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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육조단경

우리말돈황본육조단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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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764회 작성일 21-08-05 17:09

본문

13. 성 공(性空)

(13-1) “지금 이미 삼보에 귀의하여 모두 지극한 마음일 것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할 것이다.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줄 것이니 잘 들어라.

Maha Prajna Paramita 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摩何般若波羅蜜(마하반야바라밀)’이며,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하는 것이며 입으로 외우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다.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란 큰 것이다. 마음이 한량없이 넓고 크서 허공과 같다. 그러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곧 무기공에 떨어질 것이다.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산하대지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이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다.

(13-2) 자성이 만 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 법이 다 자성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않아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며, 이것이 곧 큰 실행인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또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한량없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十三. 性 空

(13-1) 今旣自歸依三寶 惣却却知心 與善知識 說摩訶般若波羅蜜法 善知識 雖念 不解 惠能與說 各各聽 摩訶般若波羅蜜者 西國梵語 唐言 大智惠彼岸到

此法 須行 不在口念 口念不行 如幻如化 修行者 法身 與佛 等也

何名摩訶 摩訶者 是大 心量 廣大 猶如虛空 莫空心坐 卽落無記空 虛空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 盡在空中 世人性空 亦復如是

(13-2) 性含萬法 是大 萬法 盡是自性 見一切人及非人 惡之與善 惡法善法 盡皆不捨 不可染著 猶如虛空 名之爲大 此是摩訶行 迷人 口念 知者 心行 又有迷人 空心不思 名之爲大 此亦不是 心量 廣大 不行 是小 莫口空說 不修此行 非我弟子


14. 반 야(般若)

(14-1)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한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생기며,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며,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어이며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으며, 이는 곧 이 언덕이며,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으며,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14-2)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은 진실이 있다고 한다.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보통 사람이며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다.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며, 앞 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보통 사람이며, 뒷 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다.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다.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서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의 번뇌와 진로를 쳐부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다.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가고 옴도 또한 없으며, 이는 정과 혜가 함께 하여 일체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 정, 혜로 삼는 것이다.

(14-3)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8만 4천의 지혜를 좇는다.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8만 4천의 진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 된다.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서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다.”


十四. 般 若

(14-1)何名般若

般若 是智惠 一切時中 念念不愚 常行智惠 卽名般若行

一念愚 卽般若絶

一念智 卽般若生

心中常愚 自言我修 般若無形相 智惠性 卽是

何名波羅蜜 此是西國梵音 言彼岸到 解義 離生滅

著境 生滅起 如水有波浪 卽是於此岸

離境 無生滅 如水承長流 故卽名到彼岸 故名波羅蜜

(14-2)迷人 口念 智者 心行

當念時有妄 有妄 卽非眞有

念念若行 是名眞有

悟此法者 悟般若法 修般若行

不修卽凡 一念修行 法身 等佛

善知識 卽煩惱是菩提捉前念 迷卽凡 後念 悟卽佛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第一 無住無去無來 三世諸佛 從中出 將大智惠到彼岸 打破五陰煩惱塵勞 最尊最上第一

讚最上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往 是 定惠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變三毒 爲戒定惠

(14-3) 善知識 我此法門 從八萬四千智惠

何以故 爲世有八萬四千塵勞 若無塵勞 般若常在 不離自性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 莫起誑妄 卽自是眞如性

用智惠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15. 근기(根機)

(15-1)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에 들고자 하거나 반야 삼매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 삼매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최상승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가 약하거나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용이 큰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에 비가 내릴 때 육지에 내리면 풀잎이 떠 다니듯 하고,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을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친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서 보고 비추어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대,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의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하나로 합쳐지는 것과 같으며,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다.

(15-2) 근기가 약한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으니, 근기가 약한 사람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지만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는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않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와 괴로움이 가득한 중생도 모두 다 당장에 깨치게 된다.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 물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않으며 오고 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고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다.”


