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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달마혈맥론

우리말달마혈맥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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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7,201회 작성일 21-08-18 07:28

본문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닦아서 증득證得할 필요가 없다. 


도는 소리와 색이 아니며,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고 차갑고 따듯함을 스스로 

아는 것이지, 남에게 말로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여래如來만이 알 수 있을 뿐, 나머지 사람이나 

하늘사람 등의 부류는 전혀 깨달아 알지 못한다. 

범부의 지혜로는 미치지 못하니, 

모습相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마음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한 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모습을 붙잡고 일체법을 붙잡으면, 

바로 외도外道에 떨어진다. 


만약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남을 안다면, 

붙잡지 말아야 하니, 붙잡으면執卽알지 못한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12부 

경전은 모두 부질없는 문자이다.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서가 다만 '마음心'을 밝히는 것이니,

말끝에 계합하여 알아차리면,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극한 도리道理는 말을 벗어났지만, 

가르침은 말이니 말은 도道가 아니다. 

도는 본래 말이 없고, 

말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밤에 꿈속에서 누각樓, 궁전, 코끼리, 말 등을 보거나, 나무, 수풀, 연못, 

정자亭子 등을 보고, 이런 것들相에 한생각 일으켜 좋아하고 집착해 보아도

얻을 수가 없으니, 모두가 의탁하여 생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 모습을 붙잡지 

않을 수 있다면, 의심을 제거할 수 있다. 

마음이 잠깐이라도 일어나면, 

곧 마구니魔에게 사로잡힌다. 

법의 몸은 본래 맑고 깨끗하여

하여 받을 것이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헤매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망령되이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좋아하여 집착하게 

되면, 자재自在할 수가 없다. 


지금 만약 깨닫는다면, 본래의 몸과 

마음은 습기習氣에 물들지 않는다. 


만약 성인을 벗어나 범부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드러내 보인다면, 스스로 중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거스르는 경계에서든 순탄한 경계에서든 모두 자재

할 수 있으니, 어떤 업도 그를 구속할 수 없어서 성스러움이 영원하다. 


큰 위덕威德이 있는 모든 종류의 업을 저 성인聖人

이 부리니, 천당과 지옥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범부凡夫는 정신精神과 의식意識이 어두우니, 

성인이 안팎이 밝게 통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일 의심이 있으면 행하지 않지만, 행하게 되면 생사生死의 

바다 위에서 떠다니게 되어, 뒤에 후회하더라도 구해 줄 수가 없다. 


가난과 고생이 모두 망상妄想으로 말미암아 생기니, 만약 이 마음을 깨닫는다면,

서로서로 권고하여 다만 행함 없이 행한다면, 곧 여래如來의 지견으로 들어간다. 


처음 발심한 사람은 정신과 의식

이 전혀 안정安定되어 있지 않다. 

만약 꿈에 흔히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바로 의심할 필요는 없으니, 

모두 자기의 마음이 일으킨 것이고 밖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에서 만약 밝음이 나타남을 보았는데 태양보다도 더 밝다면, 

곧 남은 습이 문득 없어지고 법계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바로 도道를 이루는 원인


이지만, 오직 스스로가 알 뿐 남에게 일러 줄 수 없다. 


혹시 고요한 숲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이에 눈에서 밝음을 보는데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면, 남에게 말하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지니, 역시 자성의 밝음이다. 

혹은, 밤중에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눈에서 밝음을 보아 낮과 다름

이 없다면, 괴이하게 여기지 말 것이니, 모두가 자기 마음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혹은 밤에 꿈속에서 별이나 달을 또렷이 보더라도, 자기 마음이 

여러 인연을 쉬고자 하는 것이니, 역시 남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꿈이 만약 어둡고 어두워서 마치 어두운 그늘 속을 가는 것과 같다면, 

자기 마음에 번뇌의 장애가 두꺼운 것이니, 역시 스스로 알 수 있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독경讀經

하고 염불念佛할 필요가 없다.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보아야 이익될 것이 없고,

정신精神과 의식意이 더욱 혼미하게 될 뿐이다.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다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마음을 안다면, 가르침을 

살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만약 범부를 빠져나와 성인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곧 업業

을 쉬고 정신을 수양하면서 분수 따라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만약 자주 성을 내거나 기쁘다면, 본성을 

돌려서 도와 서로 어긋나게 만들 것이다. 


