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능엄경3 > 우리말능엄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우리말능엄경

우리말능엄경3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642회 작성일 21-08-18 20:18

본문

(3-1-10) 바르게 본 것은 요량할 수 없다

아난다 " 부처님이시여, 진실로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본각의 반연하는 것이 십방세계에 두루 하며 고요히 항상 있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비가라바라문들은 명체라 하고, 갯 속에 파묻히는 외도들은 진아라 하며, 십방세계에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부처님께서도 릉가사나에서 대혜보살에게 이런 이치를 말씀하실 때 “외도들은 자연을 주장하는데 내가 말하는 인연은 외도들의 주장과 다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난다가 지금 생각하건대, 본각의 성품이 자연한 것이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온갖 허망한 것과 뒤바뀐 것을 여의어서, 인연이 아닌 듯하니, 외도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분간하여야 잘못된 소견에 빠지지 아니하고, 참되고 묘하고 밝은 본각 마음을 얻겠습니까?" 

부처님 " 아난다야,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실하게 말하였건만, 너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인가 의심하느냐.

 아난다야, 이견의 성품이 반드시 자연일진댄, 자연이란 것이 분명하여 자연의 본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네가 이 묘하고 밝은 견의 성품을 보라. 무엇으로 자연의 본체라 하느냐. 이 견의 성품이 밝은 것을 보는 것이 자연의 본체라 하느냐? 아니면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이 자연의 본체라 하느냐? 빈 것 보는 것을 자연의 본체라 하느냐? 막힌 것 보는 것을 자연의 본체라 하느냐?

 아난다야, 만일 밝은 것을 보는 것을 자연의 본체라 한다면, 어두운 것은 보지 못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빈 것 보는 것을 자연의 본체라 한다면, 막힌 것은 보지 못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어두운 것 보는 것을 자연의 본체라 한다면, 밝을 때는 견의 성품이 없어 질 것인데 어떻게 밝은 것을 보느냐?" 

아난다 " 이 견의 성품이 반드시 자연이 아니라면 인연이라고 할 것이나, 내 마음에 오히려 분명치 못하여 부처님께 묻습니다. 어찌하면 이 이치가 인연에 맞겠습니까?" 

부처님 " 네가 인연이라 하기에, 다시 묻는다. 네가 지금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봄으로 인하여, 견의 성품이 나타나니, 이 견의 성품이 밝음으로 인하여 있느냐. 어두움으로 인하여 있느냐, 빈 것으로 인하여 있느냐. 막힘으로 인하여 있느냐. 아난다야, 만일 밝음으로 인하여 견의 성품이 있다면, 어두운 것은 보지 못하여야 할 것이며, 만일 어두움으로 인하여 있다면, 밝은 것은 보지 못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빈 것으로 인하여 있다하면, 막힘으로 인하여 있다 하는 것도, 밝음으로 인하여 있다는 것이나, 어두움으로 인하여 있다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묘하고 밝은 본각의 정기는 인도 아니며 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며 인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아니라는 것도 없고,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없으며, 기라는 것도 없고, 기가 아니라는 것도 없느니라.

 온갖 분별하는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곧 온갖 것이 모두 참된 것이거늘, 네가 어찌 이 가운데 망녕된 생각을 내어, 세상의 희롱거리 논리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분별하려 하느냐? 마치 손바닥으로 허공을 만지려는 것과 같아서, 부질없이 애만 쓸지언정, 허공이 어찌하여 네게 잡히겠느냐." 


(3-1-11) 바르게 본 것은 볼 수 없다

아난다 " 부처님이시여, 이 묘한 본각의 성품이 인연이 아니라하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항상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이 네 가지 인연을 갖추어야 한다. 이른바 빈 것을 인하며, 밝은 것을 인하며, 마음을 인하며, 눈을 인함이다.”라고 하셨습니까." 

부처님 " 아난다야, 그것은 세간에서 인연으로 되는 모양을 말한 것이며, 제일의 뜻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아난다야, 네게 다시 묻는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본다고 말하는데, 어떤 것을 본다하며, 어떤 것을 보지 못한다 하느냐?" 

아난다 " 세상 사람들이 햇빛이나 달빛이나 등불 빛으로 인하여, 여라 가지 모양을 보는 것을 본다 하고, 이 세 가지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합니다." 

부처님 " 아난다야, 만일 밝은 빛이 없을 때에 보지 못한다 하면, 어두운 것도 보지 못해야 할 것인데, 만일 어두운 것을 본다면, 이것은 밝음이 없는 것일지언정, 어찌하여 보는 것이 없다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어두울 때에, 밝은 것을 보지 못하므로 보지 못한다 할 것이라면, 밝을 때에 어두운 것을 보지 못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밝을 때와 어두울 때를 둘 다 보지 못한다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서로 쫓아내고 독차지하는 것이지만, 너의 보는 성품은 잠간도 없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두 가지를 모두 본다 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보지 못한다 하겠느냐.

 그러니까 아난다야, 밝은 것을 볼 때에 보는 것이 밝은 것이 아니며, 어두운 것을 볼 때에 보는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니며, 빈 것을 볼 때에 보는 것이 빈 것이 아니며, 막힌 것을 볼

때에 보는 것이 막힌 것 아니다.

 이 네 가지 예로 설명하였으니 네가 다시 생각해 보아라. 보는 것을 다시 볼 때에 다시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여의어서, 보는 것으로도 미칠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이니 하는 말을 하느냐.