十五. 根 機

(15-1)善知識 若欲入甚深法界 入般若三昧者 直修般若波羅蜜行

但持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卽得見性 入般若三昧

當知此人功德 無量 經中 分明讚嘆 不能具說

此是最上乘法 爲大智上根人說 小根智人 若聞此法 心不生信 何以故

譬如大龍 若下大雨 雨於閻浮提 如漂草葉 若下大雨 雨於大海 不增不減

若大乘者 聞說金剛經 心開悟解 故知本性 自有般若之智 自用智惠觀照 不假文字 譬如其雨水不從天有 元是龍王 於江海中 將身引此水 令一切衆生 一切

草木 一切有情無情 悉皆蒙潤 諸水衆流 却入大海 海納衆水 合爲一切 衆生本性 般若之智 亦復如是

(15-2) 小根之人 聞說此頓敎 猶如大地草木根性自小者 若被大雨一沃 悉皆自倒 不能增長 小根之人 亦復如是

有般若之智 與大智之人 亦無差別 因何聞法卽不悟

緣邪見障重 煩惱根深 猶如大雲 蓋覆於日 不得風吹 日無能現

般若之智 亦無大小 爲一切衆生 自有迷心 外修覓佛 未悟自性

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 但於自心 令自本性 常起正見 煩惱塵勞衆生 當時盡悟 猶如大海納於衆流 小水大水合爲一體

卽是見性 內外不住 來去自由 能除執心 通達無碍 心修此行 卽與般若波羅蜜經 本無差別


16. 견 성(見性)

(16-1)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과 대승과 십이 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으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다.

만약 나[我]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 법이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 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며,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으므로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된다. 미혹한 사람은 지혜 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마음을 열리게 해야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며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 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런데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쫓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니, 바로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十六. 見 性

(16-1) 一切經書及文字 小大二乘 十二部經 皆因人置 因智惠性故 故能建立

我若無 智人 一切萬法 本無不有 故知萬法 本因人興 一切經書因人說有

緣在人中 有愚有智 愚爲小故 智爲大人

迷人問於智者 智人 與愚人說法令使愚者 悟解心開 迷人 若悟心開 與大智人無別

故知不悟 卽佛是衆生一念若悟 卽衆生是佛

故知一切萬法 盡在自身心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

菩薩戒經 云 我本源自性 淸淨 識心見性 自成佛道 卽時豁然 還得本心


17. 돈 오(頓悟)

(17-1)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대사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그 말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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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뒤 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다.

어떤 사람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승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이다. 이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며,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 세의 모든 부처와 십이 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 것이다.

만약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하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게 된다.

만약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반야의 관조가 일어나면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며,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알게 된다.

(17-2)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서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곧 무념이다.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는다.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으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 행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한다.

무념 법을 깨친 이는 만 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 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게 된다.”


十七. 頓 悟

(17-1)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大悟 頓見眞如本性 是故將此敎法 流行後代 令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性 頓悟 若不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示導 見性

何名大善知識 解最上乘法 直示正路 是大善知識 是大因緣 所謂化導令得見佛 一切善法 皆因大善知識能發起

故三世諸佛 十二部經 云在人性中 本自具有 不能自性悟 須得善知識示導 見性

若自悟者 不假外善知識 若取外求善知識 望得解脫 無有是處 識自心內善知識 卽得解脫

若自心 邪迷 妄念顚倒 外善知識 卽有敎授 不得自悟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 俱滅 卽是自眞正善知識 一悟卽知佛也

(17-2) 自性心地 以智惠觀照內外明撤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莫百物不思 常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


18. 죄를 없앰(滅罪)

(18-1) “선지식들아, 뒤 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나의 법신이 너희들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볼 것이다.

선지식들아, 이 돈교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 소원을 세워 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함으로써, 종신토록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전하고 받을 때는 모름지기 예부터 말없이 법을 부촉하여 서원을 세워서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이도 곧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게 된다.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이 선전하여 저 앞 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을 것이다.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 겁 만 겁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될 것이다.”

