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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처님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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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6,945회 작성일 21-07-0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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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백성들이 미혹에 빠져 헤매듯이 부처님의 제자인 수행자들도 형상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보지 못하는 것을 유마는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으며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간절한 유마의 마음을 부처님께서 헤아려 보시고 제자들을 둘러보며 유마에게 병 문안을 보낼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사리불에게 말했다.

 “사리불이여, 너가 유마에게 가서 그의 병을 문안하여라.”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 때에 깊은 숲 나무 밑에 앉아 조용히 좌선을 하고 있는데 유마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3-2) 아! 사리불.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닙니다. 좌선이란 생사를 거듭하는 미혹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몸이나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또 깨달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갇히어 정적에 잠기는 것도 아니고 밖을 향해 어지러워 지지도 않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은 채 궁극적인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좌선을 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생활과 격리된 깨달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깨달음의 성취도 바로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환상도 허구도 아닙니다. 실재 생활 속에 내재하고 있는 현실의 향기이며 여운인 것입니다. 


 저는 그 때 유마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를 찾아가 병 문안을 하는 것은 도리어 유마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3-3)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옆에 앉아 있는 목건련에게 말했다.

 “목건련이여, 너가 유마의 병을 문안하고 오너라.”

 목건련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도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 때에 비야리성의 어느 마을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고 있을 때 유마가 나타나서 제가 하는 설법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건련이여, 신자들에게 법을 설할 때 당신처럼 그렇게 설해서는 안 됩니다. 설법은 법대로 설해야 합니다. 그러면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체적인 실체를 생각하지만, 법에는 그런것이 없습니다. 법에는 그것을 특징 지우는 모습이 없으며, 모습으로써 포착할 것도 없습니다. 말로써 표현되지 않으니까 명칭이 없고, 형태도 없으며, 마음에 떠오를 것도 없습니다. 법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같으며, 오는 일도 가는 일도 없으며, 좋고 나쁜 것도 없으며, 늘고 줄어듬도 없으며 나고 죽음도 없습니다. 눈이나 귀, 코, 혀, 피부, 마음으로서는 잡을 수 없는 것이며, 본래 있는 그래로의 모습일 뿐입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설해서는 이 법을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으며, 또 들을려해도 들을 수도 없고 얻을려고 해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환술사가 스스로 만들어 낸 사람을 향해 법을 설하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설해지지 않으며 들어주는 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심한 경지에 서서 법을 설해야 바른 법을 설하는 것이 됩니다. 

 또 듣는 사람의 능력이나 상태를 생각하고, 진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연마해야 되며, 세상 사람을 구하는 데는 대승의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 가르침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단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법을 설해야 합니다. 형식에 얽메여 형식적으로 법을 설하고 있는 당신들은 이미 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정신이 살아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입니다. 생활과 시애데 어울리는 살아있는 법을 설하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과 같은 죽은 법을 설하면서 법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은 초역사적인 진리이지만 법의 표현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맞는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마의 이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수 백명의 젊은이들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냈습니다. 저는 그 때 유마의 이 법문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를 찾아가 병 문안을 하는 것은 도리어 유마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3-4)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가섭에게 말씁하셨다.

 “가섭이여, 너가 유마에게 갔다 오너라.”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에 제가 가난한 마을에서 걸식하고 있는데 유마가 다가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섭이여! 자비심을 지녔으면서 부자집은 피하고 가난한 사람에게서만 먹을 것을 빈다는 것은 진정으로 모든 것에 대해 자비심을 갖는 태도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모은 것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따르고, 자연스러운 순서에 응해서 걸식해야 합니다. 걸식은 잘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지 않기 위한 행위입니다. 음식을 취하는 것은 여러 요소의 결합에 의해 구성된 이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이에 대한 집착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빌 때에도 아무도 없는 빈 마을에 들어간 것처럼 집착없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더러움을 분간 못하는 소경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보시하는 사람에게서는 그 사람을 목소리를 단순한 음향처럼 듣고 음식 냄새를 단순한 바람처럼 생각하고 맛이 있고 없음을 분명하지 않고 몸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존재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받아야 합니다. 또 음식을 먹을 때에는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는 따위의 피상적인 생각을 버리고 바름이나 삿됨이나 그 본성은 언제나 같다고 이해한 다음 얼마안되는 음식이라도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부처님이나 성자들에게 공양하고 난 후에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먹는 경우는 식욕을 채우려고 먹는 것도 아니요. 식욕을 떠나서 먹는 것도 아니며 고요한 무심의 경지에서 먹는 것도 아니요. 무심의 경지를 초월하여 먹는것도 아니기에 자기 중심인 소승의 성자와 길을 달리하는 보살의 모습이 인정되는 것이지만, 다시 보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보시의 공덕의 대소를 생각하는 따위의 집착심을 버릴 때 보시된 음식도 헛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때 유마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저는 그 때 유마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3-5)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가 유마의 병을 문안하고 오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부처님이시여, 저도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 없습니다. 한 때에 제가 걸식하고 있을 때 그의 집에 가서 걸식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저의 바루(그릇)을 가지고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음식에 대해 평등할 수가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해서도 평등할 수가 있고, 모든 것에 대해 평등할 수가 있으면 음식에 대해서도 평등할 수가 있습니다. 평등한 마음으로 밥을 빌 수만 있다면 주는 것을 먹어도 됩니다.