 너희 성문들이 소견이 좁고 아는 것이 없어, 맑고 깨끗한 실상인 참 성품을 알지 못하므로 다시 네게 설명하니, 잘 생각하여 보리에 나아가는 길에서 고달파 하거나 게을러하지 말라." 


(3-1-12) 허망한 봄에서 바르게 보는 것을 보이다

아난다 "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을 말씀하였으나, 화합인지 화합이 아닌지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은 보는 것 아니다.”는 말씀을 듣고 더욱 답답하니, 넓으신 자비로 큰 지혜 눈을 베풀어 주시어 본각인 마음이 밝고 깨끗하게 하여주십시오." 

 이 말을 마치고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려 하였다. 

 부처님이 아난다와 대중을 가엾이 여겨 큰 다라니의 여러 삼매와, 묘하게 닦아 나아갈 길을 말씀하려고 법문을 계속하셨다.

부처님 " 아난다야, 네가 비록 기억을 잘하지만, 그것은 많이 아는 데만 필요할 뿐이요, 사마타의 미묘하고 비밀하게 보아 살피는 데는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니, 자세히 들어라. 지금 너에게 분별하여 보이며, 번뇌가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를 얻게 하리라.

 아난다야, 온갖 중생이 세간에서 바퀴 돌 듯하는 것은 뒤바뀌어 분별하는 두 가지 허망한 소견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며, 제 업으로 바퀴 돌 듯 하는 것이다. 

 두 가지 허망한 소견은 혼자인 허망한 소견과 다 같은 허망한 소견이다.

 어떤 것을 혼자인 허망한 소견이라 하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눈에 삼이 서면, 밤에 등불을 볼 적에 이상하게 오색이 영롱한 등무리를 보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불에 나타나는 등무리는 등불의 빛이냐. 견의 빛이냐? 

 아난다야, 이 등무리가 만일 등불의 빛이라면 삼이 서지 않는 사람은 어찌하여 보지 못하고, 삼이 선 사람만 보느냐? 만일 견의 빛이라면, 견이 이미 등무리 빛이 되었으니, 삼이 선 사람의 등무리를 보는 것은 무엇이라 하겠느냐?

 또 아난다야, 이 등무리가 등불을 여의고 따로 있다면, 곁에 있는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안석을 볼 적에도, 등무리가 있어야 할 것이며, 견을 여의고 따로 있다면, 눈으로 볼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삼이 선 사람의 눈에만 보이느냐?

 그러니까, 빛은 실로 등불에 있는데 견의 삼병이 등무리가 된 것인 줄 아느니라. 등무리와 견의 병이 모두 삼 눈 탓이지만, 삼눈 탓임을 보는 것은 삼병이 아니니, 이 등무리가 등불 탓이며 견 탓이라 할 것이 아니며, 또 등불 탓이 아니며 견 탓이 아니라고 말할 것도 아니다.

 마치 곁에 있는 달이 보는 성품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달의 그림자로 생긴 것도 아닌데, 어떠하여 그러하냐? 곁에 있는 달은 눈을 눌러서 생기는 것이므로 지혜 있는 사람이면 눌러서 생긴 곁엣 달을 달의 형상이다 혹은 달의 형상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 견 탓이라고 견 탓이 아니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등무리도 이와같이 삼눈 탓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무엇을 일러서 등불 탓이라 하며 견탓이라 하겠느냐. 하물며 등불 탓이 아니며, 견 탓이 아니라고 분별하겠는가. 

 어떤 것을  허망한 소견이라 하느냐? 아난다야, 이 남섬부주에서 바다를 제외하고 중간에 있는 육지가 삼천 섬이 있는데, 복판 대륙에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이천삼백 나라가 있고, 또 어떤 섬에는 한나라나 두 나라가 있기도 하고, 혹은 삼십 나라, 사십 나라, 오십 나라가 있기도 하니라.

 아난다야, 이 가운데, 어떤 섬에 단 두 나라가 있는데, 한나라 사람들은 다 같이 나쁜 재변을 보게 되어, 그 나라 사람만이 여러 가지 괴변을 보되, 두 달이 뜨기도 하고, 두 해가 뜨기도 하며, 달무리나 햇무리도 보며, 일식 월식도 보며, 해의 귀거리, 해성, 뿔별, 별똥, 유성, 등무지개, 곁무지개, 숫무지개, 암무지개 등 여러 가지 나쁜 모양을 보며, 옆에 나라 사람들은 이런 괴변을 보지도 않으며 듣지도 않는다. 

 아난다야, 이 두 가지 상황을 교대로 들어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아난다야, 중생의 혼자인 허망한 소견으로 보는 등무리가 앞엣 물건처럼 나타나지마는 이것은 보는 이의 삼 눈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삼 눈은 보는 성품이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것이며, 참말 색진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삼 눈 탓임을 보는 자체는 견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산과 물과 세계와 중생들을 보는데 견주어 보면 모두 끝없는 옛적부터의 견의 병으로 생긴 것이다.

 보는 작용과, 견으로 반연한 것들이, 앞에 경계를 나타내는 듯 하지만 원래  각의 밝은 것으로 반연할 바를 보는 삼 병이며, 각으로 보는 것은 곧 삼 병이 아니며, 본각의 밝은 마음이 여러 가지 반연을 깨닫는 것은 삼 병이 아니다.