스스로 이익을 보려 한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 


성인은 생사 속에서 자재하여, 나타나고 

사라지고 숨고 드러남에 정해진 것이 없다. 

모든 업이 그를 구속할 수가 없으니, 

성인은 삿된 마구니를 부순다. 


모든 중생이 본성을 보기만 하면, 남은 습習이 문득 소멸하고, 

정신과 의식이 어둡지 않아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알아차린다. 

다만 지금 진실로 도道를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어떠한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

업을 쉬고 정신을 수양하면, 남은 습習도 역시 사라져서, 저절로 명백할 것이니,


힘써 공부할 필요가 없다. 


외도外道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힘써 공부

하는 것을 최고로 삼으니, 성인의 뜻과는 어긋난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염불하고 경전을 뒤져 보아야, 

정신의 본성에는 어두워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바삐 두루 

명성과 이익을 찾겠는가? 나중에 어디에다 쓰겠는가?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고, 늘 배움에 열심히 공부하고, 

하루 종일 도道를 행하고, 늘 배움에 앉아서 눕지 않고, 두루 배우고 많이 듣

는 것을 불법佛法으로 삼는다. 

이러한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니,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나

는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큰 죄인이다. 

10대제자 가운데 아난은 다문多聞 가운데 첫째였지만, 

부처를 알지는 못하고 다만 배워서 많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승二乘과 외도外는 모두 부처를 알지 못하고, 하나하나 닦아서 깨닫는다고 알고 

있으니, 인과因果에 떨어져 중생의 업보業報를 받고 생사生死를 면免하지 못한다. 


부처의 뜻에 위배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이니, 죽여도 도리어 죄나 허물이 없다. 

경에서 말하기를 ‘천제인闡提人은 믿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죽여도 도리어 죄나 허물

이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 믿는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람

은 부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순서대로 나아가도 소용없다. 


저 선량한 성인을 비방하고 스스로 이익을 보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선과 악이 또렷하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 

천당과 지옥이 다만 눈앞에 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고, 

지금 깜깜한 지옥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만 업業이 무겁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마치 눈 없는 사람이 빛이 밝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과 같으니, 비록 그에게 

말해 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맹인盲人이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알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지금 축생畜生의 잡류雜類에 떨어져 있고 빈궁하고

하천賤하게 태어나 있어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비록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바로 물으면 말하기를

‘나는 지금 즐거워서 천당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살아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면서도,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겠다. 

이와 같이 악한 사람은 다만 업장業障이 무겁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낼 수가 없는 것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만약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보면,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으니, 세속인世俗人 또한 부처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머리를 

깎아도 역시 외도外道이다.” 


묻는다. 

“세속인은 처자妻가 있고, 음욕淫도 없애지

않는데, 어떻게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답한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음욕을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욕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견성하기만 하면

음욕은 본래 공적空寂하니 끊어 없앨 필요도 없고 즐겨 집착하지도 않는다. 

비록 남은 습기習氣가 있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본성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다. 

비록 오온五蘊의 색신色身 속에 있지만, 

그 본성은 본래 깨끗하여 오염될 수가 없다. 

법신은 본래 감각을 받아들임이 없어서, 배고픔도 없고, 목마름도 없고, 

추움도 없고, 더움도 없고, 병病도 없고, 사랑도 없고, 딸린 권속도 없고,

고통과 즐거움도 없고, 좋아함과 싫어함도 없고, 

장점과 단점도 없고, 강함과 약함도 없다. 

본래 얻을 수 있는 한 물건도 없다. 


다만 이 색신色身이라는 원인에 집착하기 때문에, 

배고픔, 갈증, 추움, 더움, 질병 등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만약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자재하게 작위하라. 

만약 생사 속에서 자재自在를 얻어 일체법을 굴린다면, 

성인과 같이 신령스러이 통하고 자재하고 막힘이 없어서 

불안한 곳이 없을 것이다. 


만약 마음에 의심이 있다면, 결코 어떤 경계도

뛰어넘지 못한다. 조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조작하면 생사의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백정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 


묻는다. 