(18-2)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선지식들아, 나의 ‘무상송(無相頌)’을 들으라. 너희처럼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며 그래서 ‘멸죄송(滅罪頌)’이라고도 한다.”

게송을 말씀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는 닦지 않고 복을 구하면서

복을 구함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다음 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만약 마음 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 버려라.

힘써 도를 닦을 것이며 게으르게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 세상 끝나게 된다.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 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니, 위사군과 관료와 스님들과 도교인과 속인들의 찬탄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으며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八. 滅 罪

(18-1) 善知識 後代 得吾法者 常見吾法身 不離汝左右

善知識 將此頓敎法門 同見同行 發願受持 如事佛故 終身受持而不退者 欲入聖位

然須傳受時 從上已來 默然而付於法 發大誓願 不退菩提 卽須分付

若不同見解 無有志願 在在處處 勿妄宣傳 損彼前人 究竟無益

若遇人不解 謾此法門 百劫萬劫千生 斷佛種性

(18-2) 大師言 善知識 聽吾說無相頌 令汝迷者罪滅 亦名滅罪頌

頌曰

遇人修福不修道 謂言修福而是道

布施供養福無邊 心中三業元來在

若將修福欲滅罪 後世得福罪無造

若解向心除罪緣 各自性中眞懺悔

若悟大乘眞懺悔 除邪行正造無罪

學道之人能自觀 卽與悟人同一例

大師令傳此頓敎 願學之人同一體

若欲當來覓本身 三毒惡緣心中洗

努力修道莫悠悠 忽然虛度一世休

若遇大乘頓敎法 虔誠合掌志心求

大師說法了 韋使君官僚 僧衆道俗 讚言無盡 昔所未聞


19. 공 덕(功德)

(19-1) 위사군이 예배하고 말하였다.

“대사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 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대사께 여쭙고자 하니, 바라건대 대사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의심이 있거든 물어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 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그렇다.”

“제자가 들으니 달마대사께서 양 무제를 교화할 때, 양 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 평생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이 얼마나 큽니까?’하고 묻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대사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위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탐욕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다.”

(19-2)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 밭에 있지 않다.

자기의 성품에 공덕이 있는 것이며,

견성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다.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이렇게 잘못된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는 것이다.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다.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功)이며,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德)이다.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며, 달마대사께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다.”


十九. 功 德

(19-1) 使君 禮拜 自言

和尙說法 實不思議 弟子嘗有少疑 欲問和尙 望和尙 大慈大悲 爲弟子說

大師言 有疑卽問 何須再三

使君問

法 可不是西國第一祖達摩祖師宗旨

大師言 是

弟子見說 達摩大師化梁武帝 問達磨

朕 一生已來 造寺布施供養 有功德否

達磨答言 竝無功德 武帝惆悵 遂遣達磨 出境 未審此言 請和尙說

六祖言 實無功德 使君 勿疑達磨大師言 武帝著邪道 不識正法

(19-2) 使君 問 何以無功德

和尙 言 造寺布施供養 只是修福 不可將福 以爲功德

功德在 法身 非在於福田

自法性 有功德

見性 是功

平直 是德

內見佛性 外行恭敬 若輕一切人 吾我不斷 卽自無功德 自性虛妄 法身 無功德

念念德行 平等直心 德卽不輕

常行於敬

自修身 卽功

自修心 卽德

功德 自心作 福與功德別

武帝不識正理 非祖大師有過


20. 서방극락(西方)

(20-1)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니 스님과 도교인과 일반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 나라에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대사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그곳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사군은 들어라.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하셨다.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에게는 멀다고 하고,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는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

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곳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은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다.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서쪽 나라에 가서 태어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마찬가지다.

다만 마음에 더러움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더러운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다.

십 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 사(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팅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군아, 다만 십 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 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生]이 없는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며,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 것이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20-2)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로 보게 할 것이니 보기를 바라는가?”