깨달을 것을 깨닫는 것은 삼 병이지만, 깨닫는 본체는 삼 병이 아니며, 보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이며, 어찌하여 깨닫는다, 듣는다, 안다, 본다 하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지금에 나를 보고, 너를 보고, 여러 세계를 보고, 중생들을 보는 것이 모두 견의 삼 병이요, 삼병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견의 참된 정기는 성품이 삼 병이 아니므로, 견이라 하지 않는다.


 아난다야, 중생들의 허망한 소견에 대하여, 한사람의 허망한 소견에 견주어 보면, 눈에 삼 선 사람은 한나라와 같고, 저 사람의 보는 등무리는 삼 눈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이 나라 사람들의 보는 괴변은 다 같은 허망한 소견의 고장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두 가지가 모두  끝없는 옛적부터의 허망한 소견으로 생기는 것이다.

비교해 보면 남섬부주의 삼천 섬들과 네 바다와 사바세계와 시방에 있는 여러 새는 세계와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샘이 없는 본각의 밝고 묘한 마음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하는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기며 화합하여 허망하게 없어진다.

 만일 능히 화합하는 인연과 화합하지 않는 인연을 멀리 여의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원인을 없애버리게 되고, 보리의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성품을 원만하게 갖추어 맑고 깨끗한 본래 마음의 본각이 항상 있게 된다.

 아난다야, 네가 비록 먼저부터, 묘하고 밝은 본각의 성품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줄을 알았으나, 이러한 본각이 화합도 아니고 화합 아닌 것도 아닌 줄은 알지 못한다.

 아난다야, 내가 앞에 것으로 네게 묻는다. 네가 지금도 이 세상에서 허망한 생각으로 화합하는 인연을 가지고서, 보리를 증 하는 본마음도 화합으로 생겼을 것이라고 의심하니,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견의 정기가 밝은 것과 화합하였느냐. 어두운 것과 화합하였느냐. 통한 것과 화합하였느냐. 막힌 것과 화합하였느냐?


 만일 밝은 것과 화합하였다면, 내가 밝은 것을 볼 때 밝은 것이 앞에 나타나는데, 어느 곳에 견이 있느냐? 보는 모양은 분별할 수 있지만 섞인 것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일 밝은 것이 견이 아니라면, 어떻게 밝은 것을 보느냐? 만일 밝은 것이 견이면, 어떻게 견을 보겠느냐? 반드시 견이 가득할 것인데 어느 곳에 밝은 것이 섞였겠느냐? 만일 밝은 것이 가득하면 견과 섞이지 않았을 것이다. 

 견은 밝은 것과 다르므로, 섞였다면 밝다는 본 성품의 이름을 잃을 것이며, 섞여서 밝다는 성품을 잃으면, 아직도 밝은 것과 섞였다고 하는 말이 옳지 않다.

 이와 같이 어두운 것과 화합하였다, 통한 것과 화합하였다, 막힌 것과 화합하였다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아난다야, 너의 묘하고 깨끗한 견의 정기가 밝은 것과 합하였느냐. 어두운 것과 합하였느냐. 통한 것과 합하였느냐. 막힌 것과 합하였느냐?

 만일 밝은 것과 합하였다면, 어두울 때는 밝은 것이 없고, 이견이 어두운 것과는 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어두운 것을 보느냐? 만일 어두운 것을 볼 때, 견이 어두운 것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은 것과 합한 견도, 밝은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밝은 것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밝은 것과 합하였다고 하며, 또 밝은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겠느냐? 

 이와 같이 어두운 것과 합하였다, 통한 것과 합하였다, 막힌 것과 합하였다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아난다 " 부처님이시여, 제가 생각하니 이 묘한 각이 앞엣 것이나 마음과는 화합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처님 " 네가 또 묘한 각이 화합한 것 아니라 하니, 너에게 묻는다. 이 묘한 견의 정기가 화합한 것이 아니라면 밝은 것과 화합하지 않았느냐? 어두운 것과 화합하지 않았느냐. 통한 것과 화합하지 않았느냐. 막힌 것과 화하지 않았느냐? 

 만일 밝은 것과 화합하지 않았다면, 견과 밝은 것이 경계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밝은 것이며, 어디까지가 견이냐? 견과 밝은 것이 어디가 경계가 되느냐? 

 아난다야, 만일 밝은 가운데 견이 없다면, 견과 밝은 것이 서로 닿지 못한 것이어서, 밝은 것이 있는 곳도 알지 못할 것이니, 경계가 어떻게 있겠느냐.

 이와 같이 어두운 것과 화합하지 않았다. 통한 것과 화하지 않았다, 막힌 것과 화하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또 묘한 견의 정기가 화합한 것이 아니라면 밝은 것과 합하지 않았느냐? 어두운 것과 합하지 않았느냐. 통한 것과 합하지 않았느냐. 막힌 것과 합하지 않았느냐?

 만일 밝은 것과 합하지 않았다면, 견과 밝은 것이 서로 어긋나서, 마치 귀와 밝은 것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 같아서, 보더라도 밝은 곳을 알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합하였다 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따지겠느냐.

 이와 같이 어두운 것과 합하지 않았다, 통한 것과 합하지 않았다, 막힌 것과 합하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3-1-13)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에서 여래장을 보이다

 아난다야, 네가 오히려, 요술같이 변화하는 허망한 모양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니, 허망한 것을 모양이라 하니 그 본 성품은 진심으로 묘한 각의 밝은 본체이다.

