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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2,689회 작성일 23-02-1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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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선을 말하여 수행하는 차례를 보이다

(5-1) 십이 종류 중생이 생기는 이야기

  아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여쭈었다.

 " 제가 어리석어 많이 알기만 좋아하고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자비로 가르치심을 받아 옳게 닦는 법을 얻었고 몸과 마음이 시원하여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렇게 삼매를 닦아서 증득할 때 열반에 이르지 못했을 때, 어떤 것을 간혜지라 사십사심이라하며, 어느 정도까지 이르러야 수행하는 명목을 얻으며, 어디까지 나아가야 지중에 들었다하며, 어떤 경계를 등각보살이라 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다섯 활개를 땅에 대고 대중들과 함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말씀을 기다리면서 눈을 바로 뜨고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좋다, 좋다. 네가 이 대중들과 말법시대의 중생들을 위하여 삼매를 닦아 대승법을 구할 때, 범부의 자리로부터 열반에 이르는 수행하는 길을 미리 보여주기를 원하니, 자세히 들어라. 너에게 말래 주겠다." 

  아난다와 대중이 합장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듣고 있었다.

부처님 "아난다야, 묘한 성품이 두렷하고 밝아 이름도 모양도 여의어서 본래 세계와 중생이 없는데, 허망함으로 인하여 나게 되었고, 나는 것으로 인하여 없어지며, 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 하고, 허망한 것이 없어지는 것을 참된 것이라 하니, 이것이 여래의 위없는 보리와 열반의 두 가지 옮겨서 의지하는 것이라 한다.

  아난다야, 네가 이제 진정한 삼매를 닦아서 여래의 열반에 바로 나아가려면 먼저 이 중생과 세계의 뒤바뀐 원인을 알아야하며, 뒤바뀐 것이 생기지 않으면 여래의 진정한 삼매라 한다. 

  아난다야, 어떤 것을 중생의 뒤바뀜이라 하느냐? 자성의 밝은 마음의 성품이 밝고 두렷한 탓으로 허망하게 밝음으로 인하여 허망한 업식의 성품이 생기고, 허망한 업식으로 인하여, 허망한 소견이 생기며, 그러므로 없는 곳에서 필경에 있는 업을 이루게 된다. 이 있게 하는 소견과 있어지는 업이 인인 것도 아니며, 인되는 것도 아니어서, 머물러 있는 것과 머물게 하는 것이 아주 근본이 없는 것이니, 이 의지할 데 없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세계와 중생이 생기는  것이다.

  본래 두렷하고 밝은 본체를 미혹하여 허망함이 생겼으며, 허망한 성품이 자체가 없어서 의지할 곳이 없다. 장차 진정한 곳으로 돌아가서 진정하여지려하여도 벌써 참된 진여의 성품은 아니다. 진정하지 않은 곳에서 돌아가기를 구하면 완연하게 잘못된 모양을 이루어서 잘못되게 나는 것과 잘못되게 머무는 소가 잘못된 마음과 잘못된 법이 차츰차츰 생겨나고, 생기는 힘이 발생하여서는 익혀져서 업을 이루게 된다. 같은 업으로 서로 받게 되며, 받게 되는 업이 있음으로 인하여, 서로 없애고 서로 내니 이리하여 중생의 뒤바뀜이 있게 된다.

  아난다야, 어떤 것을 세계의 뒤바뀜이라 하느냐? 이 있게 하는 번뇌와 업과 있어지는 정보로 말미암아 분단생사가 허망하게 생기며, 이것으로 인하여 계가 성립되고 인인 것도 아니며 인되는 것도 아닌 것이 머물러 있는 것도 없고, 머물게 하는 것도 없어서, 옮아 흘러서 머물러있지 않는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가 성립되어 삼세와 사방이 화합하여 서로 포개져서 변화하는 중생이 십이 종류가 된다.