위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서쪽 나라에 가서 나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사께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면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문득 서쪽 나라를 보아 의심이 없을 터이니 당장 흩어져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어라. 자기 색신은 성(城)이며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은 성의 문이며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王)이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면 왕도 없는 것이다.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이 무너지게 된다.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자비는 관음이요. 희사는 세지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다.

인상과 아상은 수미산이며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며 독한 마음은 악한 용이며 괴로움은 고기와 자라며 허망함은 귀신이며 삼독은 지옥이며 어리석음은 짐승이다.

십 선은 곧 천당이다. 인상과 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毒害)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게 된다.

(20-3) 자기의 마음이 땅 위에 깨닫은 성품[覺性]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의 여섯 하늘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않고 어찌 피안(彼

岸)에 이르겠는가.”

법문을 들은 법좌(法座) 아래서는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응당 미혹한 사람도 문득 밝게 볼 수 있었다.

위사군이 예배하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합니다.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닫기를 원합니다.”


二十. 西 方

(20-1) 使君 禮拜 又問 弟子見僧道俗 常念阿彌陀佛 願往生西方

請和尙 說 得生彼否 望爲破疑

大師言 使君 聽 惠能 與說 世尊 在舍衛國 說西方引化 經文 分明去此不遠 只爲下根 說遠 說近 只緣上智 人自兩種 法無不同 迷悟有殊 見有遲疾

迷人 念佛生彼

悟者 自淨其心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淨

使君 東方 但淨心 無罪 西方 心不淨 有愆

迷人 願生 東方西方 所在處竝皆一種

心但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除十惡 卽行十萬 無八邪 卽過八千 但行直心 到如彈指

使君 但行十善 何須更願往生 不斷十惡之心 何佛 卽來迎請

若悟無生頓法 見西方 只在刹那

不悟頓敎大乘 念佛 往生路遙 如何得達

(20-2) 六祖言 惠能 與使君 移西方刹那間 目前便見 使君 願見否

使君 禮拜 若此得見 何須往生 願和尙 慈悲 爲現西方 大善

大師言 唐見西方無疑 卽散 大衆 愕然 莫知何事

大師曰 大衆 大衆 作意聽 世人 自色身 是城 眼耳鼻舌身 卽是城門 外有五門 內有意門 心卽是地 性卽是王 性在王在 性去王無 性在身心存 性去身心壞

佛是自性作 莫向身外求

自性迷 佛卽衆生

自性悟 衆生卽是佛

慈悲 卽是觀音

喜捨 名爲勢至

能淨 是釋迦

平直是彌勒

人我 是須彌 邪心 是大海 煩惱 是波浪 毒心 是惡龍 塵勞 是魚鱉 虛妄 卽是神鬼 三毒 卽是地獄 愚癡 卽是畜生

十善 是千堂 無人我 須彌自倒 除邪心 海水竭 煩惱無 波浪滅 毒害除 魚龍絶

(20-3) 自心地上 覺性如來 放大智惠 光明 照耀 六門淸淨 照破六欲諸天 下照 三毒 若除 地獄 一時消滅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彼

座下聞說 讚聲 徹天 應是迷人 了然便見

使君 禮拜 讚言善哉善哉 普願法界衆生 聞者一時悟解


21. 수 행(修行)

(21-1)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아라. 그러면 그것이 곧 서쪽 나라이다.”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님, 세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닦습니까?”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교인과 일반인을 위하여 ‘무상송’을 지어 주리니 다들 외워 가져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게송을 말씀하였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하고 보니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으며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가르침을 부수도다.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으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설명하면 비록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나로 돌아오니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正]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 없음에 이르도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며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으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의 장애를 없애도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더라도

모든 것이 다 방해롭지 않으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도록 하면

도와 더불어 서로 계합하도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니

마침내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

행동의 바름이 곧 도이니

스스로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벗어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는 세간을 벗어남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대승이라 이름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二一. 修 行

