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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아함경

12처 잡아함12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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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40,257회 작성일 21-07-2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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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잡아함오전경(12처)

41. 오전경(五轉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쌓임이 있으니 색(물질작용)의 쌓임과 수(감수작용), 상(표상작용), 행(행위작용), 식(분별작용)의 쌓임이다. 나는 이 다섯 가지 쌓임에 대해서 그를 참으로 안다. 색과 색의 모임과 색의 맛과 색의 근심과 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을 참으로 안다. 곧 그것들의 모임과 그것들의 맛과 그것들의 근심과 그것들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을 참으로 아는가. 곧 모든 색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나는 <색>을 참으로 안다. 곧 색에 대해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으로써 이것을 색의 모임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색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곧 색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으로써 이것을 색의 맛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색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색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색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색>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만일 색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색을 떠남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을 참으로 아는가. 곧 여섯 가지 받는 몸이 있으니 눈으로 부딪쳐 수가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으로 부딪쳐 수가 생기는 것으로써 이것을 수라 하며, 이렇게 나는 수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모임을 참으로 아는가. 곧 부딪침의 모임이 수의 모임이니 이렇게 나는 수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곧 여섯 가지 수를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으로써 이것을 수의 맛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수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곧 만일 수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수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수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를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곧 수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고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수를 떠남이라 하며, 나는 수를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상하는 몸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으로 부딪쳐 상이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으로 부딪쳐 상이 생기는 것으로써, 이것을 상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상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모임을 참으로 아는가. 곧 부딪침의 모임이 상의 모임이니, 이렇게 나는 상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곧 상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을 상의 맛이라 하며, 나는 상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상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으로써 이것을 상의 근심이라 하며, 나는 상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곧 만일 상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상을 떠남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상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상[思]하는 몸이 있으니, 곧 눈으로 부딪쳐 상이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으로 부딪쳐 상이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을 행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행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모임을 참으로 아는가. 곧 부딪침의 모임이 행의 모임이니, 이렇게 나는 행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곧 행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으로써 이것을 행의 맛이라 하며, 나는 행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행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행의 근심이라 하며, 나는 행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만일 행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행을 떠남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식[識]의 몸이 있으니, 곧 눈의 식이 몸, 귀, 코, 혀, 몸, 뜻의 식의 몸으로써 이것을 식의 몸이라 하며, 나는 식의 몸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모임을 참으로 아는가. 곧 정신과 색의 모임으로써 이것을 식의 모임이라 하며, 나는 식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곧 식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으로서 이것을 식의 맛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식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곧 만일 식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식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나는 식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곧 식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식을 떠남이라 하며, 나는 식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비구들이여,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색에 대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 뒤에 탐욕으로 향하는 마음을 여의면 바르게 향하는 것이라 한다. 만일 그가 바르게 향하면 수, 상, 행, 식에 대해서도 또한 그와 같다고 말한다.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색에 대해서 참으로 알고 참으로 보면, 그는 색을 싫어하고 욕심을 떠나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의 해탈을 얻을 것이다. 만일 마음의 해탈을 얻으면 순일(純一)하게 되며, 순일하게 되면 곧 범행이 이루어질 것이며, 범행이 이루어지면 다른 것을 떠나 자재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한다. 수, 상, 행, 식도 또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42잡아함칠처경(12처)

42. 칠처경(七處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일곱 곳의 착함[善]과 세 가지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 있다. 만일 이 법을 다 알면 번뇌가 다 하여 번뇌가 없게 되고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여, 현재에 스스로 알고 몸으로 증득하여 완전하게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생(生)은 이미 다 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음 생에 몸을 받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안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일곱 곳의 착함인가. 

비구들이여, 참으로 색(물질작용)을 알고, 색의 모임, 색의 멸함, 색을 멸하는 길, 색의 맛, 색의 근심, 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알며, 이와 같이 수(감수작용), 상(표상작용), 행(행위작용), 식(분별작용)과 그것들의 모임, 그것들의 멸함, 그것들을 멸하는 길, 그것들의 맛, 그것들의 근심, 그것들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 것이다.