 그리하여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가 인과 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없어지는 것이니, 이렇게 생겼다 없어졌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본래 늘 있고, 묘하고, 밝고, 움직이지 않고, 두루 가득한 여래장인 묘한 진여의 성품인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참 성품인 항상하는 본체에서는 오고 가고 모르고 깨닫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을 찾아보려 하여도 될 수 없다.

 아난다야, 어찌하여 오음이 본래 여래장인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 하느냐?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깨끗한 눈으로 맑은 허공을 볼 때에 다만 청명한 허공뿐이요, 아무것도 없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바로 떠보다가 피로하여지면 저 허공에서 이상한 헛꽃을 보기도하며 여러 가지 어물거리는 모양을 보게 되니 색음도 이러한 것이다.

 아난다야, 이 허공의 헛꽃이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며, 눈에서 난 것도 아니다.

 아난다야,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허공에서 왔으므로, 도로 허공으로 들어갈 것이니 만일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 것이 있다면 허공이 빈 것이 아닌 것이며, 허공이 만일 빈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헛꽃이 났다 없어졌다 함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아난다의 몸에 아난다를 용납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만일 눈에서 났다면, 눈에서 나왔으므로 도로 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며, 또 이 헛꽃이 눈에서 나왔으므로 보는 성품이 있으리니 만일 보는 성품이 있다면 나가서 허공에 꽃이 되었을 것인데, 돌아와서는 눈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보는 성품이 없다면 나가서 허공을 가렸을 때, 돌아 와서는 눈을 가려야 할 것이며, 또 헛꽃을 볼 때에는 눈에서 가림이 없을 터인즉, 그 때를 깨끗한 눈이라 할 것이며, 어찌하여 헛꽃이 없는 허공을 보아야 깨끗한 눈이라 하느냐?

 그러므로 색음이란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손과 발이 편안하고 온몸이 화평하여, 문득 살아있는 줄을 잊어버린 듯,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가, 까닭 없이 두 손을 마주비비면, 난데없이 손바닥이 꺼끄럽거나, 맷맷하거나, 차거나, 따뜻하거나 함을 느낄 것이니, 수음도 이러한 것이다.

 아난다야, 이 여러 가지 느낌이, 허공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손바닥에서 나는 것도 아니다.

 아난다야,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어찌하여 손바닥에만 와서 닿고, 몸에는 닿지 않느냐? 허공이 가리어 닿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손바닥에서 난다면, 손바닥을 비벼도 날것이 아니며, 손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손바닥을 합할 때에 알게 된다면, 뗄 적에는 도로 들어갈 것이니, 그렇다면 손목과 팔과 팔뼈가 들어가는 자취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나오고 들어감을 안다면, 그 촉감이 스스로 몸속에서 오고 가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접촉하여 아는 것을 촉이라 하느냐?

 그러므로 수음이란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신 매실을 이야기하면, 입에 침이 생기고, 높은 벼랑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새그럽나니, 상음도 이러한 것이다.

 아난다야, 이 신 이야기로 생긴 침이, 매실에서 나는 것도 아니며, 입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아난다야, 만일 침이 매실에서 난다면, 매실이 말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려서 침이 생기느냐? 

 만일 침이 입으로 들어온다면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귀로 듣느냐? 만일 귀로만 듣는다면 침이 어찌하여 귀에서 나지 않느냐?

 높은 벼랑에 오를 것을 생각하는 것도 매실 이야기와 같다.

 그러므로 상음이란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빨리 흐르는 물이, 물결이 서로 서로 잇따라 앞물결 뒷물결이 서로 뒤넘지 아니하니, 행음도 이러한 것이다.

 아난다야, 이 흐르는 성품이 허공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며 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물의 성품도 아니며 허공과 물을 여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난다야, 만일 허공으로 인하여 생겼다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이 끝없는 흐름을 이루리니, 온 세계가 모두 물속에 들어갈 것이다.

 만일 물로 인하여 있다면 이 흐르는 성품은 물이 아닐 것이며, 흐르는 모양이 물을 떠나서 따로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흐르는 것이 물의 성품이라면 흐르지 않고 고요할 때에는 물의 본체가 아닐 것이다.

 만일 허공과 물을 여의고 흐르는 것이 있다면 허공은 바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물밖에는 흐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행음이란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가릉빈가 병의 두 구멍을 막고 병속에 허공을 담아가지고 천리나 먼 곳에 가서 그 곳에서 소용하니, 식음도 이러한 것이다.

 아난다야, 이 병속엣 허공이 저곳에서 가져온 것도 아니며 이곳에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 

 아난다야, 만일 저곳에서 왔다면 병속에 허공을 담아가지고 왔으므로 병이 있던 곳에는 허공이 조금 적어졌어야 할 것이며, 만일 이 곳에서 들어갔다면 마개를 뽑고 병을 기우릴 때에는 허공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식음이란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아 오래 되면 피로하여지므로, 그 사 람이 병이 있으면 쌉살하고, 병이 없으면 달콤하여, 이 달콤하고 쌉살한 것으로 말미암아, 혀가 핥지 않을 때에는 항상 싱거운 줄을 알지니, 그 혀가 피로하여진 것이, 다 함께 보리마음이 바르게 알아 피로하여진 것이니라. 단 것, 쓴것과 싱거운 두가지 허망한 앞엣 것으로 인하여 맛봄을 내어 그 가운데 있어서 앞엣 것을 끌어 들이는 것을 맛보는 성품이라 하며, 이 맛보 는 성품이 단 것, 쓴것과 싱거운 두가지 앞엣 것을 여의면 자체가 없느니라. 아난다야, 이 맛보는 성품이 단 것, 쓴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싱거움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혀에서 나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단 것, 쓴것에서 온다면, 싱거울 때에는 맛보아도 아는 것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싱거운 줄을 알며, 싱거운데서 온다면, 달 때에는 달다 는 것을 아는 것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단줄, 쓴줄을 알겠느냐.