(21-1) 大師言

善知識 若欲修行 在家 亦得 不由在寺

在寺不修 如西方心惡之人

在家若修行 如東方人修善

但願自家修淸淨 卽是西方

使君 問

和尙 在家如何修 願爲指授

大師言

善知識 惠能 與道俗作無相頌 盡誦取 依此修行 常與惠能 一處無別

頌曰

說通及心通 如日至虛空

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

敎卽無頓漸 迷悟有遲疾

若學頓敎法 愚人不可迷

說卽雖萬般 合離還歸一

煩惱暗宅中 常須生慧日

邪來因煩惱 正來煩惱除

邪正俱不用 淸淨至無餘

菩提本淸淨 起心卽是妄

淨性在妄中 但正除三障

世間若修道 一切盡不妨

常現在己過 與道卽相當

色類自有道 離道別覓道

覓道不見道 到頭還自懊

若欲貪覓道 行正卽是道

自若無正心 暗行不見道

若眞修道人 不見世間愚

若見世間非 自非却是左

他非我有罪 我非自有罪

但自去非心 打破煩惱碎

若欲化愚人 是須有方便

勿離世間上 外求出世間

勿令破彼疑 卽是菩提見

法元在世間 於世出世間

邪見是世間 正見出世間

邪正悉打却 菩提性宛然

此但是頓敎 亦名爲大乘

迷來經累劫 悟則刹那間


22. 교화를 행하심(行化)

(22-1)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이 게송을 외워 가져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천 리를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에 있는 것이며,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 리를 떨어져 있는 것이다.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지님이 아니겠느냐.

대중들이여, 그만 흩어져라. 혜능은 조계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조계산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할 것이다.”

함께 있던 관료, 스님, 일반인들이 혜능대사께 예배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훌륭하십니다. 크게 깨침이여! 옛날에는 미처 듣지 못한 말씀입니다. 영남에 복이 있어 산 부처가 여기 계심을 누가 능히 알았겠습니까?’ 하고는 한꺼번에 모두 흩어졌다.

(22-2)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서 소주와 광주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사십여 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이 삼천이며 재가불자가 오천 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의지하고 믿음을 삼게 하였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월·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받지 못하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말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二二. 行 化

(22-1) 大師言

善知識 汝等盡誦取此偈 依偈修行 去惠能千里 常在能邊 此不修 對面千里 各各自修 法不相持

衆人 且散 惠能 歸曹溪山 衆人 若有大疑 來彼山間 爲汝破疑 同見佛性

合座官僚道俗 禮拜和尙 無不嗟嘆 善哉 大悟 昔所未聞 嶺南 有福 生佛在此 誰能得知 一時盡散

(22-2) 大師往曹溪山 韶廣二州 行化四十餘年

若論門人 僧之與俗 三五千人 說不盡

若論宗旨 傳授壇經 以此爲依約

若不得壇經 卽無稟受 須知去處年月日姓名 遞相付囑 無壇經稟承 非南宗弟子也 未得稟承者 雖說頓敎法 未知根本 終不免諍 但得法者 只勸修行 諍是勝負之心 與道違背


23. 단박에 닦음(頓修)

(23-1) 세상 사람이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라고 하나, 이것은 근본 이유를 모르는 말이다.

또 신수대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물렀다.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이 서게 되었다.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 가지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견해가 더딘 것은 ‘점’이며 견해가 빠른 것은 ‘돈’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23-2) 일찍이 신수대사는 사람들이 혜능대사의 법은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신수대사는 드디어 문인 지성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서 혜능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지 말라. 들은 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혜능대사의 견해와 나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법을 듣고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내가 괴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라.”

지성은 분부를 받들어 반 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달하였다. 그는 혜능대사를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다.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말하였다.

“대사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대사 밑에서 깨치지 못하였으나 대사님의 법문을 듣고 문득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습니다. 대사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마땅히 염탐꾼이렷다!”