어떻게 색을 참으로 아는가. 모든 색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이것을 색이라 하며, 색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의 모임을 아는가. 애정과 기쁨을 색의 모임이라 하며, 색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의 멸함을 참으로 아는가. 애정과 기쁨의 멸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색의 멸함이라 하며, 이렇게 색의 멸함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곧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상[念], 바른 정(定)으로서 이것을 색을 멸하는 길이라 하며, 색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곧 색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으로써 이것을 색의 맛이라 하며 색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색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색의 근심이라 하며 색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곧 색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색을 떠남이라 하며 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를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수이니, 눈으로 부딪쳐 수가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으로 부딪쳐 수가 생기는 것을 수라 하며, 이렇게 수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모임을 아는가. 부딪침의 모임이 곧 수의 모임이니, 이렇게 수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멸함을 참으로 아는가. 부딪침의 멸함이 곧 수의 멸함이니, 이렇게 수의 멸함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를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바른 소견과 내지 바른 정으로서, 이것을 수를 멸하는 길이라 하며, 이렇게 수를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수를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수의 맛이라 하며 이렇게 수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수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수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수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수를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만일 수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수를 떠남이라 하며 이렇게 수를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상이니, 눈으로 부딪쳐 상이 생기고 귀, 코, 형, 몸, 뜻으로 부딪쳐 상이 일어나는 것을 상이라 하며, 이렇게 상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모임을 아는가. 부딪침의 모임이 곧 상의 모임이니, 이렇게 상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멸함을 참으로 아는가. 부딪침의 멸함이 곧 상의 멸함이니, 이렇게 상의 멸함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바른 소견과 내지 바른 정으로서 상을 멸하는 길이라 하며, 이렇게 상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상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상의 맛이라 하며 이렇게 상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상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수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상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상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만일 상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상을 떠남이라 하며, 이렇게 상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상하는 몸[想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상[想]이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으로 부딪쳐 상이 생기는 것을 행이라 하며, 이렇게 행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모임을 참으로 아는가. 부딪침의 모임이 곧 행의 모임이니, 이렇게 행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멸함을 참으로 아는가. 부딪침의 멸함이 곧 행의 멸함이니, 이렇게 행의 멸함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바른 소견과 내지 바른 정으로서 이것을 행을 멸하는 길이라 하며, 행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행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행의 맛이라 하며, 행의 맛을 참으로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행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행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행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만일 행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행을 떠남이라 하며, 이렇게 행을 떠나기를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식의 몸이니 눈의 식과 귀, 코, 혀, 몸, 뜻의 식의 몸으로써 이것을 식이라 하며, 이렇게 식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모임을 참으로 아는가. 정신과 색[名色]의 모임이 곧 식의 모임이니, 이렇게 식의 모임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멸함을 참으로 아는가. 정신과 색의 멸함이 곧 식의 멸함이니, 이렇게 식의 멸함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아는가. 이른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니, 바른 소견과 내지 바른 정으로서 이것을 식을 멸하는 길이라 하며, 이렇게 식을 멸하는 길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맛을 참으로 아는가. 식을 인연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것을 식의 맛이라 하며, 이것을 식의 맛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의 근심을 참으로 아는가. 만일 식이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면 이것을 식의 근심이라 하며, 이렇게 식의 근심을 참으로 안다. 어떻게 식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가. 만일 식에 대해서 탐욕을 항복 받고 탐욕을 끊으며 탐욕을 뛰어나면 이것을 식을 떠나기를 참으로 아는 것이라 하며,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곱 곳의 착함이라 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 이치를 관찰하는 것인가. 비구가 만일 비고 한가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밖에서 <쌓임(陰)>과 <계(界)>와 <입(入)>을 관찰하고 바른 방편으로써 그 뜻을 상하면, 이것을 비구가 세 가지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상의 것을 비구의 일곱 곳의 착함과 세 가지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라 하며, 만일 이 법을 다 알면 번뇌가 다해 번뇌가 없게 되어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여 현재에서 스스로 알고 몸으로 증득하여 완전하게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 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스스로 안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68잡아함육입처경(12처)

68. 육입처경(六入處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히며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 참으로 관찰하여야 한다. 어떻게 참으로 관찰하는가. '이것은 색(물질작용)이요, 이것은 색의 모임이며, 이것은 색의 멸함이다. 이것은 수(감수작용), 상(표상작용), 행(행위작용), 식(분별작용)이요, 이것은 그것들의 모임이며, 이것은 그것들의 멸함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색의 모임이며, 어떤 것이 수, 상, 행, 식의 모임인가.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식(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서로 합하여 <접촉[觸]>이 생기며, 접촉을 인연하여 수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욕망이 생기며, 이리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기며, 이것을 색의 모임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과 냄새, 맛, 부딪침을 인연하는 것도 그러하여, 뜻과 법을 인연하여 뜻의 색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서로 합하여 접촉이 생기며, 접촉을 인연하여 수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착이 생기며, 이리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까지 생기게 되며, 이것을 색의 모임과 수, 상, 행, 식의 모임이라 한다.

어떤 것이 색의 멸함과 수, 상, 행, 식의 멸함인가.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서로 합하여 <접촉>이 생긴다. 그러므로 <접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며, 이리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까지 멸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과 냄새, 맛, 부딪침을 인연하는 것도 그러하며, 뜻과 법을 인연하여 뜻의 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서로 화합하여 <접촉>이 생긴다. 그러므로 접촉이 멸하면 <수>이 멸하고, 수가 멸하면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까지 멸하게 되며, 이것을 색의 멸함과 수, 상, 행, 식의 멸함이라 한다.

