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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 57잡아함질루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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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19,723회 작성일 23-02-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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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잡아함질루진경

57. 질루진경(疾漏盡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성 제타숲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슈라바스티성으로 들어가 걸식(乞食)을 하였다. 걸식을 마치고 돌아와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시자(侍者)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채 혼자 서쪽에 있는 나라로 가서 세간을 유행하셨다. 

이때 안타(安陀) 숲에 있던 어떤 비구는 부처님께서 대중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자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채 혼자 가시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그는 그것을 보자 존자 아난다에게 가서 아뢰었다.

"존자여, 부처님께서는 대중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자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혼자서 나가 유행하십니다.“

그러자 아난다는 그 비구에게 말했다.

"만일 부처님께서 대중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자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채 혼자 나가 유행하신다면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오늘 부처님께서는 적멸(寂滅) 속에 계시고자 하심이니 적멸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요."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유행하면서 반사국의 파타(波陀)촌으로 가서 동산 지기가 있는 숲 속에서 어떤 밧다사알라[波陀沙羅] 나무 밑에 앉으셨다. 

그때 많은 비구들은 아난다에게 가서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북으로 반사국 파타촌에 가셔서 동산 지기가 있는 숲 속의 밧다사알라 나무 밑에 계신다고 합니다."

"존자여, 우리들은 부처님님을 뵙지 못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만일 수고를 꺼리지 않으신다면 우리들을 가엾이 여기어 부처님에게 같이 가실 수 없겠습니까."

그때 존자 아난다는 형편을 이해하여 잠자코 허락한 뒤에 많은 비구들과 함께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슈라바스티성으로 들어가 걸식을 했다. 걸식을 마친 뒤에 절에 돌아 와 침구를 챙기고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서쪽으로 나가 세간에 유행했다. 거기서 다시 북으로 반사국 파타촌의 동산지기가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존자 아난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가사와 발우를 놓고 발을 씻은 뒤에 부처님에게 나가 그 발에 머리 숙여 절하고 한 쪽에 앉았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많은 비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고 가르치고,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비구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빨리 번뇌가 다하게 될까?'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비구가 이 자리에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빨리 번뇌가 다하게 될까?'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미 그것을 설법하였다. 모든 <쌓임>을 잘 관찰하여야 하며, 이른바 '사념처(네 가지 생각하는 곳)와 사정근(네 가지 바른 정근(精勤)), 사여의족(네 가지 여의족(如意足)), 오근(다섯 가지 뿌리), 오력(다섯 가지 힘), 칠각지(일곱 가지 깨달음 갈래), 팔정도(여덟 가지 거룩한 길)' 이다. 나는 이미 이러한 법을 설하며 모든 <쌓임>을 관찰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착한 남자로서 부지런히 하고자 하지 않고 부지런히 즐겨 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생각하지 않고 부지런히 믿지 않으면서 스스로 게으르면 그는 더욱 나가지 못해 모든 번뇌를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착한 남자로서 내가 설명한 법에서 모든 <쌓임>을 잘 관찰하여 부지런히 하고자 하고, 부지런히 즐겨 하며, 부지런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믿는다면 그는 능히 모든 번뇌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물질을 <나>라고 보며, 그것을 <나>라고 보면 이것을 행(행, 行)이라 한다. 그 행은 무엇이 원인이며, 무엇의 모임이며, 무엇의 남[生]이며, 무엇의 변함인가? 무명(無明)이 부딪쳐 애욕이 생기며, 애욕을 인연하여 행을 일으킨다. 애욕은 무엇이 원인이며, 무엇의 모임이며, 무엇의 남이며, 무엇의 변함인가? 애욕은 수(느낌, 受)가 원인이며, 수의 모임이며, 수의 남이며, 수의 변함이다. 수는 촉(닿임, 觸)이 원인이며, 촉의 모임이며, 촉의 남이며, 촉의 변함이다. 촉은 무엇이 원인이며, 무엇의 모임이며 무엇의 남이며, 무엇의 변함인가? 촉은 육입(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원인이며, 육입모임이며, 육입의 남이며, 육입의 변함이다. 육입은 덧없고 변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인연하여 일어나는 법이며, 촉의 느낌과 행의 느낌도 또한 덧없고 변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인연하여 일어나는 법이다. 

이렇게 관찰하면서도 그는 물질을 <나>라고 본다. 물질을 <나>라고 보지 않더라도 물질을 <내 것>이라고 보며, 물질을 <내 것>이라고 보지 않더라도 물질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물질은 <나>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나>는 물질 안에 있다고 본다. <나>는 물질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느낌을 <나>로 보며, 느낌을 <나>라고 보지 않더라도 느낌을 <내 것>이라고 보며, 느낌을 <내 것>이라고 보지 않더라도 느낌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느낌은 <나>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나>는 느낌 안에 있다고 본다. <나>는 느낌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생각을 <나>라고 보며, 생각을 <나>라고 보지 않더라도 생각을 <내 것>이라고 보며, 생각을 <내 것>이라고 보지 않더라도 생각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생각은 <나>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나>는 생각 안에 있다고 본다. <나>는 생각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행을 <나>라고 보며, 행을 <나>라고 보지 않더라도 행을 <내 것>이라 보며, 행을 <내 것>이라 보지 않더라도 행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행은 <나>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나>는 행 안에 있다고 본다. <나>는 행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식을 <나>라고 보며, 식을 <나>라고 보지 않더라도 식을 <내 것>이라고 보며, 식을 <내 것>이라고 보지 않더라도 식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식은 <나>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나>는 식 안에 있다고 본다.

<나>는 식 안에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다시 단견(斷見)을 지어 유견(有見)을 부수고, 단견을 지어 유견을 부수지 않더라도 아만(我慢)을 떠나지 못하며, 아만을 떠나지 못하면서 다시 <나>를 보고 <나>를 보면 그것은 곧 행이다. 행은 무엇이 원인이며, 무엇의 모임이며, 무엇의 남이며, 무엇의 변함인가...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내지 아만도 또한 그러하며,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 번뇌가 빨리 다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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