가령 지킴을 떠나더라도 칼과 막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이 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칼과 작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는 원인과 근본과 인연은 지킴이다. 무슨 까닭인가.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칼과 작대기,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괴로운 오음이 생긴다. 

  

아난다야,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으면 이것을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다’고 말한다. 아난다야, 만일 집이 없어 제각기 집이 없으면 집을 떠나더라도 지킴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지킴의 원인과 지킴의 근본과 지킴의 인연은 이 집이다.’ 무슨 까닭인가. 집을 인연하기 때문에 지킴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으면 이것을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다’고. 아난다야, 만일 아낌이 없어 제각기 아낌이 없으면 아낌을 떠나더라도 집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집의 인과 집의 원인과 집의 근본과 집의 인연은 이 아낌이다.’ 무슨 까닭인가. 아낌을 인연하기 때문에 집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면 이것을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 아난다야, 만일 집착이 없어 제각기 집착이 없으면 집착을 떠나더라도 아낌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아낌의 원인과 아낌의 근본과 아낌의 인연은 집착이다.’ 무슨 까닭인가. 집착을 인연하기 때문에  아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 아난다야, 만일 욕심이 없어 제각기 욕심이 없으면 가령 욕심을 떠나더라도 집착이 있겠는가.”

  

“없나이다.”

“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집착의 인과 집착의 원인과 집착의 근본과 집착의 인연은 곧 이 욕심이다’고. 무슨 까닭인가. 욕심을 인연하므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으면 이것을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른바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고. 아난다야, 만일 분별이 없어 제각기 분별이 없으면 가령 분별을 떠나더라도 집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욕심의 원인과 욕심의 근본과 욕심의 인연은 분별이다.’ 무슨 까닭인가. 분별을 인연하므로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으면 이것을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다.’ 아난다야, 만일 이익이 없어 제각기 이익이 없으면 가령 이익을 떠나더라도 분별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분별의 원인과 분별의 근본과 분별의 인연은 이익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익을 인연하므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으면 이것을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 아난다야, 만일 구함이 없어 제각기 구함이 없으면 가령 구함을 떠나더라도 이익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이익의 원인과 이익의 근본과 이익의 인연은 구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구함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애(愛)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으면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다.’ 아난다야, 만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으면 가령 <애>를 떠나더라도 구함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구함의 원인과 구함의 근본과 구함의 인연은 <애>다.’ 무슨 까닭인가. <애>를 인연하기 때문에 구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의 법은 각(覺)을 인(因)하고 각을 연(緣)하여 오는 것이다.

  

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각>에도 연이 있느냐?’고 묻거든 ‘<각>에도 연이 있다’말하라. 어떤 사람이 ‘각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갱락(更樂)을 인연한다’고 말하라. 마땅히 알라.  ‘<갱락>을 인연하여 <각>이 있다.’ 

아난다야, 만일 눈에 갱락이 없어 제각기 눈의 갱락이 없으면, 가령 눈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눈의 갱락을 인연하여 낙각(樂覺), 고각(苦覺), 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을 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만일 귀, 코, 혀, 몸, 뜻의 <갱락>이 없어 제각기 뜻의 <갱락>이 없으면, 가령 뜻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뜻의 갱락을 인연하여 낙각, 고각, 불고불락각을 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각의 인과 각의 원인과 각의 근본과 각의 인연은 갱락이다.’ 무슨 까닭인가. <갱락>을 인연하므로  <각>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도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갱락에도 연이 있다’고 말하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명색(名色)을 인연한다’고 말하라.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갱락이 있다.’ 

아난다야, 행하는 바와 연(緣)하는 바에 명색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연을 떠나더라도 상대가 있는 갱락이 있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색신(色身)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연을 떠나더라도 <증어갱락(增語更樂)>이 있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가령 명과 색을 떠나더라도 갱락이 있어 갱락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갱락의 원인과 갱락의 근본과 갱락의 인연은 <명색>이다.’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여 <갱락>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명색>에도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명색에도 연이 있다’고 말하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식(識)을 인연한다.’고 말하라. 마땅히 알라.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다. 아난다야, <식>이 어머니 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명색이 있어 이 몸을 이루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식>이 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명색이 정(精)을 만나겠는가?”