  이러므로 세계가 움직임으로 인하여 소리가 있고, 소리로 인하여 빛이 있고, 빛으로 인하여 냄새가 있고, 냄새로 인하여 촉이 있고, 촉으로 인하여 맛이 있고, 맛으로 인하여 법진을 안다. 여섯 가지 어지러운 망상이 업의 성품을 이루므로 십이 구분이 이로 말미암아 윤회 하며, 이리하여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이 십이 변화를 일으켜 한바퀴 휘돌아 진다. 이렇게 윤회 하는 뒤바뀜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세계에 알로 낳고 태로 낳고 습기로 나고 변화하여 나는 것과 빛깔 있는 것, 빛깔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빛깔 있지 않는 것, 빛깔 없지 않는 것, 생각 있지 않는 것, 생각 없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아난다야, 세계에 허망하게 바퀴 돌듯하는 움직이는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기운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날며 잠기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며, 그리하여 알로 낳는 갈라람이 국토에 흘러 다녀 고기와 새와 거북과 뱀 같은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추잡함으로 바퀴 돌 듯 하는 욕애의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물끼와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서서 다니고 기어 다니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태로 낳는 알포담이 국토에 흘러 다녀 사람과 짐승과 용과 신선 같은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집착으로 바퀴 돌 듯 하는 가서붙는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따뜻함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엎어지며 자빠지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습기로 나는 폐시가 국토에 흘러 다녀 우물거리며 쭈물거리며 굼틀거리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변해 바뀌어 바퀴 돌 듯 하는 의지하는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건드림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새로움과 낡은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변화하여 나는 갈 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허물 벗으며 날아다니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걸림으로 바퀴 돌 듯 하는 막히는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나타남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정미롭고 반짝거리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빛깔 있는 갈 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좋고 나쁜 정미롭고 밝은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흩어지고 스러져 바퀴 돌 듯 하는 의혹하는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어두움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가만히 숨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빛깔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허공에 흘어지며 스러져 숨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헛꼴로 바퀴 돌 듯 하는 그림자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생각함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가만히 엉키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이 있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귀신과 허깨비와 정령의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우둔하게 바퀴 돌 듯 하는 어리석게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미욱함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마르고 빳빳한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정신이 변화하여 흙이 되며 나무가 되며 쇠가 되며 돌이 되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기대어 바퀴 돌 듯 하는 거짓된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지저분함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의지하며 기대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빛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빛깔이 있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해파리 같은 것이 새우의 눈을 빌려보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끌어내어 바퀴 돌 듯 하는 성품이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주문과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불러내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빛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빛깔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주문과 방자로 생겨나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허망하게 만나 바퀴 돌 듯 하는 아득한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다른 종류와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돌려 바뀌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 있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같은 것들이 딴 것으로 변화시키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세계에 원형으로 바퀴 돌 듯 하는 죽이는 뒤바뀜을 말미암는 탓으로 괴상하게 화합하여 팔만사천가지 어미 아비 잡아먹는 어지러운 생각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흘러 다녀 올빼미가 흙덩이를 붙들고 안아 새끼를 만들며 파경이가 독한 나무열매를 품어 새끼를 까는 것 같이 새끼가 자라서는 어미나 아비를 잡아먹는 종류가 가득찬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십이 종류이다.


(5-2) 보살의 수행하는 계단과 이경의 이름

  아난다야 이러한 중생들의 낱낱종류 가운데 제각금 십이가지 뒤바꿈을 갖추었으니 마치 눈을 비비면 헛꽃이 나타나듯이 묘하고 둥글고 참되고 깨끗한 밝은 마음을 뒤바꾸어서 이렇게 허망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갖추었다. 네가 지금 삼매를 닦아 증득하려면 이 근본원인이 되는 어지러운 생각에 세가지 차례를 세우고 닦아야 없앨 할 수 있다. 마치 깨끗한 그릇에 있는 독한 진액을 씻어 버리려면 끊는 물과 재와 향수로 여러 번 씻고 헹궈서 그릇이 깨끗해진 후에 감로수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차례에서 첫째는 닦아 익힘이니 돕는 원인을 덜어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참으로 닦음이니 그 근본 성품을 깎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더욱 나아감이니 현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아난다야, 돕는 원인이라는 것은 이 세계의 십이종류 중생이 그냥은 살지 못하고 네가지 먹는 것을 의지하여야 부지할 수 있다. 뭉기뭉기 잘라 먹는 것과 흠향하여 먹는 것과 생각으로 먹는 것과 인식으로 먹는 것이 네 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온갖 중생이 먹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온갖 중생이 단것을 먹으면 살고 독한 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니 중생들이 삼매를 구하려면 세간에 있는 다섯가지 매운 채소를 끊어야한다. 다섯 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돕고 날대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을 돕는다. 이 세상에서 다섯가지 매운 채소 먹는 사람이 아무리 십이부경을 말하더라도 시방의 천상사람이나 신선들은 그 냄새를 싫어하여 멀리 떠나며 아귀들은 그 사람이 밥 먹을 때에 입술을 핥아먹음으로 항상 귀신들과 함께 있게 되어 복덕이 날로 감해지고 이익될 것이 없는 것이다. 