“말을 하기 전에는 그렇습니다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닙니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23-3)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들으니 신수대사께서 가르치기를 오직 계, 정, 혜를 전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승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 정, 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아라.”

“신수대사님은 계, 정, 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고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계, 정, 혜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사님의 의견은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견해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다.”

지성이 계, 정, 혜에 대한 혜능의 소견을 청하였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아라.

마음의 땅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너의 계, 정, 혜는 낮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며,

나의 계, 정, 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 정, 혜도 세우지 않는다.

“대사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 생각마다 관조하여 지혜롭고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기의 성품을 단박 닦아라.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는 것이다.”

지성은 예배하고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二三. 頓 修

(23-1) 世人 盡傳 南能北秀 未知根本事由

且秀禪師 於荊南府當陽縣玉泉寺 住持修行

惠能大師 於韶州城東 三十五里曹溪山 住

法卽一宗 人有南北 因此便立南北

何名漸頓 法卽一種 見有遲疾 見遲卽漸 見疾卽頓 法無漸頓 人有利鈍故 名漸頓

(23-2) 神秀師嘗見人 說惠能法 疾直指路

秀師遂喚門人僧志誠曰 汝聰明多智 汝與悟至曹溪山 到惠能所 禮拜但聽 莫言吾使汝來 所聽得意旨 記取 却來與吾說 看惠能見解與吾誰疾遲 汝第一早來 勿令吾怪

志誠 奉使歡喜 遂半月中間 卽至曹溪山 見惠能和尙 禮拜卽聽 不言來處 志誠聞法 言下便悟 卽契本心 起立卽禮拜 自言 和尙 弟子從玉泉寺來 秀師處 不得契悟 聞和尙說 便契本心 和尙 慈悲 願當敎示

惠能大師曰 汝從彼來 應是細作

志誠曰 未說時卽是 說了不是

六祖言 煩惱卽是菩提 亦復如是

(23-3) 大師謂志誠曰 吾聞汝禪師敎人 唯傳戒定惠 汝和尙 敎人戒定惠 如何 當爲吾說

志誠曰 秀和尙言 戒定惠

諸惡不作 名爲戒

諸善奉行 名爲惠

自淨其意 名爲定

此卽名爲戒定惠 彼作如是說 知和尙所見 如何

惠能和尙答曰 此說 不可思議 惠能所見 又別

志誠問 何以別

惠能答曰 見有遲疾

志誠 請和尙說所見戒定惠

大師言 汝聽吾說 看吾所見處

心地無非自性戒

心地無亂是自性定

心地無癡自性惠

能大師言 汝戒定惠 勸小根諸人 吾戒定惠 勸上根人 得悟自性 亦不立戒定惠

志誠 言 請大師說不立 如何

大師言 自性 無非無亂無癡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 此所以不立

志誠 禮拜 便不離曹溪山 卽爲門人 不離大師左右


24. 부처님의 행(佛行)

(24-1)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워 칠 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대사님의 지혜가 넓고 크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의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평생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한 품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다.”

(24-2)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혜능대사께서 법화경을 듣고 곧 경전의 뜻을 알았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였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다.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일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서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해 줄 것이다.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였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어떻게 닦을 것인가?

사람의 마음이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다.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네 문으로 나누어진다.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다.

열고[開] 보이고[示] 깨닫고[悟] 들어감[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24-3)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법달아, 나는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스스로 마음자리로 부처님의 지견은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밝아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는 것이며, 중생의 지견은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승불만을 의지하라.”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된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이다.”

법달은 한 번 듣고 크게 깨달아 눈물은 흘리고 감격하여 말하였다.

“대사님이시여,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7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다.”

