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입도수행강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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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입도수행강요문
이와 같이 무릇 도(道, 완전한 깨달음의 길)에 들어가는 길은 많으나 요약해서 그것을 말하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는 이입(理入, 근본원리)이요. 둘째는 행입(行入, 실천행위)이다.
이입(理入)이라는 것은 이른바 교(敎, 경전)를 의지하여 근본을 깨닫고 함생(含生, 일체중생)이 동일한 참된 성품임을 깊이 믿으나 다만 망상과 객진(客塵)에 덮여 분명하게 요달(了達)할 수 없으니, 만약 망상을 버리고 진성(眞性)에 돌아가서 마음을 응결(凝結)하여 벽(壁)을 관(觀)하면 나와 남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동등한 하나이며 굳게 머물러 옮기지 않아서 다시 경문(經文)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이 곧 이(理)와 더불어 그윽하게 부합되어 분별이 없고 고요하여 함이 없는 행위, 그것을 이름하여 이입(理入)이라 한다.
행입(行入)이라는 것은 이른바 네 가지 실천이니, 그 나머지 모든 행위는 다 이 행위 가운데 들어간다. 무엇 등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보원행(報怨行, 전생의 관보를 받는 행위)이며, 둘째는 수연행(隨緣行, 인연을 따르는 행위)이고,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 바라는 마음이 없는 행위)이며, 넷째는 칭법행(稱法行, 진리대로 살아가는 행위)이다.
무엇을 제일의 보원행(報怨行)이라 하는가? 수도(修道)를 실천하는 사람이 만약 고통을 받을 때에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나간 옛적부터 수 없는 세월 속에서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따라서 모든 유위(有爲)의 세계에 유랑하여 많은 원한과 증오심을 일으키며 위해함이 한이 없었으니, 지금 비록 범함이 없으나 이것은 나의 과거 세상의 재앙이며 악한 행위의 결과가 익은 것이다. 즉 하늘의 탓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탓도 아님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게 마음으로 참고 받아서 도무지 원수가 없는 것이다. 경전에 이르시기를, [괴로움을 만날지라도 근심하지 말라] 하시니, 왜냐하면 의식은 근본에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나는 때에 진리와 더불어 상응해서 원한을 체득하여 진리의 길에 나아가니, 그러므로 보원행(報怨行)이라고 말한 것이다.
제이 수연행(隨緣行)이라는 것은 중생은 자아가 없어서 아울러 업(業)을 반연(攀緣)에 얽혀서 고통과 즐거움을 같이 받으니 모두 인연을 따라 나는 것이다. 만약 수승(殊勝)한 과보(果報)와 영예로운 등의 일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나의 과거의 숙세 인연을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지금에 바야흐로 그것을 얻었으나 인연이 다하면 도리어 없어지나니 무슨 기뻐할 것이 있을 것인가? 얻고 잃는 것 인연을 따를 뿐 마음에는 더하고 덜어지는 것이 없으며, 기쁨의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아서 그윽이 도를 따르니, 그러므로 수연행(隨緣行)이라고 말한다.
제삼 무소구행(無所求行)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길이 미혹해서 곳곳에 탐하고 집착하는 것을 그것을 이름하여 구한다고 하니,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서 속세를 가지고 마음을 돌이켜서 편안한 마음으로 함이 없고 형상을 따라 움직이며 온갖 것이 이렇게 텅 비어서 바라거나 즐거울 것이 없다.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闇女)가 항상 서로 좇아 다녔으니, 삼계에 오래 머무는 것이 마치 불난 집에 있는 것과 같다. 몸이 있는 것 모두 고통이니 누가 얻어서 편안하겠는가? 이러한 곳을 통달하는 연고로 모든 존재가 생각을 쉬어 구함이 없는 것이다. 경에 이르시기를, [구함이 있으면 다 고통이요 구함이 없으면 이에 즐겁다]하시니 판단해 알라 구함이 없는 것이 진실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제사 칭법행(稱法行)이라는 것은 성품이 청정한 이치는 그것을 지목하여 법이라고 하니, 이 이치는 모든 형상이 이렇게 텅 비어서 물듦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으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경에 이르시기를,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더러움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법에는 자아가 없으니 자아라는 더러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이 만약 이 이치를 믿어 알 수 있다면 응당히 일컫는 진리대로 수행할 것이다. 진리의 본체는 아끼고 탐함이 없어서 육체와 목숨과 재산을 던져 행하는 보시는 시행했다는 생각을 버리되, 마음에 아끼고 애석해하는 것이 없으며 삼공(三空)을 통달하여 알아서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다만 더러움을 제거해서 중생을 섭화(攝化)해서 형상을 취하지 안나니, 이것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며, 다시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할 수 있고, 또한 보리의 도를 장엄할 수 있는 것이니, 보시하는 것이 이미 그러하다면 나머지 다섯 가지도 또한 그러하다. 망상을 제거해서 육도(六度)를 수행해도 행하는 바가 없는 이것이 칭법행(稱法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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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교오종(藉敎悟宗); 경전을 통하여 종지(대의)를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종지(宗旨)는 실단(悉檀)이라고도 하는데 실단(悉檀, siddhanta)이란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 대치실단(對治悉檀),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 세계실단(世界悉檀) 등이다. 실(悉)은 변(두루)의 의미이고 단(檀)은 시(施)라는 의미다. 이러한 사실단(四悉檀)의 각각을 살펴보면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란 상대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곧 바로 진리에 들어가게 하는 입리실단(入理悉檀)이다. 대치실단(對治悉檀)이란 상대의 병(번뇌)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치유(악을 끊게)하는 단악실단(斷惡悉檀)을 말한다.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이란 중생의 성질과 능력에 따라 선근(善根)이 자라도록 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생선실단(生善悉檀)이라고도 한다. 세계실단(世界悉檀)이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 존재일반의 실상을 드러내어 진정한 인간의 삶과 복지를 실현하는 낙욕실단(樂欲悉檀)이라고도 한다.
* 벽관(壁觀); 담림(曇林)선사가 말하길, "이입(理入)은 안심(安心)이고, 안심은 벽관(壁觀)이다"라고 했으며, 도선선사는 "대승벽관(大乘壁觀)은 그 공행(功行)이 최상이다"라고 하였다. 즉 벽관(壁觀)이란 마음을 벽(壁)과 같이 안정시켜 벽이 모든 것을 비추어 남김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또 이입(理入)이란 이(理)는 진리의 본 바탕을 말하고 입(入)이란 깨달아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입(理入)은 근본적인 진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편안히 하여 생활을 유지한다는 안심(安心)이다. 이것은 반야(般若)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본래 텅 비어(연기) 있음을 보고 모든 집착과 분별의 마음으로 구성한 모든 존재들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해탈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반야공관(般若空觀)이고, 대승벽관(大乘壁觀)이며, 완전한 해탈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面壁)한 것은 완전한 해탈의 경지를 실천한 것으로 함이 없는 행위 즉 무위(無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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