  매운 채소 먹는 사람은 아무리 삼매를 닦더라도 보살이나 천상사람이나 신선이나 착한 귀신들이 와서 보호하지 않으며 마왕이 그 짬을 타서 부처님모양을 하고 와서 법을 말하면서 계율은 나쁘다 훼방하고 음행이나 성내는 것이나 우치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찬탄하며 이 사람이 죽어서는 마왕의 권속이 되었다가 마의 복을 다 받은 뒤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아난다야, 보리를 닦는 사람은 영원히 다섯가지 매운 채소를 먹지 말아야하니 이것이 첫째 수행하여 나아가는 차례이다. 

  아난다야, 어떤 것을 근본 성품이라 하느냐? 중생이 삼매에 들려면 먼저 계율을 깨끗하게 지녀야하며 음행할 마음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고기와 술을 먹지 않으며 불로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날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아난다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음행과 살생을 끊지 않고는 삼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음욕이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은 줄로 여기며 성문의 네가지 바라이계와 여덟가지 바라이계를 지녀 몸을 단속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고 뒤에 보살의 청정한 계율을 행하여 음행과 살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계율이 이루어지면 이 세상에서 서로 낳고 서로 죽이는 일이 없어질 것이며, 훔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묵은 빚을 갚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깨끗한 사람이 매를 닦으면 부모가 낳아준 육신으로써 천안통을 얻지 않고도 저절로 시방세계를 볼 것이며,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어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올 것이며, 큰 신통을 얻어 시방세계에 마음대로 다닐 것이며, 숙명통이 깨긋하여져서 어렵고 험난한 일이 없어지니 이것이 둘째 수행하여 나아가는 차례이다. 

  아난다야, 어떤 것을 현재의 업이라 하느냐? 이렇게 깨끗하게 계율을 가지는 사람은 마음에 음탐이 없어져서 밖으로 육진에 끌리는 일이 적을 것이며 육진에 끌리지 않음으로 근본 성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앞엣것을 반연치 않으므로 육근이 짝할 것이 없어지고 밖으로 흘러가던 것을 돌려 하나인 성품에 합하면 여섯 군데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방국토가 밝고 깨끗함이 마치 수정 속에 밝은 달을 놓은듯하며 몸과 마음이 상쾌하여 묘하고 두렷하고 평등하여 크게 편안함을 얻게 된다. 온갖 부처님의 비밀하고 두렷하고 깨긋하고 묘한 이치가 모두 이 가운데 나타나며 이 사람은 빨리 무생법인을 얻게되고 이로부터 점차로 닦아 나아가며 가는 곳마다 수행하여 성인의 자리에 밟아 이르게 되니 이것이 셋째 수행하여 나아가는 차례이다.

  아난다야 선남자가 욕심과 애정이 말라버리고 근과 앞엣것이 짝하지 않으므로 지금에 남아있는 이 몸이 다시는 나지 않게 되며, 고집하던 마음이 훤칠하게 밝아져서 순전한 지혜분이며 지혜의 체성이 밝고 두렷하여 시방세계가 환하게 맑아서 간혜지의 마른 지혜만 있게 되며 욕애의 습기가 말라서 여래의 법으로 흐르는 물과 어울리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 가운데로 점점 들어가서 두렷하며, 미묘한 것이 비로소 열리고 참되게 묘하고 두렷한데서 더욱 참되게 미묘한 것을 발생하여 묘한 신심이 항상 머물러 있고 온갖 허망한 생각은 없어져서 중도의 이치가 순전하고 참된 것을 신심주라 한다. 

  참된 신심이 분명하여 온갖 것이 원통하여지고 오음과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시 장애되지 않으며, 지나간 세상 오는 세상 수없는 겁 동안에 몸을 버렸고 몸을 받을 온갖 습기가 모두 앞에 나타난다. 이 사람이 모두 기억하여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염심주라 한다. 

  묘하고 두렷한 것이 순전히 참되어졌고 참된 정기가 변화하는 힘을 내어 예전 습기가 한결같이 정미롭고 밝아지면 이 정미롭고 밝은 것으로써 참되고 깨끗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정진심이라 한다. 

  정미로운 마음이 앞에 나타나서 순전한 지혜뿐인 것을 혜심주라 하며, 지혜의 밝음을 그냥 유지하여 두루하고 고요하며, 고요하고 묘한 것이 항상 엉기어있는 것을 정심주라 한다. 