만일 혀에서 난다면, 단 것, 쓴것과 싱거운 것과는 관계가 없으니, 그러면 맛보는 자체가 제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이 맛보는 것이니, 너의 입이 알것이 아니며, 또 허공이 아는 것이니, 너의 입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혀로 끌어 들이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찬 손으로 더운 손에 만질 때에, 찬 느낌이 많으면 더운 손이 차지고, 더운 느낌이 많으면 찬 손이 더워지니, 만져서 아는 촉감 으로 떼어서 아는 것을 나타내거니와, 적은 편이 많은 편을 따르는 것은 촉 감의 피로하여진 것이니, 그 몸과 피로하여진 것이 다 함께 보리 마음이 바르게 알아 피로하여진 것이다. 

맞대는 것과 떼는 두가지 허망한 앞엣 것에 인하여, 깨달음을 내어 그 가운 데 있어서 앞엣 것을 끌어 들이는 것을, 만져 보아 아는 성품이라 하며, 이 만져 보아 아는 성품이 맞대는 것과 떼는 것과 좋고 나쁜 두 가지 앞엣 것을 여의고는 자체가 없다.

아난다야, 이 만져 보아 아는 성품이 맞대는 것과 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 며, 좋고 나쁜 데서 오는 것도 아니며, 몸에서 나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맞대는 데서 온다면, 뗄적에는 앎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떼는 줄을 알며, 좋고 나쁜 데서 온다는 것도 이와 같다.

만일 몸에서 난다면, 맞대는 것, 떼는 것과 좋은 것, 나쁜 것과는 관계가 없 으니, 그러면 만져 보아 아는 자체가 제 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이 아는 것이니, 너의 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피로하면 자고, 마음 껏 자고는 깨어서, 앞엣 것을 보면 기억하고, 기억이 없으면 잊어 버리니, 이것은 뒤바뀐 나고 머물고 달 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 모양을 끌어 들여 마음으로 돌아가서, 뛰어넘지 않는 것을 뜻이라 하거 니와, 그 뜻과 피로하여진 것이 다 함께 보리 마음이 바르게 알아 피로하여 진 것이다.

나는 것과 없어지는 두가지 허망한 앞엣 것으로 인하여, 앎을 모아 그 가운 데 있어서 법진을 끌어 모으되, 지난 적에 보고 듣던 것을 거슬려 생각하기 도 하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을, 아는 성품이라 하며, 이 아는 성품 이 깨는 것과 자는 것과 나는 것과 없어지는 두가지 앞엣 것을 여의고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

아난다야, 이 마주쳐 보아 아는 성품이 맞대는 것과 떨어지는 것에서 오는 것 아니며, 좋고 나쁜 것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몸에서 나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어찌 함이냐? 만일 맞대는것에서 온다면, 떨어질 때는 앎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떨어지는 줄을 알며, 좋고 나쁜 것에서 온다는 것도 이와 같다.

만일 몸에서 난다면, 맞대는 것과 떨어지는 것과 좋은 것과 나쁜 것과는 관계가 없으니, 그렇다면 마주쳐 보아 아는 자체가 제 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이 아는 것이니, 너의 입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 것이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어떤 사람이 피로하면 자고, 충분히 자고는 깨어나서, 앞에 것을 보면 기억하고, 기억이 없으면 잊어버리니, 이것은 뒤바뀐 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 모양을 끌어 들여 마음으로 돌아가서, 뛰어넘지 않는 것을 뜻이라 하며, 그 뜻과 피로하여진 것이 다 함께 보리마음이 눈 바로 떠 피로하여진 것이다.

나는 것과 없어지는 두 가지 허망한 앞엣것으로 인하여 앎을 모아 그 속에 법진을 끌어 모으되, 지난 적에 보고 듣던 것을 거슬려 생각하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을 아는 성품이라 한다. 이 아는 성품이 깨는 것과 자는 것과 나는 것과 없어지는 두 가지 앞엣것을 여의고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

아난다야, 이 아는 성품이, 깨는 것과 자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뜻에서 나는 것이 아니며, 허공에서 생긴는 것도 아니다.

어찌 함이냐? 만일 깬 것에서 온다면 잘 적에는 앎이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자며, 나는 것에서 온다면 없어질 때에는 없을 것이니 무엇이 없어짐을 알며, 만일 없어지는 것에서 온다면 날 적에는 없을 것이니 무엇이 나는 줄을 알겠느냐.

만일 뜻에서 난다면 깨는 것과 자는 것은 몸의 열리고 닫힘을 따르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여의고는 아는 자체가 스스로의 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 자체가 아는 것이니, 너의 입과는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뜻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닌,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또 아난다야, 어찌하여 십이처가 본래 여래장인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 하느냐.

