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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달마혈맥론

우리말달마혈맥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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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통섭불교
댓글 0건 조회 5,647회 작성일 21-08-18 07:27

본문

성불이란 모름지기 

본성을 보는 것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않으면, 

인과 등의 말들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만약 부처라면, 

외도를 익히지 않는다. 


부처는 업을 짓는 사람이 아니며, 

부처에게는 인과因果가 없다. 


벌써 얻을 수 있는 조그만 법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성불하겠는가? 

하나의 마음이든 하나의 능력이든 하나의 이해이든 하나의

견해이든지 머물기만 하면, 부처는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부처에게는 

지키거나 범할 것이 없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 공이니, 또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모든 법은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부처는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선을 닦지도 않고, 악을

짓지도 않고, 정진精進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만드는 일이 없는 사람이니, 마음에 

머물러住着 부처를 본다면, 용납되지 않는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라. 

만약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결코 본래 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자성을 보지 못하고 언제나 ‘만드는 일이 없다’라는 

생각만 한다면, 이것은 큰 죄인이고, 어리석은 사람이고, 

무분별의 허공 속에 떨어져서 어둡기가 술 취한 

것과 같은 사람이어서 좋고 나쁨을 판별하지 못한다. 


만약 만드는 일이 없는 법을 닦으려 한다면, 먼저 반드시 

자성을 본 연후에야 반연하는 생각이 쉬어지는 것이다. 

자성을 보지 못하고도 불도道를 

이룰 수 있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사람은 인과를 무시하고 마구 악업惡을 짓고는, 망녕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空이니 악한 일을 해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무간흑암지옥에 떨어져 

영원토록 벗어날 기약이 없다. 

만약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된다. 


“이미 움직이고 함이 언제나 모두 본래 마음이라면, 

육체가 무상할 때에 어떻게 본래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본래 마음이 늘 앞에 드러나 있건만,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 

무슨 까닭에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꾼 적이 없는가? 

꿈 꾼 적이 있습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에, 

그대의 본래 몸인가? 

본래 몸입니다. 


그대의 말과 움직임과 동작은 그대와

따로 있는가? 따로 있지 않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미 따로 있지 않다면, 곧 이 몸이 그대의 본래

법신法身이고, 이 법신이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과

다르지 않아서, 생기거나 사라진 적이 없다.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옳고 그름도 없고, 남녀의 모습도 없고, 승속과 노소도 없고,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닦아서 깨달음도

없고, 원인도 결과도 없고, 근력筋力도 없고, 모양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산山이나 강江이나 석벽石壁이 가로막을 수도 없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가고 옴에, 

자재하고 신령스러이 통한다. 


오온五蘊의 산을 통과하고, 생사의 강을 건너니,

어떤 업業이라도 이 법신法身을 구속할 수 없다. 


이 마음은 미묘微妙하여 보기가 어려우니, 

이 마음은 색심色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사람들은 모두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광명光明 속에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물어 보면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과 같다. 


 

모두가 스스로 받아서 쓰는데, 

무슨 까닭에 알지 못하는가? 


부처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은 전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런 까닭에 업을 지어서 생사의

강에 떨어져 나오고자 하지만 도리어 잠겨 버리니, 

단지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중생이 만약 어리석지 않다면, 무슨 까닭에 물어 보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스스로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면서도 무슨 까닭에 알지 못하는가? 


성인聖의 말은 잘못됨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밝히기가 어려워서 오직 

부처 한 사람만이 이 마음을 알아차릴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과 하늘 사람과 중생들은 

전혀 밝게 깨닫지 못함을 알겠다. 


만약 지혜가 마음을 밝게 깨달으면, 바로 법성法性이라 이름하고, 

또 해탈이라 이름 하니, 생사에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그를 구속할 수 없으니 크게 자유로운 으뜸가는 여래大自在王如來라 

하고, 또 생각과 말로 하지 못한다[不思議]고 하고, 

또 성스러운 바탕 聖體이라고 하고, 

또 영원히 살아서 죽지 않는다[長生不死]고 하고, 

또 큰 신선[大仙]이라 한다.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바탕은 하나이니, 성인이 여러

가지로 분명한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의 크기는 광대하고, 

응하여 작용함은 끝이 없다. 

