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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 31중아함분별성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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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30,171회 작성일 23-02-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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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중아함분별성제경(分別聖蹄經)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행설법(正行說法)이니 사성제다. 널리 껴잡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한다. 과거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들도 또한 이 정행설법을 했다. 미래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들도 또한 이 정행설법을 할 것이니 사성제다. 널리 껴잡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할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총명한 지혜, 속한 지혜, 민첩한 지혜, 예리한 지혜, 넓은 지혜, 깊은 지혜, 도로 나아가는 지혜, 환히 아는 지혜, 변재의 지혜가 있다. 사리불 비구는 진실한 지혜를 성취했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남을 위하여 널리 가르치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한다. 그가 이 사성제를 널리 가르치고 두루 보이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할 때에, 한량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사리불 비구는 바른 소견으로써 사람을 인도하고, 목건련 비구는 사람으로 하여금 최상의 진제(眞際)에서 서게 하니, 번뇌가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모든 범행을 나게 하는 것이 마치 생모와 같고, 목건련 비구는 모든 범행을 자라게 하는 것이 마치 양모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범행자는 마땅히 사리불과 목건련 비구를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 두 비구는 모든 범행자를 위하여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셨다. 이에 존자 사리불은 여러 비구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세상에 나오셨다. 중생을 위하여 <사성제>를 널리 가르치고 두루 보이시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하신다. 사성제는 고성제, 고집, 고멸, 고멸도성제다. 고성제는 남(生)은 고통이며 늙음은 고통이며, 병은 고통이며 죽음은 고통이며, 원수와 만남이 고통이며 사랑과 여윔이 고통이며, 구하여 얻지 못함이 고통이며 간략하게 줄여서 오성음(盛陰)은 고통이다.

남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남이란 무엇인가. 모든 중생의 무리들은 배게 되어 배고, 나오게 되면 나와서 오음(陰)을 일으킨 뒤에는 명근을 얻는다. 이것을 남이라 한다. 중생이 날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되 온몸의 고통을 받으며, 온몸의 고통이 느낌을 안다. 마음도 고통을 받되 온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온 몸의 고통의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되 두루 받으며, 두루 느낌을 깨닫는다. 몸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느낀다. 마음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도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남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늙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늙음이란 또 무엇인가. 모든 중생의 무리들은 늙기 때문에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지며, 젊음은 날로 쇠한다. 허리는 굽고 다리는 휘어지며, 몸은 무겁고 피는 머리로 올라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살은 쭈그러들고 피부는 늘어나 주름살은 얽은 것 같으며, 모든 근은 낡고 얼굴빛은 추악하다.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중생이 늙을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되 두루 고통을 받으며,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고통을 받으며,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두루 고통을 받으며, 두루 느낌을 안다. 몸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이 장렬하고 번뇌하고 우척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장렬하고 번뇌하고 우척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장렬하고 번뇌하고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늙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병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병이란 무엇인가. 두통, 눈병, 귓병, 콧병, 낯병, 입술병, 잇병, 혓병, 잇몸병, 목병, 헐떡거림, 기침병, 구토, 후비, 지랄병, 등창, 경일, 피가래, 열병, 여윔병, 치질, 이증 등이다. 이러한 병이 갱락촉에서 생겨 마음을 떠나지 않고 몸 속에 있으면 이것을 병이라 한다. 병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앓을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遍受)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병의 고통을 말함은 이러한 때문인 것이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이른바 저 중생의 무리들은 목숨을 마치기 항상됨이 없어 죽으면 흩어져 멸하고, 수가 다하면 부서져 명근이 닫긴다.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죽음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죽을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원수를 만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원수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안의 6처(處)가 있으니, 사랑하지 않는 안처와 이·비·설·신·의처가 그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 되고 서로 사귀고 가까이 하게 되고 함께 합해 괴로워한다. 이와 같이 외처와 갱락과 각·상·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다. 여러분, 중생에게는 실로 6계가 있으니, 사랑하지 않는 지계와 수·화·풍·공·식계가 그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사귀고 가까이 하게 되고 함께 합해 괴로워한다. 이것을 원수를 만남이라 한다. 여러분, 원수를 만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원수를 만날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원수를 만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랑을 떠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말하는가. 사랑을 떠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안의 6처가 있으니, 사랑하는 안처와 이·비·설·신·의처가 그것이다. 그들은 서로 달라 흩어져 서로 응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떠나 모이지 못하고 사귀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이와 같이 외처와 갱락·각·상·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다. 중생에게는 실로 6계(界)가 있으니, 사랑하는 지계와 수·화·풍·공·식계가 그것이다. 그들은 서로 달라 흩어져 서로 응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떠나 모이지 못하고 사귀지 못하며, 가까이 하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이것을 사랑의 떠남이라 한다. 사랑의 떠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이별할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사랑을 떠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구하여 얻지 못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른바 중생은 나는(生) 것으로써 나는 법을 떠나지 못한다. 나로 하여금 나지 않게 하고자 해도 그것은 실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늙는 법·앓는 법·죽는 법·시름하는 법도 또한 그러하며, 그것은 걱정하고 슬퍼하는 법으로써 걱정하고 슬퍼하는 법을 떠나지 못한다. 나로 하여금 걱정하고 슬퍼하지 않게 하고자 해도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실로 괴로운 것으로써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괴로운 것으로써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면, 이것을 돌려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 중생은 실로 즐거운 것으로써 사랑할 만한 것이라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즐거운 것으로써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이것을 항상 오래 있게 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실로 사상으로써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사상으로써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면, 이것을 돌려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실로 사상으로써 사랑할 만한 것이라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사상으로써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이것을 항상 오래 있게 하여 변하지 않는 법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구하여 얻지 못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간략하게 줄여 5성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른바 색성음과 각·상·행·식성음이 그것이다. 또 5성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이것은 고성제였고,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고성제이다. 참된 진리로써 헛되지 않고 여(如)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써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如是諦)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고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애집고집성제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안의 6처가 있으니, 안처와 이·비·설·신·의처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만일 애욕이 있고 때낌이 있으며, 물듬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集)이라 한다. 여러분,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는 내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집고집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이자를 붙이는 재물을 사랑하고, 가지는 직업을 위하여 애정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며, 물듬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집고집성제(愛集苦集聖諦)를 안다. 이와 같이 외처와 갱락·각·상·사의 애정도 또한 이와 같다.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6계가 있으니, 지계와 수·화·풍·공·식계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만일 애정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며, 물듦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