그리하여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관찰>과 같이, 내지 <증>의 십이경도 또한 이와 같이 널리 설명하였다.'

  

'수[受]과 남[生]과 또 낙(樂)과

육입처(六入處)를 말하였다.

낱낱의 십이경도

선정 삼매경(禪定三昧經)이다.‘



209잡아함육촉입처경(12처)

209. 육촉입처경(六觸入處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기관[六觸入處]이 있다. 어떤 것이 여섯인가. 눈이 부딪쳐 들이는 기관, 귀, 코, 혀, 몸, 뜻이 부딪쳐 들이는 기관이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이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기관의 모임, 멸함, 맛, 근심, 떠남에 대해서 참으로 알지 못하면,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내 법, 율에서 거리가 멀기는 허공과 땅 사이와 같다."

때에 어떤 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여미고 부처님께 예배한 뒤에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그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기관의 모임, 멸함, 맛, 근심, 떠남을 낱낱이 참으로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제 너에게 묻는 대로 대답하라. 비구여, 너는 눈이 부딪쳐 들이는 기관을 '이것은 <나>다. <다른 나>다. 그 둘의 합한 것이다'라고 보는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착하고 착하다! 이 눈이 부딪쳐 들이는 기관을 '<나>가 아니다. <다른 나>도 아니다. 그 둘의 합한 것도 아니다'라고 참으로 알고 보는 사람은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물들어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게 되며, 이것을 첫번째 부딪쳐 들이는 기관이라 한다. 그것을 이미 끊고 이미 알며, 그 근본을 끊는 것은 마치 타알라[多羅]나무 머리를 끊는 것과 같아서, 미래법(未來法)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며, 이른바 눈의 식(識)과 빛깔이 그것이다. 너는 다시, 귀, 코, 혀, 몸, 뜻이 부딪쳐 들이는 기관을 '이것은 <나>다. <다른 나>다. 그 둘의 합한 것이다'라고 보느냐."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착하고 착하다!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쳐 들이는 기관을 '이것은 <나>다. <다른 나>다. 그 둘의 합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참으로 알고 보는 사람은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물들어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게 되며, 비구여, 이것을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기관>이라 한다. 그것을 이미 끊고 이미 알면 그 근본을 끊는 것은 마치 타알라 나무 머리를 끊는 것과 같아서 미래의 욕심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며, 이른바 뜻의 의식과 법이 그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211잡아함세간오욕경

211. 세간오욕경(世間五欲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샬리의 지바카코마라 약사가 가진 암라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옛날 다른 깨달음[五覺]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에는 혼자 어느 고요한 곳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내 마음이 어느 곳으로 많이 향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과거의 다섯 가지 욕심 공덕을 많이 쫓아 헤맸고, 현재의 다섯 가지 욕심 공덕은 조금 쫓으며, 미래 세상을 쫓는 것은 더욱 적은 것을 관찰하였다. 나는 과거의 다섯 가지 욕심을 많이 쫓는 것을 관찰한 뒤에는 지극히 방편을 써서, 꾸준히 힘써 스스로 단속하여 다시 과거의 다섯 가지 욕심 공덕을 따르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꾸준히 힘써 스스로 단속하므로 말미암아 점점 아욕다라삼먁삼보리(阿 多羅三 三菩提)에 가까워졌다.

너희 비구들도 또한 과거의 다섯 가지 욕심 공덕을 많이 쫓고 또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미소(微少)하거든, 또한 마음이 과거의 다섯 가지 욕심 공덕을 많이 쫓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 단속하기를 더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오래지 않아 모든 번뇌를 다하게 되어,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여, 현재에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증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 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 줄을 스스로 알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눈이 빛깔을 보는 인연으로 안의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내고, 귀, 코, 혀, 몸, 뜻이 법의 인연으로 안의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정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 <들이는 기관>을 마땅히 깨닫고 알아야 하며, 만일 눈이 멸하면 빛깔이라는 생각이 곧 떠나고, 귀, 코, 혀, 몸, 뜻이 멸하면 법이라는 생각이 떠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들이는 기관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뒤에 방으로 들어가 좌선(坐禪)하셨다.

그때 많은 비구는 부처님께서 떠나신 뒤에 이렇게 의논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여섯 가지 들이는 기관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이 눈이 멸하면 빛깔이라는 생각이 곧 떠나고, 귀, 코, 혀, 몸, 뜻이 멸하면 법이라는 생각이 곧 떠난다'고 간략히 설법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신 채 방으로 들어가 좌선하신다. 우리들은 오늘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법을 아직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이 대중 가운데 누가 슬기의 힘이 있어서 능히 우리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법 가운데서 그 뜻을 널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고.