눈에 응해서는 색을 보고, 귀에 응해서는 소리를 듣고, 코에 응해서는 냄새를 맡고, 

혀에 응해서는 맛을 알고, 나아가 움직이고 동작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心이다.


언제나 말길이 끊어지기만 

하면 곧 자기 마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래의 색色은 다함이

없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색에 다함없음이 곧 자기 마음이고, 마음인 의식이 모든

것을 잘 분별함과 나아가 움직이고 동작함이 모두 지혜이다. 


마음은 모습이 없고, 

지혜 역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래의 색은 다함이

없고, 지혜 역시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사대 색신이 곧 번뇌이니, 색신에는 

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이다. 


법신은 언제나 머물러 있으니,

다시 머물 것은 없다. 


여래의 법신은 한결같아서 

다르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중생은 불성이 본래

스스로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가섭은 다만 본성을 깨달았을 뿐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본성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의 마음과 같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이 마음을 전하였을 뿐이다. 

이 마음을 제외하고는 얻을 부처가 없다. 


뒤집힌 중생은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찾아서 하루 종일 바쁘다. 


염불念하고 예불禮하지만,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된다. 

단지 자기 마음만 알면,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가 없다. 

경經에서 말하기를 ‘무릇 모습 있는 것은 모두 허망虛妄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있는 그곳에 곧 부처가 있다.’고 하였다.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해서는 안된다.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문득 앞에 나타나더라도, 

절하고 공경할 필요가 없다. 


 

나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니, 

본래 모양으로 그린 모습은 없다. 

만약 모습을 취한다면 곧 마구니에게 

포섭되니, 모두 사도邪道에 떨어진다. 


만약 부처님 모습의 환상幻이 

마음에서 생긴다면, 절할 필요가 없다. 

절하는 자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진실을 아는 자는 절하지 않는다. 

절하는 것은 마구니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학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할까봐 염려

되어, 그 때문에 이렇게 변별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와 본성의 바탕에는 전혀 부처의 

이런 모습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다른 경계가 있더라도, 결코 붙잡아 취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심할 필요도 없다. 


나의 마음은 본래 맑고 맑은데, 어느 

곳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겠는가? 


나아가 천룡, 야차, 귀신,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등의 모습에 대해서도,

또한 마음을 써서 공경하거나 귀중하게 여기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마음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모든 모습은 전부 허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결코 모습을 붙잡지는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를 내고, 부처라는 모습, 보살이라는 모습을 

내어서, 공경하고 귀중하게 여긴다면, 스스로 중생의 처지 속에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말하길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고 하였으니, 정해진 진실은 없는 것이다. 


환상幻에는 정해진 모습이 없으니, 

이것이 곧 무상無常한 법이다. 

단지 모습을 취하지 않기만 하면, 

성인의 뜻과 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모습을 떠난

것을 모든 부처라고 일컫는다.’라 한 것이다. 


묻는다. 

“무엇 때문에 부처나 보살들에게 절하면 안됩니까?“ 


답한다. 

“천마天魔와 파순波旬과 아수라가 신통神通을

드러내어 모두 보살의 모습을 지을 수 있다.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것은 모두 

외도外道이지, 결코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자기 마음이니, 

착각하여 절하지 말라. 


부처佛란 인도印度 말로서, 

중국말로는 각성覺性이라고 한다. 

각이란 신령스럽게

깨어 있는 것이다. 


기연機緣에 응應하고 사물을 대하며,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신령스럽게 깨어 

있는 본성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도道이고, 도가 곧 선禪이다. 

선(禪)이라는 한 글자는 범부도 

성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또 말한다. 

“본성을 보는 것이 선禪이다. 

만약 본성을 보지 못하면, 선이 아니다. 

설사 천 권의 경전과 만 권의 논서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다만 범부일 뿐, 불법佛法은 아니다. 


지극한 도는 그윽하고 깊어서 말로써는 알아차릴 수가 없으니, 

경전의 가르침이 어떻게 미치겠는가? 

단지 본성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몰라도 된다.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이다. 


 

성聖스런 본바탕은 본래 

청정하여 잡스런 때가 없다. 

기왕의 말들은 모두가 성인聖人이 

마음에서 일으켜 사용하는 것이다. 

작용이니 본체니 하는 것은 본래 헛된 이름이다. 말로도 

미치지 못하는데, 12부 경전이 어떻게 미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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