아난다야, 네가 기타 숲과 냇물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것은 색이 눈의 견을 냈다 하겠느냐? 눈이 색을 냈다 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눈이 색을 냈다면 공을 볼 때에는 색이 아닐 것이며, 눈에 있던 색의 성품이 없어졌을 것이다. 없어졌다면 아무 색도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니, 색이 없으면 어떻게 공을 인식하겠느냐. 눈이 공을 낸다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색이 눈의 견을 냈다면 공을 볼 때에는 색이 아닐 것이며 견이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견이 없어졌다면 아주 없을 것이니 어떻게 공인지 색인지를 분간하겠느냐?

그러므로 견이나 색과 공이 모두 처가 없어서 색의 처와 견의 처가 허망한 것임을 알 것이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이 기타숲절에서 밥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대중이 모임에는 종을 쳐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을 듣을 수 있다. 이것은 소리가 귀에 오는 것이냐, 귀가 소리 나는데 가는 것이냐?

아난다야, 만일 소리가 귀에 온다면, 내가 실라벌성에서 밥을 빌 때에는 기타숲절에는 내가 없다. 이 소리가 아난다의 귀에 왔을 때에는 목건련이나 가섭은 듣지 못하여야 할 것인데 어떻게 일천이백오십명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공간하는 곳으로 오느냐?

만일 네 귀가 소리 나는 곳에 간다면 내가 기타숲절에 돌아 왔을 때에는 실라벌성에는 내가 없다. 네가 북소리를 들을 때에 귀가 북치는데 갔다면 종소리가 동시에 나더라도 듣지 못하여야 할 것인데 어떻게 코끼리 소리, 말 소리, 소 소리, 양의 소리들을 한꺼번에 듣느냐?

만일 소리가 오지도 않고 귀가 가지도 않는다면 소리를 듣지 못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나 소리가 모두 처가 없어서 들음의 처와 소리의 처가 허망한 것임을 알것이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네가 향로에 피우는 전단향기를 맡는다면 이 향을 오푼만 피워도 실라벌성 사십리 안에서 한꺼번에 향기를 맡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가 전단나무에서 난다고 하느냐. 코에서 난다고 하느냐. 허공에서 난다고 하느냐?

아난다야, 만일 이 향기가 너의 코에서 난다면 코에서 나는 것이므로 코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며, 코가 전단이 아닌데 어찌하여 전단 냄새가 나겠느냐? 또 네가 냄새를 맡는 것이므로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코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는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허공에서 난다면 허공은 항상 있는 것이므로 향기도 항상 있을 것이며 어찌하여 향로에 전단나무를 태워야 향기가 나느냐? 

만일 전단나무에서 난다면 이 향나무가 타서 연기가 되는 것인즉 코가 향기를 맡을 때에 연기가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그 연기가 공중으로 올라가서 멀리 퍼지기도 전에 실라벌성  사십리안에서 어떻게 맡게 되느냐?

그러므로 향기나 코나 맡는 것이 모두 처가 없어서 맡는 처와 향기의 처가 허망한 것임을 알 것이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네가 매일 두 번씩 대중 가운데서 발우공양을 할 때에 우유로 만든 제호를 만나면 맛 좋은 것이라 알 것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이 허공에서 생기느냐. 혀에서 나느냐. 음식에서 나느냐?

아난다야, 이 맛이 만일 너의 혀에서 난다면 너의 입에는 혀가 하나 뿐 이므로 한번 우유맛을 느끼면 사탕을 먹어도 맛이 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으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고, 달라진다면 혀는 여럿이 아닌데, 어떻게 한 혀로 여러 가지 맛을 알겠느냐.

만일 음식에서 난다면 음식에는 알음알이가 있는 것 아닌데 어떻게 알며 음식제가 아는 터인즉 다른 사람이 먹어도 맛이 같을 것이며 네와는 무슨 관계가 있어서 맛을 안다고 하느냐?

만일 맛이 허공에서 생긴다면 네가 허공을 씹어 보라. 무슨 맛이 나느냐. 허공이 짜다 하면  네 혀를 짜게 하였으므로 네 얼굴도 짜게 할 것이니 이 세상 사람들이 바다의 고기와 같아서 항상 짜기만 하므로 싱거운 줄을 알지 못할 것이며 싱거운 줄을 모른다면 짠 것도 알지못 할 것이며 아무 맛도 모른다면 어떻게 맛이라 하겠느냐.

그러므로 맛이나 혀나 맛보는 것이 모두 처가 없어서 맛보는 처와 맛의 처가 허망한 것임을 알 것이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네가 아침마다 손으로 머리를 만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져서 아는 것은 어느 것이 닿여 아는 것이냐? 닿여 아는 것이 손에 있느냐. 머리에 있느냐.

만일 닿여 아는 것이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앎이 없을 것이며, 어떻게 닿는 줄을 아느냐. 만일 머리에 있다면 손은 앎이 없을 것이며, 어떻게 닿는 줄을 아느냐. 만일 머리에도 닿여 앎이 있고 손에도 있다면 아난다의 몸이 둘이라야 할 것이다.

만일 머리와 손이 한 촉이라면, 손과 머리가 한 덩어리일 것이며, 한 덩어리라면 촉을 이룰 수 없고, 만일 두 덩어리라면 촉이 어디에 있는 것이냐. 닿여 아는 것이라면 닿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닿히는 것이라면 닿여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허공이 너에게 촉하여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촉이나 몸이 모두 처가 없어서, 몸의 처와 촉의 처가 허망한 것임을 알 것이며,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다.

아난다야, 너의 뜻 가운데 반연하는 착한 성품, 나쁜 성품, 무기 성품을 법진이라 하며, 이 법진이 마음에 즉한 것이 겠느냐 아니면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느냐?