 번뇌에서 벗아난 것도 아니나 그렇다고 번뇌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어리석지 않으나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며, 성인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성인이 아닌 것도 아닌 평등한 공의 이치를 체득할 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또 만약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교도를 스승으로 삼아 잘못된 길을 가다가 지옥에라도 떨어질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또 그릇된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깨달음에 대한 생각도 없고, 번뇌속에서 헤어나지도 못하면서 깨달을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공의 이치를 체득하여 그대가 분쟁이 없는 삼매 속에 들어간다면 모든 사람도 똑같이 이 경지에 들어가겠지만 그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그대에게 보시해 봤자 공덕이 되기는 커녕,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경계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마와 손을 잡아 번뇌의 벗이 되든지 아니면 악마나 번뇌와 하나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원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방해서 끝내 깨달음을 이룰려고 하는 따위의 생각을 버린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수보리여! 걱정하지 말고 음식을 가져 가십시오. 부처님이 만드신 환상의 인간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다 해서 대답할 바를 몰라 걱정하겠습니까?

 일체의 존재는 환상과 같은 것이니까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도 환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자 같은 것에 집착하여 근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문자는 그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물에서 분리돼 있는 까닭입니다. 말하자면 문자라는 것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해탈이며, 이 해탈의 모습이 곧 일체의 존재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부패나 악을 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제도를 고치거나 새로운 규정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과 교, 전통불교와 민중불교, 모두 긍정적으로 볼 때는 불교이지만, 부정적으로 볼 때는 모두 불교가 아닌 것 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획득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불교 안에 있지만, 깨달음이 없을 때에는 경전이라 하더라도 불교 밖에 있는 것입니다.


 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그 때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3-6) 부처님께서는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너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갔다 오너라.”

 부루나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에 제가 큰 숲 속에서 출가한지 얼마 안된 수행자에게 설법하고 있을 때 유마가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루나여, 설법을 할려거든 먼저 선정에 들어 설법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와 인연을 관찰하여 거기에 맞는 것을 설하는 것이 설법입니다. 정에 들지 않고 입 안에서만 맴도는 설법은 더러운 음식을 금으로 빚은 보배 그릇에 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유리를 가지고 수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설법을 듣고 있는 저 수행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더욱 근복적으로 이 몸이 받고 있는 업의 뿌리를 알아야 바른 법을 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좁은 뒷길을 가르켜 주지 말 것이며, 햇빛을 반딧불과 같다고 억지를 쓰지 마십시오.

 부루나여, 이 수행자들은 이미 전생에서 다 닦은 수행자들로서 <모든 생명들과 함께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큰 마음을 낸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자신만 깨달으면 된다는 소승법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유마는 선저엥 들어 수행자에게 전생을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이 이제까지 닦아온 수행의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에서 한 발자욱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는 유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에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3-7) 부처님께서는 가전연에게 물었다.

 “가전연이여, 너가 가서 유마의 병을 문안하고 오겠으냐?”

 가전연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을 문안 갈 수가 없습니다. 한 때에 제가 큰 숲 속에서 수행자들에게 무상에 대하여 무아에 대하여 공에 대하여 고에 대하여 열반에 대하여 설법하고 있을 때 유마가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전연이여, 나고 죽는 존재 본질에 대하여 집착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모든 법을 바로 보기만 하면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현상이고 죽는 것도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무상이며,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있어서 나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서 생성되었다가 없어지는 관계를 바로 보는 것이 무아이며, 정해진 법이라는 것은 본래 없으므로 공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이 공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없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 고이며, 나와 너가 본래 하나이므로 있는 그대로를 보기만 하면 고요하고 적멸하여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3-8) 부처님께서는 아나율에게 말했다

 “아나율이여, 너가 유마에게 가서 병 문안을 하고 오너라.”

 아나율은 부처님에게 말씀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을 문안 갈 수가 없습니다. 한 때에 제가 큰 숲 속에서 생각에 잠겨 거닐고 있을 때 엄정이라는 범천왕이 저에게 다가와 묻기를 <하늘의 눈으로 이 우주를 보면 얼마나 넓고 큽니까?> 하기에 저는 자만에 빠져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늘의 눈으로 이 우주를 보면 손바닥에 놓여 있는 호두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유마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나율이여, 하늘의 눈으로 우주를 보았을 때 보겠다는 생각을 일으켜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보겠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보았습니까?