  

“만나지 못합니다.”

“아난다야, 어떤 소년과 소녀의 <식>이 처음부터 끊어지고 부서져서 있지 않으면 명색이 더 자라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명색의 원인과 명색의 근본과 명색의 인연은 식이다.’ 무슨 까닭인가. <식>을 인연하므로 <명색>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도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식에도 연이 있다’고 말하라. 어떤 사람이 ‘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명색>을 인연한다.’고 말하라. 마땅히 알라.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 아난다야, 식이 명색을 얻지 못하고 식이 명색에 서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으면, 식은 과연 남[生]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괴로움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마땅히 알라. ‘이 식의 원인과 식의 근본과 식의 인연은 명색이다.’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므로 <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야, 이것을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또한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을 보태어 설명해 전(傳)하며, 전해 설명하여 마련해야 한다. 곧 ‘식과 명색은 함께 있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신(神)이 있다고 보는가?”

존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부처님을 좇아 나옵니다. 원하건대 그것을 해설하여 주십시요. 그것을 들은 뒤에는 그 뜻을 알게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여 설한다.”  

존자 아난다는 분부를 듣고 있었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神)이라 본다.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으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또 신법(神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각은 신이다’라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물어야 한다.

 ‘각에는 낙각, 고각, 불고불락각이 있다. 너는 이 삼각에서 어느 각을 신이라고 보는가? 만일 낙각을 깨달으면 그 때에 그는 고각과 불고불락각은 멸하고 다만 낙각만을 깨닫는다. 낙각은 무상(無常)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의 법이다. 만일 낙각이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다야, 만일 고각이 있으면, 그는 그 때에는 낙각과 불고불락각은 멸하고 다만 고각만을 깨닫는다. 고각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의 법이다. 만일 고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만일 불고불락각이 있으면, 그는 그 때에는 낙각과 고각은 멸하고 다만 불고불락각만을 깨닫는다. 불고불락각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의 법이다. 만일 불고불락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다야, 그는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다만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 다시 각을 신이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으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해야 한다. ‘네가 각이 없으면 깨달을 수가 없어 응당 이것은 너의 소유라고 말할 수 없다.’ 아난다야, 그가 이렇게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해야 한다. 

  

‘네가 만일 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신이 각을 떠나면 응당 신은 청정할 수 없다.’ 아난다야, 그가 다시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그러므로 그는 응당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다야,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 한다.

  

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가?”

존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부처님을 좇아 나옵니다. 원하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한다.”

  

존자 아난다는 분부를 받고 듣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은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보지 않은 뒤에는 이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피로하지 않는다. 피로하지 않은 뒤에는  열반에 든다. 그래서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뜻을 안다.

  

아난다야, 이것을 ‘거듭 말을 보태고 말을 보태어 설명해 전하며, 전해 설명하여 <유(有)>를 주장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받아들임이 없다. 

아난다야, 비구가 이렇게 바르게 해탈하면, 여래는 마지막이라고 보거나 마지막이 아니라고 보거나 마지막이면서 마지막이 아니라고 보거나 마지막도 아니며 마지막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보는 일이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 한다.

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존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부처님을 좇아 나옵니다. 원하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소색(小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무량색(無量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소무색(小無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무색(無量無色)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신이 있어 만일 소색을 떠날 때에도 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신이 있어 무량색을 떠날 때에도 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무량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신이 있어 소무색을 떠날 때에도 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신이 있어 만일 무량무색을 떠날 때에도 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보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고 한다.

  

아난다야, 어떻게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가?”

존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근본이 되시고, 법의 주인이 되시며, 법은 부처님을 좇아 나옵니다. 원하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들은 뒤에는 널리 그 뜻을 알게 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또한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신이 있어 만일 소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신이 있어 무량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이와 같이 무량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신이 있어 소무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신이 있어 무량무색을 떠날 때에도 또한 이러하다 생각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이 아닌 것을 신이라 보지 않아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고 한다.