  정심의 빛이 밝아지고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가 그대로 나아가기만하고 물러나지 않는 것을을 불퇴심이라 한다.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 편안하여지며 보전하여 가지고 잃어버리지 않으며 시방여래의 기분과 서로 어울리 것을 호법심이라 한다. 

  각의 밝은 것을 보전하여 가졌거든 묘한 지혜의 힘으로써 부처님의 자비한 광명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향하여 편안히 머무는 것이 마치 두 거울의 밝은 빛이 서로 대하는 것 같다. 그 가운데 묘한 그림자가 거듭 서로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을 회향심이라 한다. 

  마음 빛이 간만히 회향하여 부처님의 항상 엉김과 위없는 묘하고 깨끗함을 얻어 끝없는 도에 편안히 머물러있어 잃어버리지 않음을 계심주라 한다. 

  계심에 머물러있어 자재하여지고 시방으로 다니는 것이 소원대로 가게 되는 것을 원심주라 한다. 

  아난다야, 선남자가 진여의 방편으로 열 가지 마음을 내며 마음의 정기가 빛을 내어 열 가지 작용을 걷어 들여 한마음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발심주라 한다. 

  마음 가운데서 밝음을 내는 것이 깨끗한 수정 속에 순금을 담은 것 같아서 앞엣 묘한 마음으로 다져서 지정을 닦는 것을 치지주라 한다. 

  마음과 지정이 서로 알아서 함께 밝아지고 시방으로 다니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을 수행주라 한다.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과 같아져서 부처님의 기분을 받는 것이 마치 중음신이 부모가 될 이를 구할 적에 그윽한 기별이 가만히 통하는 듯이 여래의 종성에 들이가는 것을 생귀주라 한다. 

  불도의 태속에 노닐면서 부처님의 지혜를 받들어 불자가 되는 것이 마치 태속에서 자라는 아기가 사람의 모양을 갖춘 것 같은 것을 방편구족주라 한다. 

  용모가 부처님과 같고 마음도 같은 것을 정심주라 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이루어져서 날마다 점점 자라는 것을 불퇴주라 하며, 십신의 영특한 모양을 한꺼번에 갖추는 것을 동진주라 한다. 

  형상이 이루어져서 태에서 나와 친히 부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법왕자주라 하며, 어른이 되었다고 표시하되 마치 임금이 나라정사를 태자에게 맡기며 찰제리왕이 세자가 자라 관정식을 하는 것 같은 것을 관정주라 한다. 

  아난다야, 이 선남자가 부처님의 아들이 되어 여래의 한량없는 묘한 공덕을 갖추어 시방으로 다니면서 수순하는 것을 환희행이라 한다. 

  온갖 중생을 잘 이익케하는 것을 요익행이라 하며,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하는 일에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 것을 무진한행이라 한다. 

  여러 종류을 다 벗어나게 하되 오는 세상의 끝까지 하여 삼세가 평등하고 시방에 통달하는 것을 무진행이라 하며, 온갖 것이 합하여 같아지는 종종법문에 잘못되지 않는 것을 이치란행이라 한다. 

  같은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나타내고 낱낱 다른 데서 제각금 같음을 보는 것을 선행형이라 하며, 이리하여 시방허공에 티끌을 채우고 낱낱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거나 세계를 나타내는데 서로 거리끼지 않음을 무착행이라 한다. 

  여러 가지가 앞에 나타나는데 모두 제일바라밀다인 것을 존중행이라 하며, 

  이렇게 원융하여져서 시방부처님의 규모를 이루는 것을 선법행이라 한다. 

  낱낱 것이 모두 청정하여 누가 없어지고 한결같이 참되고 끝이 없어 본래 그러한 성풍인 것을 진실행이라 한다. 

  아난다야, 이 선남자가 신통을 만족하며 불사를 성취하였으며 순전하게 깨끗하고 정미롭고 참되어 모든 거리낌을 멀리 여의었으며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다는 상이 없으며 끝없는 마음을 돌이켜 열반 길로 향하며, 온갖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중생이라는 상을 여읜 것을 회향이라 한다. 

  부술 것을 모두 부수고 여러 가지를 멀리 여읜 것을 불괴회향이라 한다. 

  본래 각이 고요하고 맑아 깨달은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것을 등일체불회향이라 한다. 

 정미롭고 참된 것이 밝은 빛을 내어 경지가 부처님 경지와 같은 것을 지일체처회향이라 한다. 