그리고 다시 '오직 존자 아난다는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항상 스승님에게 총명과 슬기와 범행이 있다고 찬탄을 받고 있다. 오직 존자 아난다 만이 능히 우리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법 가운데서 그 뜻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 다 같이 존자 아난다에게 가서 그 요긴한 뜻을 물어 보고 그 말대로 다 받들어 가지자'고 생각하였다.

그 때 많은 비구는 존자 아난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서로 인사한 뒤 한 쪽에 앉아, 존자 아난다에게 사뢰었다.

"존자여,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간략히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하고, 자세히 아난다에게 물으면서 말하였다.

"우리들을 위하여 널리 그 뜻을 설명하여 주시오."

존자 아난다는 여러 비구에게 말하였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법 가운데서 널리 그 뜻을 설명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것은 곧 이 <여섯 가지 들이는 기관>을 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눈이 들이는 기관이 멸하면 빛깔이라는 생각이 곧 떠나고, 귀, 코, 혀, 몸, 뜻의 들이는 기관이 멸하면 법이라는 생각이 곧 떠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법을 간략히 말씀하신 뒤에 방으로 들어가 좌선하셨다. 나는 이미 너희들을 위하여 그 뜻을 설명하였다."

존자 아난다가 이 뜻을 설명하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212잡아함불방일경

212. 불방일경(不放逸經)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비구을 위해 방일(放逸)하지 않는 행(행위작용, 行)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비구을 위해 방일하지 않는 행을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종류의 비구들을 향해서는 방일하지 않는 행을 말하지 않는가. 만일 비구로서 아라한이 되어 모두 존재[有]의 번뇌를 다하고, 모든 무거운 짐을 떠나고, 자기의 이익을 이미 얻고, 모든 존재의 맺음을 다하여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였으면, 그러한 종류의 비구에게는 나는 방일하지 않는 행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구들은 이미 방일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방일한 일은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저 모든 존자가 방일하지 않는 과(果)를 얻은 것을 본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는 방일하지 않는 행을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종류의 비구을 위해서는 방일하지 않는 행을 말하는가. 만일 모든 비구로서 배우는 지위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아직 더욱 높고 안온하게 <열반>을 향하여 머무르게 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종류의 비구에게는 방일하지 않는 행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비구들은 모든 근(根)을 훈련시킴으로써 마음이 즐겨 생활 도구를 따르지만, 착한 벗을 친근하여 오래지 않아 모든 존재의 번뇌를 다하게 되고 번뇌가 없어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여 현재에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증득한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 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의 눈의 식(분별작용, 識)이 사랑하고 즐겨 하며, 물들어 집착할 만한 빛깔도 그 비구는 그것을 본 뒤에는 기뻐하지 않고 찬탄하지 않으며, 물들지 않고 매여 집착하여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뻐하지 않고 찬탄하지 않으며, 물들지 않고 집착하여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훌륭하게 정진하여 몸과 마음이 그치고 쉬어 마음이 편안하고 지극히 머물러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언제나 고요하고 한 마음이 되어 한량이 없는 법의 기쁨이 있고. 다만 첫째가는 삼매[三昧]의 바른 받음을 얻어, 마침내 물러나 눈과 빛깔을 따르지 않으며, 귀, 코, 혀, 몸, 뜻의 식(識)과 법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241잡아함소연법경

241. 소연법경(燒燃法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샬리의 잔나비 못 가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셨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 비구들이여, 차라리 불에 달군 구리쇠 산대로써 그 눈을 태워 불붙게 할 지언정, 눈의 <의식>으로써 빛깔 모양을 잡아서 아름다운 형상을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빛깔 모양을 취하거나 아름다운 형상을 취함으로써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쇠 송곳을 불에 달구어 그 귀를 찌를지언정 귀의 식으로써 소리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소리를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귀의 식이 소리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소리를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 비구들이여, 차라리 날카로운 칼로 그 코를 벨 지언정 코의 식으로써 냄새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냄새를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냄새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냄새를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귀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날카로운 칼로 그 혀를 끊을 지언정 혀의 식으로 맛의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맛을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맛의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맛을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강철로 된 날카로운 창으로 그 몸을 찌를지언정 몸의 식으로써 부딪치는 모양이나 아름다운 부딪침을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부딪치는 모양이나 아름다운 부딪침을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수면(睡眠)은 어리석은 삶이다. 어리석은 삶은 이익도 없고 복도 없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차라리 잠잘 지언정 저 빛깔에 대해서 깨닫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만일 깨닫는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얽맴과 다툼이 생겨,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옳지 않은 일을 저지르게 하고, 하늘과 사람을 이익 되게 하거나 안락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이와 같이 공부한다. 즉 '나는 이제 차라리 불에 달군 쇠창으로 내 눈을 찌를 지언정, 눈의 식으로써 빛깔 모양을 취해, 세 가지 나쁜 세계에 떨어져 긴 밤 동안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나는 오늘부터 바르게 생각하여, 눈은 덧없고 하염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혹은 빛깔과 눈의 식과 눈의 부딪침과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 그것도 또한, 덧없고 하염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귀, 코, 혀, 몸의 들이는 곳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렇게 배워야 한다. 차라리 쇠창으로 내 몸을 꿸 지언정, 몸의 식으로써 부딪치는 모양이나 아름다운 부딪침을 취함으로써 세 가지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오늘부터 바르게 생각하여, 몸은 덧없고 하염 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혹은 부딪침과 몸의 식과 몸의 부딪침과 몸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 그것도 또한 덧없고 하염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고.