  

아난다야, 七식주(識住)와 二처(處)가 있다.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약간의 생각[想]이 있으니 사람과 욕천(欲天)이다. 이것을 제 一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범천(梵天)이 처음 나서 오래 살지도 않고 일찍 죽지도 않는다. 이것을 제 二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약간의 생각이 있으니, 황욱천(晃昱天)이다. 이것을 제 三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변정천(遍淨天)이다. 이것을 제 四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건너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이 없는 공처(空處)로서 이 공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이것을 제 五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량공처를 건너 한량이 없는 식처(識處)로서 이 식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이것을 제 六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량식처를 건너 무소유처(無所有處)로서 이 무소유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다. 이것을 제 七식주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것이 二처(處)인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생각[想]도 없고 감각도 없으니, 무상천(無想天)이다. 이것을 제 一처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소유처를 건너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로서 이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이것을 제 二처라 한다.

  

아난다야, 제 一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약간의 생각이 있으니 사람과 욕천이다.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二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약간의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범천이 처음 나서 오래 살지도 않고 일찍 죽지도 않는 것이다.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三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약간의 생각이 있으니, 황욱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四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은 한 몸에 한 생각이 있으니, 변정천이다.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五식주란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으로서 일체의 빛깔이란 생각을 건너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이 없는 공처로서 이 공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무량공처천이다.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은 일체의 무량공처를 건너 한량이 없는 식처(識處)로서 이 식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이것을 제 六식주라 한다.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七식주란 것은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으로서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건너 무소유처로서 이 무소유처에서 성취하여 있으니, 무소유처천이다.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원인을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에 집착하고 그 식주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一처란 것은 빛깔이 있는 중생으로서 생각도 없고 감각도 없으니, 무상천이다. 어떤 비구가 그 곳[處]을 알고 그 곳의 원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곳에 집착하고 그 곳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제 二처란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으로서 일체의 무소유처를 건너는 비유상비무상처로서 이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성취하여있으니, 비유상비무상처천이다. 어떤 비구가 그 곳을 알고 그 곳의 원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 알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참뜻을 안다면, 아난다야, 이 비구는 그래도 그 곳에 집착하고 그 곳에 머무르기를 즐겨하겠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난다야, 만일 어떤 비구가 七식주와 二처에 대해서 그 참뜻을 알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얻으면, 이것을 비구 아라한으로서 <지혜의 해탈>이라 부른다.

  

아난다야, 八해탈이 있다. 안의 색(色)의 생각이 밖의 색(色)을 관찰하니, 이것을 제 一해탈이라 한다. 안으로 색상(色想)이 없이 밖으로 색을 관찰하니, 이것을 제 二해탈이라 한다. 깨끗한 해탈을 몸으로 증득(證得)하여 성취하여 머무니, 이것을 제 三해탈이라 한다.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건너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이 없는 공처로서 이 공처에서 성취하여 머무니, 이것을 제 四해탈이라 한다.

일체의 한량이 없는 공처를 건너 한량이 없는 식처로서 이 한량이 없는 식처에서 성취하여 머무니, 이것을 제 五해탈이라 한다. 일체의 한량이 없는 식처를 건너 무소유처로서 이 무소유처에서 성취하여 머무니, 이것을 제 六해탈이라 한다. 

일체의 무소유처를 건너 비유상비무상처로서 이 비유상비무상처에서 성취하여 머무니, 이것을 제 七해탈이라 한다.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건너 멸해탈(滅解脫)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머무는 줄을 알고, 지혜로 관찰하여 모든 누(漏)가 다한 줄을 아니, 이것을 제 八해탈이라 한다.

  

아난다야, 만일 어떤 비구가 七식주와 二처에 대해서 그 참뜻을 알고 마음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얻고, 또 이 八해탈을 순(順)으로 역(逆)으로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머물며, 또한 지혜로 관찰하여 모든 누(漏)가 다하면, 이것을 비구 아라한으로서 <구해탈(俱解脫)>이라 부른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존자 아난다와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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