“백정은 살생殺生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가 있습니까?” 


답한다. 

“단지 견성을 말할 뿐, 업 짓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비록 업 짓는 것

이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 않아도, 어떤 업도 그를 구속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다만 본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속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

로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한다. 본성을 깨닫게 되면, 끝내 업을 짓지 않는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염불念佛해도 과보果報를 

면하지 못하니, 생명을 살해하는 것까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본성을 보면, 의심이 문득 사라지니, 

생명을 죽인 것도 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인도의 27조사가 다만 차례차례 심인心印을 전했을 뿐이며, 나는 이제 이 땅에 와서

오직 돈교대승頓敎大乘의 즉심시불卽心是佛만을 전할 뿐, 지계戒나 보시나 정진精進

이나 고행苦行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물과 불 속에 들어가고, 칼을 꽂은 바퀴 위에 올라가고, 한 끼 

밥만 먹고, 늘 앉아서 눕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외도의 유위법有爲이다. 


만약 행위와 동작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본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대가 곧 모든 부처의 마음이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단지 마음을 전한다고만 

하였으니, 다시 다른 법은 없다. 


 

만약 이 법을 알아차리게 되면, 범부가 한 글자도 알지 못해도 역시 부처이지만,

만약 자기의 신령스런 깨달음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설사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더라도 부처 찾는 일은 끝내 이룰 수 없다. 


부처를 법신이라고도 하고, 

본심本心이라고도 한다. 


이 마음에는 모습도 없고, 인과因果도 없고, 근육과 골격도 없고, 마치 

허공과 같아서 붙잡을 수도 없고, 물질과 같지 않고, 외도와 같지가 않다. 


이 마음은 여래如來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그 나머지 중생인 어리석은 사람들은 밝게 알 수가 없다. 


이 마음은 사대색신四大色身 

속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 마음을 벗어난다면,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몸에는 지각知覺이 없으니 마치 초목草木이나 기와조각 같고,

이 몸에는 정식情識이 없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겠는가? 


만약 자기 마음이 움직이면,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들이, 모두 마음이 움직여 작용함이다.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니, 

움직임이 바로 그 작용이다. 

움직여 작용함 밖에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움직임이 아니다. 

움직임에는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은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음은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에는 마음이 떠나지 않고, 마음에는 움직임이 떠나지 않는다. 


움직임은 마음의 작용이고, 작용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움직이면 마음이 

작용하고, 작용하면 마음이 움직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작용하지도 않는다. 


작용의 바탕은 본래 공인데,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과 작용은 마음과 같지만,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움직이니 또 움직일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이 까닭에 종일 왔다갔다하지만 한 번도 왔다갔다한 적이 없으며, 종일 보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종일 웃지만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으며, 종일 듣지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며, 

종일 알지만 한 번도 안 적이 없으며, 종일 기뻐지만 한 번도 기뻤던 적이 없으며, 

종일 다니지만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으며, 종일 머물지만 한 번도 머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사라졌다’고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 두루 고요하다. 

나아가 성내고 기쁘고 아픈 것이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만 아픔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길 ‘악업은 고통스런 과보를 가져오고 선업善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성을 내면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다. 


만약 성냄과 기쁨의 본성이 공空임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모든 업에서 해탈한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고 경전을 

읽는다면, 결정코 의지할 것이 없다. 

 

말을 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략히 삿됨과 바름을 

드러낸 것이 이와 같지만, 한두 가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송頌한다.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은 찾기가 어려우니,  

넓을 때에는 법계法界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다. 


나는 본래 마음을 찾고 부처를 찾지 않으니,  

삼계三界가 비어서 물건이 없음을 밝게 안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찾을지니, 

단지 이 마음 마음 하는 마음이 곧 부처이다. 


나는 본래 마음을 찾았으나 마음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마음을 찾아도 마음을 기다릴 수는 없음을 안다. 


불성은 마음 밖에서 얻을 수 없으니, 

마음이 생기면 곧 죄가 생기는 때이다. 



게偈한다. 


나는 본래 이 땅에 와서,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려 했다. 


하나의 꽃에 다섯 잎이 열리니, 

열매 맺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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