  세계와 여래가 서로 서로 들어가되 걸림이 없는 것을 무진공덕장회향이라 한다. 

  부처님 경지와 같은데서 경지마다 제각금 청정한 인을 내고 인을 의지하여 빛을 드러내어 열반 길을 취하는 것을 수순평등선근회향이라 한다. 

  진정한 선근이 이루어지면 시방중생이 모두 나의 본성품이며 성품이 원융하게 성취하면서도 중생을 잃지 않는 것을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이라 한다. 

  온갖 법에 즉하면서 온갖 상을 여의어 즉하는 것이나 여의는 것이나 두 가지에 모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진여상회향이라 한다. 

  참으로 같은 이치를 얻어서 십방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무박해탈회향이라 한다. 

  성품인 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법계에 한량이 없는 것을 법계무량회향이라 한다. 

  아난다야, 이 선남자가 이 청정한 사십이심을 끝까지 닦고 다음에는 네 가지 묘하고 두렷한 가행을 이루게 된다. 

  부처님의 각으로써 내 마음을 삼았으나 날듯 날듯하면서도 나지 않는 것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낼 적에 나무를 태울 듯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난지라 한다.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밟으시던 바를 이루었으나 의지한듯하면서도 의지한 것이 아닌 것이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서 몸이 허공에 들어갔으나 아래는 조금 걸림이 있는 듯한 것을 정지라 한다. 

  마음과 부처님이 둘이 같아서 중도를 얻은 것이 마치 일을 참는 사람이 품어두는 것도 아니며 내어버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을 인지라 한다. 

  셈으로 요량하는 것이 소멸하여져서 아득한 중도나 깨달은 중도나 둘에 지목할 것이 없는 것을 세제일지라 한다. 

  아난다야, 이 선남자가 보리를 잘 통달하되 깨달음이 여래와 융통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극진한 것을 혼희지라 한다. 

  다른 성품이 같게 되고 같은 성품까지 없어진 것을 이구지라 한다. 

  깨끗한 것이 지극하여 밝은 빛이 나는 것을 발광지라 한다. 

  밝은 것이 지극하여 각이 원만한 것을 염혜지라 한다. 

  일체의 같다 다르다 하는 것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을 난승지라 한다. 

  하염없는 진여의 성품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나는 것을 현전지라 한다.

  진여의 끝까지 다한 것을 원행지라 한다. 

  한결 같이 진여의 마음뿐인 것을 부동지라 한다. 

  진여의 작용을 내는 것을 선혜지라 한다. 

  아난다야, 보살들이 이제부터는 닦는 공부를 마치고 공덕이 원만하였으므로 여기까지를 수습하는 자리라 한다. 

  자비한 그늘과 묘한 구름이 열반바다에 덮인 것을 법운지라 한다. 

  여래는 흐르는 것을 거슬려 올라오며, 보살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각의 경계선에 들어가 어울린 것을 등각이라 한다. 

  아난다야 간혜지로부터 등각까지 이르러서는 이 각이 비로소 금강심가운데의 초건혜지를 얻는다. 이렇게 홑으로 겹으로 열두 번을 거듭하여야 비로소 묘각이 극진하여 위없는 도를 이루게 된다. 

  이 여러 가지 지위는 모두 환술 같은 열 가지로 비유하는 금강같이 관찰하는 사마타 가운데서 여래의 비바사나로써 깨끗하게 닦아 증하여 차례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난다야 이것들은 모두 세 가지 차례로 닦아 나아가는 것으로  오십오십위의 참된 깨달음의 길을 성취한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은 올바른 관이라 하고 다르게 보는 것은 잘못된 관이라 한다. 

  그때 문수사리법왕자가 대중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문수 "이 경 이름을 무엇이며 대중들은 어떻게 받아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 "이 경 이름은 크고 부처 정수리 같은 ‘실달다반달라’이고 위없는 보배로운 인이며, 시방여래의 맑고 깨끗한 바다 같은 눈이며, 친척과 인연 있는 이를 구원한다. 아난다와 이 회중에 있는 성비구니를 제도하여 보리마음을 얻어 두루 아는 바다에 들어가게 하며, 여래의 비밀한 인이며 닦아 증득할 요의라고하며 또 크고 방정하고 넓고 묘한 연꽃왕이며, 시방부처님 어머니인 다라니 주 라 하며 또 관정하는 글발이며 보살들의 온갖 수행인 수능엄이라 하니 너희들이 이렇게 받아 지니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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