또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이렇게 공부한다. 즉 '잠이란 어리석은 삶이다. 이 어리석은 삶은 결과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복도 없는 것이다. 나는 마땅히 자지 않을 것이며 또한 깨닫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생각을 일으키면 얽맴과 다툼이 생겨,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치로써 이익 되지 않게 하고 안락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이 이렇게 관찰하면, 눈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혹은 빛깔과 눈의 식과 눈의 부딪침과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 그것에 대해서도 또한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싫어하므로 바라지 않고, 바라지 않으므로 해탈하며 또 해탈한 줄을 안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 귀, 코, 혀, 몸, 뜻에 있어서도 도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253잡아함비뉴가전연경

253. 비뉴가전연경(毘紐迦 延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존자 우다이[優陀夷]는 코살라[拘薩羅]국으로 가서 세간에 노닐면서 카만다야[拘磐多]촌에 이르러 비누가전연[毘紐迦 延]이라는 바라문[婆羅門] 여승(女僧)의 암라(菴羅) 동산에 머물렀다. 때에 비누가전연 바라문에게는 많은 젊은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나무하다가 암라 동산에 와서, 존자 우다이가 어떤 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얼굴은 단정하고 모든 근(根)은 고요하며 마음은 편안하여 훌륭한 조복(調伏)을 성취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나아가 서로 인사한 뒤에 물러나 한 쪽에 앉았다.

그때 우다이는 젊은이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설법하고 힘쓰기를 권한 뒤에 잠자코 있었다. 그 젊은이들은 존자 우다이의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그때 젊은이들은 나무 단을 지고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 집으로 가서 나무 단을 내려놓고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에게 나아가 물었다.

"혹시 여승(和尙尼)께서는 고타마의 설법을 들어셨습니까? 그는 암라 동산에 사문 우다이가 있는데 성은 고타마입니다. 그는 거기서 지극히 설법을 잘하셨습니다."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은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서 사문 우다이 고타마를 청해서, 내일 여기서 공양하도록 하라."

그때 젊은 제자들은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의 분부를 받고 존자 우다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우다이에게 말하였다.

"존자시여,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께서 존자 우다아에게 내일 아침에 공양하시라고 청합니다."

그때 우다이는 잠자코 청을 받았다.  젊은이들은 우다이가 청을 받은 줄을 알고 화상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에게 돌아가 말하였다.

"여승이시여, 저희들은 존자 우다이에게 청하였더니 존자 우다아이는 잠자코 청을 받아 주었습니다. "

그 때에 존자 우다이는 밤이 지나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 집으로 갔다. 그때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은 멀리서 존자 우다이가 오는 것을 보고 빨리 자리를 펴고 앉기를 청한 뒤에 여러 가지 음식을 베풀고 손수 풍성하고 맛난 음식을 차려 만족하게 하였다. 공양이 끝나자 손을 씻고 발우를 씻은 뒤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때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은 공양이 끝난 줄을 알고, 좋은 가죽신을 신고 천으로 머리를 덮고 따로 높은 자리를 펴서 업신여기는 모양으로 거만하게 앉아 우다이에게 말했다.

"물을 일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우다이는 대답했다.

"여승이여,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이렇게 하여 다음 날도 제자들은 암라 동산으로 가서 나무하고 법을 듣고 돌아가, 다시 여승에게 말하였다. 여승은 다시 제자들을 보내어 공양을 청하였다. 전날과 같이 세 번 되풀이하였다. 설법을 청하면 때가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설법하지 않았다.

모든 젊은 제자는 다시 여승에게 말하였다.

"암라 동산의 사문 우다이는 지극히 설법을 잘하십니다."

여승은 대답했다.

"나도 또한 그가 지극히 설법을 잘하는 줄을 알고 두 번 세 번 오기를 청해 음식을 차리고 법을 물어도 언제나 때가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설법하지 않고 떠났다."

모든 제자는 말하였다.