아난다야, 만일 이 법진이 마음에 즉하였다면, 진이 아니므로 마음으로 반연할 것이 아니며, 어떻게 처가 되겠느냐?

만일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다면, 법진의 성품이 아는 성품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아는 성품이 없느냐? 

아는 성품이 있다면 마음이라 할 것인데, 너와는 다르고, 진은 아니니, 다른이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만일 네게 즉하였고 또 마음이라면, 어찌하여 네 마음이 네게 둘이 있겠느냐.

만일 아는 성품이 없다면, 이 법진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대고, 떼고, 차고, 더운 것이 아니며, 허공도 아니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 법진을 색이라 할 수도 없고, 공이라 할 수도 없으며, 또 이 세상에 허공 밖이 무엇이 있을리 없다. 마음이라면 반연할 바가 아니며, 법진의 처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그러므로 법진이나 마음이 모두 처가 없어서, 뜻의 처와 법진의 처가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네가 아는바와 같이 귀와 소리가 인연이 되어 이식을 낸다 하며, 이 식이 귀로 인하여 났다 하여, 귀를 계라 하겠느냐. 소리를 인하여 났다하여, 소리를 계라 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귀를 인하여 났다면 떠들고 조용함이 없으면, 귀가 아는 것이 없으니, 귀가 아는 것이 없다면 알음알이도 없는 것이니, 귀가 내었다는 식이 무슨 모양이겠느냐.

만일 귀로 듣는 것을 식이라 한다면, 떠들고 조용함이 없으므로 듣는 것이 없을 것이며, 또 어떻게 빛과 냄새와 맛과 촉으로 된 귓바퀴를 식계라하겠느냐. 이식계가 무엇으로 더불어 성립되겠느냐.

만일 소리에서 났다면, 식이 소리를 인하여 있는 것이므로, 듣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며 들음이 없으면 소리도 있는 곳이 없을 것이다.

만일 식은 소리에서 난다 하고, 소리는 들음으로 인하여 소리 모양이 있다 하는 것이다. 소리를 들을 적에 식을 들어야 할 것이다. 식을 듣지 못한다면 소리가 식을 내는 계가 아닐 것이며, 듣는다면 식이 소리와 같아서, 식이 들리는 것이 되었으니, 무엇이 식 듣는 줄을 알겠느냐.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초목과 같을 것이다. 

또 소리와 들음이 함께 어울려서, 중간의 식계를 이루지도 않았을 것이며, 중간이란 계가 없다면 안과 밖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그러므로 귀와 소리가 인연이 되어 이식계를 낸다 하나, 세 군데가 모두 허무한 것임을 알 것이며, 귀와 소리와 이식의 세계가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네가 아는바와 같이, 코와 냄새가 인연이 되어 비식을 낸다 하니, 이 식이 코로 인하여 났다하여, 코를 계라 하겠느냐. 냄새를 인하여 났다하여 냄새로 계라 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코로 인하여 났다면, 무엇으로 코라 하겠느냐, 쌍손톱 같은 살덩이를 코라 하겠느냐. 맡아서 아는 성품을 코라 하겠느냐.

만일 살덩이를 코라 한다면, 살덩이는 몸이며, 몸으로 아는 것은 촉이니, 몸이라면 코가 아니다, 촉이라면 진이라, 코라는 이름도 없거늘, 어떻게 계가 성립되겠느냐.

만일 맡아서 아는 성품을 코라 한다면, 무엇이 안다 하느냐. 살로 된 코가 안다면, 살로 아는 것은 촉이며, 코가 아니다. 코구멍의 허공이 안다면, 허공이 아는 것이므로, 살로된 코는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허공이 네가 될 것이며, 네 몸은 아는 것이 아니며, 지금아난다가 있는 데가 없는 것이다.

만일 향기가 안다면, 아는 것이 향기에 있으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만일 향내와 구린내가, 네 코에서 나는 것이라 한다면, 향내와 구린내가 이란과 전단나무에서 나지 앓을 것이니 이 두 가지가 없을 때는 네가 네 코를 맡아 보라. 향기로우냐. 구리냐. 구리다면 향기가 아닐 것이며, 향기롭다면 구린내가 아닐 것이다.

만일 향내와 구린내를 다 맡는다면, 한 사람에게 두 코가 있는 것이며, 나에게 도를 물을 때에도, 두 아난다가 있을 것이니, 어느 아난다가 너의 본체이냐. 만일 코가 하나라면, 향내와 구린내가 두 가지가 아니어서, 구린내가 향내가 되고, 향내가 구린내가 될 것이니, 두 가지가 있지 않으면, 식계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만일 냄새로 인하여 난다면, 식이 냄새로 인하여 있는 것인즉, 마치 눈으로 인하여 견이 있으므로, 눈을 보지 못하는 것 같이, 냄새로 인하여 식이 있으므로 마땅히 냄새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식이 냄새를 안다면, 냄새에서 난 것이 아닐 것이며,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식이라 할 수 없다.

냄새가 앎을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냄새의 계가 성립될 수 없고, 식이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식계가 냄새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 아닐 것이다.