여러분,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는 내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집고집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재물을 사랑하여 가지는 직업이 있으면, 애정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며 물듬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집고집성제를 안다. 과거에도 이것은 애집고집성제였고,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애집고집성제이다. 참된 진리로써 헛되지 않고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써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애집고집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 것이 애멸고멸성제(愛滅苦滅盛諦)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안의 6처가 있으니, 안처와 이·비·설·신·의처가 그것이다.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서 버리고 다 뱉아서 욕(欲)을 아주 없애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멸고멸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이자 붙는 재물을 사랑하지 않아서 가지는 직업이 없고,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멸고멸성제를 안다. 이와 같이 외처와 갱락·각·상·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다.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6계가 있으니, 지계와 수·화·풍·공·식계가 그것이다.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서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 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는 내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멸고멸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이자 붙이는 재물을 사랑하지 않아서 가지는 직업이 없으며,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서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 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멸고멸성제를 안다. 과거에도 이것은 애멸고멸성제였고,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애멸고멸성제이다. 참된 진리로써 헛되지 않아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써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애멸고멸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고멸도성제(苦滅道盛諦)인가. 이른바 바른 소견·바른 뜻·바른 말·바른 행동·바른 생활·바른 방편·바른 생각·바른 정이 그것이다. 또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災患)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는 착한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두루 가리어 가진 법을 결정하며, 두루 보고 관찰하여 환히 안다.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여러분, 어떤 것이 바른 뜻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이 착한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마음으로 살피고 두루 자세히 살피고 그것을 따라 살피어, 생각할 만한 것이면 생각하고 바랄 만한 것이면 바란다. 이것을 바른 뜻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말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입의 사묘행(四妙行)은 제하고 다른 모든 입의 악행은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이것을 바른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행동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혹은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몸의 3묘행은 제하고 다른 모든 몸의 악행은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이것을 바른 행동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생활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集)을 집, 멸(滅)을 멸, 도(道)를 도라고 생각할 때,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혹은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욕심이 많아 만족할 줄 모르지 않으며, 온갖 기술과 주설의 삿된 직업으로써 생활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써 옷을 구하여 법이 아닌 것을 쓰지 않으며, 또한 법으로써 음식과 자리를 구하여 법이 아닌 것은 쓰지 않는다. 이것을 바른 생활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방편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때,그 중에서 만일 정진 방편이 있으면, 한결같이 꾸준히 힘써 구하고 힘차게 나아가 오로지 달라붙어 버리지 않으며, 또한 지쳐 물러나지도 않고 바르게 그 마음을 항복 받는다.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만일 따르는 생각은 생각하고 향하지 않는 생각은 등지며, 두루한 생각을 생각하고 되풀이한 마음을 기억하여, 바르게 마음의 응하는 바를 잊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정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혹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만일 마음이 머무르고 선이 머무르고 순함이 머물러, 어지럽지 않고 흩어지지 않아 바른 정을 거두어 잡으면, 이것을 바른 정이라 한다.

과거에도 이것은 고멸도성제요,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고멸도성제다. 참된 진리로써 헛되지 않고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써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고멸도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게송으로써 말하였다.

  

부처님은 모든 법을 환히 알아

한량이 없는 선한 덕을 보시고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잘 나타내시고 분별하시네.

  

존자 사리불이 이렇게 말하니, 여러 비구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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