"여승은 좋은 가죽신을 신고 천으로 머리를 덮고 공경하지 않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설법하겠습니까. 

존자 우다이는 법을 공경하기 때문에 설법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여승은 대답했다.

"만일 그렇다면 다시 나를 위해 그를 청하라."

모든 제자는 분부를 받고 다시 공양을 청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그때 여승은 공양이 끝난 줄을 알자, 가죽신을 벗고 옷을 여미고는 낮은 자리에 앉아 공경하면서 말하였다.

"물을 일이 있는데 시간이 있으면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우다이는 대답했다.

"이제 물어십시요. 여승을 위해 설명하겠습니다."

여승은 물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가 지은 것이다'고 말하고, 다시 어떤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남이 지은 것이다'고 말합니다. 다시 어떤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와 남이 지은 것이다'고 말하며, 다시 어떤 이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존자는 어떠합니까."

존자 우다이는 말했다.

"여승이여, 아라한(阿羅漢)은 '괴로움과 즐거움은 이생(異生)이라'고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여승은 다시 물었다.

"그 뜻은 어떠합니까."

우다이는 대답했다.

"아라한은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은 인연을 좇아 난다'고 말한다."

우다이는 다시 바라문 여승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물으니 마음대로 대답하라. 너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눈이 있는가."

"있습니다."

"빛깔이 있는가."

"있습니다."

"눈의 식(識)과 눈의 부딪침과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존자 우다이여,"

우다이는 다시 물었다.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존자 우다이여,"

우다이는 다시 물었다.

"이것이 아라한이 말하는 '그 인연을 좇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난다'는 것이다."

바라문 여승은 존자 우다이에게 말했다.

"존자 우다이여, 그와 같이 아라한은 '그 인연을 좇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난다'고 말합니까."

"그렇다. 바라문 여승이여,"

바라문 여승은 다시 물었다.

"사문이시여, 아라한은 어떻게 '인연으로 생긴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 멸한다'고 말합니까."

우다이는 대답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물으니 마음대로 대답하라.

바라문 여승이여, 일체의 눈이 한꺼번에 멸해 남음이 없는데, 그래도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사문이시여."

"그와 같이, 귀, 코, 혀, 몸, 뜻이 한꺼번에 멸하고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는데, 그래도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사문이시여."

"그와 같이, 귀, 코, 혀, 몸, 뜻이 한꺼번에 멸하고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는데, 그래도 그것들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사문이시여."

"그와 같이 바라문 여승이여, 이것을 아라한이 말하는 <인연으로 생긴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 멸하는 것>이라 한다."

존자 우다이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에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눈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 때 비누가전연 바라문 여승은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에 들어가 의혹을 건넜으며, 남을 의지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치신 법에 들어가 그 법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여미고 공경히 합장하고 존자 우다이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스님에게 귀의합니다. 나는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삼보(三寶)에 귀의합니다."

그 때에 존자 우다이는 바라문 여승을 위해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고 기뻐하게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273잡아함수성유경

273. 수성유경(手聲喩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에 어떤 비구는 혼자서 고요히 생각하였다.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까. 어떤 것이 <나>인가. <나>는 어디서 머무르는가'고. 그는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혼자 고요한 곳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까. 어떤 법이 <나>인가. <나>는 어디 머무르는가'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너를 위해 두 법을 말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어떤 것이 둘인가. 눈과 빛깔이 둘이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부딪침, 뜻과 법이 둘이니, 이것을 두 법이라 한다.

비구여, 혹 어떤 이는 말한다. '사문 고타마가 말하는 두 법은 둘이 아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두 법을 세우리라'고. 그러나 그는 다만 말이 없을 뿐이다. 자꾸 물으면 알지 못하고  의혹만 더할 뿐이니 그것은 대경(對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의식[識]이 생긴다. 비구여, 눈이란 곧 살[肉] 형상이니, 그것은 안[內]이요, 그것은 인연이며, 그것은 단단한 것이며,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눈의 살 형상의 안의 지계(地界)라 한다. 비구여, 혹은 눈의 살 형상이, 혹은 안이요 혹은 인연으로 젖고 윤나는 것, 이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것을 눈의 살 형상의 안의 수계(水界)라 한다. 비구여, 혹은 그 눈의 살 형상이, 혹은 안이요 혹은 인연으로 밝고 따뜻한 것, 이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것을 눈의 살 형상의 안의 화계(火界)라 한다. 혹은 그 눈의 살 형상이, 혹은 안이요 혹은 인연으로 가볍게 나부끼면서 흔들리는 것, 이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니 눈의 살 형상의 안의 풍계(風界)라 한다.

