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일상평등무별문(一相平等無差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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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일상평등무별문(一相平等無差別門)
원융(圓融)한 마음은 하여금 깨끗하게 할 수 있으나, 만약 그 마음에 편견(偏見)을 일으키면 곧 문득 생멸(生滅)이 있다. 그 가운데 기억하는 망상은 삿된 생활을 짓는 것이며, 진리를 찾아서 업을 헤아리나 잊혀지지 않고, 굴림에 더러움이 더해지면 마음은 궁극에 이르기 어렵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잠깐 여덟 글자를 듣고, 곧바로 진리를 깨달아 비로소 육 년간의 고행이 부질없음을 알았다. 세간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모두 이 마구니의 백성이다. 한갓 스스로 시끄럽게 헛되이 다투며 부질없는 망상으로 알음알이(견해)를 지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입으로 약을 처방한다고 말하나 병을 제거(치료)하지는 못한다.
고요한 곳에서 왔으므로 본래 형상이 없거늘 어찌하여 선과 악, 삿됨과 바름이 있겠는가? 생긴다고 말하나 생기는 것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말하나 소멸하는 것은 또한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는 것이 곧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고요한 것이 곧 고요한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형상을 말미암아 일어남이며, 메아리는 소리를 의지하여 온다. 그림자를 잡으려고 형상을 수고롭게 하나 형상이 바로 그림자의 근본임을 알지 못함이며, 소리를 드날려서 메아리를 그치려하나 소리가 바로 메아리의 근본임을 알지 못한다. 밝게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을 구하는 것은 비유컨대 형상을 제거해서 그림자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며, 중생을 버리고 여의어 부처를 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리를 묵묵히 해서 메아리를 찾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혹함과 깨달음은 하나이며, 어리석음과 지혜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름 없는 곳에 억지로 이름을 세우니 그 이름으로 인해서 곧 옳고 그름이 생긴다. 이치가 없는 곳에 억지로 이치를 짓게 되니, 그 이치로 인해서 곧 쟁론이 일어난다. 허깨비는 진실이 아니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허망한 것은 실체가 없으니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 것인가? 마땅히 알라. 얻어도 얻는 것이 없고, 잃어도 잃는 것이 없다. 아직 담소하지 못했다. 오로지 이 글을 올릴 뿐 어찌 현묘한 종지를 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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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산동자(雪山童子)가 구법할 때, 범천이 나찰로 변신하여 설법한 내용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다. 여기서 뒤 구절을 듣기 위해 목숨을 바친 여덟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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