 만약 보겠다는 생각을 일으켰다면 업과 식이 따르게 되어 바른 법이 아니며, 보겠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식의 작용이 없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범천왕은 유마의 말을 듣고 진실로 기뻐하면서 유마에게 “유마여, 그러면 누가 진정한 하늘의 눈을 가졌습니까?” 하고 물으니 유마는 “부처님께서 진정한 하늘의 눈을 갖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삼매중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함께 있고,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를 둘로 보지 않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범천왕은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큰 마음을 내고 유마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3-9) 부처님께서는 우바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바리여, 너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갔다 오너라,”

 우바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에 두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는 부끄러워하면서 저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우바리여, 우리들은 건강한 몸으로 술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부처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의혹과 뉘우침을 풀어주시어 허물을 없애주길 바랍니다.”

 제가 그들을 위하여 법대로 말하고 있는데 유마가 다가와서 저의 말이 끝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바리여, 죄에 대해서 형식대로 참회할 것을 가르치면 도리어 죄를 무겁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죄가 생기는 것은 간접의 원인인 인연 때문이며 죄 자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죄는 본래 그것을 범한 사람의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며,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본성에서는 번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망상이야말로 번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상이 없어지면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멸하여 멈춤이 없는 꿈이나 물에 비친 달 같이 실재성 없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변하지 않고 분명 거기에 있는 듯 생각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망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 바르게 계율을 지키는 자인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지 그 사회를 유지케 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양심의 최소한인 윤리질서가 무너지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오계는 불교가 불교이게 하는 최소한의 질서입니다. 오계는 소극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적극적일 때 시대를 초월하여 진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다루어 생명을 살려라.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줄 알아 항상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라.

 적은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바르게 말하라.

 술과 오락등 중독성 있는 것을 멀리하여 항상 바른 생각을 하라.


 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그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3-10) 부처님께서는 나후라에게 말씀하셨다.

 “나후라여, 너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갔다 오너라.”

 나후라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에 비야리성의 젊은이들이 저에게 찾아와 위대한 성자의 아들로서 출가한 공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 때 제가 법대로 출가의 공덕을 말하였더니 유마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후라여, 출가에는 그것도 없고 이것도 없으며 또 그 중간도 없습니다. 출가가 절대적 무위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작용하여 그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악에서 멀어지는 것도, 뛰어난 능력을 얻는 것도, 일체의 번뢰를 끊어 버리려는 것도, 모든 것은 그대로 타인의 마음을 지켜주려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출가하는 형식에 의해서 공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출가한 행위를 함므로써 공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먹물 옷을 입고 절을 지킨다고 승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옷을 입었든지 간에 출가자로서 합당한 행위를 할 때 좋은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출가하는 것입니다.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서원을 하고 그에 대한 행위가 따르는 것이 진정한 출가입니다.


 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그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3-11)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너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갔다 오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몸이 불편하시어 약간의 우유가 필요 했습니다. 제가 새벽에 발우를 들고 바라문의 집 앞에 서 있다가 유마를 만났습니다. 유마가 저를 보고 물었습니다.

 “아난이여, 이른 새벽부터 왠 일입니까?”

 “부처님께서 몸이 불편하시어 약간의 우유를 얻을력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이여,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의 몸은 금강과 같아 아무 것도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나쁜 것이 이미 끊어졌고 착한 것들만 모여 있으므로 병이 생길 이유가 없으며 괴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냥 돌아 가십시오. 부처님의 몸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비야리성의 백성들이나 다른 수행자들이나 보살들이 이와 같은 추한 말을 듣는다면 부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도 병에 걸리지 않는 데 하물며 지혜와 복덕으로 충만된 부처님의 몸으로 병을 앓겠습니까? 빠릴 수행처로 돌아가십시오. 이른 새벽 부처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당신이 다른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의 눈에 띈다면 그들이 부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난이여, 부처님의 몸은 애욕과 탐욕과 집착을 벗어난 법의 몸입니다. 부처님의 몸은 나고 죽음에 자유로우며 윤회의 원인이 되는 모든 번뇌가 소멸하였으며 세간 속에 머물러 계시지만 세간에 물들지 않으며,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데 몸에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유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는 그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마의 속삭이는 소리가 저의 고막을 찢는 것처럼 아프게 들렸습니다.

 “아난이여,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유를 가지고 가시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부처도 중생에 따라 병이 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가는 것은 유마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유마에게 병 문안을 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 과거에 유마와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면서 유마의 병 문안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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