비구여, 비유하면 두 손이 화합해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의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은 부딪침이니, 부딪침이 함께 하면 수, 상, <사(思)>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법은 <나>가 아니며, 항상이 아니며, 이것은 덧없는 <나>요, 항상이 아니요 안온이 아니며, 변하고 바뀌는 <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여, 그것은 이른바 나고 늙고 죽고 마치며 남[生]을 받는 법이기 때문이다.

비구여, 모든 행[行]은 꼭두각시와 같고 불꽃과 같으며 잠깐 동안에 다 썩어져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여, <공(空)>인 모든 행에 대해서 마땅히 알고 마땅히 기뻐하고 마땅히 생각하라. <공>인 모든 행은 항상 머물러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니다. <공>에는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

비유하면, 눈이 밝은 사부(士夫)가 손에 밝은 등불을 잡고 빈방에 들어가서 그 빈방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여, 일체의 <공>인 행과 <공>인 마음을 관찰하여 기뻐하면 <공>인 법과 행은 항상 머물러 변하고 바뀌는 법이 아니며, <나>와 <내 것>이 <공>하였기 때문이다. 눈과 같이, 귀, 코, 혀, 몸, 뜻과 법이 인연하여 뜻의 의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은 부딪침이니 부딪침이 함께 하면 수, 상, <사>가 생긴다. 이 모든 법은 <나>가 없고 항상이 없으며, <나>와 <내 것>이 <공>하였다.

비구여,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눈은 항상된 것인가. 항상 되지 않은 것인가."

"항상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일 항상 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일 덧없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그런데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로서 과연 거기서 <나>와 <다른 나>와, 그 둘의 합한 것을 보겠느냐."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귀, 코, 혀, 몸, 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그러므로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눈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기 때문에 바라지 않으며, 바라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고 또 해탈한 줄을 안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나니, 귀, 코, 혀, 몸, 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그때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합수성비경(合手聲譬經)>의 가르침을 듣고 혼자 어느 고요한 곳에서 알뜰히 생각하면서 함부로 놀지 않는데 머물렀다. 다음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고 아라한이 되었다.



322잡아함안내입처경

322. 안내입처경(眼內入處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어느 때 어떤 비구는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물러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눈을 내입처(內入處)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간략히 말씀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눈은 내입처입니까."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내입처로써 사대(四大)로 된 것인데, 깨끗한 빛깔이어서 볼 수 없으나 상대가 있는 것이다. 귀, 코, 혀, 몸의 내입처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이 말한다."

그는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뜻을 안의 감관이라 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뜻은 내입처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뜻을 내입처라 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의식은 빛이 아니어서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뜻의 내입처라 한다."

그는 다시 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물질을 외입처(外入處)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간략히 말씀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물질은 외입처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을 외입처라 하는 것은 물질은 사대로 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상대도 있는 것이니, 그래서 물질의 외입처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소리를 외입처라 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소리는 외입처입니까."

"소리는 사대로 볼 수는 없으나 상대는 있는 것이니, 소리, 냄새, 맛과 감촉은 또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닿임을 외입처라 말씀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닿임은 외입처입니까."

"닿임을 외입처라 하는 것은 이른바 사대 및 사대로 된 물질은 볼 수는 없으나 상대는 있는 것이니, 이것을 닿임의 외입처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외입처라 말씀하시고 널리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법은 외입처입니까."

"법을 외입처라 하는 것은  십일입(十一入)에는 소속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법의 외입처라 한다.“


"육 내입처가 있으니 이른바 눈의 내입처, 귀, 코, 혀, 몸, 뜻의 내입처이다.

육 외입처가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이른바 물질이 내입처이며, 소리, 냄새, 맛, 부딪침, 법이 외입처이니, 이것을 육 외입처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325잡아함육식촉수애신경(12처)

325. 육식촉수애신경(六識身經)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식신(識身)이 있다. 어떤 것을 여섯이라 하는가. 눈의 식신, 귀의 식신, 코의 식신, 혀의 식신, 몸의 식신, 뜻의 식신이니, 이것을 여섯 식신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촉신(觸身)이 있으니 어떤 것을 육 촉신이라 하는가. 눈의 촉신, 귀의 촉신, 코의 촉신, 혀의 촉신, 몸의 촉신, 뜻의 촉신이니, 이것을 육촉신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수신(受身)이 있으니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과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이니라. 이것을 여섯 가지 수신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상신(想身)이 있으니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과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생각이니라. 이것을 여섯 가지 상신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사신(思身)이 있으니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사(思)>와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사이니, 이것을 여섯 가지 사신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애신(愛身)이 있으니 어떤 것을 육 애신이라 하는가.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욕망과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욕망이니 이것을 여섯 가지 욕망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334 잡아함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334.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이와 같이 나는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쿠루수의 조우 마을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설하는 법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으며, 좋은 뜻과 좋은 맛으로서 순수하고 하나같고 원만하고 깨끗하여 범행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고 얽매임이 있는 법의 경(經)>이다. 어떤 것이 인이 있고 연이 있고 얽맴이 있는 법의 경인가? 