만일 중간이 없다면, 안과 밖이 생기지 못할 것이니, 맡는다는 것이 끝까지 허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코와 냄새가 인연이 되어 비식계를 낸다 하나 세 군데가 모두 허망한 것임을 알지니, 코와 냄새와 비식의 세 계가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또 네가 아는바와 같이, 혀와 맛이 인연이 되어 설식을 낸다 하니, 이 식이 혀로 인하여 났다하여, 혀를 계라 하겠느냐. 맛으로 인하여 났다하여, 맛을 계라 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혀로 인하여 났다면, 이 세상에 사탕 매실 황련 소금 세신 새앙 계피가, 모두 맛이 없을 것이며, 네가 혀를 맛보아라, 다냐? 쓰냐?

혀가 쓰다면, 무엇이 혀를 맛보겠느냐. 혀가 혀를 맛보지는 못할 것이니, 무엇이 쓴 줄을 알겠느냐. 혀가 쓰지 않다면, 맛이 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식계가 성립되겠느냐. 만일 맛으로 인하여 식이 난다면, 식이 곧 맛일 터인즉, 혀가 혀를 맛보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맛인지 맛 아닌지를 알 것이며, 또 여러 가지 맛이 한 물건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맛이 여러 가지에서 난다면, 식도 여러 가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식은 하나라 하면서, 식이 맛에서 난다한다면, 짠맛 싱것운 맛 단맛 매운맛 섞인 맛 본래 맛 변한 맛들이 온통 한맛이 되어 분별이 없을 것이다. 분별이 없다면 식이라 할 수 없으며, 어떻게 설식계라 하겠느냐. 허공이 너의 식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혀와 맛이 화합하여 식을 냈다면, 중간이란 제 성품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계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혀와 맛이 인연이 되어 설식계를 낸다 하나, 세 군데가 모두 허무한 것임을 알지니, 혀와 맛과 설식의 세계가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아난다야, 또 네가 아는바와 같이 몸과 촉이 인연이 되어 신식을 낸다하니, 이 식이 몸으로 인하여 났다하여, 몸을 계라 하겠느냐. 촉으로 인하여 났다하여 촉을 계라 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신식이 몸으로 인하여 났다면 대고 떼는 몸으로 아는 두 가지 인연이 없을 것인데 몸이 무엇을 알겠느냐.

만일 촉으로 인하여 난다면 네 몸은 관계가 없을 것이며 몸이 아니고 대고 떼는 것을 아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아난다야, 물건은 촉하여도 알지 못하고 몸으로 촉을 아는 것이다. 몸을 아는 것은 촉이요, 촉을 아는 것은 몸이니, 아는 것이 촉이면 몸은 아니며, 아는 것이 몸이면 촉은 아니다. 몸과 촉의 두 모양이 원래 있는 데가 없으니, 촉이 몸에 합하였으면 몸의 자체일 것이며, 몸을 여의었으면 허공과 같을 것이니 안과 밖이 없다면 중간이 어떻게 성립되며 중간이 성립되지 못하면 안이라 밖이라 하는 성품도 공하게 된다. 설사 네 식이 난다한들 무엇으로 말미암아 계가 성립되겠느냐.

그러므로 몸과 촉이 인연이 되어 신식계를 낸다하나 세 군데가 모두 허무한 것임을 알것이며 몸과 촉과 신식의 세계가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사연도 아닌 성품이인 것이다.

아난다야, 네가 아는바와 같이 뜻과 법진이 인연이 되어 식을 낸다 하니, 이 식이 뜻으로 인하여 났다하여 뜻으로 계라 하겠느냐. 법진으로 인하여 났다하여 법진으로 계라 하겠느냐.

아난다야, 만일 뜻으로 인하여 의식이 난다면 네 뜻에 반드시 생각할 바 법진이 있어야 뜻을 발현할 것이며, 법진이 없으면 뜻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법진의 반연을 여의고는 뜻의 모양이 없으니, 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의 의식이 생각하고 요량하는 뜻의 분별하는 성품과 같다 하겠느냐. 다르다 하겠느냐. 뜻과 같으면 뜻일 것인데 어찌하여 뜻에서 난 것이라 하겠느냐.

뜻과 다르면 뜻의 아는 성품과는 다를 것이므로 아는 작용이 없을 것이며, 앎이 없으면 어떻게 뜻에서 난 것이라고 하며, 만일 앎이 있으면 어떻게 뜻을 알겠느냐.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모두 결정할 수 없으니, 계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만일 법진으로 인하여 난다면 이 세상의 법이란 것이 오직 오진뿐이니,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의 다섯 가지법이 모두 제 모양들이 분명하여 오근을 상대하는 것이어서, 뜻으로 반연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의식이 법진으로 인하여 난다면 그 법진이란 법이 어떤 모양인 것이냐. 색과 공, 떠드는 것과 조용한 것, 통한 것과 막힌 것, 대는 것과 떼는 것, 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을 여의고는 이 밖에는 다른 법이 없는 것이다. 난다면 색법과 공법들이 나고, 없어진다면 색법과 공법들이 없어지는 것이다. 인연할 법진부터 없거늘 인하여 났다는 식이 무슨 모양이 있으며, 모양이 없다면 계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뜻과 법진이 인연이 되어 의식계를 낸다하나 세 군데가 모두 허무한 것임을 알것이며, 뜻과 법진과 의식의 세 계가 본래부터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인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이트 정보

상호.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대표. 김성규 사업자등록번호. 514-82-14810 [사업자등록, 법인등록정보 확인]
Tel)053-474-1208 Fax)053-794-0087 E-mail) tongsub2013@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두류공원로 10(대명동)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성규

Copyright © 사단법인 통섭불교원. All rights reserved.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5,356
어제
7,407
최대
7,694
전체
1,23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