그때 이 말씀을 들은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二四. 佛 行

(24-1) 又有一僧 名法達 常誦法華經七年 心迷不知正法之處

來問曰 經上 有疑 大師 智惠廣大 願爲決疑

大師言 法達 法卽甚達 汝心不達 經上無疑 汝心自疑 如心自邪 而求正法

吾心正定 卽是持經 吾一生已來 不識文字 汝將法華經來 對吾讀一遍 吾聞卽知

(24-2) 法達 取經到 對大師讀一遍 六祖聞已 卽識佛意 便與法達說法華經

六祖言 法達 法華經 無多語 七卷 盡是譬喩因緣 如來廣說三乘 只爲世人根鈍 經文分明 無有餘乘 唯一佛乘

大師言 法達 汝聽一佛乘 莫求二佛乘 迷却汝性 經中 何處是一佛乘 與汝說

經云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已上十六字是正法)

此法 如何解 此法 如何修 汝聽吾說

人心 不思 本源 空寂 離却邪見 卽一大事因緣

內外不迷 卽離兩邊

外迷著相

內迷著空

於相離相 於空離空 卽是不迷 悟此法 一念心開 出現於世

心開何物 開佛知見 佛 猶如覺也 分爲四門

開覺知見 示覺知見 悟覺知見 入覺知見

開示悟入 從一處入 卽覺知見 見自本性 卽得出世

(24-3) 大師言 法達 吾常願一切世人 心地 常自開佛知見 莫開衆生知見

世人 心邪 愚迷造惡 自開衆生知見

世人 心正 起智惠觀照 自開佛知見 莫開衆生知見

開佛知見 卽出世

大師言 法達

此是法華經一乘法 向下分三 爲迷人故 汝但依一佛乘

大師言 法達

心行 轉法華 不行 法華轉

心正 轉法華 心邪 法華轉

開佛知見 轉法華

開衆生知見 被法華轉

大師言 努力依法修行 卽是轉經

法達 一聞 言下大悟 涕淚悲泣

自言 和尙 實未曾轉法華 七年被法華轉 已後 轉法華 念念修行佛行

大師言 卽佛行 是佛

其時聽人 無不悟者


25. 예배하고 법을 물음(參請)

(25-1) 그 무렵 지상이라는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혜능대사께 예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을 물었다.

“부처님은 삼승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으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원래 사승법이란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외움은 소승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이다.

승(乘)은 행한다는 뜻이며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25-2)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라고 하였으며 남양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대사님은 좌선하면서 봅니까, 보지 않습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대사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냐?”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보통 사람과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며,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이다.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였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나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다.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산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서 모셨다.


二五. 參 請

(25-1) 時有一僧 名知常 來曹溪山 禮拜和尙 問四乘法義

智常 問和尙曰 佛說三乘 又言最上乘 弟子不解 望爲敎示

惠能大師曰 汝自身心見 莫著外法相 元無四乘法 人心自有四等 法有四乘

見聞讀誦 是小乘

悟法解義 是中乘

依法修行 是大乘

萬法盡通 萬行俱備 一切無離 但離法相 作無所得是最上乘

乘是行義 不在口諍 汝須自修 莫問吾也

(25-2) 又有一僧 名神會 南陽人也 至曹溪山

禮拜問言 和尙坐禪 見 亦不見

大師起打神會三下 却問神會 吾打汝 痛不痛

神會答言 亦痛亦不痛

六祖言曰 吾亦見亦不見

神會又問

大師 何以亦見亦不見

大師言 吾亦見 常見自過患 故云亦見 亦不見者 不見天地人過罪 所以亦見亦不見 汝 亦痛亦不痛 如何

神會答曰 若不痛 卽同無情木石 若痛 卽同凡夫 卽起於恨

大師言 神會 向前 見不見 是兩邊 痛不痛 是生滅 汝自性 且不見 敢來弄人

神會禮拜 更不言

大師言 汝心迷不見 問善知識覓路 以心悟自見 依法修行 汝自迷 不見自心 却來問惠能見否 吾見自知 代汝迷不得 汝若自見 代得吾迷 何不自修 問吾見否

神會作禮 便爲門人 不離曹溪山中 常在左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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