눈은 인이 있고 연이 있으며 얽매임이 있다. 어떤 것을 눈의 인, 눈의 연, 눈의 얽매임이라 하는가? 눈의 업(業)의 인, 업의 연, 업의 얽매임이다. 

업도 인이 있고 연이 있으며 얽매임이 있으니, 어떤 것을 업의 인, 업의 연, 업의 얽맴이라 하는가? 업은 욕망의 인, 욕망의 연, 욕망의 얽매임이다. 

욕망도 인이 있고 연이 있으며 얽매임이 있으니, 어떤 것을 욕망의 인, 욕망의 연, 욕망의 얽맴이라 하는가? 

욕망은 무명(無明)의 인, 무명의 연, 무명의 얽매임이다. 무명도 인이 있고 연이 있으며 얽맴이 있으니, 어떤 것을 무명의 인, 무명의 연, 무명의 얽맴이라 하는가? 

무명은 바르지 않은 생각의 인, 바르지 않은 생각의 연, 바르지 않은 생각의 얽매임이다. 바르지 않은 생각의 인이 있고 연이 있으며 얽매임이 있으니, 어떤 것을 바르지 않은 생각의 인, 바르지 않은 생각의 연, 바르지 않은 생각의 얽매임이라 하는가? 

눈과 색을 인연하여 바르지 않은 생각이 생기고 어리석음이 생기며, 눈과 색을 인연하여 바르지 않은 생각이 생기고 어리석음이 생기면 그 어리석음이 곧 무명이다. 

어리석음이 구(求)하고 욕심내는 것을 욕망이라 부르고, 욕망이 지은 것을 업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바르지 않은 생각의 인은 무명에 의한 욕망 때문이니 무명의 인은 욕망이요, 욕망의 인은 업이며, 업의 인은 눈이다. 

귀, 코, 혀, 몸, 뜻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존재에 대한 <인이 있고 연이 있고 얽맴이 있는 법의 경>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336잡아함육희우사상행경

336. 육희우사상행경(六喜行經)

  

이와 같이 내가 보고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기뻐하는 행[喜行]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지금 물질을 보고 기뻐하면 그 물질이 있는 곳에서 행한다. 귀로 소리를,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부딪침을, 뜻의 의식으로 법을 기뻐하면 그 법이 있는 곳에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섯 가지 기뻐하는 행이라 한다."


"여섯 가지 걱정하는 행[憂行]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만일 눈으로 물질을 보고 걱정스러우면 그 물질이 있는 곳에서 행한다. 귀로 소리를,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부딪침을, 뜻의 의식으로 법을 보고 걱정스러우면 그 법이 있는 곳에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섯 가지 걱정하는 행이라 한다."


"여섯 가지 버리는 행[捨行]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이른바 눈으로 물질을 보고 버리면 그 물질이 있는 곳에서 행한다. 귀로 소리를,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부딪침을, 뜻의 의식으로 법을 버리면 그 법이 있는 곳에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섯 가지 버리는 행이라 한다."


"여섯 가지 떳떳한 행[常行]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눈으로 물질을 보고 괴로워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고,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지며, 귀의 소리, 코의 냄새, 혀의 맛, 몸의 부딪침, 뜻의 의식의 법에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고,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지면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이라 한다."


"여섯 가지 떳떳한 행[常行]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혹 비구는 눈으로 물질을 보아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귀의 소리, 코의 냄새, 혀의 맛, 몸의 부딪침, 뜻의 식의 법에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만일 비구로서 이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을 성취하면 그는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을 얻는다."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혹 비구는 물질을 보아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귀의 소리, 코의 냄새, 혀의 맛, 몸의 부딪침, 뜻의 식의 법에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비구로서 이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을 성취하면 그는 세간에서 얻기 어려우며, 받들어 섬기고 공경하고 공양할 만하여 세간의 위없는 복 밭이 된다."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이 있다. 어떤 것을 육이라 하는가. 혹 비구는 눈으로 물질을 보아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귀의 소리, 코의 냄새, 혀의 맛, 몸의 부딪침, 뜻의 식의 법에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비구로서 이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을 성취하면 마땅히 알라. 그는 샤리풋트라와 같다.

샤리풋트라 비구는 눈으로 물질을 보아도 괴로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귀의 소리, 코의 냄새, 혀의 맛, 몸의 부딪침, 뜻의 식의 법에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가진다. 샤아리풋트라 비구는 이 여섯 가지 떳떳한 행을 성취하였으므로 세간에서 얻기 어려운 것을 얻었다. 그는 받들어 섬기고 공경할 만하여 세간의 위없는 복밭이 된다. "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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